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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정보
 
{{문화유산정보
|대표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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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강릉 오죽헌
|지정번호 =  
+
|지정번호 = 보물 제165호
|지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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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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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강릉 오죽헌
|한자명칭 =  
+
|한자명칭 = 江陵 烏竹軒
|영문명칭 =  
+
|영문명칭 = Ojukheon House, Gangn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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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탄생지
|건립·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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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제작 = 조선시대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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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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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 37.779391
 
|경도 = 128.878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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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오죽헌.jpg  
|웹사이트 = 문화재청<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2130000,32 삼척죽서루]', 문화재청, 2017년 4월 5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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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문화재청]<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1650000,32 강릉 오죽헌]', 문화재청, 2017년 4월 6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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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ukheon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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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ukheon House is where Sin Saimdang (1504-1551) lived and her son, Yi I (Yulgok, 1536-1584) was born. Sin Saimdang was an exemplary mother, wise wife, and an outstanding artist while her son wa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greatest scholars of Joseon with Yi Hwang.  Built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this house remains to be one of the oldest wooden residential building in Korea. It was designated as Treasure No. 165. Inside the house is Yulgok Memorial Hall (Mongryongsil) where Yi I was born.
  
 
==정의==
 
==정의==
삼척시 오십천 절벽위에 자리잡고 있는 [[관동팔경]]으로 꼽히는 누각. 창건연대와 창건자는 알 수 없으나 1266년에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빼어난 경치로 많은 문인들의 시의 배경이 되었으며 여러 번 고쳐 세워진 것으로 보아 강원도 내에서 위상이 대단했음을 몰 수 있다. 누각 내에도 유명 학자, 문인들의 시가 적힌 현판 여러 개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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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주택<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111 강릉 오죽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4월 6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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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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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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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검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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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대나무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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軒-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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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검은 대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창건연대와 이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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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죽서루는 '서루(西樓)'라고도 불렸는데, '''죽장사(竹藏寺)'''의 서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에 많이 나타나는 별당과 그 평면형식을 같이 한다.
또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ref>안세현, 「麗末鮮初 八景詩의 창작 양상과 삼척 竹西樓 八詠」, 『강원문화연구』 제34집, 2015, 9쪽</ref>
+
<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1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릉 오죽헌(江陵烏竹軒))' , 2022.10.07 접속 </ref>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후기 이승휴(1224-1300)가 1266년에 죽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
있어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2130000,32 삼척 죽서루]', 문화재청, 2017년 4월 5일</ref>
+
1403년에 삼척 수령 김효종이 고쳐서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로 사용했다.  
+
사신관들을 위한 연회와 접대를 위한 장소로, 삼척 지방 양반 사대부와 문인들의 정신 수양을 위한 공간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쳐 세워 졌다는 기록이 있어 죽서루가 갖는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ref>문지은, 「생활을 바탕으로 한 죽서루, 경포대의 누정건축 공간해석에 관한 연구 : 조선시대 회화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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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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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송강 정철이 소개한 [[관동팔경]]에 속하며 태백산 오십천의 동쪽 암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죽서루와 오십천이 함께 명승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긴 장방형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ref>문지은, 「생활을 바탕으로 한 죽서루, 경포대의 누정건축 공간해석에 관한 연구 : 조선시대 회화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ref>
+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자연 바위 그대로를 주춧돌로 이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그 표면의 울퉁불퉁한 모양대로 기둥을 깎아내어 맞물리게 했다.(그랭이질이라는 전통 건축 기법)
+
<ref>[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23201650000 '강릉 오죽헌 (江陵 烏竹軒)', 국가문화유산포털], 2022.10.07 접속 </ref>
===죽서루 내의 시문(詩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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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에는 임금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유명한 문인들의 한시 편액이 곳곳에 붙어있다. 1959년 9월 17일 사하라 태풍으로 많이 유실되고 현재는 27점이 남아있다. 중에서 [[이율곡]], [[정조]]어제시, 이구의 작품은 1992년 김충현이, 정철의 작품은 홍태의가 다시 써서 붙였다. 몇가지를 살펴보면,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는 숙종 대의 삼척부사였던 이성조가 쓴 것이다.'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대의 삼척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ref>삼척시, 「삼척 죽서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1999, 39쪽</ref>
+
===죽서루 팔영(八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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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승경을 여덟 가지 경치로 구분하여 쓴 시를 팔경시라 한다. 죽서루를 주제로 한 팔경시도 ''''죽서루 팔영(八詠)'''이라하여 몇 가지가 전해져온다. 안축(1282~1348)의 <삼척서루팔영(三陟西樓八詠)>과 이를 모델로 한 이곡(1503~1549)의 <차안근제축삼척팔영운(次安謹軸三陟八詠韻)>, 이달충(1309~1385)의 <삼척팔영(三陟八詠)>, 이곡의 시를 모델로 한 서거정(1420~1488)의 <삼척축서루팔영(三陟竹西樓八詠)>, 성현(1439~1504)의 <삼척죽서루팔영(三陟竹西樓八詠)>, 신광한(1484~1555)의 <죽서루팔영(竹西樓八詠)> 등 이 있다.<ref>박연호, 「竹西樓의 공간 특성과 그 의미」, 『강원문화연구』28, 2009, 3쪽</ref>
+
  
===용문(龍門)과 성혈(性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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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죽서루 동쪽에 행초서로 '용문(龍門)'이라 생긴 음각글씨가 있는 바위이며 그 위에 성혈을 암각한 것이 남아있다. 성혈은 여성의 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의미한다. 성혈은 풍요와 생산을 의미하는 선사시대의 상징물이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남자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비는 곳으로 변모하게 된다. 용문바위위 성혈은 지금 3~4cm, 깊이 2~3cm 정도의 크기로 10개가 뚫려있다.<ref>삼척시, 「삼척 죽서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1999, 59-6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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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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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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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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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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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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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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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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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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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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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 고택의 본래 배치는 본가 우측 대나무 숲의 가운데에 가묘가 있고 앞으로 오죽헌이 있는 것이다. 현재 문성사가 있는 자리는 어제각이 있던 자리이다. 그 뒤는 소나무숲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본가는 ㅁ자형의 평면이었고 우측에 입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당의 뒤쪽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정면에 위치한 사랑채는 ‘호해정사(湖海精舍)’라 이름하였고, 5대 권진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가와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별도의 영역에 자리한 오죽헌은 권씨 집안으로 물려진 고택의 일부분이며 현재 보물로 지정된 곳도 여기이다.본가와는 다르게 동남향하고 있는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 반 크기의 온돌방, 그리고 반칸 너비의 툇마루로 된 단순한 一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이곳의 온돌이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다. 온돌의 뒤쪽 반칸은 별도로 마루를 드렸는데, 당시 다른 사대부들의 별당과 마찬가지로 책을 보관하던 서실(書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커다란 장대석을 한 층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익공(翼工)으로 처리한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의 집이다. 도리는 굴도리이고 그를 운두가 낮은 장여로 받치며, 다시 그것을 주간에서는 창방 위에 화반(花盤)으로, 기둥에서는 첨차 위에 소로[小累]를 놓아 받치고 있다. 겹처마에 양측 면에 합각(合閣)을 형성한 팔작지붕이다.정면에는 띠살창호를, 측면에는 골판문으로 된 덧문을 달았다. 온돌방은 벽과 천장을 모두 종이로 마감하였고,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마감하였으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또, 오량(五樑)집의 가구(架構)들은 모두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데,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얹고 그 위에 종보[宗樑]를 놓고, 다시 초각(草刻)한 판대공(板臺工)과 첨차로써 마루도리[宗道里]를 떠받게 하였다. 합각 밑부분에는 귀틀을 짠 뒤 우물천장을 만들어 서까래가 모여드는 것을 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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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사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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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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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111 강릉 오죽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4월 6일</ref>
  
 
==사진자료==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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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죽서루정면도.JPG | 죽서루정면도<ref> 문지은, 「생활을 바탕으로 한 죽서루, 경포대의 누정건축 공간해석에 관한 연구 : 조선시대 회화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5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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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861 삼척 죽서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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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111 강릉 오죽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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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6981&cid=40942&categoryId=33080 강릉 오죽헌]', 『두산백과』, (주)두산, 2017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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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A3%BD%ED%97%8C 오죽헌]', 『위키백과』, 2017년 4월 13일
  
 
==주석==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분류:황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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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구현회]]
[[분류: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 2017 봄 학술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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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7일 (금) 20:39 기준 최신판


Ojukheon House

Ojukheon House is where Sin Saimdang (1504-1551) lived and her son, Yi I (Yulgok, 1536-1584) was born. Sin Saimdang was an exemplary mother, wise wife, and an outstanding artist while her son wa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greatest scholars of Joseon with Yi Hwang. Built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this house remains to be one of the oldest wooden residential building in Korea. It was designated as Treasure No. 165. Inside the house is Yulgok Memorial Hall (Mongryongsil) where Yi I was born.

정의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주택[2]


위치

내용

烏-검을오 竹-대나무죽 軒-집헌
검은 대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개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에 많이 나타나는 별당과 그 평면형식을 같이 한다. [3]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4]

인물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의의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권씨 고택의 본래 배치는 본가 우측 대나무 숲의 가운데에 가묘가 있고 그 앞으로 오죽헌이 있는 것이다. 현재 문성사가 있는 자리는 어제각이 있던 자리이다. 그 뒤는 소나무숲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본가는 ㅁ자형의 평면이었고 우측에 입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당의 뒤쪽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정면에 위치한 사랑채는 ‘호해정사(湖海精舍)’라 이름하였고, 5대 권진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가와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별도의 영역에 자리한 오죽헌은 권씨 집안으로 물려진 고택의 일부분이며 현재 보물로 지정된 곳도 여기이다.본가와는 다르게 동남향하고 있는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 반 크기의 온돌방, 그리고 반칸 너비의 툇마루로 된 단순한 一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이곳의 온돌이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다. 온돌의 뒤쪽 반칸은 별도로 마루를 드렸는데, 당시 다른 사대부들의 별당과 마찬가지로 책을 보관하던 서실(書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커다란 장대석을 한 층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익공(翼工)으로 처리한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의 집이다. 도리는 굴도리이고 그를 운두가 낮은 장여로 받치며, 다시 그것을 주간에서는 창방 위에 화반(花盤)으로, 기둥에서는 첨차 위에 소로[小累]를 놓아 받치고 있다. 겹처마에 양측 면에 합각(合閣)을 형성한 팔작지붕이다.정면에는 띠살창호를, 측면에는 골판문으로 된 덧문을 달았다. 온돌방은 벽과 천장을 모두 종이로 마감하였고,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마감하였으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또, 오량(五樑)집의 가구(架構)들은 모두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데,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얹고 그 위에 종보[宗樑]를 놓고, 다시 초각(草刻)한 판대공(板臺工)과 첨차로써 마루도리[宗道里]를 떠받게 하였다. 합각 밑부분에는 귀틀을 짠 뒤 우물천장을 만들어 서까래가 모여드는 것을 가리고 있다. [5]

관련된 사회제도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다.[6]

사진자료


참고문헌

주석

  1. '강릉 오죽헌', 문화재청, 2017년 4월 6일
  2. '강릉 오죽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4월 6일
  3.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1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릉 오죽헌(江陵烏竹軒))' , 2022.10.07 접속
  4. '강릉 오죽헌 (江陵 烏竹軒)', 국가문화유산포털, 2022.10.07 접속
  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1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릉 오죽헌(江陵烏竹軒))' , 2022.10.07 접속
  6. '강릉 오죽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4월 6일

수정:2022:구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