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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윈폴리오가 '하얀손수건'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많은 10대 소녀 팬들이 울먹이며 따라 불렀다. [[윤형주]]가 "이제 우리 튄 폴리오를 그만 해체하려 합니다"라고 말하고 [[송창식]]이 '떠나야 할 그 사람'을 노래할 예정이었으나 노래 도중에 맞붙잡고 둘이 우는 바람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공연 때 팬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선물이 손수건이었다. | + | 트윈폴리오가 '하얀손수건'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많은 10대 소녀 팬들이 울먹이며 따라 불렀다. [[윤형주]]가 "이제 우리 튄 폴리오를 그만 해체하려 합니다"라고 말하고 [[송창식]]이 '떠나야 할 그 사람'을 노래할 예정이었으나 노래 도중에 맞붙잡고 둘이 우는 바람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공연 때 팬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선물이 손수건이었다.<ref>[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61101.22023185319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0) 청년세대가 원한 트윈폴리오 (하)]</ref> |
− | 결국 둘은 해체했으나 각자 40여년이 넘도록 친구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 + | 결국 둘은 해체했으나 각자 40여년이 넘도록 친구사이를 유지하고 있다.<ref>몇몇 이들은 [[윤형주]]에게 "[[송창식]]이랑 40년 넘도록 친구하는 [[윤형주|당신]]이 참 대단하다"고 했다고.</ref> |
===[[송창식]]과 [[윤형주]]=== | ===[[송창식]]과 [[윤형주]]=== |
2019년 6월 17일 (월) 23:40 판
아티스트 | |
---|---|
이름 | 트윈폴리오 |
활동기간 | 1967년 ~ 1969년 |
장르 | 포크 |
레이블 | 세시봉 |
URL |
목차
정의
1960년대 후반 활동한 2인조 남성 포크(통기타) 그룹
내용
결성
1967년 송창식이 세시봉에 등장한 이후, 세시봉 사장이 송창식에게 숙식을 해결해줄테니 마음에 드는 사람 두 명을 모아 트리오를 결성해보라고 제안했다.[1] 그때 송창식은 윤형주와 이익균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윤형주는 송창식이 팝송을 전혀 알지 못해 하나씩 가르쳐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망설였으나, "그를 놓치기엔 첫인상이 무척 강렬"해서 끝내 승낙했다. 이렇게 1967년 10월 초 트윈폴리오의 전신인 '세시봉 트리오'가 결성 되었으나,[2] 이익균의 갑작스러운 군입대로 인해 1968년 1월 말에 해체하게 된다. 당시 한밤의 멜로디' 연출을 맡았던 임성기 PD가 세시봉 트리오의 첫 출연후 노래가 좋다며 고정 출연을 제안했고 이익균의 군입대로 인해 해체하게 되어서 나갈 수 없다고 하는 이들에게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래? 그럼 둘이 해. 이름 새로 만들어 가지고 나와."
그들은 'Song Folio'란 팝송 악보에서 힌트를 얻어서'트윈 폴리오'란 이름을 지었고 '한밤의 멜로디'에 고정 출연하기 시작했다.[3]
활동
당시 그들이 출연하던 '한밤의 멜로디'는 밤 11시에 시작해서, 방송이 끝나면 밤 12시가 넘은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집에 갈 수 없었던 송창식과 윤형주는 자주 세시봉에서 자곤 했다. 매주 새로운 노래를 연습해야 했으나,
송창식의 천재성 덕분에 많은 노래의 음을 딸 수 있었고, 그 동안 윤형주는 가사를 한국어로 번안했다.[4]
그 때 부른 노래들이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행복한 아침(Early in the morning)', 비지스(Bee Gees)의 '내 고향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의 '자메이카여 안녕(Jamaica Farewell)' 등의 팝송과 더불어 '퐁당퐁당', '따오기', '오빠생각', '등대지기' 등 동요도 불렀다. 정훈희의 '안개', 최희준의 '빛과 그림자', 패티 김의 '내 사랑아', 김상희의 '빨간 선인장', 김추자의 '나뭇잎이 떨어져서' 등 가요도 재해석해 불렀다.
트윈폴리오는 차츰 인기를 얻어갔다. 1968년 4월부터는 TBC 라디오 '브라보 선데이'에도 고정 출연하기 시작했다. [5] 이 '브라보 선데이'를 통해 트윈폴리오의 첫 히트곡이 탄생했다. PD가 그리스 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를 들려주며 말했다. "트윈폴리오가 이 노래를 불러 봐." '하얀 손수건'이었다. 송창식이 가사를 번안했다. 같은 PD의 권유로 카니 프란시스의 곡을 윤형주가 번안해 '웨딩 케이크'를 발표했고 그해 여름 이 두 곡을 실은 앨범[6]을 발매했다.
데뷔 초기의 트윈폴리오에 대한 당시 기사내용
우리나라 보칼팀 중에는 가장 고음의 노래를 부르는 남성 듀엣. 세시봉에서 아마추어로 출발한 이들은 처음에는 트리오로 출발했으나 한 멤바가 군입대로 탈락 현재의 듀엣으로 자리를 잡았다. 히피모양 텁수룩하게 머리를 길러 별명이 히피폴리오. 경희대학 의예과에 다니는 윤형주(22)와 홍대 조각과 송창식(23)[7]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고음의 노래를 시원스럽게 불러 허스키 내지 저음일변도의 우리 가요계에서는 아무래도 이색존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여고생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들은 기타연주에 편곡까지 하는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8] |
1968년, 트윈폴리오 인기의 절정은 그해 겨울에 왔다. 12월 23일부터 이틀간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가을에 조영남이 포크 가수로는 처음으로 대규모 공연을 열었던 곳이다. 트윈 폴리오 리사이틀은 매회 전 석이 매진됐고, 일이백 명이 더 몰려들었다. 이 공연으로 트윈 폴리오는 가요사 최초의 하이틴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9]
1969년 5월 세시봉이 전세 계약 만료로 인해 폐업하게 되며 트윈폴리오는 서울 명동 맥주집 오비스캐빈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500원, 1000원 꼴로 벌던 그들은 각자 한 달 20만원을 받았다. [10]
그들은 음악의 지향성도 달랐고, [11] 듀엣 자체도 의외의 조합이었다.
1969년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유명한 음악 평론가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트윈 폴리오는 참 불가사의한 팀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두 목소리가 어떻게 이런 화음을 만들어내는가? 윤형주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때로 소년 같거나 여성적이다. 가정적인 느낌이 있다. 반면 송창식의 목소리에선 물과 바람, 파도 소리가 들린다. 때로 흙냄새가 나고, 때론 바위를 때리는 것 같다." 그 평론가를 직접 만났을 때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당신들의 목소리는 참 드물고 귀한 목소리들이오. 부디 잘 보존하고 간직하시오."[12]
해체
당시 트윈폴리오 활동으로 인해 학업에 소홀했던 윤형주는 계속해서 집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고,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트윈폴리오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결국 윤형주는 트윈폴리오를 만든지 2년만인 1969년 12월 23일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가진 트윈폴리오 공연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송창식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조금씩 재정적 여유를 가지게 된 그에게 미리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한다. [13]
트윈폴리오가 '하얀손수건'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많은 10대 소녀 팬들이 울먹이며 따라 불렀다. 윤형주가 "이제 우리 튄 폴리오를 그만 해체하려 합니다"라고 말하고 송창식이 '떠나야 할 그 사람'을 노래할 예정이었으나 노래 도중에 맞붙잡고 둘이 우는 바람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공연 때 팬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선물이 손수건이었다.[14]
결국 둘은 해체했으나 각자 40여년이 넘도록 친구사이를 유지하고 있다.[15]
송창식과 윤형주
한 때는 같은 무대에서 노래를 했던 그들이지만, 이들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평가는 매우 다르다.
송창식은 폭넓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갖추고 어떤 경지에 도달한 예술가로 인식된다. 김세환과 윤형주는 한때 7080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연예인으로 인식된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송창식은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음악만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 윤형주가 트윈폴리오 해체 이후 학업과 은퇴를 번복하며 세월을 보낼 때 송창식은 음악 외에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송창식은 1975년 가수왕을 차지하며 자신의 시대를 맞이했으며 통기타 가수 대부분 대마초사건으로 활동을 정지당했을 때도 유일하게 평소의 건전한 생활 태도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송창식은 1977년 능력 있는 아내를 만나 편하게 안주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더욱 예술성과 실험성으로 음악을 밀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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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폴리오의 음악적 의미
트윈폴리오의 고별무대 이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해체 2주가 지나기도 전에 MBC-TV와 TBC-TV에서 각각 2번씩(본방과 재방) 4번이나 방송하고도 TBC-TV는 이들의 고별공연 실황을 재편집하여 '쇼쇼쇼'에 방송함으로써 5번이나 트윈폴리오의 고별공연이 방송을 타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부산에서 팬들의 출연요청이 빗발쳐서 1970년 1월 15일부터 4일간 해운대 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평소 두 배의 출연료를 받고 여섯 번째 고별공연까지 해야만 했다.
이런 소동은 그저 한때의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계에 중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청년문화세대가 찾던 음악이 통기타음악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났고, 그들이 찾던 대중적 스타 또한 등장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1969년은 트윈폴리오가 첫 음반을 발표하고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한대수가 창작곡으로 공연을 가짐으로써 통기타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로 기록된다.[17]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웨딩케이크
하얀손수건
타임라인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이미지출처
기여
주석
- ↑ 송창식에게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 궁금하면 나무위키 송창식의 천재성 부분을 참고
- ↑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4 무협지 읽는 사나이
- ↑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5 트윈폴리오의 탄생
- ↑ 당시만 해도 방송에서 팝송을 온전히 부를 수 없었다. 적어도 노래의 절반을 한국말로 불러야 했던 시절이다.
- ↑ 패티 김, 이미자, 남진, 현미, 최희준, 김상희, 이금희, 유주용, 블루벨스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과 함께 출연하곤 했다. 그들에 비하면 트윈 폴리오는 햇병아리에 가까웠다.
- ↑ 트윈폴리오 1집, LP 한 장에 펄 시스터즈 데뷔 앨범을 함께 실은 반쪽짜리 앨범이었다고 한다.
- ↑ 실제로 송창식은 홍대생이 아니었다. 홍대생이었던 친구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홍대생으로 인식되었을 뿐
- ↑ '새로운 보칼그룹들 청신한 스타일로 세대교체 이뤄' 동화그라프 69.4, 60쪽
- ↑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5 트윈폴리오의 탄생
- ↑ 당시 대기업 신입 사원의 초봉이 14만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송창식은 광화문 인근에 월세 집을 얻었다.
- ↑ 예를 들면 송창식이 음악적으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화음을 쓰자고 권유하면, 윤형주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범주를 떠나지 말자고 반대하는 편이었다.
- ↑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6트윈 폴리오 해체… 가객 송창식의 탄생
- ↑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6트윈 폴리오 해체… 가객 송창식의 탄생
- ↑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0) 청년세대가 원한 트윈폴리오 (하)
- ↑ 몇몇 이들은 윤형주에게 "송창식이랑 40년 넘도록 친구하는 당신이 참 대단하다"고 했다고.
- ↑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2> 1970년대 여대생의 로망 윤형주(하)
- ↑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0) 청년세대가 원한 트윈폴리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