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충신 이춘일(李春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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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7일 (토) 12:16 기준 최신판
粵在丙寅失此門 (월재병인실차문) 병인년 난리 통에 남문을 못 지켜서,
鑰魚堞雉帶羞痕 (약어첩치대수흔) 자물쇠와 치첩에는 상처가 둘러 있네.
大呼拔劍忠臣李 (대호발검충신리) 호령하며 칼을 뽑던 충성신하 이춘일은,
泉下應歸不死魂 (천하응귀불사혼) 구천으로 돌아갔으련만 혼은 죽지 않았네.
○ 황상의 병인년(1866, 고종 3) 9월에 서양인의 도적들의 난리를 일으켰을 때 유수 이인기(李寅夔)·판관 김세헌(金世獻)·중군 이아무개 등이 수비를 하지 않고 도적떼가 이르자마자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그때 남문의 수문장인 이춘일(李春一)이 도적떼가 이르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너희들이 감히 이곳에 들어오려 하려느냐.”라고 하며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일이 알려지자 공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기행지도
인물
- 유수 이인기(李寅夔)
- 판관 김세헌(金世獻)
- 중군 이아무개
- 수문장 이춘일(李春一)
참고
- 구창서발문본에는 제 2구의 ʻ羞ʼ가 ʻ愁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