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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은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일대는 산지 지형에 가까워 강의 흐름이 비교적 빠르며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조수가 밀려드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 때문에 오히려 물이 깊어서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고려 시대의 국도(國都)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였던 관계로 벽란도가 고려 유일의 국제 항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예성강(禮成江)이라는 이름은 고려에서 중국의 송나라와 교섭할 때 이곳에서 모든 배를 띄워 예절 있게 맞아들이고 다시 배웅했던 강이라 하여 붙여졌다. 고려 시대 송나라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을 때의 사실을 노래한 「예성강곡(禮成江曲)」도 있었다고 한다.<ref>김주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56 예성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br/> | 예성강은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일대는 산지 지형에 가까워 강의 흐름이 비교적 빠르며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조수가 밀려드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 때문에 오히려 물이 깊어서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고려 시대의 국도(國都)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였던 관계로 벽란도가 고려 유일의 국제 항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예성강(禮成江)이라는 이름은 고려에서 중국의 송나라와 교섭할 때 이곳에서 모든 배를 띄워 예절 있게 맞아들이고 다시 배웅했던 강이라 하여 붙여졌다. 고려 시대 송나라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을 때의 사실을 노래한 「예성강곡(禮成江曲)」도 있었다고 한다.<ref>김주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56 예성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br/> | ||
− | 예성강 하구의 번화한 나루(渡)였던 벽란도(碧瀾渡)는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까운 국제무역항으로 중국 송나라 상인을 비롯하여 일본, 남양, 서역의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또한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내항(內港)으로서도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꼭 들러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육로로 중국에서 오는 도로 끝에 있어 유동인구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 + | 예성강 하구의 번화한 나루(渡)였던 벽란도(碧瀾渡)는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까운 국제무역항으로 중국 송나라 상인을 비롯하여 일본, 남양, 서역의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또한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내항(內港)으로서도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꼭 들러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육로로 중국에서 오는 도로 끝에 있어 유동인구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가 있어 중국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거나 떠나기 전에는 이곳에서 묵었다. 벽란도의 원래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禮成港)이었다가 이 벽란정에서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바꾼 것이다.<br/><br/> |
− |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가 있어 중국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거나 떠나기 전에는 이곳에서 묵었다. 벽란도의 원래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禮成港)이었다가 이 벽란정에서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바꾼 것이다.<br/> | + | 고려의 화원(畵員) 이녕(李寧)은 1124년(인종 2) 추밀사 이자덕(李資德)을 따라 수행화원으로 북송에 갔다가 휘종(徽宗)의 요청으로 〈예성강도〉를 그려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ref>이혜은,"[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829 벽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녕의 실경산수화 〈예성강도〉는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전할 뿐 실물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예술에 뛰어났던 휘종의 인정을 받았던 점으로 미루어 그 수준이 매우 높았을 것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화풍은 화원들의 원체화풍(院體畫風) 수집과 진흥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휘종의 궁정취향과 연관지어 볼 때 사실적인 청록산수화풍(靑綠山水畫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와 함께 우리나라 실경산수화의 태동과 발전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f>홍선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7958 예성강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br/> |
− | 고려의 화원(畵員) 이녕(李寧)은 | + | 박성환의 〈예성강도〉는 박정희 정권 시기 민족기록화 '문화편'의 일환으로 1978년 300호(197x290.9cm)의 대형 편폭에 유화로 제작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배와 이국적인 복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나르거나 거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벽란도의 번화함을 평면적이고 장식적으로 표현했다.<ref>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ref>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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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0일 (수) 18:45 기준 최신판
작가
박성환(朴成煥): 1919~2001. 서양화가. 1919년 황해도 해주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지주였으며 부친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실업가였다. 1932년 해주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해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을 받았다. 해주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스승인 선우담은 그의 뛰어난 재능을 조기에 인식하고 미술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박성환은 1936년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전국학생미술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였으며,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계류」로 입선하였다. 193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그 후 분카학원에 진학하여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미술적 기량을 더욱 향상시켰다. 일본 유학 중 그는 다양한 스타일과 기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개방적인 태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는 인상주의에서 시작하여 사실주의와 추상주의 사이에서 다양한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박성환은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일본의 서양화계에서의 경력을 중단하고 고향 해주로 귀환했다. 1945년에 해주예술학교의 미술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년 뒤에는 해주미술학교를 창설하여 학교장으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생들에게 실제 인체 구조에 근거한 기초 데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북한 미술계는 공산당의 정치적 지배와 강한 통제 아래 있었으며, 리얼리즘 화풍이 강요되었다. 박성환은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도 실력을 증명하여 1946년 제1회 해방기념종합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지주 집안 출신의 박성환은 결국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1949년 월남하였다. 그는 육군본부 정경실에서 좌익 작가들의 우익 전환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국방부 소속의 종군화가단에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주로 전쟁화와 포스터, 삽화 등을 제작했는데 대부분의 작품이 군사적 주제의 사실주의적 스케치였다. 1954년에는 "6월 27일 미아리 방호전"이라는 대규모 작품으로 국방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전쟁의 현장감과 엄중한 무게감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종군화가로서의 경력은 그가 박정희 정권 시절 민족기록화가로 선정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후 대한미술협회 중앙위원 및 전국예총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 서라벌예술대학 창설교수로 취임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한국의 농촌 풍경과 농악을 소재로 하며, 형태를 단순화하고 두꺼운 물감층과 나이프를 사용하여 화면을 거칠게 표현했다. 박성환은 한국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가로서, 한국의 산천과 농촌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황토색의 다양한 톤을 탐구하고, 향토적 소재를 자유롭게 재조합했다. 그는 서양화와 동양화의 기법을 혼합하여 한국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농무 연작을 통해 농민의 흥과 신명을 생생한 에너지로 표현했다. 197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박성환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작품
예성강은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일대는 산지 지형에 가까워 강의 흐름이 비교적 빠르며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조수가 밀려드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 때문에 오히려 물이 깊어서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고려 시대의 국도(國都)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였던 관계로 벽란도가 고려 유일의 국제 항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예성강(禮成江)이라는 이름은 고려에서 중국의 송나라와 교섭할 때 이곳에서 모든 배를 띄워 예절 있게 맞아들이고 다시 배웅했던 강이라 하여 붙여졌다. 고려 시대 송나라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을 때의 사실을 노래한 「예성강곡(禮成江曲)」도 있었다고 한다.[1]
예성강 하구의 번화한 나루(渡)였던 벽란도(碧瀾渡)는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까운 국제무역항으로 중국 송나라 상인을 비롯하여 일본, 남양, 서역의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또한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내항(內港)으로서도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꼭 들러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육로로 중국에서 오는 도로 끝에 있어 유동인구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가 있어 중국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거나 떠나기 전에는 이곳에서 묵었다. 벽란도의 원래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禮成港)이었다가 이 벽란정에서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바꾼 것이다.
고려의 화원(畵員) 이녕(李寧)은 1124년(인종 2) 추밀사 이자덕(李資德)을 따라 수행화원으로 북송에 갔다가 휘종(徽宗)의 요청으로 〈예성강도〉를 그려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2] 이녕의 실경산수화 〈예성강도〉는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전할 뿐 실물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예술에 뛰어났던 휘종의 인정을 받았던 점으로 미루어 그 수준이 매우 높았을 것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화풍은 화원들의 원체화풍(院體畫風) 수집과 진흥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휘종의 궁정취향과 연관지어 볼 때 사실적인 청록산수화풍(靑綠山水畫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와 함께 우리나라 실경산수화의 태동과 발전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3]
박성환의 〈예성강도〉는 박정희 정권 시기 민족기록화 '문화편'의 일환으로 1978년 300호(197x290.9cm)의 대형 편폭에 유화로 제작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배와 이국적인 복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나르거나 거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벽란도의 번화함을 평면적이고 장식적으로 표현했다.[4]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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