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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부여 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내에는 5층석탑(국보 제9호) 1기와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1구(軀)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이 절의 창건은 유구와 유물을 통하여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직후 얼마 지나지 않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나 창건 당시의 절이름은 알 수 없으며, 사지(寺址)의 현재 명칭은 고려시대 때 절의 재건 당시(현종 19년, 1028)에 제작된 기와 가운데 ‘대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정림사지(定林寺址)라 하게 되었다.
 
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부여 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내에는 5층석탑(국보 제9호) 1기와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1구(軀)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이 절의 창건은 유구와 유물을 통하여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직후 얼마 지나지 않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나 창건 당시의 절이름은 알 수 없으며, 사지(寺址)의 현재 명칭은 고려시대 때 절의 재건 당시(현종 19년, 1028)에 제작된 기와 가운데 ‘대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정림사지(定林寺址)라 하게 되었다.
 
1927년 조사에서는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막연하게 [[백제]] 왕릉군으로 추정되었다. 뒤이어 이루어진 1932~1933년 조사에서는 6호분이 발견되어 점차 백제 왕릉군이라는 주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고분군이 [[백제]] 왕릉군으로서 분명한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무령왕릉(武零王陵)|무령왕릉]] 발견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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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학계가 이해해온 백제 가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一)자형’으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대문-탑-금당(金堂·본존불이 있는 절의 본당)-강당이 놓이고, 사방에 회랑을 둘러 중심 영역을 형성했다는 것. 이러한 가람 형식은 ‘1탑1금당식’으로 불리며 일본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 가람 배치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돼왔다. 일제강점기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나 국내의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 등 그동안 정림사지를 조사해온 학자들도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같이 추정해왔다.
 
지금까지 학계가 이해해온 백제 가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一)자형’으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대문-탑-금당(金堂·본존불이 있는 절의 본당)-강당이 놓이고, 사방에 회랑을 둘러 중심 영역을 형성했다는 것. 이러한 가람 형식은 ‘1탑1금당식’으로 불리며 일본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 가람 배치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돼왔다. 일제강점기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나 국내의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 등 그동안 정림사지를 조사해온 학자들도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같이 추정해왔다.
 
하지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가 2008년 실시한 강당 및 동회랑지에 대한 제8차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강당지 좌우에서 대형 부속건물지 각 1동이 확인되면서 사정이 달라지게 됐다. 이번 조사에선 부속건물 남쪽의 동회랑 및 석축배수로 등도 새롭게 확인됐다. 확인된 강당지 규모는 동서길이 39.1m, 남북 폭 16.3m이며, 강당지 좌우로 1m 간격을 둔 부속건물지 규모는 동서 폭 12.1m, 남북길이 39.3m로 조사됐다. 강당지나 좌우 부속건물지 모두 기와로 기단을 치장한 와적기단(瓦積基壇) 위에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가 2008년 실시한 강당 및 동회랑지에 대한 제8차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강당지 좌우에서 대형 부속건물지 각 1동이 확인되면서 사정이 달라지게 됐다. 이번 조사에선 부속건물 남쪽의 동회랑 및 석축배수로 등도 새롭게 확인됐다. 확인된 강당지 규모는 동서길이 39.1m, 남북 폭 16.3m이며, 강당지 좌우로 1m 간격을 둔 부속건물지 규모는 동서 폭 12.1m, 남북길이 39.3m로 조사됐다. 강당지나 좌우 부속건물지 모두 기와로 기단을 치장한 와적기단(瓦積基壇) 위에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지금까지 7차례에 걸쳐 이뤄진 정림사지에 대한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내용이다. 특히 6세기 중반에 세워진 부여 능산리사지나 왕흥사지 등 최근 발굴된 백제 절터에서도 강당지 좌우에서 부속건물지가 확인돼 이같은 구조가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일 가능성이 높다고 부여문화재연구소측은 설명했다. 심 소장은 “백제시대 가람배치의 전형을 확인한 것은 물론, 아스카데라(飛鳥寺) 등 일본 사찰의 가람배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자료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ref> 문화일보, 2008년 11월 20일자 </ref><br/><br/><br/><br/><br/><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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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지금까지 7차례에 걸쳐 이뤄진 정림사지에 대한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내용이다. 특히 6세기 중반에 세워진 부여 능산리사지나 왕흥사지 등 최근 발굴된 백제 절터에서도 강당지 좌우에서 부속건물지가 확인돼 이같은 구조가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일 가능성이 높다고 부여문화재연구소측은 설명했다. 심 소장은 “백제시대 가람배치의 전형을 확인한 것은 물론, 아스카데라(飛鳥寺) 등 일본 사찰의 가람배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자료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ref> 문화일보, 2008년 11월 20일자 </ref><br/><br/><br/><br/><br/><br/><br/>
  
 
=='''정림사지의 문화재 소개'''==
 
=='''정림사지의 문화재 소개'''==

2016년 4월 18일 (월) 17:43 기준 최신판


개요

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부여 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내에는 5층석탑(국보 제9호) 1기와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1구(軀)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이 절의 창건은 유구와 유물을 통하여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직후 얼마 지나지 않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나 창건 당시의 절이름은 알 수 없으며, 사지(寺址)의 현재 명칭은 고려시대 때 절의 재건 당시(현종 19년, 1028)에 제작된 기와 가운데 ‘대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정림사지(定林寺址)라 하게 되었다.

부여 정림사지 발굴 역사

1915년 고적조사

1915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고적조사 5개년 사업을 실시하였다. 조사대상으로 석불좌상과 정림사지오층석탑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당시 보고서에는 동남리석조여래좌상 속칭 소정방상으로 기록하였다.

1945년 고적조사

정림사지는 1942년 총독부박물관의 후지사와 카츠오(藤澤一夫)에 의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발굴은 중문지와 금당지는 전면 발굴을 실시하였고 강당지는 주로 적심석의 위치만 확인한 부분 발굴에 그쳤다. 조사 결과 정림사지는 남북축선상에 중문·석탑·금당·강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주위에 회랑을 두른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인 백제시대의 사찰로 밝혀졌다. 백제의 서울이었던 충남 부여의 부소산 일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다. 6월 3일에 백제시대 궁전벽화가 발견되고 6일에는 새로운 백제시대 왕궁지와 기타 유물들이 발견되다. 이어 9월 중순에는 대가람지가 발견되다. 그리고 10월 초순에는 소위 평제탑 부근에 대한 발굴이 계속되어 대가람의 사지가 확인되고 법당지에서 ‘大平八年戊辰 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다. - 「일본침략下 한국사 36년사」 1942년 기록

1979년 발굴조사

1979~1980년, 1983~1984년에 걸쳐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정림사지의 윤곽을 확인하였다. 정림사지의 주요 건물배치는 남북을 기본 축으로 하여 2개의 연못과 남문·중문·석탑·금당·강당지가 일직선상에 건립되어 있으며 건물들을 회랑으로 감싸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정림사지의 대지는 북동에서 남서로 경사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북동쪽은 깍고, 낮은 서남쪽은 성토하여 조성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정심사지 사역의 남편과 서편은 원래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사역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낮아 사찰의 위용이 한껏 과시되었을 것이다. 정림사지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중문, 금당지, 강당지 및 그 북·동·서편의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다. 그 배치 평면과 같은데, 이러한 회랑에 접속된 북·동·서 승방지의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독특한 모습으로 백제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예불대상이 되는 불상이 안치되는 금당과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는 탑이다. 탑과 금당간의 관계에 따라 <1탑-1금당>, <1탑-2금당> 등의 가람배치양식을 구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림사지는 강당과 승방지, 그리고 회랑으로 둘러진 공간 내에 탑과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사찰터로서, 각 건물들은 기와로 쌓은 기단 위에 건축 된 목조의 기와 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전체 사찰지의 규모는 북승방지에서 중문지까지 107m이며, 폭은 동서건물지외곽 기준으로 62m이다. 두개의 연못지가 중문지 남쪽에서 발굴되었다.

1984년 연지 발굴조사

1984년 발굴 당시의 지면에서 4m를 넘는 깊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서 유적에 대한 발굴 보다 상부에 퇴적된 토층을 제거하기 위한 인력이 많이 소비되었다고 한다. 정림사지 연지는 자연적으로 유입된 토사에 의해 매몰되었으며 백제패망 후 얼마 되지 않아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지 내부에서 탄화된 연꽃의 줄기와 잎 등이 확인되었다.

  • 동측 연지 15.3m, 남북 11m, 장방형
  • 서측 연지 11.2m, 남북 11m, 정방형

2008년 ~ 2010년 발굴조사

2008~2009년 조사에서는 백제시대 강당동서너비 40m, 남북길이 16m, 회랑지, 석축배수로와 강당지 서편으로 별도의 건물지 공방관련 유구, 고려시대 금당지, 중문지 등 정림사의 가람배치 전모가 드러났다. 이를 통해 강당지 좌우에 부속 건물지가 강당지와 나란히 위치하고, 부속 건물지 남쪽으로 와적기단의 회랑이 배치되는 가람구조인 것이 드러났다. 사역규모는 동서 폭 최대 62m 부속건물지 외각, 동서 최소 50.4m 회랑지 외각이며 남북 길이 91m로 추정된다. 2010년에는 현 보호각 북편의 동편일대에서 백제시대 정림사유구인 북승방지, 배수로, 축대, 고려시대 정림사관련 적심석군이 확인되었다. 금당지와 탑지사이에서는 창건 이전 성 토층 하부의 목탄층이 확인되어 창건 이전의 생활면을 알 수 있었다. 출토유물은 수대隨代로 추정되는 중국 자기, 백제시대 벼루·기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 등이 있다.

가람배치

부여 정림사지 가람배치도(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추정)

백제시대 사비도성의 중심사찰이었던 충남 부여 정림사지(사적 제301호)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시대 가람 구조가 새롭게 밝혀졌다. 지금까지 학계가 이해해온 백제 가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一)자형’으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대문-탑-금당(金堂·본존불이 있는 절의 본당)-강당이 놓이고, 사방에 회랑을 둘러 중심 영역을 형성했다는 것. 이러한 가람 형식은 ‘1탑1금당식’으로 불리며 일본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 가람 배치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돼왔다. 일제강점기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나 국내의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 등 그동안 정림사지를 조사해온 학자들도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같이 추정해왔다. 하지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가 2008년 실시한 강당 및 동회랑지에 대한 제8차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강당지 좌우에서 대형 부속건물지 각 1동이 확인되면서 사정이 달라지게 됐다. 이번 조사에선 부속건물 남쪽의 동회랑 및 석축배수로 등도 새롭게 확인됐다. 확인된 강당지 규모는 동서길이 39.1m, 남북 폭 16.3m이며, 강당지 좌우로 1m 간격을 둔 부속건물지 규모는 동서 폭 12.1m, 남북길이 39.3m로 조사됐다. 강당지나 좌우 부속건물지 모두 기와로 기단을 치장한 와적기단(瓦積基壇) 위에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지금까지 7차례에 걸쳐 이뤄진 정림사지에 대한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내용이다. 특히 6세기 중반에 세워진 부여 능산리사지나 왕흥사지 등 최근 발굴된 백제 절터에서도 강당지 좌우에서 부속건물지가 확인돼 이같은 구조가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일 가능성이 높다고 부여문화재연구소측은 설명했다. 심 소장은 “백제시대 가람배치의 전형을 확인한 것은 물론, 아스카데라(飛鳥寺) 등 일본 사찰의 가람배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자료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1]






정림사지의 문화재 소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 지정번호: 국보 제9호(지정일1962.12.30.)
  • 높이: 8.33m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어,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여러장의 돌을 사용하여 단층으로 된 낮은 기단을 만들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귀퉁이 기둥돌)와 탱주(지탱하는 돌)를 하나씩 세웠다. 1층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별도의 돌로 민흘림의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장씩 판석을 끼웠다. 탑신 2층부터 몸돌은 윗면으로 갈수록 부재가 줄어 차례로 4개, 2개,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지붕돌의 아래 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지붕받침을 두었는데, 탑신과 마찬가지로 위층으로 갈수록 석재의 수가 줄어든다. 옥개석(지붕석)은 얇고 넓으며 전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고, 옥개받침(지붕받침)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히 다듬어서 간략화된 공포(公布) 형태를 재현하였다. 지붕돌의 윗면에는 한 단의 탑신받침을 놓았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석을 두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의 폭이 넓고,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고 축조하여 외견상 목조건물과 유사하다. 안정감 있는 체감률의 격조 높은 탑이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민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 지정번호 : 보물 제108호(지정일1963.01.21.)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지권인(智卷印)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권인은 비로자나불의 특징적인 손모양으로, 불법으로서 모든 것을 감싼다는 것을 상징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眼象)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봉안된 곳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정림사지 불상군

  •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국립부여박물관·충남대학교박물관

1979년에서 1980년에 걸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를 발굴할 때 불상과 보살상·인물상[陶俑] 등이 다량 발견되었는데, 재료는 활석(滑石)과 진흙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구려 원오리 출토 소조불상과도 유사한 550년경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우리 나라의 초기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상들은 소조상이지만 납석제삼존불이 1구 출토되었는데, 당시의 조각 양식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삼존불은 가슴 부분 이상이 잘려진 불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하체나 대좌 등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에 불상 양식을 연구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본존불은 연화좌 위에 서 있는 상으로 두꺼운 옷 속에 감추어진 신체는 비교적 당당하다. U자형의 옷주름 선은 선각적(線刻的)인 표현을 하였다. 불의(佛衣)의 끝은 V자형으로 뾰족하고 양끝이 Ω자형을 이루는 변화를 보여 준다. 좌우 신체를 따라 내려간 자락은 지그재그의 옷주름을 형성하다가 끝이 새 날개처럼 마무리되었다. 아래에는 하내의(下內衣)를 걸쳤으며, 이것 역시 발목 부근에서 Ω자형 주름과 부드러운 곡선 주름을 이루고 있다. 대좌는 둥근 연화좌로서, 복련(覆蓮 :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은 소박하고 힘찬 초기 연꽃무늬를 보여 준다. 협시보살은 두 손을 가슴에서 맞잡아 보주(寶珠)를 감싸고 있는 자세로서, 이런 모습은 같이 출토된 소조보살상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백제 보살상에서 이러한 형식이 주로 많은 것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신체의 굴곡이나 옷주름도 부드럽지만 상의(裳衣 : 치마)는 세로선으로 표현하고 3겹 주름의 Ⅹ자형 천의(天衣) 등의 묘사는 6세기 중엽 내지 후기의 보살상, 가령 원오리 소조보살상과 상통한다. 이상의 소조상들은 북위(北魏)의 도용상과 친연성이 강하면서 고구려 소조상과도 깊이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납석제삼존상 또한 고구려나 중국 양식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 양식 내지 문화 교류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작품들이다.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관련사이트

참고문헌

  • 고고학사전, 2001, 국립문화재 연구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부여 정림사지 발굴조사보고서』(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답사 후기

  • 답사 중/후에 느낀 것.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으면 적어주세요!

출처

  1. 문화일보, 2008년 11월 20일자

기여

역할 이름 전공
정리 김윤희, 신은혜 민속학
편집 장원석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