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미황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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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명승 제59호
 
|지정번호 = 명승 제59호
 
|지정일 = 2009년 09월 18일  
 
|지정일 = 2009년 09월 18일  
|지정명칭 =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海南 達摩山 美黃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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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한자명칭 = 海南 美黃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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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칭 = 海南 達摩山 美黃寺 一圓
|영문명칭 = Mihwangsa temple in Haenam,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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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Mihwangsa Temple and Surroundings in Dalmasan Mountain, Haenam
 
|분류 = 자연유산/명승/역사문화명승
 
|분류 = 자연유산/명승/역사문화명승
 
|건립·제작 = 신라 경덕왕 8년(749년)
 
|건립·제작 = 신라 경덕왕 8년(7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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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수정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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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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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해남 대흥사|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br/>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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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947호인 대웅보전, 보물 1183호인 응진당과 명부전 등이 있다.<br/>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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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어둔 괘불(掛佛)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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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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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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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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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하였다고 하므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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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현종 1) 성간(省侃)이 3창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 뒤 고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이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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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殿)·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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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미황사 응진당(美黃寺應眞堂)이 보물 제1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598년 만선(萬善)이 신축하였으며, 1971년 주지 이하덕(李河德)이 일부 보수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 등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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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년에도 중수되었으며, 1982년의 수리 때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알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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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고,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어둔 괘불(掛佛)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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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堂)·송파(松坡)·금하(錦河)·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br/>
 
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堂)·송파(松坡)·금하(錦河)·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br/>
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 1634∼1692)이 세운 것으로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 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이 밖에 절 뒷산 사자봉에는 ‘토말(土末)’이라 쓰인 비석이 있어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나타내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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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 1634∼1692)이 세운 것으로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 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미황사의 내력을 기록한 비로 추정되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br/>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5118&cid=46648&categoryId=4664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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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절 뒷산 사자봉에는 ‘토말(土末)’이라 쓰인 비석이 있어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나타내고 있다.<br/>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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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스테이와 어린이 한문학당, 자원봉사 등의 프로그램을 일반인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매년 추수철이 되면 보물 제 1342호로 지정된 미황사 괘불을 중심으로 행사를 열기도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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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은 옥외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운반이 가능한 형태로 제작된 불화를 이르는데, 미황사 괘불은 특히 풍년과 비를 가져다주는 부처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믿음이 지금에까지 이어져 마을 주민들이 모여 1년간 농사지은 수확물들을 공양하고 서로 나누는 장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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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연말연초에는 해넘이 해맞이 행사를 여는 등 역사문화재이자 종교단체로서 지역주민, 외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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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5118&cid=46648&categoryId=4664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미황사'], [http://www.mihwangsa.com/ 미황사 공식 홈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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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82876, 126.577319, [[해남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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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출처: [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문화재청],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5118&cid=46648&categoryId=46648 민백 '미황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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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2일 (목) 07:42 기준 최신판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947호인 대웅보전, 보물 1183호인 응진당과 명부전 등이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어둔 괘불(掛佛)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 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堂)·송파(松坡)·금하(錦河)·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
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 1634∼1692)이 세운 것으로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 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미황사의 내력을 기록한 비로 추정되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 밖에 절 뒷산 사자봉에는 ‘토말(土末)’이라 쓰인 비석이 있어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나타내고 있다.

템플스테이와 어린이 한문학당, 자원봉사 등의 프로그램을 일반인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매년 추수철이 되면 보물 제 1342호로 지정된 미황사 괘불을 중심으로 행사를 열기도 한다.
괘불은 옥외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운반이 가능한 형태로 제작된 불화를 이르는데, 미황사 괘불은 특히 풍년과 비를 가져다주는 부처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믿음이 지금에까지 이어져 마을 주민들이 모여 1년간 농사지은 수확물들을 공양하고 서로 나누는 장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연말연초에는 해넘이 해맞이 행사를 여는 등 역사문화재이자 종교단체로서 지역주민, 외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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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전각 배치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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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미황사 관련 인물 의조(義照)
해남 미황사 관련 공간 달마산, 해남 대흥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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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주석

  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미황사', 미황사 공식 홈페이지
  2. 출처: 미황사 공식 홈페이지
  3. 출처: 문화재청, 민백 '미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