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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생활
 
*관직 생활
허균은 1594년(선조 27) 23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6달만에 파직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살고, 거침없이 행동하며 청탁을 일삼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다시 관직에 올라 형조정랑, 사복시정,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 허균이 수안군수를 역임할 때 그는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에서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이때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였고 난설헌의 빼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허균은 주지번을 잘 영접한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부사가 된지 세 달이 못 되어 또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었으나 서얼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또한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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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1594년(선조 27) 23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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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6달만에 파직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살고, 거침없이 행동하며 청탁을 일삼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다시 관직에 올라 형조정랑, 사복시정,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 허균이 수안군수를 역임할 때 그는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에서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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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이때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였고 난설헌의 빼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허균은 주지번을 잘 영접한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부사가 된지 세 달이 못 되어 또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었으나 서얼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또한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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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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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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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대북(大北)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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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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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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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1617년(광해군 9)좌참찬이 됐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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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2019년 6월 18일 (화) 05:22 판


기본정보

인물정보

개요

조선 중기(선조~광해군)의 문장가·사상가·개혁가이고, 호는 교산(蛟山), 본관은 양천이며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때 반역 혐의를 쓰게되어 결국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생애
  • 유년기

허균은 1569년(선조 2) 경상도 관찰사 허엽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이 속했던 집안은 당대 최고 명가 중 하나였고 자연스럽게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 시는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특히 이달은 허균의 인생관과 문학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달 사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기렸을 만큼 그를 각별히 생각했다.

  • 관직 생활

허균은 1594년(선조 27) 23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6달만에 파직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살고, 거침없이 행동하며 청탁을 일삼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다시 관직에 올라 형조정랑, 사복시정,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 허균이 수안군수를 역임할 때 그는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에서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이때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였고 난설헌의 빼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허균은 주지번을 잘 영접한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부사가 된지 세 달이 못 되어 또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었으나 서얼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또한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허균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대북(大北)에 참여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 9)좌참찬이 됐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