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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1일 (금) 10:31 판
합일학교(合一學校)는 1901년 미국인 감리교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와 박능일 목사가 설립한 강화 최초의 사숙(私塾)으로 학동 3명으로 시작하였다. 1909년 4년제로 인가받고 1923년 4월 신효승·최상현 두 사람의 노력으로 총 공사비 12,400원을 들여 2층 양옥을 신축하였으며, 1924년 2월「신교육령」에 의하여 6년제로 되었다.
현재 공립초등학교인 강화합일초등학교는 원래 선교사업 일환으로 1900년 잠두의숙에서 세운 사립학교였다. 합일학교에 이어 계명의숙, 보창학교(육영학원)가 연달아 개교할 만큼 강화의 근대교육 열기는 뜨거웠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이동휘 선생을 비롯한 강화의 지도자들은 근대교육을 통한 구국계몽운동에 힘썼다. 일제강점기 이후, 합일학교는 민족교육기관으로 거듭났고 3·1운동 당시 합일학교 졸업생들은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 사회적인 책무를 다했다. [1]
1922년에는 감리교 선교회의 보조 중단으로 재정적인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강화지역 주민들의 모금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33년에는 일제가 공립학교를 설립하여 압력을 가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교장으로 취임한 최상현이 자신의 재산 상당분인 18만여 평의 토지(당시 싯가 70,000원 상당)를 기부하여 확고한 재정기반을 갖추었다.
합일학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보여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교육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교사인 강흥석이 일제 경찰에 여러 번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 학교는 여학생과 유년교육에 앞장서 지역사회의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갖고, 주민후원회와 확고한 재정 기반으로 투철한 항일민족정신을 주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최상현 교장과 그 뒤를 이은 오영섭 교장은 모두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다. [2]
“강화읍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합일학교가 있었듯이, 흥천교회에 흥천합일학교(현 양도초등학교), 덕적합일학교, 장봉합일학교, 월오제 합일학교 등이 있었어요. 당시 강화의 기독교는 감리교와 성공회가 있었는데, 감리교계 사립학교는 거의 합일학교라고 불렀죠. 기독교계를 포함하여 강화학파, 향교 등 곳곳에서 세운 사립학교가 72개였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모두 문을 닫게 됩니다. 강화합일학교도 폐교 될 상황이었는데, 강화읍교회 권사이며 합일학교 교감이었던 최상현 선생이 전 재산인 18만평 토지를 기부 합니다. 그 돈으로 선생님들 월급도 주고, 학생들에게 교과서와 학용품을 사줬다고 해요. 교장으로 취임한 처남 오영섭 선생은 물론, 소식을 들은 졸업생들이 명예교사로 자원할 만큼 합일학교를 지키려는 지역사회의 열망은 뜨거웠죠. 어린이들을 민족의 동량으로 키우겠다는 애국계몽지사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합일학교는 일제강점기 내내 민족교육기관으로 남아있게 됩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