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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콘텐츠_복식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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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콘텐츠_복장정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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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답호이미지.jpg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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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표명칭=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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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답호
|영문명칭=Da-po<br/> Man's coat<br/> Man's coat with half sleeves or no sleeves worn during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ref> 『한국복식사전』, 민속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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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褡𧞤|塔胡|搭胡|褡胡|褡複|褡穫|褡護
|한자표기=褡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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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탑호 탑홀 더그레 전복 호의 쾌자 반비 비갑 배자 작자 단수포
|이칭별칭=전복 호의 전포 쾌자 더그레
+
|분류=  
|유형 = 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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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신분= 왕의 常服과 관리들의 단령안의 받침옷이나 철릭,액주름 등의 袍 위에 덧입는 옷으로 士大夫 이하 庶民에 이르기까지 널리 착용
|시대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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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성별= 남성
|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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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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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 덧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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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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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성별 =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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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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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문헌으로 본 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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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으로 본 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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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호는 元의 복식명’(褡護 ,元衣名)으로 남송 鄭思省의 詩의 에 기록되어 있는데 징기스칸 족 역사서인『集史』(1300-1304년 완성)의 미니어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답호의 最古 기록은 고려시대 말에 들어온 한어 학습서인 『老乞大』(1346)에서 찾을 수 있는데 高麗末부터 朝鮮後期까지 왕의 常服과 관리들의 단령안의 받침옷이나 철릭, 액주름 등의 袍 위에 덧입는 옷 으로 士大夫 이하 庶民에 이르기까지 널리 착용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을 거치면서 형태상의 변화가 있었다. 朝鮮時代 외국어 학습서에 보면 褡護 명칭으로 ‘大搭胡,褡 護,搭胡,搭忽’ 로 표기되어 있으며,『老朴集覽』(1517)에 ‘比甲’이란 명칭이 나온다. 褡護는 고려 말부터 국말까지 착용되었는데 世宗 26년(1444) 사은사謝恩使 유수강柳守剛에 의해 明帝가 사여한 왕의 常服인 단령, 답호, 철릭 일습으로 계절별로 3습이 들어와 王의 곤룡포의 裏衣로 착용되었는데 또한 출토유물에 서도 단령, 답호, 철릭 일습의 출토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褡護를 착장자에 따라 구분하면 왕王, 조신朝臣, 하급下級 군속群俗으로 구분할 수 있다.<ref>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ref>
 
 
====(1) 답호의 용도====
 
====(1) 답호의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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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답호는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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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용도로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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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4가지로 분류 될 수 있다. 조정 신하
 +
들의 단령 안에 받침옷으로 착용하였고, 중국의
 +
사신, 성절의 하례품, 왕의 일가친척, 조신들의 하
 +
사품으로 단령, 답호, 철릭 등과 함께 일습으로
 +
사용하였다. 또한 단령이나 곤룡포 안의 받침옷
 +
으로 착용하였으며 왕의 소렴, 대렴의로 사용하였
 +
다. 이러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오례⸱흉
 +
례의식습(襲)’에 사용된 복식에서 곤룡포, 답
 +
호, 철릭으로 일습이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
134권). ‘곤룡포·답호·철릭’ 또는 ‘단령·답호·철
 +
릭’을 ‘次’를 사용하여 세 번이나 중복하여 의복
 +
간의 구분을 하고 있음을 볼 때 답호가 왕의 평상
 +
복인 곤룡포, 원령, 단령 안에 받침옷으로써 사용
 +
하였음을 알 수 있다(장인우, 이춘계, 1995). 이외
 +
에도 답호가 왕의 국상 때 소렴, 대렴 시에 습의
 +
(襲衣), 피례(被禮), 보공(補空)용으로 사용하였음
 +
을 『선조실록』(선조, 26년. 5. 2), 『영조실록』(영조,
 +
52년. 3. 5), 『정조실록』(정조, 24년. 6. 29), 『순종
 +
실록부록』(순종, 12년. 1. 24)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성종실록』 1480년에 성종이 내기에서 이긴 자
 +
에게 홍단답호(紅段搭胡)를 상으로 내린 기록이
 +
있다. “이것은 내가 입었던 원령이었는데 지금 답
 +
호를 만들어 내리니 경(卿)들이 이것을 두고 내기
 +
하라(성종, 11년. 3. 20).”는 기록을 보면 원령을
 +
답호로 고쳐 사용하였으며, 답호는 왕의 평상복,
 +
조신의 관복으로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
 +
에도 답호는 성절 하례품(성종, 7년. 12. 23), 외교
 +
를 담당하는 사신, 사은사, 성절사, 주문사(성종,
 +
11년. 8. 19) 왕의 일가친척 등에게 하사품 의복의
 +
일습이었다(세조, 6년. 4. 20). 이후 『고종실록』
 +
1895년 갑오경장 이후에는 통상복색(通常服色)은
 +
편리한 대로 주의(周衣), 답호에 사대(絲帶) 차림
 +
을 하되 내관과 외관의 관리가 출근할 때에는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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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없이 입으라는 규정을 반포하여 답호를 문관의
 +
통상예복으로 착용하라는 기록이 있다(고종, 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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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0). 이처럼 답호는 조선 초기부터 후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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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서부터 유생·서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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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하였을 알 수 있다.<ref>염순정 김은정, 『조선시대 답호의 조형특성을 응용한 디자인 연구』,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제21권 1호 (2019. 2)</ref>
 
====(2) 답호의 색상====
 
====(2) 답호의 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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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답호의 색상은 모두 26색이다. 이를 다시 색상별로 크게 분류하면 녹색계열, 청색계열, 황색계열, 홍색계열, 자색계열 그리고 회색과 백색이 있다. 제일 자주 등장하는 색은 초록으로 단종, 세조, 성종, 연산군에 걸쳐 23회이다. 그 다음은 남색으로 세조, 성종, 연산군대로 12회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은 유청(柳靑)과 청(靑)으로 7회와 5회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답호의 색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녹색계열의 색명은 초록(草綠), 유청 (柳靑), 녹(綠), 청류청(靑柳靑)이 있다. 청색계열은 청(靑), 남(藍), 아청(鴉靑)이 있다. 황색계열에는 황 (黃), 다갈(茶褐)이 있다. 홍색계열에는 도홍(桃紅), 대홍(大紅), 홍(紅)이 있다. 자색계열에는 자(紫), 회색계열에는 회색(灰色)이 있으며, 그리고 백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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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왕들의 하사품인 답호의 색은 大紅 草綠 柳靑 茶褐 桃紅 紫 藍 灰色등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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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前期 王의 褡護 色을 보면 英祖 國喪(1776년)시 凶禮服에 草綠․紫赤․ 多紅․柳綠의 다양한 색을 볼 수 있다. 朝臣의 褡護는『芝峯類說』에서 언급하길 ‘세종조 평상복으로 착용된 褡護는 황색을 많이 착용하였으나 許稠는 灰色褡護를 입었다’고 하였고, 성종때 朝臣의 服色을 大紅․草綠․鴉靑․紅 色으로 규정하고 玉色․玄色․淡黃色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朝鮮王朝實錄에 朝臣들에게 하사한 褡護 色은 靑․大紅․草綠․ 鴉靑․紫色․灰色․藍色으로 다른 의복들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색상이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正祖 國喪(1800년), 高宗 國喪(1919년)시 褡護色을 보면 鴉靑色만이 사용되었다. <ref>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ref>
 
====(3) 답호의 옷감과 구성====
 
====(3) 답호의 옷감과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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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답호의 옷감 은 단종 조에는 綿布 1건, 綿紬 1건, 紬 7건, 羅 1건, 段子 2건, 匹段 2건의 기록이 있으며, 세조 조에는 綿布 1건, 綿紬 10건, 紬 1건, 紗 1건, 羅 2건, 段子 2건이다. 성종 조에는 紵布 1건, 紵絲 1건, 綿紬 1건, 紬 20건, 紗 5건, 羅 1건, 綃 1건, 匹段 11건, 段 子 3건으로 다양한 종류의 옷감이 답호에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연산군조의 답호에 사용된 옷감의 기록은 苧絲 2건, 紬 1건, 鼎紬 1건, 紗 1건, 匹段 1건, 段 子 3건이 있다. 중종 조에는 苧布 1건, 紬 1건이 있다. 선조 조에는 紵絲 2건, 紗 1건의 답호 기록이 있다. 광해군 조에는 綃 1건과 生綃 2건의 답호 기록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답호에 사용된 옷감은 12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종~광해군 대에 답호에 사용된 옷감의 74.47%가 綿, 紵, 紬, 紗, 羅와 같은 비교적 얇은 옷감이 기록되어 있고 匹段, 段子와 같은 段類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조선시대 답호의 색상과 직물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을 분류하여 변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지만, 광해군시대 이후의 답호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영정조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왕의 빈전도감에 사용되었던 답호는 습과 소렴 대렴에 언급된 답호의 순서로 보아 명나라 정릉(定陵)에서 출토된 명 만력제 (萬曆帝 1563~1620)의 중단(中單)과 탐릉군(耽陵 君 1636~1731)의 답호처럼 칼깃에 무수의(無袖衣)의 형태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고종시대의 답호는 중요민속자료 13호로 지정된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경 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 의대(衣帶) 가 운데 답호가 있다. 이를 <표4>로 정리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답호의 구 성은 겹과 유(襦: 솜)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를 구 분하여 표기된 왕조는 단종, 세조, 세종, 연산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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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前期 褡護 소재는 緞․紗․羅․苧布․綿 紬 등 고급 견직물이 사용되었는데 王의 褡護는 雲紋緞․大雪紋香緞․有紋 緞․貢緞․龍紋緞 등 비단류가 국말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또한 朝臣의 褡護로 中宗 14년(1519년)‘紬緞塔胡’를 착용하고 各司의 書吏나 生徒는 염색한 褡護 착용을 금하였고, 中宗 17년(1522년)에는 東西班 正職 외에는 白紵布로 褡護 만드는 것을 금하고『芝峯類說』(1614년)에 비단 답호 착용을 비난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치가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ref>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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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출토유물 자료로 본 답호의 시대별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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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유물 자료로 본 답호의 시대별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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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17세기 초기까지의 ‘답호’는 반수의(半袖衣)로 포류(袍類)의 일종으 로, 『 조선왕조실록』에는 철릭 위에 입으며, 관복(官服) 으로 답호 위에 단령을 입는다. 전체적인 형태는 깃의 모양만 제외하고 단령과 동일하다.
 
이 장에서는 조선시대전기 남자묘에서 출토된답호의 형태에따라, 깃, 소매, 무, 고름등과같은 답호형태의 특징과직물을 살펴보려고 한다. <ref>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ref>
 
 
====(1) 15세기 답호====
 
====(1) 15세기 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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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윤(1431~1489)의 답호 1점과 송효상(1430~ 1490추정)묘 출토 답호 2점과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15세기 추정 답호 1점이 있다. 이계윤의 답호는 반파되어 깃모양은 알 수 없다. 앞뒤 길이 차이가 3cm 있는 전단후장형이다. 소매는 진동에서 수구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선형 소매이다. 조선전기 무의 특 징인 ‘다중 접음무’이다.<ref>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ref>
 
====(2) 16세기 전기 답호====
 
====(2) 16세기 전기 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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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기에 해당되는 답호는 변수(1447~1524), 김흠조(1461~1528), 고운(1479~1530), 정온(1481~ 1538) 묘에서 수습된 21점으로 답호의 수습 빈도가 조선전기에서 제일 많은 편이다. 이 시기 답호의 특징은 깃은 ‘이중목판깃’이나 ‘이 중칼깃’으로 동 시대의 포류의 깃과 동일한 형태이다. 또한 ‘겨드랑이 아래 옆선길이’가 10~25cm로 긴 길 이가 특징이다. 그와 더불어 답호의 앞 뒤 길이차이 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공존하는 시기이다. 소매는 직선형 소매, 진동에서 수구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선 형 소매가 섞여있다. 무의 형태도 무의 위가 접혀서 안으로 들어간 ‘다중 접음무’이다.<ref>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ref>
 
====(3) 16세기 후기 답호====
 
====(3) 16세기 후기 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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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기에 해당하는 답호는 정응두(1508~ 1572), 신여관(1530~1580), 이언충(1529~1582), 이 석명(1513~1583), 심수륜(1534~1589) 묘에서 수습된 16점이다. 16세기 중기의 출토복식이 보고된 바가 없어, 16세기의 복식은 답호 뿐 만 아니라 포류에 있 어서도 변화의 폭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답호의 깃은 ‘이중칼깃’과 ‘칼깃’이 혼재되 어 있으며, ‘겨드랑이 아래 옆선길이’도 16세기 전기 답호에 비해 짧아졌다. 답호의 앞뒤 길의 길이차이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섞여있다. 소매의 형태는 직선 형소매와 진동에서 수구로 갈수록 넓어지는 깔대기 형소매가 섞여있다. 무의 형태는 16세기 전기의 형태 인 위가 접혀서 안으로 들어간 ‘다중 접음무’와 무 위가 직선인 형이 섞여있다.<ref>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ref>
 
====(4) 17세기 전기 답호====
 
====(4) 17세기 전기 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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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전기에 해당하는 답호는 정휴복(1529~1604), 조경(1541~1609), 강대호(1541~1624), 윤선언(1580~ 1628)의 묘에서 수습된 11점이다. 이 가운데 윤선언 묘 출토복식은 매우 다양한 시대를 보여주어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답호는 16세기와는 구별되는 형태로 진행하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답호의 깃은 이중칼깃, 칼 깃, 목판깃의 형태로 다양하다. ‘겨드랑이 아래 옆선길 이’는 매우 짧아졌다. 겨드랑이 아래 옆선길이가 짧아지 면서 소매는 넓어져 답호의 무와 소매는 겹치는 형태로 보인다. 소매는 두리소매를 잘라 놓은 형태이다. 무의 형태는 사각형 무와 조선후기 단령에서 보이는 무처럼 무의 상단이 뽀족하게 끝이 올라간 형태도 있다.<ref>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ref>
 
====[출토복식]====
 
====[출토복식]====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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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po10.png|[[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 답호]] <br><small>조선 후기의 장군 김덕원의 묘에서 출토된 의복. 보물 제672호. 개인 소장. 답호는 소색의 명주로 겉감과 안감이 되어 있으며 겹누비이다. 양옆선이 터져 있으며, 섶이 얕고, 깃은 앞 목둘레를 둥글게 파고 길과 각지게 놓였으며 X자형으로 곱게 박음질하였다.<br>[[김덕원묘출토|<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 답호>]]</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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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po01.png|[[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 답호]] <br><small>조선 후기의 장군 김덕원의 묘에서 출토된 의복. 보물 제672호. 개인 소장. 답호는 소색의 명주로 겉감과 안감이 되어 있으며 겹누비이다. 양옆선이 터져 있으며, 섶이 얕고, 깃은 앞 목둘레를 둥글게 파고 길과 각지게 놓였으며 X자형으로 곱게 박음질하였다.<br>[[김덕원묘출토|<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 답호>]]</small>
파일:dapo20.png|[[이언충 묘 출토 복식 답호]] <br><small>조선 중기의 문신 이언충의 묘에서 출토된 복식 일괄. 중요민속문화재 제243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br>[[이언충묘출토|<이언충 묘 출토 복식 답호>]]</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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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po02.png|[[이언충 묘 출토 복식 답호]] <br><small>조선 중기의 문신 이언충의 묘에서 출토된 복식 일괄. 중요민속문화재 제243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br>[[이언충묘출토|<이언충 묘 출토 복식 답호>]]</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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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더그레・답호・전복・호의・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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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그레(Deogeure)란 褡護․戰服․號衣․快子가 모두 포함된 것으로 고려말 한자 학습서인『老乞大』에는 褡護를 언해한 명칭이었지만 조선 말기에는 덧 입는 의복인 褡護․戰服․號衣․快子가 동일한 형태가 되므로 포나 상의류 위에 덧입는 의복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정의한다.<ref>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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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褡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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褡護는 중국 元代 등장한 의복으로 朝鮮 前期에 半袖交衽衣에서 無袖對襟衣로 변화하였는데 無袖衣 褡護 형태를 기준으로 하였다. 褡護는 王과 士大夫의 異衣와 表衣로써 쓰였는데 異衣로는 단령안 받침옷으로 입혀져 국말까지 쓰였다. 宮闕의 王家에서는 ’加文剌[더그레]’으로, 一般 士大夫는 ‘褡護’ 또는 ‘더그레’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表衣로는 철릭위에 입혀지던 褡護는 1834년 王의 快子와 褡護 형태가 같아질 때까지 형태가 변하는 과도기로 생각된다. 이미 1800년대 戰服․快子 형태가 같아졌으므로 褡護는 戰服, 王의 快子와 같은 형태로 원삼형 깃 또는 V형 깃 無袖對衿形으로 짧은 옆트임과 긴 뒤트임이 있는 포와 같은 길이이다. 이후 국말까지 褡護․戰服․王의 快子는 같아진다.<ref>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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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戰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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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服은 둥근깃 無袖對衿衣로 옆․뒤트임이 있는 포와 같은 길이보다 짧은 형태로 朝鮮 中期 임진난을 전후 武官이 착용한 옷을 기준으로 한다. 最古 기록은 人祖 2년(1624년)으로 1765년 이전 옆트임만 있던 전복은 옆․뒤트임 있는 형태로 변하면서 1770년대 ‘快子’란 명칭의 새로운 의복이 나타난다. 1800년 正祖 國喪時 ‘戰服’과 ‘快子’가 같아진 것을 1795년 회화자료와 1848년 戰服유물을 통해 확인하였다. 純祖 國喪(1834년)凶禮服에 등장하는 王의 快 子는 褡護와 같으므로 褡護․戰服․王의 快子 형태는 같은 것으로 본다. 1850년 회화로 확인된 王과 士大夫의 戰服 형태는 둥근깃이던 전복이 V형깃 - 83 -의 無袖對襟衣로 짧은 옆트임과 긴 뒤트임이 있으며 포와 같은 길이로 보인다. <ref>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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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號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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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衣는 各 營門軍士․馬上才軍․司諫院 喝道․義禁府 羅將이 입던 세 자 락 옷으로『武藝圖譜通志』(1790년)官服圖說에 號衣를 기준으로 한다. 이 형 태는 둥근깃 無袖對襟衣로 옆트임이 있는 종아리 길이보다 짧다.1771년에서 1901년까지 號衣와 快子를 함께 착용하였다. 육군복장규칙(1900년)반포로 군 복을 신식군복으로 규정하였지만 고종『壬寅進宴儀軌』(1902년)에 보면 신식 군복과 함께 快子형태의 네 가닥 號衣가 보인다. 이는 號衣가 一般 軍卒 快 子와 같아지면서 더그레가 된 것으로 형태는 둥근깃 無袖對襟衣로 긴 옆․뒤 트임이 트여 있다. <ref>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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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快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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快子란 掛子와 같은 동의어로 宮中 舞人 掛子는 ‘褂子’와 같은 소매 있는 상의였는데 1829년 이후 掛子는 깃만 제외하면 褡護․戰服와 같아진다. 형태는 원삼형 깃이 달린 無袖對襟衣로 짧은 옆트임과 긴 뒤트임이 있다. 王의 快子는 褡護․戰服과 같은 형태이며, 一般 軍卒은 네 자락의 긴 옆․뒤트임이 있 는 快子․戰服․號衣를 착용하다가 快子형태로 같아진다. 宮中 舞人이 착용 한 掛子는 원삼형 깃만 제외하면 王의 快子와 같은데 1877년 이후 王의 快子 와 함께 一般 軍卒 快子와 같은 형태의 掛子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쾌자란 王․一般 軍卒․宮中 舞人이 착용한 掛子를 포함하는 광의의 형태라고 생각한다.<ref>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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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조선시대 남자 포의 종류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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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자 袍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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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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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관리들이 상복안에 입거나 사대부의 겉옷 위에 덧입던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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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선 중기까지는 직령과 같되, 소매만 반수의 이지만 17세기를 지나면서 소매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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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류 !! 특징
답호는 중국 원대에 등장한 의복으로 징기스칸(1162~1227) 역사서인 『집사集史』(1300~1304)의 미니어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 기록에는 고려시대 『원간노걸대 原刊老乞大』에  ‘대답호 大塔胡, 답호 褡護, 답호 塔胡, 답홀 塔笏’로 표기되어 있으며 더그레로 언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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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답호 유물로는 문수사의 답호(1346)와 해인사의 답호(1350~136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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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령 || 단령은 둥근깃이 특징이며 백관의 관복으로 제정되어 있고, 서민은 평생에 한 번 혼례 때 착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의례복이었다. 후기에 단령의 안깃에 직령의 깃이 부착되어 두겹의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 되면서 예전보다 착장이 간편해졌다. <ref>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ref>
곧은 깃에 반소매가 팔꿈치에 이르며, 옷길이는 발목까지 오고 옆선에는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 고정된 다중 주름의 무가 달렸으며 옆트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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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답호는 조선 중기까지 왕의 상복과 관리들의 단령 안 받침옷이나 철릭, 직령등 포위에 덧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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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령 || 직령은 깃이 곧은 형태에서 유래되었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남자 포이며, 외출이나 의례 시에 착용하였고 조선 말기에 착용이 줄어들었다. 임진왜란 후 무관이나 하급관리들이 직령을 입자 사대부들은 직령의 형태를 바꾼 도포를 착용하였으며, 도포, 심의, 중치막, 창의, 주의 등 포가 다양하게 발달하여, 용도에 따른 포의 선택이 넓어져 직령의 착용이 줄어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ref>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ref>
형태는 반수의로 곧은 깃 교임형에 옆선에 무가 달렸고 옆 트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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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형태는 직령과 같되, 소매 길이가 짧은 것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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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 || 창의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널리 착용되어 보편화되었다. 옆선이나 뒷중심에 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으로 소매너비, 무의 유무, 트임의 위치에 따라 대창의, 중치막, 소창의, 학창의로 분류된다. 창의는 다른 포에 비해 출도 복식의 수가 많으며, 창의가 네가지 종류로 분화되어 용도에 따라 선택하여 입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된다.<ref>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ref>
답호에는 광다회 등의 실띠를 둘렀는데, 당상관 이상은 붉은색을 사용하였고 그 이하는 청색 계통의 것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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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령과 유사한 형태의 답호는 임란 직후부터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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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포 || 도포는 도사道士들이 착용하여 생겨났으나 직령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도포의 형태는 곧은 깃에 넓은 소매이며 앞길에 무가 있고 앞무가 연장되어 뒷길이나 한판에 고정되어 그 위에 전삼이라는 뒷자락이 붙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신분복식의 기능이 강해 고위 관직만 착용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도포의 착용이 보편화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착용하였다. <ref>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ref>
그러나 ‘답호’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에도 간편한 덧옷용 포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어 그대로 유지되면서 옷의 형태상 변화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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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매와 직사각형 무가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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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호 || 답호의 형태는 곧은 깃에 소매가 짧거나 없으며 옆트임이 있고 임진왜란 후부터 착용이 줄어들었으며, 왕은 답호를 곤룡포 안에 입었고 사대부는 포 안이나 겉옷 위에 착용하였다. 답호의 소매가 없어진 것은 직령이 넓은 두리소매로 바뀐 시대와 일치하며, 이는 직령이 두리소매로 정착된 후에 소매가 없는 전복을 착용하는 것이 적합했을 것이다. 말기에 답호의 형태가 바뀌면서 전복이나 전포라고 불렸는데 이는 군에서 종사하는 하급관리나 천한 관직이 주의 위에 착용하였다.<ref>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ref>
이때의 답호 형태에 대해 『사례편람』에는 ‘무수창의’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 ‘소매가 없는 창의’ 라는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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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는 뒤트임이 특징인데 소매가 없고 뒤가 트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의 탐릉군묘에서 출토된 답호 유물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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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 주의는 곧은 깃에 옷의 사방에 트임이 없고 두루 막혀있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며 두루마기라고 한다. 주의는 삼국시대부터 착용하여 두루마기가 되었고, 조선 후기부터 널리 착용되기 시작하였다. 형태는 좁은 소매에 옆선에 삼각형 무가 있으며 양 옆이나 뒷중심에 트임 없이 모두 막혀 있다. 문문백관들은 통상예복으로 사용하였고 사인들은 사복으로 착용하여 일반인들까지 널리 입게 되었으며 양반계급에서는 겉옷으로 착용하였다.<ref>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ref>
또한 『영조실록』에 의하면 답호가 영조의 수의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소매 없는 반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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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에 갈수록 답호는 전복, 괘자가 혼동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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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재궁의대에 전복과 답호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형태가 다른 의복이었으나 순조 재궁의대에는 쾌자만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순조 이후 답호는 괘자와 같은 형태로 괘자로 집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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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5년(1888)직강 김영선이 “답호와 전복은 그 제도가 달랐는데 답호령을 내리고 전복을 입으라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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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은 깃 없는 대금형의 긴 옷으로 허리 아래로 뒤트임이 있고 짧은 옆트임이 있는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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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자는 전복 형태에 깃머리가 둥근 방령에 동정이 달린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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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답호도 뒤트임이 있고 소매가 없는 덧옷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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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령과 같은 형태의 답호 유물은 강대호(1541~1642)의 묘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늦은 시기의 유물이며 무수창의 형태의 답호 유물은 탐릉군의 묘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ref> 『한국복식사전』, 민속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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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복====
 
 
 
 
 
 
===문헌과 유물을 통한 답호의 형태변화시기와 사라진 원인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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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references/>
 
<references/>

2020년 10월 21일 (수) 13:14 판

답호
(褡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표명칭 답호
한자표기 褡𧞤
이칭별칭 탑호 탑홀 더그레 전복 호의 쾌자 반비 비갑 배자 작자 단수포
착용신분 왕의 常服과 관리들의 단령안의 받침옷이나 철릭,액주름 등의 袍 위에 덧입는 옷으로 士大夫 이하 庶民에 이르기까지 널리 착용
착용성별 남성


I.문헌으로 본 답호


(1) 답호의 용도

조선시대 답호는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다양한 용도로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분류 될 수 있다. 조정 신하 들의 단령 안에 받침옷으로 착용하였고, 중국의 사신, 성절의 하례품, 왕의 일가친척, 조신들의 하 사품으로 단령, 답호, 철릭 등과 함께 일습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단령이나 곤룡포 안의 받침옷 으로 착용하였으며 왕의 소렴, 대렴의로 사용하였 다. 이러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오례⸱흉 례의식습(襲)’에 사용된 복식에서 곤룡포, 답 호, 철릭으로 일습이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134권). ‘곤룡포·답호·철릭’ 또는 ‘단령·답호·철 릭’을 ‘次’를 사용하여 세 번이나 중복하여 의복 간의 구분을 하고 있음을 볼 때 답호가 왕의 평상 복인 곤룡포, 원령, 단령 안에 받침옷으로써 사용 하였음을 알 수 있다(장인우, 이춘계, 1995). 이외 에도 답호가 왕의 국상 때 소렴, 대렴 시에 습의 (襲衣), 피례(被禮), 보공(補空)용으로 사용하였음 을 『선조실록』(선조, 26년. 5. 2), 『영조실록』(영조, 52년. 3. 5), 『정조실록』(정조, 24년. 6. 29), 『순종 실록부록』(순종, 12년. 1. 2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종실록』 1480년에 성종이 내기에서 이긴 자 에게 홍단답호(紅段搭胡)를 상으로 내린 기록이 있다. “이것은 내가 입었던 원령이었는데 지금 답 호를 만들어 내리니 경(卿)들이 이것을 두고 내기 하라(성종, 11년. 3. 20).”는 기록을 보면 원령을 답호로 고쳐 사용하였으며, 답호는 왕의 평상복, 조신의 관복으로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 에도 답호는 성절 하례품(성종, 7년. 12. 23), 외교 를 담당하는 사신, 사은사, 성절사, 주문사(성종, 11년. 8. 19) 왕의 일가친척 등에게 하사품 의복의 일습이었다(세조, 6년. 4. 20). 이후 『고종실록』 1895년 갑오경장 이후에는 통상복색(通常服色)은 편리한 대로 주의(周衣), 답호에 사대(絲帶) 차림 을 하되 내관과 외관의 관리가 출근할 때에는 구 애 없이 입으라는 규정을 반포하여 답호를 문관의 통상예복으로 착용하라는 기록이 있다(고종, 32년. 8. 10). 이처럼 답호는 조선 초기부터 후기 까지 왕에서부터 유생·서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착용하였을 알 수 있다.[1]

(2) 답호의 색상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답호의 색상은 모두 26색이다. 이를 다시 색상별로 크게 분류하면 녹색계열, 청색계열, 황색계열, 홍색계열, 자색계열 그리고 회색과 백색이 있다. 제일 자주 등장하는 색은 초록으로 단종, 세조, 성종, 연산군에 걸쳐 23회이다. 그 다음은 남색으로 세조, 성종, 연산군대로 12회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은 유청(柳靑)과 청(靑)으로 7회와 5회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답호의 색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녹색계열의 색명은 초록(草綠), 유청 (柳靑), 녹(綠), 청류청(靑柳靑)이 있다. 청색계열은 청(靑), 남(藍), 아청(鴉靑)이 있다. 황색계열에는 황 (黃), 다갈(茶褐)이 있다. 홍색계열에는 도홍(桃紅), 대홍(大紅), 홍(紅)이 있다. 자색계열에는 자(紫), 회색계열에는 회색(灰色)이 있으며, 그리고 백색이 있다. 역대왕들의 하사품인 답호의 색은 大紅 草綠 柳靑 茶褐 桃紅 紫 藍 灰色등이고, 朝鮮 前期 王의 褡護 色을 보면 英祖 國喪(1776년)시 凶禮服에 草綠․紫赤․ 多紅․柳綠의 다양한 색을 볼 수 있다. 朝臣의 褡護는『芝峯類說』에서 언급하길 ‘세종조 평상복으로 착용된 褡護는 황색을 많이 착용하였으나 許稠는 灰色褡護를 입었다’고 하였고, 성종때 朝臣의 服色을 大紅․草綠․鴉靑․紅 色으로 규정하고 玉色․玄色․淡黃色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朝鮮王朝實錄에 朝臣들에게 하사한 褡護 色은 靑․大紅․草綠․ 鴉靑․紫色․灰色․藍色으로 다른 의복들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색상이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正祖 國喪(1800년), 高宗 國喪(1919년)시 褡護色을 보면 鴉靑色만이 사용되었다. [2]

(3) 답호의 옷감과 구성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답호의 옷감 은 단종 조에는 綿布 1건, 綿紬 1건, 紬 7건, 羅 1건, 段子 2건, 匹段 2건의 기록이 있으며, 세조 조에는 綿布 1건, 綿紬 10건, 紬 1건, 紗 1건, 羅 2건, 段子 2건이다. 성종 조에는 紵布 1건, 紵絲 1건, 綿紬 1건, 紬 20건, 紗 5건, 羅 1건, 綃 1건, 匹段 11건, 段 子 3건으로 다양한 종류의 옷감이 답호에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연산군조의 답호에 사용된 옷감의 기록은 苧絲 2건, 紬 1건, 鼎紬 1건, 紗 1건, 匹段 1건, 段 子 3건이 있다. 중종 조에는 苧布 1건, 紬 1건이 있다. 선조 조에는 紵絲 2건, 紗 1건의 답호 기록이 있다. 광해군 조에는 綃 1건과 生綃 2건의 답호 기록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답호에 사용된 옷감은 12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종~광해군 대에 답호에 사용된 옷감의 74.47%가 綿, 紵, 紬, 紗, 羅와 같은 비교적 얇은 옷감이 기록되어 있고 匹段, 段子와 같은 段類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조선시대 답호의 색상과 직물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을 분류하여 변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지만, 광해군시대 이후의 답호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영정조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왕의 빈전도감에 사용되었던 답호는 습과 소렴 대렴에 언급된 답호의 순서로 보아 명나라 정릉(定陵)에서 출토된 명 만력제 (萬曆帝 1563~1620)의 중단(中單)과 탐릉군(耽陵 君 1636~1731)의 답호처럼 칼깃에 무수의(無袖衣)의 형태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고종시대의 답호는 중요민속자료 13호로 지정된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경 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 의대(衣帶) 가 운데 답호가 있다. 이를 <표4>로 정리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답호의 구 성은 겹과 유(襦: 솜)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를 구 분하여 표기된 왕조는 단종, 세조, 세종, 연산군대이다. 朝鮮 前期 褡護 소재는 緞․紗․羅․苧布․綿 紬 등 고급 견직물이 사용되었는데 王의 褡護는 雲紋緞․大雪紋香緞․有紋 緞․貢緞․龍紋緞 등 비단류가 국말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또한 朝臣의 褡護로 中宗 14년(1519년)‘紬緞塔胡’를 착용하고 各司의 書吏나 生徒는 염색한 褡護 착용을 금하였고, 中宗 17년(1522년)에는 東西班 正職 외에는 白紵布로 褡護 만드는 것을 금하고『芝峯類說』(1614년)에 비단 답호 착용을 비난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치가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3]

II.출토유물 자료로 본 답호의 시대별 형태


(1) 15세기 답호

이계윤(1431~1489)의 답호 1점과 송효상(1430~ 1490추정)묘 출토 답호 2점과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15세기 추정 답호 1점이 있다. 이계윤의 답호는 반파되어 깃모양은 알 수 없다. 앞뒤 길이 차이가 3cm 있는 전단후장형이다. 소매는 진동에서 수구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선형 소매이다. 조선전기 무의 특 징인 ‘다중 접음무’이다.[4]

(2) 16세기 전기 답호

16세기 전기에 해당되는 답호는 변수(1447~1524), 김흠조(1461~1528), 고운(1479~1530), 정온(1481~ 1538) 묘에서 수습된 21점으로 답호의 수습 빈도가 조선전기에서 제일 많은 편이다. 이 시기 답호의 특징은 깃은 ‘이중목판깃’이나 ‘이 중칼깃’으로 동 시대의 포류의 깃과 동일한 형태이다. 또한 ‘겨드랑이 아래 옆선길이’가 10~25cm로 긴 길 이가 특징이다. 그와 더불어 답호의 앞 뒤 길이차이 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공존하는 시기이다. 소매는 직선형 소매, 진동에서 수구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선 형 소매가 섞여있다. 무의 형태도 무의 위가 접혀서 안으로 들어간 ‘다중 접음무’이다.[5]

(3) 16세기 후기 답호

16세기 후기에 해당하는 답호는 정응두(1508~ 1572), 신여관(1530~1580), 이언충(1529~1582), 이 석명(1513~1583), 심수륜(1534~1589) 묘에서 수습된 16점이다. 16세기 중기의 출토복식이 보고된 바가 없어, 16세기의 복식은 답호 뿐 만 아니라 포류에 있 어서도 변화의 폭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답호의 깃은 ‘이중칼깃’과 ‘칼깃’이 혼재되 어 있으며, ‘겨드랑이 아래 옆선길이’도 16세기 전기 답호에 비해 짧아졌다. 답호의 앞뒤 길의 길이차이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섞여있다. 소매의 형태는 직선 형소매와 진동에서 수구로 갈수록 넓어지는 깔대기 형소매가 섞여있다. 무의 형태는 16세기 전기의 형태 인 위가 접혀서 안으로 들어간 ‘다중 접음무’와 무 위가 직선인 형이 섞여있다.[6]

(4) 17세기 전기 답호

17세기 전기에 해당하는 답호는 정휴복(1529~1604), 조경(1541~1609), 강대호(1541~1624), 윤선언(1580~ 1628)의 묘에서 수습된 11점이다. 이 가운데 윤선언 묘 출토복식은 매우 다양한 시대를 보여주어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답호는 16세기와는 구별되는 형태로 진행하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답호의 깃은 이중칼깃, 칼 깃, 목판깃의 형태로 다양하다. ‘겨드랑이 아래 옆선길 이’는 매우 짧아졌다. 겨드랑이 아래 옆선길이가 짧아지 면서 소매는 넓어져 답호의 무와 소매는 겹치는 형태로 보인다. 소매는 두리소매를 잘라 놓은 형태이다. 무의 형태는 사각형 무와 조선후기 단령에서 보이는 무처럼 무의 상단이 뽀족하게 끝이 올라간 형태도 있다.[7]

[출토복식]

III.더그레・답호・전복・호의・쾌자


더그레(Deogeure)란 褡護․戰服․號衣․快子가 모두 포함된 것으로 고려말 한자 학습서인『老乞大』에는 褡護를 언해한 명칭이었지만 조선 말기에는 덧 입는 의복인 褡護․戰服․號衣․快子가 동일한 형태가 되므로 포나 상의류 위에 덧입는 의복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정의한다.[8]

① 褡護

褡護는 중국 元代 등장한 의복으로 朝鮮 前期에 半袖交衽衣에서 無袖對襟衣로 변화하였는데 無袖衣 褡護 형태를 기준으로 하였다. 褡護는 王과 士大夫의 異衣와 表衣로써 쓰였는데 異衣로는 단령안 받침옷으로 입혀져 국말까지 쓰였다. 宮闕의 王家에서는 ’加文剌[더그레]’으로, 一般 士大夫는 ‘褡護’ 또는 ‘더그레’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表衣로는 철릭위에 입혀지던 褡護는 1834년 王의 快子와 褡護 형태가 같아질 때까지 형태가 변하는 과도기로 생각된다. 이미 1800년대 戰服․快子 형태가 같아졌으므로 褡護는 戰服, 王의 快子와 같은 형태로 원삼형 깃 또는 V형 깃 無袖對衿形으로 짧은 옆트임과 긴 뒤트임이 있는 포와 같은 길이이다. 이후 국말까지 褡護․戰服․王의 快子는 같아진다.[9]

② 戰服

戰服은 둥근깃 無袖對衿衣로 옆․뒤트임이 있는 포와 같은 길이보다 짧은 형태로 朝鮮 中期 임진난을 전후 武官이 착용한 옷을 기준으로 한다. 最古 기록은 人祖 2년(1624년)으로 1765년 이전 옆트임만 있던 전복은 옆․뒤트임 있는 형태로 변하면서 1770년대 ‘快子’란 명칭의 새로운 의복이 나타난다. 1800년 正祖 國喪時 ‘戰服’과 ‘快子’가 같아진 것을 1795년 회화자료와 1848년 戰服유물을 통해 확인하였다. 純祖 國喪(1834년)凶禮服에 등장하는 王의 快 子는 褡護와 같으므로 褡護․戰服․王의 快子 형태는 같은 것으로 본다. 1850년 회화로 확인된 王과 士大夫의 戰服 형태는 둥근깃이던 전복이 V형깃 - 83 -의 無袖對襟衣로 짧은 옆트임과 긴 뒤트임이 있으며 포와 같은 길이로 보인다. [10]

③ 號衣

號衣는 各 營門軍士․馬上才軍․司諫院 喝道․義禁府 羅將이 입던 세 자 락 옷으로『武藝圖譜通志』(1790년)官服圖說에 號衣를 기준으로 한다. 이 형 태는 둥근깃 無袖對襟衣로 옆트임이 있는 종아리 길이보다 짧다.1771년에서 1901년까지 號衣와 快子를 함께 착용하였다. 육군복장규칙(1900년)반포로 군 복을 신식군복으로 규정하였지만 고종『壬寅進宴儀軌』(1902년)에 보면 신식 군복과 함께 快子형태의 네 가닥 號衣가 보인다. 이는 號衣가 一般 軍卒 快 子와 같아지면서 더그레가 된 것으로 형태는 둥근깃 無袖對襟衣로 긴 옆․뒤 트임이 트여 있다. [11]

④ 快子

快子란 掛子와 같은 동의어로 宮中 舞人 掛子는 ‘褂子’와 같은 소매 있는 상의였는데 1829년 이후 掛子는 깃만 제외하면 褡護․戰服와 같아진다. 형태는 원삼형 깃이 달린 無袖對襟衣로 짧은 옆트임과 긴 뒤트임이 있다. 王의 快子는 褡護․戰服과 같은 형태이며, 一般 軍卒은 네 자락의 긴 옆․뒤트임이 있 는 快子․戰服․號衣를 착용하다가 快子형태로 같아진다. 宮中 舞人이 착용 한 掛子는 원삼형 깃만 제외하면 王의 快子와 같은데 1877년 이후 王의 快子 와 함께 一般 軍卒 快子와 같은 형태의 掛子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쾌자란 王․一般 軍卒․宮中 舞人이 착용한 掛子를 포함하는 광의의 형태라고 생각한다.[12]


IV.조선시대 남자 포의 종류 및 특징


포류 특징
단령 단령은 둥근깃이 특징이며 백관의 관복으로 제정되어 있고, 서민은 평생에 한 번 혼례 때 착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의례복이었다. 후기에 단령의 안깃에 직령의 깃이 부착되어 두겹의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 되면서 예전보다 착장이 간편해졌다. [13]
직령 직령은 깃이 곧은 형태에서 유래되었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남자 포이며, 외출이나 의례 시에 착용하였고 조선 말기에 착용이 줄어들었다. 임진왜란 후 무관이나 하급관리들이 직령을 입자 사대부들은 직령의 형태를 바꾼 도포를 착용하였으며, 도포, 심의, 중치막, 창의, 주의 등 포가 다양하게 발달하여, 용도에 따른 포의 선택이 넓어져 직령의 착용이 줄어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4]
창의 창의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널리 착용되어 보편화되었다. 옆선이나 뒷중심에 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으로 소매너비, 무의 유무, 트임의 위치에 따라 대창의, 중치막, 소창의, 학창의로 분류된다. 창의는 다른 포에 비해 출도 복식의 수가 많으며, 창의가 네가지 종류로 분화되어 용도에 따라 선택하여 입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된다.[15]
도포 도포는 도사道士들이 착용하여 생겨났으나 직령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도포의 형태는 곧은 깃에 넓은 소매이며 앞길에 무가 있고 앞무가 연장되어 뒷길이나 한판에 고정되어 그 위에 전삼이라는 뒷자락이 붙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신분복식의 기능이 강해 고위 관직만 착용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도포의 착용이 보편화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착용하였다. [16]
답호 답호의 형태는 곧은 깃에 소매가 짧거나 없으며 옆트임이 있고 임진왜란 후부터 착용이 줄어들었으며, 왕은 답호를 곤룡포 안에 입었고 사대부는 포 안이나 겉옷 위에 착용하였다. 답호의 소매가 없어진 것은 직령이 넓은 두리소매로 바뀐 시대와 일치하며, 이는 직령이 두리소매로 정착된 후에 소매가 없는 전복을 착용하는 것이 적합했을 것이다. 말기에 답호의 형태가 바뀌면서 전복이나 전포라고 불렸는데 이는 군에서 종사하는 하급관리나 천한 관직이 주의 위에 착용하였다.[17]
주의 주의는 곧은 깃에 옷의 사방에 트임이 없고 두루 막혀있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며 두루마기라고 한다. 주의는 삼국시대부터 착용하여 두루마기가 되었고, 조선 후기부터 널리 착용되기 시작하였다. 형태는 좁은 소매에 옆선에 삼각형 무가 있으며 양 옆이나 뒷중심에 트임 없이 모두 막혀 있다. 문문백관들은 통상예복으로 사용하였고 사인들은 사복으로 착용하여 일반인들까지 널리 입게 되었으며 양반계급에서는 겉옷으로 착용하였다.[18]


참고문헌

  1. 염순정 김은정, 『조선시대 답호의 조형특성을 응용한 디자인 연구』,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제21권 1호 (2019. 2)
  2.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
  3.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
  4.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
  5.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
  6.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
  7.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
  8. 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9. 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10. 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11. 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12. 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13.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
  14.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
  15.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
  16.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
  17.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
  18. 김신애. (2018).『조선시대 남자 포에 나타난 무의 형태변화에 관한 연구』, P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