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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인물=== | ||
− | + |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 1506∼?)은 조선시대의 학자로 본관은 강릉, 자는 열지(說之), 호는 임경당(臨鏡堂)이다. 강릉김씨 임경당파의 파조(派祖)이고, 명주군왕의 24세손이다.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 세거하며 경사(經史)와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과거에 응시했다는 기록은 없고, 『강릉김씨천이백년사(江陵金氏千二百年史)』에 의하면 평강(平康)의 훈도(訓導)로 제수되었으나 처음부터 불사(不仕)하여 일생 동안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효친과 우애로 제가(濟家)하였다 한다. 형제가 한 마을에 살면서 우애가 깊었고 집 주위에 선대에서 심어놓은 소나무를 후손들이 함부로 손을 댈까봐 율곡(栗谷)에게 부탁하여 「호송설(護松說)」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김열은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나 주위에서 과거를 봐서 출사할 것을 권했으나, 효친과 우애로 평생을 일관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임경처사(臨鏡處士)라 불렀다고 한다. 1808년(순조 8)에 강릉향현사(江陵鄕賢祠)에 배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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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임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익공계 건물이다. 본채에서 떨어진 별당으로써 대청 우물마루와 굴뚝이 없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다듬은 돌 판석 세워쌓기를 2단으로 하였고 초석은 자연석으로 하였으며, 전면 4개는 두리기둥(30㎝)을 그 외는 각 기둥(21㎝)을 세워 1고주 5량집으로 결구하였다. 전체적으로 전면 7.5m, 측면 4.2m의 방형 평면 위에 다듬은 돌기단과 전면 두리기둥, 팔작 기와지붕이 어울려 소박한 미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 |
===의의=== | ===의의=== | ||
− | + |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김열의 호를 따서 지은 임경당은 그 후손들이 선대에서 심어놓은 소나무에 함부로 손을 댈까 두려워, 율곡(栗谷)에게 부탁하여 귀감으로 삼도록 글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고 이에 율곡이 호송설(護松說)을 지어주었다. 지금도 금산리 종가에서는 그의 호에서 연유한 임경당이라 쓴 누정이 있고, 또한 조선 후기 개인 건축물로써 그 가치가 인정되어 강원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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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 | +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362 임경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10월 7일 |
− | * | + | * '[https://www.gn.go.kr/www/contents.do?key=650 김열]', 강릉시청, 2022년 10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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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references/> |
2022년 10월 7일 (금) 18:22 기준 최신판
임경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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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6호 |
지정일 | 1974년 9월 9일 |
지정 명칭 | 임경당 |
한자 명칭 | 臨鏡堂 |
영문 명칭 | Imgyeongdang House |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
건립·제작 | 조선시대 16세기 |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소목길 18-26(금산리 445-1) |
위도 | 37.7399 |
경도 | 128.8515 |
웹사이트 | 문화재청[1] |
정의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 1506∼?)의 별당이다.
위치
내용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 1506∼?)의 별당이다.
개요
당호인 임경당은 김열의 아호이며, 마을 위쪽에 있는 상임경당(上臨鏡堂)과 구분하기 위해 하임경당(下臨鏡堂)이라고도 한다.
인물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 1506∼?)은 조선시대의 학자로 본관은 강릉, 자는 열지(說之), 호는 임경당(臨鏡堂)이다. 강릉김씨 임경당파의 파조(派祖)이고, 명주군왕의 24세손이다.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 세거하며 경사(經史)와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과거에 응시했다는 기록은 없고, 『강릉김씨천이백년사(江陵金氏千二百年史)』에 의하면 평강(平康)의 훈도(訓導)로 제수되었으나 처음부터 불사(不仕)하여 일생 동안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효친과 우애로 제가(濟家)하였다 한다. 형제가 한 마을에 살면서 우애가 깊었고 집 주위에 선대에서 심어놓은 소나무를 후손들이 함부로 손을 댈까봐 율곡(栗谷)에게 부탁하여 「호송설(護松說)」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김열은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나 주위에서 과거를 봐서 출사할 것을 권했으나, 효친과 우애로 평생을 일관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임경처사(臨鏡處士)라 불렀다고 한다. 1808년(순조 8)에 강릉향현사(江陵鄕賢祠)에 배향되었다.
건물
임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익공계 건물이다. 본채에서 떨어진 별당으로써 대청 우물마루와 굴뚝이 없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다듬은 돌 판석 세워쌓기를 2단으로 하였고 초석은 자연석으로 하였으며, 전면 4개는 두리기둥(30㎝)을 그 외는 각 기둥(21㎝)을 세워 1고주 5량집으로 결구하였다. 전체적으로 전면 7.5m, 측면 4.2m의 방형 평면 위에 다듬은 돌기단과 전면 두리기둥, 팔작 기와지붕이 어울려 소박한 미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의의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김열의 호를 따서 지은 임경당은 그 후손들이 선대에서 심어놓은 소나무에 함부로 손을 댈까 두려워, 율곡(栗谷)에게 부탁하여 귀감으로 삼도록 글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고 이에 율곡이 호송설(護松說)을 지어주었다. 지금도 금산리 종가에서는 그의 호에서 연유한 임경당이라 쓴 누정이 있고, 또한 조선 후기 개인 건축물로써 그 가치가 인정되어 강원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