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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근대의 차 (차생활문화대전, 2012. 7. 10., 홍익재) | [네이버 지식백과] 근대의 차 (차생활문화대전, 2012. 7. 10., 홍익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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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에 와서 차(茶)는 전통문화라는 측면에서와 단순한 기호음료의 측면에서도 한층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차에 함유된 여러 성분이 분석되자 우리 차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다. 광복과 한국전쟁의 격동기가 지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1970년대에 들어와 민족문화의 재발견, 민족사관의 확립 등 우리 민족 본연의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전통다도의 계승발전을 위한 자생적인 운동이 전개되었다. 차인들은 차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1979년 창립), 재단법인 광주요다도문화연구회(1980년 창립), 사단법인 한국다도협회(1983년 창립)가 설립되어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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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사단법인 예지원과 재단법인 한국문화재보호협회에서도 다도강좌를 개설하여 많은 수강생을 배출하였다. 또한 1982년 7월 23일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전통차의 세미나 개최와 전통차 보급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통차 보급의 홍보 및 교육을 하고 있다. 다구(차구)의 대량생산 지원으로 다구(차구)가 시중에 많이 보급되어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다구(차구)로는 탕관, 다관, 찻숟가락, 찻잔, 찻잔받침, 표주박, 찻상, 찻쟁반, 차행주, 물항아리, 개숫물통 등이며 생활여건의 변화에 따라서 옛날의 풍로, 화로, 찻솥 등은 전열기, 탕수기, 보온병 등으로 현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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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지식백과] 현대차 [-茶] (차생활문화대전, 2012. 7. 10., 홍익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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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한국의 전통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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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1일 (화) 13:16 기준 최신판
근대의 차 문화
근대의 차 역사
근대는 문호를 개방하였던 1876년 이후를 말한다. 개화기에는 차나무재배의 기반조성을 위하여 차나무 시책으로 1883년 농상사(農商司)에서는 차나무의 재배에 관한 업무를 맡아 보았고 1885년에는 청국에서 차나무의 모종 6,000그루를 수입하였으며 1886년에는 청으로부터 차씨를 수입하였다. 그리고 1905년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는 차 재배와 가공법이 수록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각도에 배포하였다.
1905년 농상공부에서중추원(中樞阮)의 고문관의 발기에 의한 다화회(茶話會)가 성행되었다. 또한 여성계에서는 학무국장의 부인 윤고려(尹高麗)씨가 자택에 황족부인과 여성계 대표를 초청하는 다화회(茶話會)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1906년 4월 20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여흥학교의 개교식에서 다례가 거행되었다. 그러던 중 일제침략기에 차는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차 역사
한편 일제 강점기에도 장흥 보림사(寶林寺) 일대에서는 단차(團茶)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차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시장에서 팔렸으나 어느 사이엔가 사라졌다. 장흥지방에서는 이 차를 청태전(靑苔錢)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고형(固型)의 차는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불회사(佛會寺) 일대에서도 광복 직후까지 생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경상남도 화개(花開)에는 약시장(藥市場)이 열렸다고 하며 여러 약초 가운데 차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차는 조상대대로 우리의 생활 속에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차의 유통구조는 일본인이 장악하였다. 차의 생산기반인 차밭도 일본인이 경영하였다. 이 무렵 여자전문학교와 고등여학교에서는 일본의 말차에 의한 다도교육을 하게 되었다. 일본인이 실시한 다도교육의 목적은 일본으로의 동화를 위한 교육이라 보는 이가 많다. 1940년에는 전국 47개 여자고등학교의 상당수와 이화, 숙명여전 등에서 다도가 교습되었다.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심한 압박을 받아 차문화, 차생활이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차라고 하면 마치 일본인의 전유물인양 우리의 것을 완전히 빼앗아 버렸고 더욱이 광복이 되자 서구 문명이 물밀 듯 밀려오고 커피, 홍차 등의 서양차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차는 더욱 멀어진 것은 사실이다.
커피와 차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오군란 이후 서양의 갖가지 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1910년 전후 지금의 세종로에는 부래상(富來祥)이라고 하는 프랑스인이 나무시장을 열었는데 그는 항상 어깨에 보온병을 메고 다니다가 나무장수가 다가오면 인사를 하고 보온병 속의 가배차를 주었다고 한다. 나무장수들에게는 “양탕국”으로 불리었던 가배차는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마시고 있는 커피이다. 이 가배차 즉 커피는 황실에서도 애용되었다.
러시아 공사 위베르에 의해 궁중에 들어온 커피는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더욱 퍼져서 궁중의 다례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고종황제는 유난히 커피를 즐겼으며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국사를 의논하기도 하였는데 거의 습관성이었다고 한다. 어느 사이 우리의 전통 차는 외래의 커피에 밀려나서 차 대접이 커피 대접이요 차 마시는 다방이 커피 마시는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나 차생활의 가치와 멋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으나 사찰이나 일부 뜻있는 사람에 의하여 차문화가 면면히 유지되어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근대의 차 (차생활문화대전, 2012. 7. 10., 홍익재)
현대의 차 문화
현대에 와서 차(茶)는 전통문화라는 측면에서와 단순한 기호음료의 측면에서도 한층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차에 함유된 여러 성분이 분석되자 우리 차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다. 광복과 한국전쟁의 격동기가 지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1970년대에 들어와 민족문화의 재발견, 민족사관의 확립 등 우리 민족 본연의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전통다도의 계승발전을 위한 자생적인 운동이 전개되었다. 차인들은 차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1979년 창립), 재단법인 광주요다도문화연구회(1980년 창립), 사단법인 한국다도협회(1983년 창립)가 설립되어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그리고 사단법인 예지원과 재단법인 한국문화재보호협회에서도 다도강좌를 개설하여 많은 수강생을 배출하였다. 또한 1982년 7월 23일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전통차의 세미나 개최와 전통차 보급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통차 보급의 홍보 및 교육을 하고 있다. 다구(차구)의 대량생산 지원으로 다구(차구)가 시중에 많이 보급되어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다구(차구)로는 탕관, 다관, 찻숟가락, 찻잔, 찻잔받침, 표주박, 찻상, 찻쟁반, 차행주, 물항아리, 개숫물통 등이며 생활여건의 변화에 따라서 옛날의 풍로, 화로, 찻솥 등은 전열기, 탕수기, 보온병 등으로 현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대차 [-茶] (차생활문화대전, 2012. 7. 10., 홍익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