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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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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우백호, 인왕산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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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양팔, 산으로 설전을 벌이다
  
 
==Synopsis==
 
==Synopsis==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인왕산은 예로부터 조선시대 한양인들도 조선의 우백호라 부르며 즐겨 찾는 장소였다.<ref>1968년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1.21 사태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다시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ref> 맑은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수성동(水聲洞), 산수의 풍광도 빼어나지만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별장으로 충절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이 된 청풍계(淸風溪), <ref>애초의 이름은 ‘푸른 단풍나무이 우거진 골짜기’라는 뜻의 ‘청풍계’(靑楓溪) 였으나, 김상용이 이 곳에 별장을 꾸민 이후 선조가 ‘맑은 바람’, ‘충절’이라는 뜻이 담긴 청풍계(淸風溪)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그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강화도에서 자결했고,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거부했다. 이것으로 인조는 훗날 김상용을 충신으로 인정하며 장동김씨의 가세는 강해졌고, 덕분에 청풍계는 서인과 노론의 성지가 되었다. </ref>,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터이자 봄날 꽃 구경의 명소로 기록된 필운대(弼雲臺) 등 인왕산에는 수많은 명소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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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이 조선의 우백호가 된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정궁의 위치를 정할 때 태조의 양팔인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설전을 벌인 것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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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을 세우고 동향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한데 반해, 정도전은 백악산(白岳,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으로 정궁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ref>「사실(事實),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ref>
  
현실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진경산수화를 통하여 한양인들이 사랑한 명소를 살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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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은 백악을 등지고 남향을 바라보게 되었고, 북악산은 주산(主山), 남산(南山)은 안산(案山), 낙산(駱山)은 좌청룡(左靑龍), 그리고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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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궁이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자, 무학대사는 “신라(新羅)의 고승 의상대사가 지은 《산수비기(山水祕記)》를 보면 도읍을 선택하는 자가 만일 중의 말을 믿게 되면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고, 정가(鄭哥) 사람이 나와 시비를 하게 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00년이 못 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 것이니 조심조심 하라.” 고 하였다. <ref>「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대동야승(大東野乘)』</ref> 무학대사의 주장을 일정부분 받아들여 경복궁을 지을 때 무학대사의 의견을 반영하여 궁궐의 화기를 막기 위해 정문에 돌로 만든 해태상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동으로 만든 용을 넣어두었다. 그러나 과연 ‘5대 후의 자리다툼’은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의 왕위찬탈(1453년)이 일어났고, 1592년‘200년 후의 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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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주장은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라는 유학의 이념과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ref> 「경도(京都)」,『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ref> 이외에도 정도전은 유학을 대표하는 경서 중  『주례(周禮)』의 원리인 ‘左廟右社 面朝後市(좌묘우사, 면조후시)’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4가 자리에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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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도전은 궁궐의 주요 건물 하나하나에 유교적 이념과 민본주의 의지를 새겨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란 이름은 유학의 삼경(三經) 중 하나인 『시경(詩經)』의 ‘기취(旣醉 : 이미 술에 취하다)’라는 시의 구절 중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곧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네. 군자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에서 뜻을 취하고 글자를 따와 경복궁(景福宮)이라고 하였다. <ref>태조4년 1395년 10월 7일, 『태조실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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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궁궐의 위치 및 이름 등 한양의 건설은 유학의 사상과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Storytelling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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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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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2일 (목) 09:1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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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태조 이성계의 양팔, 산으로 설전을 벌이다

Synopsis

인왕산이 조선의 우백호가 된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정궁의 위치를 정할 때 태조의 양팔인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설전을 벌인 것과 관련이 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을 세우고 동향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한데 반해, 정도전은 백악산(白岳,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으로 정궁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은 백악을 등지고 남향을 바라보게 되었고, 북악산은 주산(主山), 남산(南山)은 안산(案山), 낙산(駱山)은 좌청룡(左靑龍), 그리고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가 되었다.

정궁이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자, 무학대사는 “신라(新羅)의 고승 의상대사가 지은 《산수비기(山水祕記)》를 보면 도읍을 선택하는 자가 만일 중의 말을 믿게 되면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고, 정가(鄭哥) 사람이 나와 시비를 하게 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00년이 못 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 것이니 조심조심 하라.” 고 하였다. [2] 무학대사의 주장을 일정부분 받아들여 경복궁을 지을 때 무학대사의 의견을 반영하여 궁궐의 화기를 막기 위해 정문에 돌로 만든 해태상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동으로 만든 용을 넣어두었다. 그러나 과연 ‘5대 후의 자리다툼’은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의 왕위찬탈(1453년)이 일어났고, 1592년‘200년 후의 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정도전의 주장은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라는 유학의 이념과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3] 이외에도 정도전은 유학을 대표하는 경서 중 『주례(周禮)』의 원리인 ‘左廟右社 面朝後市(좌묘우사, 면조후시)’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4가 자리에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또한 정도전은 궁궐의 주요 건물 하나하나에 유교적 이념과 민본주의 의지를 새겨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란 이름은 유학의 삼경(三經) 중 하나인 『시경(詩經)』의 ‘기취(旣醉 : 이미 술에 취하다)’라는 시의 구절 중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곧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네. 군자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에서 뜻을 취하고 글자를 따와 경복궁(景福宮)이라고 하였다. [4]

이처럼 궁궐의 위치 및 이름 등 한양의 건설은 유학의 사상과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Storytelling Network


주석

  1. 「사실(事實)」,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2.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대동야승(大東野乘)』
  3. 「경도(京都)」,『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
  4. 태조4년 1395년 10월 7일, 『태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