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봉-구월산지구 유격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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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작가== | ||
− | 김서봉(金瑞鳳): 1930~2005. 현대 서양화가‧서예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52년 김응현(金膺顯) 등과 서예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 1957년 김창렬(金昌烈) 등과 현대미술가협회(現代美術家協會)를 창립. 1960년대까지 앙가주망‧사실적 자연주의 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 이후부터 한국의 산야(山野)‧풍치(風致) 등 동양의 멋과 정신이 담긴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970년부터 1989년까지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교수협의회장‧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조형예술협회 한국위원장‧남북문화교류협회 미술분과 위원장‧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0년 평안북도 문화상(예술부문),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4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 + | 김서봉(金瑞鳳): 1930~2005. 현대 서양화가‧서예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52년 김응현(金膺顯) 등과 서예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 1957년 김창렬(金昌烈) 등과 현대미술가협회(現代美術家協會)를 창립. 1960년대까지 앙가주망‧사실적 자연주의 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 이후부터 한국의 산야(山野)‧풍치(風致) 등 동양의 멋과 정신이 담긴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970년부터 1989년까지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교수협의회장‧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조형예술협회 한국위원장‧남북문화교류협회 미술분과 위원장‧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0년 평안북도 문화상(예술부문),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4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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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월산지구 유격대== | + | ==작품: 구월산지구 유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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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월산지구 유격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상대로 황해도 구월산에서 유격 활동을 벌인 무장세력을 일컫는다. 부대원을 잃고 남겨진 김종벽 대위가 1950년 12월에 조직한 '연풍유격대'를 모체로 보기도 하지만 구월산 지역 무장 활동의 배경에는 1950년 10월 신천·재령군에서 발생한 우익의 무장봉기 및 양민학살이 있다.<br/><br/> | ||
+ | 1998년 10월 정부기록보존소(국가기록원의 전신)에서 발견된 4권의 기록물에 따르면 구월산 유격대는 창설 당시 600명 정도의 규모였으며 한때 2500에 달했다.<ref>"[https://www.mk.co.kr/news/economy/1951048 6·25 구월산유격대 기록물 4권 발견]", 『매일경제』, 1998년 10월 02일.</ref> 구월산 부대는 후방 교란과 첩보 활동을 벌였으며, 서해지구, 초도, 석도, 웅도, 청양도, 상취라도, 하취라도, 피도, 능금도 등지에서 도서 방위와 공격 활동에도 나섰다. 이들은 1950년 12월부터 51년 10월까지 적 583명을 사살하고 323명을 생포했다. 황해도 일대 유격대들의 활동은 한국이 전략 요충지인 백령도를 지키는 데 기여했다.<ref>"[https://m.segye.com/view/20131201002598 구월산유격대], 『세계일보』, 2013년 12월 01일."</ref><br/><br/> | ||
+ | 한국전쟁 시기 구월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게릴라 활동에는 국군 장교 중심의 서사보다 더 다양한 행위 주체와 역사적 배경이 존재한다. 전쟁 전부터 황해도 신천군에는 북한의 토지개혁과 기독교 탄압에 반발한 우익 세력이 지하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의 징병을 피해 구월산으로 도피한 이들은 1950년 7월 유격대를 조직했다.<ref>조동환, 『항공의 불꽃』, 보문각, 1957, 89-97쪽.</ref> 1950년 10월 9일 재령의 권영화가 북한군 트럭을 습격하여 소련제 소총을 200여 정 노획하자, 우익 세력은 10월 14일 신천과 재령에서 봉기를 기획했다. 그러나 13일 안악과 재령의 조직이 인민군에게 사전 진압당했고, 이에 신천의 무장대는 13일 오후 9시에 봉기했다. 내무서 등 신천읍내 주요 행정부처를 장악한 우익 무장세력은 북한군에 의해 살해된 시신들을 발견하고 흥분하여 인민군, 노동당원 및 그 가족들을 학살했다. 신천의 우익 무장세력은 신천읍을 두고 북한군과 수차례 뺏고 빼앗기는 공방을 벌이다가 1950년 12월 21일 옹진을 통해 섬으로 철수했다.<br/><br/> | ||
+ | 약 2개월 간 벌어진 신천 지역 좌우익의 상호 학살 사건을 전후 북한은 미군이 주도한 것으로 선전했다. 북한 내부에 우익 무장봉기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보다 미군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2000년대 이후 민간인 학살 문제가 조명되기 전까지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반공 무장 투쟁을 부각시켜왔다.<br/><br/> | ||
+ | 김서봉이 1967년 완성한 〈구월산지구 유격대〉는 박정희 정권 시기 민족기록화 중 '전승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ref>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41쪽 각주67.</ref> 김서봉은 화면 왼편은 붉은 갈색, 오른편은 푸른 회색빛으로 표현함으로써 색채 대비를 통하여 남북의 대립구도를 나타냈다. 붉은색을 띠고 있는 부분에는 인민군이 그려져 있는 반면, 이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유격대원들은 푸른색으로 화면 오른쪽과 앞쪽에 그려져 영웅적인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한쪽에 적군, 다른 한쪽에 아군을 배치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전쟁화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 방법이다.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전시된 실제 작품과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제작과정을 기록한 사진을 비교하면 화면 오른쪽 유격대원 묘사 방식이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작 단계에서는 약간 움츠린 대원의 모습이 나타나는 반면, 실제 완성된 작품에서는 모두 결전의 의지로 가득차 있다.<ref>조기쁨, 「전쟁 주제의 민족기록화 특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46쪽.</ref> 〈구월산지구 유격대〉는 냉전 시기 남한 정부의 '구월산 반공 서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
==관련 자료== | ==관련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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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erences/> | ||
− | + | [[분류:전자문서와 하이퍼텍스트 2023]][[분류:이재열B]][[분류:민족기록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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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0일 (수) 18:42 기준 최신판
작가
김서봉(金瑞鳳): 1930~2005. 현대 서양화가‧서예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52년 김응현(金膺顯) 등과 서예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 1957년 김창렬(金昌烈) 등과 현대미술가협회(現代美術家協會)를 창립. 1960년대까지 앙가주망‧사실적 자연주의 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 이후부터 한국의 산야(山野)‧풍치(風致) 등 동양의 멋과 정신이 담긴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970년부터 1989년까지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교수협의회장‧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조형예술협회 한국위원장‧남북문화교류협회 미술분과 위원장‧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0년 평안북도 문화상(예술부문),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4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작품: 구월산지구 유격대
구월산지구 유격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상대로 황해도 구월산에서 유격 활동을 벌인 무장세력을 일컫는다. 부대원을 잃고 남겨진 김종벽 대위가 1950년 12월에 조직한 '연풍유격대'를 모체로 보기도 하지만 구월산 지역 무장 활동의 배경에는 1950년 10월 신천·재령군에서 발생한 우익의 무장봉기 및 양민학살이 있다.
1998년 10월 정부기록보존소(국가기록원의 전신)에서 발견된 4권의 기록물에 따르면 구월산 유격대는 창설 당시 600명 정도의 규모였으며 한때 2500에 달했다.[1] 구월산 부대는 후방 교란과 첩보 활동을 벌였으며, 서해지구, 초도, 석도, 웅도, 청양도, 상취라도, 하취라도, 피도, 능금도 등지에서 도서 방위와 공격 활동에도 나섰다. 이들은 1950년 12월부터 51년 10월까지 적 583명을 사살하고 323명을 생포했다. 황해도 일대 유격대들의 활동은 한국이 전략 요충지인 백령도를 지키는 데 기여했다.[2]
한국전쟁 시기 구월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게릴라 활동에는 국군 장교 중심의 서사보다 더 다양한 행위 주체와 역사적 배경이 존재한다. 전쟁 전부터 황해도 신천군에는 북한의 토지개혁과 기독교 탄압에 반발한 우익 세력이 지하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의 징병을 피해 구월산으로 도피한 이들은 1950년 7월 유격대를 조직했다.[3] 1950년 10월 9일 재령의 권영화가 북한군 트럭을 습격하여 소련제 소총을 200여 정 노획하자, 우익 세력은 10월 14일 신천과 재령에서 봉기를 기획했다. 그러나 13일 안악과 재령의 조직이 인민군에게 사전 진압당했고, 이에 신천의 무장대는 13일 오후 9시에 봉기했다. 내무서 등 신천읍내 주요 행정부처를 장악한 우익 무장세력은 북한군에 의해 살해된 시신들을 발견하고 흥분하여 인민군, 노동당원 및 그 가족들을 학살했다. 신천의 우익 무장세력은 신천읍을 두고 북한군과 수차례 뺏고 빼앗기는 공방을 벌이다가 1950년 12월 21일 옹진을 통해 섬으로 철수했다.
약 2개월 간 벌어진 신천 지역 좌우익의 상호 학살 사건을 전후 북한은 미군이 주도한 것으로 선전했다. 북한 내부에 우익 무장봉기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보다 미군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2000년대 이후 민간인 학살 문제가 조명되기 전까지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반공 무장 투쟁을 부각시켜왔다.
김서봉이 1967년 완성한 〈구월산지구 유격대〉는 박정희 정권 시기 민족기록화 중 '전승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4] 김서봉은 화면 왼편은 붉은 갈색, 오른편은 푸른 회색빛으로 표현함으로써 색채 대비를 통하여 남북의 대립구도를 나타냈다. 붉은색을 띠고 있는 부분에는 인민군이 그려져 있는 반면, 이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유격대원들은 푸른색으로 화면 오른쪽과 앞쪽에 그려져 영웅적인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한쪽에 적군, 다른 한쪽에 아군을 배치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전쟁화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 방법이다.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전시된 실제 작품과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제작과정을 기록한 사진을 비교하면 화면 오른쪽 유격대원 묘사 방식이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작 단계에서는 약간 움츠린 대원의 모습이 나타나는 반면, 실제 완성된 작품에서는 모두 결전의 의지로 가득차 있다.[5] 〈구월산지구 유격대〉는 냉전 시기 남한 정부의 '구월산 반공 서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