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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5일 (일) 08:1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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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황의 연시조(連時調). 퇴계는 스스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이별육가(李鼈六歌)>를 모방해서 지었다고 밝히고, 아울러 전육곡(前六曲) 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눈 후 전자를 ‘언지(言志)’, 후자를 ‘언학(言學)’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도산십이곡>의 주제가 ‘지(志)’와 ‘학(學)’임을 작가 자신이 천명한 것이지, 독자의 입장에서는 달리 파악할 여지도 있다. ‘언지’의 ‘지(志)’는 성정의 올바름(性情之正)으로서 정감이 아닌 이성(理性)을 의미하고, ‘언학’의 ‘학(學)’은 주자학의 심오한 이치이거나 혹은 배움의 자세와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도산십이곡>은 현대의 서정시와 동렬에 놓거나, 아니면 그같은 시각으로 접근하면 작품의 본질을 훼손시키기 십상이다. 퇴계는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을 지어 독자에게 그 시세계를 밝혔다. 그는 시를 창작한 것이 아니다. 가곡(歌曲)의 노랫말을 지었다. 동방가곡(東方歌曲)의 주제가 대체로 음란하고 건전하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여겨서, 백성들이 남녀노소가 함께 불러도 좋을 건전가요를 보급시키고자 하는 의욕을 가졌다. 당시 가곡의 음란성은 물론이고 그 못지 않게 당대 현실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비판하는 주제의식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 했다. 따라서 퇴계는 당시의 대중가요인 세속의 음악을 듣는 것을 꺼렸다. <도산십이곡>을 완성한 후 아이들에게 익히게 하여 조석(朝夕)으로 노래부르게 했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울러 춤까지 추게 했다. <도산십이곡>은 이를 노래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 모두가 정서가 순화되고 원만한 심성을 작게 하는 가곡이며, 마음속에 쌓인 찌꺼기를 씻어내어 온유돈후(溫柔敦厚)의 경지로 이끄는 힘이 있다고 퇴계는 생각했다. <도산십이곡>에 대한 작자의 대단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동방가곡의 음란성과 <한림별곡(翰林別曲)>류의 교만방자함과 <이별육가>의 세상을 비아냥거리는 따위의 성격을 지닌 당시 속악(俗樂)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우리의 가곡을 속악으로 인식한 것은 아악(雅樂)을 염두에 든 시각이다. <도산십이곡>은 동양의 예악사상(禮樂思想)과 연결된 단가(短歌)의 가사(歌詞)이다. 퇴계는 조정(朝廷)의 아악이 아인 향당(鄕黨)의 가곡으로 <도산십이곡>이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했고, 또 그 기대가 십분 충족되었을 뿐 아니라 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영남(嶺南)의 가곡으로 되었으며, 아울러 남인계(南人系) 사인(士人)들의 대표적 가곡으로 발돋움했다. <도산십이곡>은 명종(明宗) 20년(1565) 퇴계의 나이 65세에 완성된 만년의 작품이다. 원숙의 경지에 이른 대석학의 심오한 학문과 고매한 인격이 고도의 미적 구도 속에 용해되어 있다. 퇴계는 전육곡(前六曲) 언지(言志) 기사(其四)에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自然)이 듣디됴해,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됴해, 이듕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욱 닛디 못하애”라고 노래했다. 퇴계의 은거지(隱居地) 도산은 은둔지(隱遁地)가 아니다. 임금님(彼美一人)을 그리워하는 인간(人間)의 연장선상이다. 깊은 산 속 숲 속의 난초는 자기를 보는 사람이 있던 없든 간에 그윽한 향기를 발한다. 남들이 주변에서 자신을 보아쥐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를 발하지 않은 법은 없다. 산마루를 넘나드는 흰 구름 역시 그렇게 있는 것이다. 심림(深林)의 난초와 산정(山頂)의 구름처럼 의연한 자세를 지닐 것을 당부하고 있다. 후육곡 기육(其六)의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롬과 한가지라, 하말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느그지 이슬고”에서 봄날 산을 뒤덮은 흐드러진 꽃들과 정대(亭臺)에 교교하게 비치는 달빛을 묘사하면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구가했다. 사계절의 가흥이 사람과 같다라고 노래한 구절은 정호(程顥, 1032-1085)의 시<추일(秋日)>의 “사계절의 흥취가 사람과 같다(四時佳興與人同)”와 거의 흡사하다. 물아일체(物我一體)는 흔히 서정자아가 강호(江湖)의 미경(美景)에 몰입하는 경지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강호에 존재하는 갖가지의 자연물 하나하나는 모두가 그들 나름의 흥(興)이 있다는 인식은 고대의 만물유령(萬物有靈)의 사유(思惟)와 관계가 았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와서 모든 자연물에 있다고 여겼던 ‘영혼’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다 성리학적 ‘이(理)와 ’흥취‘를 넣었다. 위에 인용한 단가에 등장하는 꽃과 고기 등의 자연물도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과 함께 대등하게 이(理)를 가졌거나 또는 흥취를 공유하는 경지가 바로 물아일체이다. 연못에 뛰노는 고기와 하늘을 나는 솔개 등은 사람의 종속물이 아니고 대등한 독립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외물인식(外物認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서양의 서정시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의 단가문학(時調)을 서양의 서정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학(言學)의 후육곡(後六曲) 기육(其六) “우부(愚夫)도 알며하니 긔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몯다하시니 긔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낫듕에 늙난주를 몰래라”에서 퇴계는 학문의 특성을 극명하게 밝혔다. “쉽고도 어려운 것이 학문이다”라는 속설(俗說)을 시로 형상하여, 스스로 어리석고 재주가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학문에 뜻을 두게 했다. 그러나 범부(凡夫)가 물색 없이 학문을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나대는 것을 막기 위해 성인(聖人)도 다하지 못할 만큼 광대무변함을 깨우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학문’을 제재로 하여 쓴 시가작품 중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도산십이곡>을 따라잡을 작품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근래에 분방한 감성을 노래한 작품들을 무리하게 추켜세우고, 단아(端雅)한 이성(理性)을 형상한 시가들을 지나치게 폄하한 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온유돈후(溫柔敦厚)한 품격(品格)으로 창작된 <도산십이곡>은 현대에서도 재평가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도산십이곡>은 한국의 시조, 즉 단가문학사(短歌文學史)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단가를 여흥(餘興)차원에서 격상시켜 정서 순화는 물론이고 진일보하여 교화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율곡(栗谷)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百姓)을 교화하고 이끌어 간다는 중세의 예악사상이 깔려 있다. 퇴계는 백성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건강한 민족가곡(民族歌曲)을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을 지녔다. <도산십이곡>은 이같은 퇴계의 악무인식(樂舞認識)을 바탕으로하여 창출되었다. 퇴계는 <도산십이곡> 발문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게했다(自歌而自舞)’라고 밝혔다. <도산십이곡>을 노래할 때 추었던 춤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세속에 유행하는 춤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도산십이곡>의 주제는 ‘지(志)’와 ‘학문’이다. 신바람 나는 정감도 아니고 이른바 남녀상열(男女相說)의 애정도 아니다. 이같이 딱딱한 주제를 형상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읽히고 있을 뿐 아니라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퇴계가 창작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작품으로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퇴계는 탁월한 미의식(美意識)을지녔다. 당시 범동양권의 주된 주제의식(主題意識)은 문이재도(文以載道)였다. 문학은 성리학적 도(道)를 형상해야 한다는 풍조는 조선조 사단(詞壇)의 주류였다. 이는 자칫 시가를 사변적인 도학의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이 뒤따른다. 퇴계는 이 같은 유가적 문예의식의 약점을 강호(江湖)의 미경(美景)을 매체로 활용하여 생경(生硬)에 흐를 소지를 제거했다. 성리학의 경우 퇴계는 주리론자(主理論者)이다. 그러므로 <도산십이곡> 역시 주리적 성정(性情)을 강호를 매개로 하여 형상한 단가로 규정할 수 있으며 조선조 시조문학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