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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의 여각(閭閣)은 현재 강릉시 노암동 병무청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발문(跋文)을 짓고, 양사언이 썼다. 또한 '삼세사효지각(三世四孝之閣)'이란 서액(書額)은 추사(秋史)가 썼다. | 김담의 여각(閭閣)은 현재 강릉시 노암동 병무청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발문(跋文)을 짓고, 양사언이 썼다. 또한 '삼세사효지각(三世四孝之閣)'이란 서액(書額)은 추사(秋史)가 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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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3일 (월) 00:58 기준 최신판
김담(金譚) | |
대표명칭 | 김담 |
---|---|
한자표기 | 金譚 |
출생일 | 1522 |
사망일 | 1605 |
본관 | 강릉(江陵) |
호 | 보진재(葆眞齋)·진재(眞齋) |
자 | 담지(譚之)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없음(벼슬 사양) |
부 | 낭장(郎將) 김광복(金光輻) |
모 | 삼척심씨 군수(郡守) 심희전(沈希佺)의 딸 |
자녀 | 아들 경황(景滉)·경시(景時) |
김담(金譚, 1522 ~ 1605)은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문신이다.
생애
1539년(중종 34) 18세의 나이로 낭해(郞解)에 뽑혀 예위(禮圍)에 갔을 때 중국인 골상가(骨相家)가 관상을 보고 이르기를 "골상(骨相)은 귀인의 형상이나 벼슬길에 나아가 귀하게 되면 명이 길지 못할 상이라" 하여 이에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부모 봉양에 일관하였다.
효자로서 병이 든 부친의 똥을 맛보거나, 부친의 명을 극진히 여겨 북두칠성에 매일 기도를 올렸고,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제상(祭床)에 올린 술잔이 저절로 말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담의 아들인 경황(景滉)과 경시(景時) 역시 효자로 유명하였는데, 김담이 여묘살이 도중 하도 울어 눈에서 피를 흘리고 눈이 멀게 되자 약을 구하기 위해 성심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허공에서 3년 묵은 된장을 3말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이 들려오자 고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된장을 가져와 얼마 되지 않아 된장 1석이 모였다고 한다. 된장을 먹은 김담은 눈병을 치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사가 충효로 관찰사에 추천하여 여러 번 상직(賞職)을 내렸으나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사양하였고, 강릉부사 양사언(楊士彦)의 천거 역시 마다하였다. 이후 진부면과 대화현에 가뭄 등으로 민심이 나빠지자 양사언의 청으로 진부면과 대화현에서 판관(判官) 일을 섭행하였는데, 이후 재액이 줄어들어 양사언은 김담의 효심을 다시 한번 칭찬하였다.
김담과 그의 아들 경황, 경시, 손자 한(垾)이 모두 효행하여 '3세 4효의 가문'이라 불렸다.
여담
김담의 여각(閭閣)은 현재 강릉시 노암동 병무청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발문(跋文)을 짓고, 양사언이 썼다. 또한 '삼세사효지각(三世四孝之閣)'이란 서액(書額)은 추사(秋史)가 썼다.
이러한 효성을 널리 인정받아 김담은 강릉 12향현의 한 명으로서 강릉 향현사(江陵鄕賢祠)에 1759년 추향되었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