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식-8.15해방(2023-02실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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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순간을 그린 [ | +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순간을 그린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윤중식 윤중식]의 민족기록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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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그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 투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국민들이 지속적으로 투쟁해온 결과이다. 그림에서도 묘사되었듯이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지상 혹은 지하에서 활발하게 | + |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그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 투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국민들이 지속적으로 투쟁해온 결과이다. 그림에서도 묘사되었듯이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지상 혹은 지하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소재로서 작품 내에 여기저기 등장하는 태극기는 그 자체로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독립에 대한 염원이었다. 3.1운동 당시에는 많은 독립 투사들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몰래 태극기를 숨겨 놓고 있다가 발각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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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①②③ 푸른 논밭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농민들'''과 '''④⑤⑥⑦⑧⑨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차분하게 기쁨을 나누고 있는 지식인들'''의 대비이다. '''①②③⑥⑨ 흰 비둘기들'''은 분리되어 있는 두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①②③ 푸른 논밭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농민들'''과 '''④⑤⑥⑦⑧⑨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차분하게 기쁨을 나누고 있는 지식인들'''의 대비이다. '''①②③⑥⑨ 흰 비둘기들'''은 분리되어 있는 두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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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식(尹仲植, 1914∼2012): 서양화가.평양 출신.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을 역임. <br/> | 윤중식(尹仲植, 1914∼2012): 서양화가.평양 출신.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을 역임. <br/> | ||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하기 전인 1931년부터 수 차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하였고, 제국미술하교 재학 당시에는 일본의 중진 서양화가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가 주도하던 국화회(國畵會)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에 결성된 재동경미술협회전에 두 차례 출품하였다. 해방후에는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에는 홍익대학교 교수에 부임하여 1977년까지 재직하였다.<br/> |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하기 전인 1931년부터 수 차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하였고, 제국미술하교 재학 당시에는 일본의 중진 서양화가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가 주도하던 국화회(國畵會)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에 결성된 재동경미술협회전에 두 차례 출품하였다. 해방후에는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에는 홍익대학교 교수에 부임하여 1977년까지 재직하였다.<br/> | ||
− | 학습기 이후 일본 서양화단의 영향으로 야수파 경향이 강하여 단순한 형태에 강렬한 색채, 굵은 윤곽선 등이 특징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분단상황으로 인한 실향민으로서의 향수를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조형적인 순화과정을 보였다. 소재로는 비둘기와 같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된 예들과 저녁놀, 농촌풍경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1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윤중식</ref> | + | 학습기 이후 일본 서양화단의 영향으로 야수파 경향이 강하여 단순한 형태에 강렬한 색채, 굵은 윤곽선 등이 특징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분단상황으로 인한 실향민으로서의 향수를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조형적인 순화과정을 보였다. 소재로는 비둘기와 같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된 예들과 저녁놀, 농촌풍경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18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윤중식]</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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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일전쟁1.jpg|청일전쟁(1894~1895) | ||
+ | 청일전쟁2.jpg|청일전쟁(1894~1895) | ||
+ | 명성왕후1.jpg|일본의 명성황후 시해(1895. 10. 8) | ||
+ | 명성왕후2.jpg|명성황후 영정 | ||
+ | 러일전쟁1.jpg|일본과 중국이 조선을 유린하는 것을 경계하는 러시아 | ||
+ | 러일전쟁2.jpg|발틱함대의 이동 | ||
+ | 러일전쟁3.jpg|러일전쟁(1904~1905) | ||
+ | 오승윤-동학혁명(전봉준)-1976s.jpg|오승윤 「동학교주 전봉준」 1976 | ||
+ | 장이석-홍주성수복(민종식)-1975s.jpg|장리석 「홍주성수복」 1975 | ||
+ | 정창섭-태백산전투(신돌석)-1975s.jpg|정창섭 「태백산전투」 1975 | ||
+ | 손수광-민충정공순국(민영환)-1976s.jpg|손수광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1905. 11.) 1976 | ||
+ | 박기태-박성환순국(박성환)-1976s.jpg|박기태 「박승환의 자결순국」(1907. 8.) 1976 | ||
+ | 박영선-이등박문총살(안중근)-1976s.jpg|박영선 「이등박문을 총살하는 안중근의사」(1909. 10.) 1976 | ||
+ | 최대섭-독립선언-1976s.jpg|최대섭 「민족대표의 독립선언」(1919. 3.) 1976 | ||
+ | 문학진-삼일운동-1976s.jpg|문학진 「파고다공원의 3.1독립만세시위」(1919. 3.) 1976 | ||
+ | 손수광-청산리싸움(김좌진)-1975s.jpg|손수광 「청산리싸움」(靑山里戰鬪, 1920. 10.) 1975 | ||
+ | 임직순-봉오동전투(홍범도)-1976s.jpg|임직순 「홍범도장군의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20. 6.) 197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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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다른 작품== | ==작가의 다른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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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윤중식-전쟁드로잉_1951_1.jpg|전쟁드로잉(19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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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9일 (목) 11:23 기준 최신판
목차
작품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순간을 그린 윤중식의 민족기록화이다.
작품 소재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그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 투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국민들이 지속적으로 투쟁해온 결과이다. 그림에서도 묘사되었듯이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지상 혹은 지하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소재로서 작품 내에 여기저기 등장하는 태극기는 그 자체로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독립에 대한 염원이었다. 3.1운동 당시에는 많은 독립 투사들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몰래 태극기를 숨겨 놓고 있다가 발각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작품 구도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①②③ 푸른 논밭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농민들과 ④⑤⑥⑦⑧⑨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차분하게 기쁨을 나누고 있는 지식인들의 대비이다. ①②③⑥⑨ 흰 비둘기들은 분리되어 있는 두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작가
윤중식(尹仲植, 1914∼2012): 서양화가.평양 출신.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을 역임.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하기 전인 1931년부터 수 차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하였고, 제국미술하교 재학 당시에는 일본의 중진 서양화가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가 주도하던 국화회(國畵會)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에 결성된 재동경미술협회전에 두 차례 출품하였다. 해방후에는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에는 홍익대학교 교수에 부임하여 1977년까지 재직하였다.
학습기 이후 일본 서양화단의 영향으로 야수파 경향이 강하여 단순한 형태에 강렬한 색채, 굵은 윤곽선 등이 특징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분단상황으로 인한 실향민으로서의 향수를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조형적인 순화과정을 보였다. 소재로는 비둘기와 같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된 예들과 저녁놀, 농촌풍경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1]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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