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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대수의 아들 황신(黃愼)은 호를 추포(秋浦)라고 하였는데 일찍이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사사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성혼의 제자라고 하였다. 오윤겸과 황신은 진사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대성(臺省)에 들어갔으며 행동이 매우 곧아서 여러 소인에게 배척을 당했으며, 후에는 천장(天將)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웅천(熊川)의 왜영(倭營)에 있었다. 병신년(1596)에는 통신사로서 일본에 들어가 서해문(誓海文)을 지었다. 정유년(1597)에는 호남의 안찰사가 되어서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능히 절의가 이름을 떨쳐 크게 중국의 도적들이 복종하는 바 되어 관직이 겸호조판서체찰사(兼戶曹判書體察使)까지 올랐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李爾瞻)에게 모함을 받아 죽음을 겨우 면해서 옹진(瓮津)에 유배되어 죽었다. 인조반정이 있은 후에는 우의정에 추존되었으며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 황대수의 아들 황신(黃愼)은 호를 추포(秋浦)라고 하였는데 일찍이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사사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성혼의 제자라고 하였다. 오윤겸과 황신은 진사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대성(臺省)에 들어갔으며 행동이 매우 곧아서 여러 소인에게 배척을 당했으며, 후에는 천장(天將)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웅천(熊川)의 왜영(倭營)에 있었다. 병신년(1596)에는 통신사로서 일본에 들어가 서해문(誓海文)을 지었다. 정유년(1597)에는 호남의 안찰사가 되어서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능히 절의가 이름을 떨쳐 크게 중국의 도적들이 복종하는 바 되어 관직이 겸호조판서체찰사(兼戶曹判書體察使)까지 올랐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李爾瞻)에게 모함을 받아 죽음을 겨우 면해서 옹진(瓮津)에 유배되어 죽었다. 인조반정이 있은 후에는 우의정에 추존되었으며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
− | ○ 문민공의 아들 황일호(黃一皓)는 호를 지소(芝所)라고 하였는데 인조 을해년(1635)에 군수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의주 부윤에 오르고 풍옥(風玉) 조수륜(趙守倫 | + | ○ 문민공의 아들 황일호(黃一皓)는 호를 지소(芝所)라고 하였는데 인조 을해년(1635)에 군수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의주 부윤에 오르고 풍옥(風玉) 조수륜(趙守倫)을 사사했는데, 주나라를 종주로 여기는 뜻으로 인해 청나라 오랑캐들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인조가 천금(千金)을 들여서라도 구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단지 휼전만을 거행하였다. 좌찬성으로 추존되었으며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와 운봉의 용암서원(龍庵書院)에 배향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어주었다. 강화부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 | ○ 지소(芝所)의 증손 황사용(黃士用)은 오수당(悟修堂)이라 호를 하였는데 글씨를 잘 써서 세상에 유명하였다. 유수 황경원(黃景源 | + | ○ 지소(芝所)의 증손 황사용(黃士用)은 오수당(悟修堂)이라 호를 하였는데 글씨를 잘 써서 세상에 유명하였다. 유수 황경원(黃景源)은 ʻ오수당기(悟修堂記)ʼ를 지었다. |
− | ○ 지소의 현손 황경조(黃景祚)는 승지 황윤(黃玧 | + | ○ 지소의 현손 황경조(黃景祚)는 승지 황윤(黃玧)의 증손이다. 장녕전의 참봉으로 동부(東部) 도사(都事)를 지냈다. |
○ 아술당(蛾述堂) 황진(黃璡)은 우암(尤菴)과 동춘(同春)을 사사하였으며 효도하는 마음을 오로지 하였고 창릉(昌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지평에 추증되었다. | ○ 아술당(蛾述堂) 황진(黃璡)은 우암(尤菴)과 동춘(同春)을 사사하였으며 효도하는 마음을 오로지 하였고 창릉(昌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지평에 추증되었다. | ||
− | ○ 쌍송당(雙松堂) 황하민(黃夏民)은 황진(黃璡)의 아들이다. 형 황하신(黃夏臣 | + | ○ 쌍송당(雙松堂) 황하민(黃夏民)은 황진(黃璡)의 아들이다. 형 황하신(黃夏臣)이 계묘년(1723)에 참화를 당하자, 이로 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섬으로 돌아와 다시는 갑곶진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서하였다. 일찍이 오류천(五流川)에 거주하면서 대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였다. 임진년(1772)에 경녕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관직이 직산 현감에까지 이르렀다. |
− | 것을 포기하고 섬으로 돌아와 다시는 갑곶진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서하였다. 일찍이 오류천(五流川)에 거주하면서 대문을 닫고 손님을 | + | |
− | 사양하였다. 임진년(1772)에 경녕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관직이 직산 현감에까지 이르렀다. | + | |
− | ○ 황하민의 아들 황상경(黃尙敬 | + | ○ 황하민의 아들 황상경(黃尙敬)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황상경의 손자 황면철(黃勉喆)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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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 ||
+ | *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 ||
* 조수륜(1555∼1612)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지(景至), 호는 풍옥헌(風玉軒) | * 조수륜(1555∼1612)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지(景至), 호는 풍옥헌(風玉軒) | ||
+ | * 우계(牛溪) 성혼(成渾) | ||
+ | *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 ||
+ | |||
* 황경원(1709∼1787)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禮學者).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 * 황경원(1709∼1787)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禮學者).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 ||
+ | * 지촌(芝村) 황형(黃衡) | ||
+ | * 황원(黃瑗) | ||
+ | * 황대수(黃大受) | ||
+ | * 추포(秋浦) 황신(黃愼) | ||
+ | * 지소(芝所) 황일호(黃一皓) | ||
* 황윤(1623년 출생) 자는 집중(執中). 본관은 창원(昌原). | * 황윤(1623년 출생) 자는 집중(執中). 본관은 창원(昌原). | ||
+ | * 오수당(悟修堂) 황사용(黃士用) | ||
+ | * 황경조(黃景祚) | ||
+ | * 아술당(蛾述堂) 황진(黃璡) | ||
* 황하신(1656년 출생) 자는 종명(宗明). 본관은 창원(昌原). | * 황하신(1656년 출생) 자는 종명(宗明). 본관은 창원(昌原). | ||
+ | * 쌍송당(雙松堂) 황하민(黃夏民) | ||
* 황상경(1688년 출생) 자는 일경(一卿). 본관은 창원(昌原). | * 황상경(1688년 출생) 자는 일경(一卿). 본관은 창원(昌原). | ||
* 황면철(1739년 출생) 본관은 창원(昌原). | * 황면철(1739년 출생) 본관은 창원(昌原). |
2019년 5월 21일 (화) 09:41 기준 최신판
112. 왕림사 추포영당(秋浦影堂*)
旺林寺古在何邊 (왕림사고재하변) 왕림사 옛 터는 어디쯤에 있는가,
秋浦影堂獨嵬然 (추포영당독외연) 추포 선생 영당만이 홀로 우뚝 서 있네.
想是雲仍文蔭武 (상시운잉문음무) 생각하니 후손들이 문무 관직에 나아가고,
鳴吾東國博淵泉 (명오동국박연천) 우리나라 울려 퍼져 깊은 덕성을 넓혔네.
○ 왕림사(旺林寺)는 고려 때의 절이다. 지금은 폐지되어 형체도 없지만 동네 이름만이 남아있다.
○ 추포(秋浦) 황신(黃愼)의 영당(影堂)이 이 동네에 있었는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화상찬(畵像贊)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炯如氷壺 貞若竹筠 (형여빙호 정약죽균) 옥병처럼 맑디맑고 대처럼 곧다네.
百年間氣 一幅精神 (백년간기 일폭정신) 백년의 기운은 한폭의 정신이라네.
凜烈之節 正大之識 (늠렬지절 정대지식) 늠름한 절개에 바르고 큰 식견일세.
斯焉取斯 考亭之學 (사언취사 고정지학) 어디서 취했는가? 주자의 학문이라네.
○ 장무공(莊武公) 지촌(芝村) 황형(黃衡)의 아들은 황원(黃瑗)이고, 황원의 아들은 황대수(黃大受)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주서(注書)로서 잠저의 처소에 드나들었으며 그의 행동은 그 지키는 바가 탁월해서 여론이 매우 칭찬하였다. 장차 높이 쓰일 것을 기약하였는데 병조정랑으로서 영남도에 명을 받들고 가다가 죽었다.
○ 황대수의 아들 황신(黃愼)은 호를 추포(秋浦)라고 하였는데 일찍이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사사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성혼의 제자라고 하였다. 오윤겸과 황신은 진사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대성(臺省)에 들어갔으며 행동이 매우 곧아서 여러 소인에게 배척을 당했으며, 후에는 천장(天將)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웅천(熊川)의 왜영(倭營)에 있었다. 병신년(1596)에는 통신사로서 일본에 들어가 서해문(誓海文)을 지었다. 정유년(1597)에는 호남의 안찰사가 되어서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능히 절의가 이름을 떨쳐 크게 중국의 도적들이 복종하는 바 되어 관직이 겸호조판서체찰사(兼戶曹判書體察使)까지 올랐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李爾瞻)에게 모함을 받아 죽음을 겨우 면해서 옹진(瓮津)에 유배되어 죽었다. 인조반정이 있은 후에는 우의정에 추존되었으며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문민공의 아들 황일호(黃一皓)는 호를 지소(芝所)라고 하였는데 인조 을해년(1635)에 군수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의주 부윤에 오르고 풍옥(風玉) 조수륜(趙守倫)을 사사했는데, 주나라를 종주로 여기는 뜻으로 인해 청나라 오랑캐들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인조가 천금(千金)을 들여서라도 구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단지 휼전만을 거행하였다. 좌찬성으로 추존되었으며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와 운봉의 용암서원(龍庵書院)에 배향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어주었다. 강화부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지소(芝所)의 증손 황사용(黃士用)은 오수당(悟修堂)이라 호를 하였는데 글씨를 잘 써서 세상에 유명하였다. 유수 황경원(黃景源)은 ʻ오수당기(悟修堂記)ʼ를 지었다.
○ 지소의 현손 황경조(黃景祚)는 승지 황윤(黃玧)의 증손이다. 장녕전의 참봉으로 동부(東部) 도사(都事)를 지냈다.
○ 아술당(蛾述堂) 황진(黃璡)은 우암(尤菴)과 동춘(同春)을 사사하였으며 효도하는 마음을 오로지 하였고 창릉(昌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지평에 추증되었다.
○ 쌍송당(雙松堂) 황하민(黃夏民)은 황진(黃璡)의 아들이다. 형 황하신(黃夏臣)이 계묘년(1723)에 참화를 당하자, 이로 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섬으로 돌아와 다시는 갑곶진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서하였다. 일찍이 오류천(五流川)에 거주하면서 대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였다. 임진년(1772)에 경녕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관직이 직산 현감에까지 이르렀다.
○ 황하민의 아들 황상경(黃尙敬)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황상경의 손자 황면철(黃勉喆)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인물
-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 조수륜(1555∼1612)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지(景至), 호는 풍옥헌(風玉軒)
- 우계(牛溪) 성혼(成渾)
-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 황경원(1709∼1787)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禮學者).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 지촌(芝村) 황형(黃衡)
- 황원(黃瑗)
- 황대수(黃大受)
- 추포(秋浦) 황신(黃愼)
- 지소(芝所) 황일호(黃一皓)
- 황윤(1623년 출생) 자는 집중(執中). 본관은 창원(昌原).
- 오수당(悟修堂) 황사용(黃士用)
- 황경조(黃景祚)
- 아술당(蛾述堂) 황진(黃璡)
- 황하신(1656년 출생) 자는 종명(宗明). 본관은 창원(昌原).
- 쌍송당(雙松堂) 황하민(黃夏民)
- 황상경(1688년 출생) 자는 일경(一卿). 본관은 창원(昌原).
- 황면철(1739년 출생) 본관은 창원(昌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