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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26.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br /> | *2019.3.26.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br /> | ||
*2016.3.2~2016.12.31 동국대학교 사학과 71대 학생회 집행부 | *2016.3.2~2016.12.31 동국대학교 사학과 71대 학생회 집행부 | ||
===좋아하는 것=== | ===좋아하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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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 十四日,漂大洋中,是日晴,哺時,漂至一島,東西南三面,一望無際,唯可避北風處,顧以無為憂,初發濟州時,舟甚大無載物,故輸若干石塊于舟中,使不撓動,至是,尚理等以較索纏其石四齒,合為假碇以留泊焉,安義與軍人等相與言,使之聞之於臣曰:“此行所以至於漂死者,我知之矣,自古以來,凡往濟州者, | + | *원문: 十四日,漂大洋中,是日晴,哺時,漂至一島,東西南三面,一望無際,唯可避北風處,顧以無為憂,初發濟州時,舟甚大無載物,故輸若干石塊于舟中,使不撓動,至是,尚理等以較索纏其石四齒,合為假碇以留泊焉,安義與軍人等相與言,使之聞之於臣曰:“此行所以至於漂死者,我知之矣,自古以來,凡往濟州者,皆祭於[https://encrypted-tbn0.gstatic.com/images?q=tbn%3AANd9GcQz7Zc97SbYPir7la2aN3jebLbjey5BtefEDrDVX8ROwJvy0WMJ&usqp=CAU 光州無等山]祠及[https://www.namdotimes.co.kr/data/photos/201804/869_596_1949.jpg 羅州錦城山][[https://koya-culture.com/mobile/article.html?no=121406] 洞,自濟州出陸者,又皆祭於廣壤、遮歸、川外、楚春等詞,然後行,故受神之枯,利涉大海,今此敬差官特大言非之,來不祭無等、錦城之祠,去不祭廣壤諸洞,慢神不敬,神亦不恤,使至此極,尚誰給哉?”軍人和之,咸臣,權松獨曰:“不然,前此李准義暹,三日致齋,精祀廣壤等神,亦至漂流,幾復甦,[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826 權敬差官]景帖,俱不致祭,尚且往來快順,亡些子差,則過海便否,在於待風之如何耳,__關於神之祭不祭哉?”臣亦稱之曰:“天地無私,鬼神默運,福善禍,唯其公耳,人有惡者,論事以微福,則其可福之乎?人有善者,不惑邪說,不為顯祭,則其可稱之乎?會謂天地鬼神為語事飲食,而降禍福於人乎?萬萬無此 |
p.362 理也,况祭有常等,士庶人祭山川,非禮也,非禮之祭,乃谣也,溶以獲福者,我未之見也.爾濟州人,酷好鬼神,山澤川敷,俱設神祠,至如廣壤等堂,朝夕敬詞,靡所不至,其於涉海,宜無漂沈之患,然而今日某船漂,明日某船沈,漂沈之船,前後相望,是果神有靈應歇?祭能受福欺?况今我同舟人不祭者,唯我一人耳,爾軍人皆誠心齋祭而來,神若有靈,豈以我一人不祭之故,廢爾四十餘人齊祭之誠也?我之漂船,專是行李顛倒,不善候風之所致,反以廢祭尤我,不亦惑乎?”安義等猶以臣言為迂闊不以為是. | p.362 理也,况祭有常等,士庶人祭山川,非禮也,非禮之祭,乃谣也,溶以獲福者,我未之見也.爾濟州人,酷好鬼神,山澤川敷,俱設神祠,至如廣壤等堂,朝夕敬詞,靡所不至,其於涉海,宜無漂沈之患,然而今日某船漂,明日某船沈,漂沈之船,前後相望,是果神有靈應歇?祭能受福欺?况今我同舟人不祭者,唯我一人耳,爾軍人皆誠心齋祭而來,神若有靈,豈以我一人不祭之故,廢爾四十餘人齊祭之誠也?我之漂船,專是行李顛倒,不善候風之所致,反以廢祭尤我,不亦惑乎?”安義等猶以臣言為迂闊不以為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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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Ui and the others seem to consider what I said irrelevant and wrong. | An Ui and the others seem to consider what I said irrelevant and wr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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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十五日, 漂大洋中, 是日陰, 海色赤而濁, 東風復起, 又順風指舵于西,舟中人若朴從迴、萬山、李山等,有疾病不堪事;高保終、梁達海、高迴、金朝迴、任山海等,自漂海以至是日,臥不起動,雖督之以(露)取「露]等事,聽之藐藐;鄭實、夫同、金得時、姜有、宋真、金粟、姜內、吳山、高內乙同等,十喚一應,或有不得已而從事者;肯斤寶、金怪山、高福、金松、金石貴、李孝台、金真山等,或畫勤夜食,或始勤終息;許尚理、權山、金高面、金仇迴、崔巨伊山、金都終、高以福、文迴、玄山、韓每山、權松、莫金等,畫夜不息,以運船為己任;程保、金重、李植、孫孝子、李孝枝、安義等,或親自服役,或檢督治船,以期完事,自遇賊復漂以後,人皆無意於生,漸不如前,丹為暴濤所擊,為日已久,百孔千瘤,旋塞旋缺,蹲漏有水,將不勝,臣曰:漏水若此,舟人之解體又若此, | *원문:十五日, 漂大洋中, 是日陰, 海色赤而濁, 東風復起, 又順風指舵于西,舟中人若朴從迴、萬山、李山等,有疾病不堪事;高保終、梁達海、高迴、金朝迴、任山海等,自漂海以至是日,臥不起動,雖督之以(露)取「露]等事,聽之藐藐;鄭實、夫同、金得時、姜有、宋真、金粟、姜內、吳山、高內乙同等,十喚一應,或有不得已而從事者;肯斤寶、金怪山、高福、金松、金石貴、李孝台、金真山等,或畫勤夜食,或始勤終息;許尚理、權山、金高面、金仇迴、崔巨伊山、金都終、高以福、文迴、玄山、韓每山、權松、莫金等,畫夜不息,以運船為己任;程保、金重、李植、孫孝子、李孝枝、安義等,或親自服役,或檢督治船,以期完事,自遇賊復漂以後,人皆無意於生,漸不如前,丹為暴濤所擊,為日已久,百孔千瘤,旋塞旋缺,蹲漏有水,將不勝,臣曰:漏水若此,舟人之解體又若此, |
2020년 6월 22일 (월) 07:58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학력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 청주대성고등학교 졸업
경력
- 2020.3.16~ 동국대학교 사학과 비상대책위원회 4학년 임시 과대표
- 2019.3.26.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 2016.3.2~2016.12.31 동국대학교 사학과 71대 학생회 집행부
좋아하는 것
라디오, 음악 듣기, 마블, 전시관람, 공연, 료리
수업/김덕영
디지털큐레이션 기획
백제 기와분류
한국의 미륵신앙
마이클 조던:Road to GOAT
프라하의 묘지
가야 특별전:칼과현
최부의 표해록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교수님최원재
기말고사 대체과제
1월 8일
자세한 내용은 1월 8일로
1월 9일
자세한 내용은 1월 9일로
1월 10일
자세한 내용은 1월 10일로
1월 11일
자세한 내용은 1월 11일로
1월 12일
- 원문:十二日,遇贼于寧波府界,是日,午陰乍雨,海色還白,哺,至巨島,連綿如屏,望有中船二艘,皆帶懸居,直指臣船而來,程保等羅跪臣前,曰:“凡事有經有權,請解喪服,權着紗帽團領,以示官人之儀,不然則彼必哄我為劫賊,加以修辱矣.”臣曰:“漂流海上,天也,屢經死地而復生,天也,到此島而遇此船,亦天也,天理本直,安可違天以行詐乎?”俄頃,二船漸近相值,一船可十餘人,人皆穿黑橘榜芒鞋,有以手帕裏頭者,有着竹葉笠棕皮囊者,喧麼叫噪,渾是漢語,臣度其乃是中國人,全程保書紙以遺曰:“朝鮮國臣崔溥奉王命,往海島,奔父喪過海,遇風漂到,不知是何國邑地也?”
其人復曰:“此乃大唐國浙江寧波府地方,”又曰:“要到本國去,润到大唐好.”程保以手指其口,其人以陸水二桶來遺,掉丹東去,臣令人嚮入一島以依,又有一艘亦帶懸居,有軍人可七八人,其衣服語音,亦與前所見同.來逆臣船,曰:“你是何國人?”臣又使程保答如前,因問曰:“此何國?”其人指其島,曰:“此即大唐寧波府地下山也,風水好,二日可回去,”臣又復:“他國人遭風萬死之餘,幸到大國之境,喜得復生之地,又問渠姓名謂誰,其人答曰:“我是大唐林大,你若大唐去,帶你進去,你有寶貨,可遺我:”臣答日:“僕奉使臣,非商賈者流,且漂流浮沈之後,安有寶貨乎?”即减米粮以之,其人受而復曰:“此山繫船,不怕西北風,但南風不好,隨我繫船,”引臣船指一泊舟島,曰:“此可泊可泊,”臣如其言,即往泊之,果無風風,環島中可藏船處也,其西岸有二草屋,如鮑作于家者,其人等泊舟于屋下,臣之同舟人,久久渴久勞久不寝寐之極,得食以食,得風定處以泊,困億支贏,相與 枕藉乎舟中,夜二更,所謂自稱林大者,率其黨二十餘人,或執鎗或帶刀而無弓箭,秉炬擁至,闖入臣船,賊魁書曰:“我是觀音佛,你有金銀,便須看,”臣答曰:“金銀非本國所產,初無有賣,”賊魁曰:“你若官人,豈不費來?
我當看看,”初臣及程保、李植、金重、孝子等,以濟州海外地,往來無期,具四節衣服數套而往,至是賊魁即叫其黨,窮搜臣及陪吏等包中衣裝、舟人糧物,輸載其船,其所遺者,若衣之濃沾鹹水者及諸般書册而已,賊中
p. 360 __一目者,惡之尤甚,程保謂臣曰:“賊之始至,示若從容,見我勢弱,剛成大賊,請一奮擊,以決死生:”臣曰:“我舟人皆以飢渴垂死之後,奪氣於賊,故賊乘勢肆暴,若與相搏,則我輩皆死於賊手,莫如盡付行李,以乞生活耳,” 賊魁又奪臣所賣印信、馬牌,納之懷袖,程保尾其後請還不得,臣曰:“船中有物,可盡取去,印與馬牌,乃國之信,私無可用,可還我.”賊魁以印牌還.繼出篷,與其黨列立船舷,喧嚣良久,旋入舟中,先脱程保衣榜,細而枚之,次以研刀,截臣衣紐,赤身脫,背手曲脚以綁之,以杖杖臣左臂七八下,曰:“你若愛生,便出金銀,”臣大號曰:“身可彎骨可碎,何所得金銀乎?”
賊不曉臣言,解臣轉,許以寫意,臣即寫之,贼魁怒,嗔目張喙,指程保而叫,指臣而叫,即更臣頭髮,還轉倒懸,荷刀指臣頸斷之,刀遍誤下右肩偶,刃舔在上,賊又荷刀將斬臣,有一賊來把荷刀之臂以泪之,賊黨齊聲大叫,莫知所謂,是時,舟人喘惧失常,奔竄無地,唯金重、巨伊山等,攤手拜跪,冀活臣命,俄而,賊魁蹂躏臣身,喝嚇人,引其黨而出,截去臣船牆諸緣,投諸海,遂以其船導緯臣船,指放大洋,然後乘其船遁去,夜已蘭矣.
- 국역: 영파부(寧波府)[1][2] [3] [4]에서 해적 [5] [6] [7] [8] [9]을 만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다가 비가 오기도 하더니, 바다 빛깔이 도로 희게 되었습니다.
해질 무렵에 큰 섬에 이르렀는데, 섬이 병풍처럼 잇닿아 있었습니다.
바라보니 중선(中船) 두 척이 모두 거룻배를 매달고서 신의 배를 향하여 똑바로 왔습니다.
정보 등이 신의 앞에 빙 둘러 꿇어앉아 말하기를, “무릇 일에는 경상(經常)도 있고 권변(權變)[10]도 있는 것이니, 청컨대 상복[11]을 벗고[12] 임시로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착용하여 관인(官人)의 위의(威儀)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도적이라고 떠들어 대며 욕을 보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해상에서 표류하게 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여러 번 사지(死地)를 거쳤지만 다시 살아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이 섬에 도착하여 이 배를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다. 천리(天理)는 본래 곧은 법인데, 어찌 천리를 어기면서 거짓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두 배가 점차 가까워져서 서로 만났습니다. 한 배에 약 10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모두 검은 솜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그중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 맨 사람도 있었고, 대나무 잎으로 만든 삿갓과 종려(綜) 껍질로 만든 도롱이를 입은 사람도 있었는데, 요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모조리 중국말이었습니다. 신은 그들이 중국 사람인 줄 짐작하고 정보를 시켜서 종이에 글을 써서 건네기를, 조선국(朝鮮國)의 신(臣) 최부는 왕명을 받들고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바다를 건너가던 도중,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어느 나라 고을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회답하기를, “이곳은 곧 대당국(大唐國)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13] 지방이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대당(大唐)으로 가는 것이 좋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의 입을 가리켜 보이니, 그 사람들은 먹을 물 두 통을 가지고 와서 주고는 노를 저어 동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신은 배 안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노를 저어 한 섬에 들어가서 대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배 한 척도 거룻배를 달고 있고 군인 7-8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앞에 보았던 자들과 같았습니다.
신의 배에 다가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또 정보에게 전과 같이 대답하게 하고는 이어서 물어보기를, “이곳은 어느 나라 땅이오?”라고 하니,
그 사람은 그 섬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곧 대당(大唐) 영파부의 하산(下山)[14]이오. 바람과 물길이 좋으면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타국 사람이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다행스럽게 대국(大國)의 땅에 이르러 다시 살아날 길을 얻게 되어 기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의 성명이 누군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대당의 임대(林大)요. 당신이 만약 대당으로 간다면 데리고 갈 터이니 보화(寶貨)가 있으면 내게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봉명사신(奉命使臣)5이지 장사하는 무리가 아니며 또 바다에 표류하여 물에 떴다 가라앉았다 한 뒤인데 어떻게 보화가 있겠소?”라고 하고, 쌀을 덜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받고 나서 다시 말하기를, “이 산은 배를 매기에 서북풍은 걱정되지 않지만, 다만 남풍이 좋지 않으니 나를 따라와 배를 매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배를 인도하더니 배 댈 만한 섬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댈 만하오, 댈 만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말대로 곧 가서 배를 대었는데 과연 바람이 없었으며, 온 섬 안을 둘러보아 배를 매어 둘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 서쪽의 물가에는 초가집 두 채가 있었는데 보자기의 집 같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초가집 아래에 매었습니다.
신과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은 오랫동안 굶주리고 목말랐으며 지치고 잠자지 못한 끝에 먹을 것을 먹게 되고 바람 잔 곳에 배를 대자 피로가 몰려들어 사지가 풀려서 배 안에서 서로를 베개 삼아 이내 곯아 떨어졌습니다.
밤 2경에 자칭 임대(林大)란 자가 그 무리 20여 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창을 쥔 자도 있고 칼을 찬 자도 있었지만 활과 화살은 없이 횃불을 잡고 들이닥쳐 신의 배 안으로 마구 들이닥쳤습니다.
해적의 괴수가 글로 써 보이기를, "나는 관음불(觀音佛)이라 네 마음을 뚫어본다. 네가 금은을 가지고 있으니 찾아보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금은은 본국에서 생산되지 않아서 처음부터 가져온 것이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벼슬아치라면 어찌 금은을 가지고 오지 않았겠는가? 내가 찾아보아야겠다.”
당초 신 및 정보, 이정, 김중, 손효자 등은, 제주도는 바다 밖의 땅이라 갔다 오는데 기약할 수 없다고 해서 사철 의복 몇 벌을 갖추어 갔습니다.
이 때 와서 해적의 괴수는 곧 그 무리들을 큰 소리로 불러서 신 및 배리(陪吏)들의 보자기 속에 있는 의류와 뱃사람의 양식 등을 샅샅이 뒤져 가지고 가 그들의 배에 실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것은 바닷물에 흠뻑 젖은 옷과 여러 종류의 서책(書冊)뿐이었습니다.
해적 가운데 애꾸눈인 자가 특히 악독하였습니다.
정보가 신에게 말하기를,“해적이 처음 이르렀을 적에는 얌전하였는데, 우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더니 차츰 날강도로 변하였습니다.
청컨대 한 번 온 힘을 다하여 공격하여 사생결단을 내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리 일행은 모두 굶주리고 목말라 거의 죽게 된 뒤이라 해적에게 기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한 형세를 이용하여 포악한 짓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우리들은 모두 해적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행장을 모조리 주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비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의 괴수가 또 신이 가졌던 인신(印信)과 마패를 빼앗아 그의 소매 속에 넣었습니다.
정보가 그 뒤를 따라가서 돌려주기를 청했으나 받지 못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배 안에 있는 물건은 죄다 가져 가도 되지만, 인신과 마패는 나라의 신표(信標)라 사사로이 쓸 곳이 없으니 나에게 돌려주면 좋겠소”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의 괴수는 인신과 마패를 돌려주었습니다.
봉창(蓬窓)을 나서더니, 그 무리들과 뱃전에 죽 늘어서서 한참 동안 떠들다가 배 안으로 도로 들어왔습니다.
먼저 정보의 웃옷과 바지를 벗기고 묶어놓고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 칼로 신의 옷고름을 끊고 옷을 벗겨서 알몸을 만든 뒤, 손을 뒤로 젖히고 무릎을 굽혀 결박하더니, 몽둥이를 가지고 신의 왼팔을 일곱 여덟 차례 때리고 난 뒤에 말하기를, “네가 만약 목숨이 아깝다면 얼른 금은을 내 놓아라”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몸뚱이가 문드러지고 뼈가 가루가 될지라도 어디에서 금은을 가져온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은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므로, 신의 결박을 풀어주고는 그 의미를 글로 쓰게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썼더니 해적의 괴수는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정보를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신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나서 곧 신의 머리채를 끌어당겨 도로 묶어 거꾸로 매달고는 칼을 메고 신의 목을 베려고 하였지만, 칼을 마침 오른쪽 어깨로 잘못 내렸고 칼날이 뒤집혀져 있었습니다.
다시 칼을 메고 신의 목을 베려고 할 때 한 해적이 와서 칼을 멘 자의 팔을 잡아 이를 저지시켰습니다.
해적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 크게 떠들어 댔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뱃사람들은 두려워 제정신을 잃고 쥐새끼처럼 구석구석 숨어버렸습니다.
김중과 최거이산 등만은 손을 모아 절하고 꿇어앉아서 신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해적의 괴수가 신의 몸뚱이를 짓밟고, 뱃사람들을 공갈 협박하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신의 배의 닻, 노 등 여러 가지 기구를 끊어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배로 신의 배를 끌어 큰 바다 가운데 놓은 다음 배를 타고 도망가 버렸는데 밤은 이미 깊었습니다.
- 영역: 12th Day. An Encounter with Pirates at the Boundary of Ning-po Prefecture. This day was cloudy and sometimes rainy. The sea was again white. At dusk we came to large islands that lay opened out like a screen. We saw that there were two boats among them. Both carried small boats. They pointed directly at my boat and came toward us. Chòng Po and others knelt round me and said, “In all things there are rules and exceptions to the rules. Please take off your mourning clothes and, as an exception, wear your silk gauze cap and round collar and thus display the signs of an official. If you do not, they will make us out to be pirates and humiliate us.” I said, “We have drifted at sea by the will of Heaven. We have repeatedly approached death and regained life by the will of Heaven. We have also arrived at these islands and met these boats by the will of Heaven. Heaven's principles are just. How can I go against Heaven to practice deceit?" Very quickly, the two boats drew near and met us. In each boat there were about ten men, all of whom wore black, padded trousers and straw boots. Some had towels wrapped round their heads, and some wore bamboo-leaf rain hats and coir-bark raincoats. They clamored and shouted loudly. It was all in Chinese, and I judged them to be men of China. I ordered Chòng Po to write sa message] on a piece of paper and send it to them. It said, “I, Ch'oe Pu, a minister of Korea, received the King's order to go to an island in the sea. I was hurrying to mourn for my father, and, crossing the sea, met a wind and drifted here. I do not know what land or district this is.” The men answered, “This is the region of Ning-po Prefecture, Chekiang, China.” They also said, “If you want to reach your own country, it would be well for you to go to China [first].” Chong Po pointed to his mouth with his hand. The men brought two buckets of fresh water and gave them to us. They rowed their boats away to the east. I commanded the boatmen to scull into an island and seek shelter. There was another boat, which also carried a small boat and had about seven or eight soldiers. Their clothes and speech were the same as those of the men we had previously seen. They came to meet my boat and said, “What country are you from?” I had Chòng Po answer again as before. Then we asked, “What country and place is this?” The men pointed to the island and said, “This is Hsia-shan,21 in Ning-po Prefecture, China. If the wind and water are right, you can return home in two days." I replied, “We, men from a strange land, have encountered a storm and, despite ten thousand brushes with death, have been fortunate enough to reach the shores of China. We are happy to have reached a place where our lives are saved.” Then I asked them what their names were. A man answered, “I am Lin Ta of China. If you are going to China, I shall accompany you. If you have valuables, you should give them to me.” I answered, “I am an official on a mission, not a merchant. After drifting and bobbing about, furthermore, how could I have valuables?”' I took rice from our rations and gave it to him. The man accepted it and replied, “If you moor your boat to this island you need not fear the northwest wind, but the south wind is not good. Follow me to moor it.” He led my boat to an island anchorage. He said, “Here, this is where you should moor.” I did as he said. We went and moored the boat, and there was, true enough, no wind. It was a place ringed by the island, in which boats could find shelter. On the west shore were two thatched huts that looked like houses in which salt fish were prepared. The other men moored their boat below the huts. The men in my boat, at the extremity of prolonged hunger and thirst and having toiled without sleep for a long time, had got food and eaten and had got a place protected from the wind and moored. Then, exhausted, they dropped down in a jumble of limbs in the boat.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the one who had called himself Lin Ta came at the head of his band of over twenty men, some carrying spears, some carrying swords, but without bows and arrows, and holding torches. They came without leave into my boat. The pirate chief wrote [a message] that said, “I am the Buddha Kuan-yin. I see through to your heart. You have gold and silver, and I am going to look for it.” I answered, “Gold and silver are not produced by my country. I have not had any from the first.” The pirate chief said, “If you are an official, how can you not have brought any? I'll take a look.” Now I, Chòng Po, Yi Chong, Kim Chung, and Hyo-ja, because it was uncertain how long a voyage to Cheju and places at sea would take, had sailed with several pieces of clothing for all seasons. This pirate chief, now, shouted to his band to make a thorough search for clothes in my portmanteau and those of my secondary officials and for the boatmen's rations and to load them into his boat. They left behind only such things as the clothes drenched in salt water and all the books and documents. Among the pirates there was a one-eyed one who behaved especially badly. Chong Po said to me, “When the pirates first came, they showed something like courtesy. When they saw that we were weak, they gradually came to show their true colors. I suggest that we make one strong attack to decide who should die and who should live.” I said, “Our boatmen, after being on the brink of death from hunger and thirst, have lost their courage before the pirates. The pirates, therefore, take advantage of the circumstances and inflict on us their violence. If we fought with them, our men would all die at the pirates' hands. It is better to give up all our baggage and beg for our lives.” The pirate chief also seized the seal and horse permit that I had and put them into his sleeve. Chòng Po followed after him and asked him to return them but did not get them. I said, “Take away everything in the boat, but the seal and horse permit are symbols of state and of no use to unauthorized persons. You had better return them to me.” The pirate chief returned the seal and permit. Then he went out the door of the shelter and stood lined up with his band on the gunwale of the boat. They argued noisily for some time and then came back into the boat. First, they took off Chòng Po's clothes, bound him and beat him. Next, they cut the frog of my gown with a sword and stripped me naked. They put my hands behind me, bent my legs, and bound me. They beat my left arm with a stick seven or eight times and said, “If you love life, better bring out the gold and silver.” I shouted, “You can cut my body and break my bones, but where am I to get gold and silver?” The pirates did not understand what I said. They untied my bonds to let me write what I meant, and I wrote it. The pirate chief was angry. He stared ferociously, his mouth wide open. He pointed at Chòng Po and shouted, pointed at me and shouted. He pulled me by the hair and again bound me. He raised his sword and aimed it at my throat to cut it, but the sword happened to miss and struck something by my right shoulder, the blade glancing off. The pirate again raised the sword and was about to behead me, when one of the pirates came, took hold of the arm that raised the sword, and restrained it. The pirate band all raised great shouts, but I do not know what was said. | At the time, the boatmen were beside themselves with fright. They scurried about to hide, but there was no place. Only Kim Chung and Kõisan clasped their hands and begged on their knees that my life be spared. Then, after torturing me and terrifying the boatmen, the pirate chief led his band off. They cut away the boat's anchor, oars, and all ropes and threw them into the sea. Then with their boat they towed my boat toward the open
1월 13일
자세한 내용은 1월 13일로
1월 14일
- 원문: 十四日,漂大洋中,是日晴,哺時,漂至一島,東西南三面,一望無際,唯可避北風處,顧以無為憂,初發濟州時,舟甚大無載物,故輸若干石塊于舟中,使不撓動,至是,尚理等以較索纏其石四齒,合為假碇以留泊焉,安義與軍人等相與言,使之聞之於臣曰:“此行所以至於漂死者,我知之矣,自古以來,凡往濟州者,皆祭於光州無等山祠及羅州錦城山[[1] 洞,自濟州出陸者,又皆祭於廣壤、遮歸、川外、楚春等詞,然後行,故受神之枯,利涉大海,今此敬差官特大言非之,來不祭無等、錦城之祠,去不祭廣壤諸洞,慢神不敬,神亦不恤,使至此極,尚誰給哉?”軍人和之,咸臣,權松獨曰:“不然,前此李准義暹,三日致齋,精祀廣壤等神,亦至漂流,幾復甦,權敬差官景帖,俱不致祭,尚且往來快順,亡些子差,則過海便否,在於待風之如何耳,__關於神之祭不祭哉?”臣亦稱之曰:“天地無私,鬼神默運,福善禍,唯其公耳,人有惡者,論事以微福,則其可福之乎?人有善者,不惑邪說,不為顯祭,則其可稱之乎?會謂天地鬼神為語事飲食,而降禍福於人乎?萬萬無此
p.362 理也,况祭有常等,士庶人祭山川,非禮也,非禮之祭,乃谣也,溶以獲福者,我未之見也.爾濟州人,酷好鬼神,山澤川敷,俱設神祠,至如廣壤等堂,朝夕敬詞,靡所不至,其於涉海,宜無漂沈之患,然而今日某船漂,明日某船沈,漂沈之船,前後相望,是果神有靈應歇?祭能受福欺?况今我同舟人不祭者,唯我一人耳,爾軍人皆誠心齋祭而來,神若有靈,豈以我一人不祭之故,廢爾四十餘人齊祭之誠也?我之漂船,專是行李顛倒,不善候風之所致,反以廢祭尤我,不亦惑乎?”安義等猶以臣言為迂闊不以為是.
- 국역: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해질 무렵에 배가 표류하여 한 섬에 이르니 동, 서, 남 3면이 탁 터져 있고, 북풍은 피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살펴보니 닻이 없는 것이 근심거리였습니다. 처음에 제주도를 출발할 때는 배가 매우 큰데도 실을 물건이 없었으므로 몇 개의 돌덩이를 배 안에 실어서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습니다.[1][2] 이 때 상리 등이 새끼줄로 그 돌 네 개를 얽어매어 합쳐서 임시 닻을 만들어 배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안의는 신(臣)이 들을 수 있도록 군인 등에게 말하기를,“이번 행차에서 표류하여 죽게 된 까닭을 나는 안다. 옛날부터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3]의 신사(神祠)[4]와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신사[5][6][7]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광양(廣壤)[8]·차귀(遮歸)[9][10][11]·천외(川外)[12][13]·초춘(楚春)[14][15][16] 등의 신사102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 떠났던 까닭에 신령님의 도움을 받아 큰 바다를 순조롭게 건너갈 수가 있었다. 지금 이 경차관은 특별히 이를 잘못이라고 큰소리치며 비난하며, 올 때도 무등산과 금성산의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갈 때도 광양 등 여러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신령님을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았으므로, 신령님 또한 돌보지 아니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또한 누구의 잘못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동조하며 모두 신을 탓하였습니다.
권송만은 홀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에 앞서 정의현감 이섬은 3일 동안 재계(齋戒)[17][18][1]</ref>팔재계, 법보신문, 2007.04.18[19]한 뒤 광양 등의 신령님께 정성껏 제사를 지냈는데도, 표류되어 거의 죽을 뻔하다 다시 살아났다.
경차관 권경우(權景祐)[20]는 아무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왕래가 아주 순조로웠고 아무 탈도 없었다. 결국 바다를 건너는 데 그 안전한가 아니한가는 순풍을 기다리는 여부에 달려 있지, 어찌 신령님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말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 또한 일러 말하기를, “천지는 사심이 없고, 귀신은 말없이 운행(運行) 하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니 공평할 따름이다. 악한 사람이 귀신을 아첨해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그에게 복을 내리겠는가? 착한 사람이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않아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그에게 재앙을 내리겠는가? 천지와 귀신이 아첨하는 음식을 올렸다 하여 그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이 일찍이 있었던가? 절대로 그런 이치는 없다. 하물며 제사도 일정한 등급이 있으니, 사대부와 서인(庶人)이 산천에 제사지내는 것[21][22][23][24][25]은 예에 어긋난 일이다[26][27]. 예에 어긋난 제사가 바로 음사(淫祀)인데, 음사로써 복을 얻은 일은 나는 본 적이 없다. 너희들 제주도 사람들은 귀신을 몹시 좋아하여 산택(山澤)과 천수(川藪)에 모두 신사를 세워, 광양 등의 신당(神堂) 같은 데는 조석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기를 지극하게 하거늘, 바다를 건너는 데 표류거나 침몰하는 재앙이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은 어느 배가 표류하고 내일은 또 다른 배가 침몰하여,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배가 앞뒤로 서로 잇닿으니, 이것이 과연 신령님의 영험이 있는 셈인가? 제사를 지낸다고 복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지금 함께 배를 탄 우리들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고, 너희 군인들은 모두 정성스런 마음으로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내고 왔는데, 신이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나 한 사람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들 40여명이 재계하고 제사 지낸 정성을 저버릴 수가 있는가? 나의 배가 표류한 것은 오로지 일정을 서두르다, 순풍 기다리기를 잘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도리어 제사 지내지 않은 일로 나를 탓하니, 또한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의 등은 여전히 신의 말을 물정에 어두운 탓이라 하며 옳다고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 영역: 14th Day. Adrift in the Ocean. This day was fair. Between 3 and 5 p.m. we sailed into an island. In three directions, east, south, and west, nothing met the eye. It was a place sheltered from only the north wind, and we were concerned about not having an anchor. When we had first left Cheju, because the boat was very large and carried nothing in it, we had put in a number of stones to keep it from rolling. Now Sang-ni and others tied four stones together with line for a makeshift anchor, and we moored there. An Ủi talked with the soldiers in my hearing: “I know why we have come to the point of drifting off and dying on this trip. Ever since olden times, everyone going to Cheju has first sacrificed at Mudungsan Shrine in Kwangju and Kumsongsan Shrine in Naju. Everyone sailing from Cheju has first sacrificed at Kwangyang, Sogwi, Ch’onwoe, and Ch’och’un shrines. Therefore they received the aid of the gods and successfully crossed the ocean. “The present Commissioner, however, has arrogantly ignored these measures. He came without sacrificing at Mudung and Kŭmsong shrines, and he went without sacrificing at Kwangyang and the other shrines. He is contemptuous of the gods. The gods, in turn, have not pitied us and have sent us to this extremity. Who is at fault?” The soldiers agreed with him and all blamed me. Kwon Song, however, said, “That is not so. Before this, Yi Som of Sõnŭi fasted three days and sacrificed punctiliously to Kwangyang and the other gods. He, too, went adrift, almost died, and survived. Commissioner Kwon Kyong-u did not sacrifice at all, yet he came and went swiftly and surely, without the slightest discomfort. Thus, the ease or difficulty of crossing the sea depends on waiting for the wind; it has nothing to do with sacrificing or not sacrificing to the gods.” I also admonished them, saying, “Heaven and Earth are not partial, and the gods and spirits do their work silently. They are strictly impartial in blessing good and damning evil. If a man is wicked and toadies for blessings, can they bless him? If a man is good and neither is deluded by heretical doctrines nor offers blasphemous sacrifices, can they damn him? Can one say that Heaven, Earth, the gods and spirits send down damnations and blessings on men for the sake of flattery, food, and drink? That cannot possibly be. “Sacrifices, moreover, have fixed ranks. For gentry and commoners to sacrifice to mountains and rivers goes against the code of propriety. A sacrifice opposed to propriety is an evil sacrifice. I have never known of any man who obtained blessings by improper sacrifice. “You Cheju men are devoted to gods and spirits. You build shrines to gods in all the mountains, marshes, rivers, and swamps. At such temples as Kwangyang you sacrifice respectfully morning and night, leaving nothing undone. That being so, when you cross the ocean you ought not to have mishaps like drifting and sinking. Yet today such-and-such a boat goes adrift, tomorrow such-and such a boat sinks, and so it goes with one after another. Can these things be taken to mean that these gods are powerful and that sacrifices to them can bring blessings? “Of the people in this boat, moreover, I alone have not sacrificed. All you soldiers devoutly fasted and sacrificed and then came. If the gods are powerful, how can they deny the devotion of the fasting and sacrificing of you fortyodd men because I alone did not sacrifice? Our boat has gone adrift solely because the baggage was unevenly stowed and because we were not good at forecasting the weather. Is it not foolish to blame me for having neglected the sacrifices ?”
An Ui and the others seem to consider what I said irrelevant and wrong.
1월 15일
- 원문:十五日, 漂大洋中, 是日陰, 海色赤而濁, 東風復起, 又順風指舵于西,舟中人若朴從迴、萬山、李山等,有疾病不堪事;高保終、梁達海、高迴、金朝迴、任山海等,自漂海以至是日,臥不起動,雖督之以(露)取「露]等事,聽之藐藐;鄭實、夫同、金得時、姜有、宋真、金粟、姜內、吳山、高內乙同等,十喚一應,或有不得已而從事者;肯斤寶、金怪山、高福、金松、金石貴、李孝台、金真山等,或畫勤夜食,或始勤終息;許尚理、權山、金高面、金仇迴、崔巨伊山、金都終、高以福、文迴、玄山、韓每山、權松、莫金等,畫夜不息,以運船為己任;程保、金重、李植、孫孝子、李孝枝、安義等,或親自服役,或檢督治船,以期完事,自遇賊復漂以後,人皆無意於生,漸不如前,丹為暴濤所擊,為日已久,百孔千瘤,旋塞旋缺,蹲漏有水,將不勝,臣曰:漏水若此,舟人之解體又若此,
p.363 我其妄自尊大,坐見溺死,胡可哉?”遂與程保等六人,親自到水幾盡,尚理以下十餘人,亦稍有奮力而起者,夜無風而雨,至一大島,為勢所逆,欲依泊不得,中流海上,
- 국역: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붉으면서 탁하였습니다.
동풍이 다시 일었으므로 또 바람 부는 대로 키를 서쪽으로 맞추어 갔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박종회, 만산, 이산 등은 병이 나서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보종, 양달해, 고회, 김조회, 임산해 등은 바다에서 표류가 시작된 뒤로 여태까지 드러누워 움직이려 하지 않고, 비록 취로(取露) 등의 일로 이들을 독려하여도 귀담아 듣지도 않았습니다.
정실, 부명동, 김득시, 강유, 송진, 김속, 강내, 오산, 고내을동 등은 열 번 부르면 한 번 대답하였으며, 마지못해 일을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소근보, 김괴산, 고복, 김송, 김석귀, 이효태, 김진산(金眞山)05 등은 낮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밤에는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나태하기도 하였습니다.
허상리, 권산, 김고면, 김구질회, 최거이산, 김도종, 고이복, 문회, 현산, 한매산, 권송, 막금 등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배를 운행하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며,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 이효지, 안의 등은 몸소 일하기도 하고, 배를 수리하는 일을 점검하고 독려하기도 하며, 일을 끝내기를 기하였습니다.
해적을 만나 바다에 다시 표류한 이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어 하는 일이 점차 전만 같지 못하여졌습니다.
배가 사나운 파도에 부딪친 지 오래 되자 수많은 구멍과 틈이 생겼고, 막는 즉시 곧 터져 새어 들어오는 물을 이루 다 퍼낼 수 없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물새는 것이 이러하고, 뱃사람들 마음이 흩어진 것이 또 이러하니, 무턱대고 높은 사람이라고 점잔만 빼다가 앉아서 익사 당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정보 등 6명과 함께 몸소 물을 거의 다 퍼내었습니다. 상리 이하 10여명 또한 조금씩 힘을 내어 일어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밤에는 바람은 없었지만 비가 내렸습니다. 어느 큰 섬에 이르렀지만 썰물의 힘에 밀려 정박할 수 없었고 배는 바다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 영역: 15th Day. Adrift in the Ocean. This day was cloudy.
The sea was red and muddy. An east wind had arisen again. Again we went with the wind and set the helm heading west. Of the men in the boat, some, such as Pak Chong-hoe, Mansan, and Yi San, were sick and not able to work. Ko Po-jang, Yang Tal-hae, Ko Hoe, Kim Cho-hoe, and Im San-hae, from the time we went adrift until the present, had lain down and not risen to work. Though we directed them to bail and do other things, they ignored the commands completely. Chòng Sil, Pu Myong-dong, Kim Tủk-si, Kang Yu, Song Chin, Kim Sok, Kang Nae, O San, and Ko Naeŭltong had to be called ten times before they would answer once. Some worked only when they could not help it. Among San Kủn-bo, Kim Koe-san, Ko Pok, Kim Song, Kim Sok-kwi, Yi Hyo-t'ae, and Kim Chin-san*,23 some worked hard by day and slacked by night, and some worked hard at first and became lazy later. Hồ Sang-ni, Kwồn San, Kim Ko-Myặn, Kim Kujilhoe, Chooe Köisan, Kim To-jong, Ko I-hok, Munhoe, Hyon San, Han Mae-san, Kwon Song, and Makkům worked hard night and day and made the sailing of the boat their responsibility. Chồng eo, Kim Chung, Yi Chăng, Son Hyo-ja, Yi Hyo-ji, and An Ủi, either personally undertook jobs or oversaw the repairing of the boat in the hope of finishing the work. But after we met the pirates and again were set adrift, they gradually changed from what they had been before, and none of them cared whether he lived. The ship had been pounded by violent waves now for many days. There were a hundred holes and a thousand strains; no sooner was one stopped than another leaked. So much water came through the cracks that we could not bail fast enough to keep up with it. I said, “With the water leaking like this and, too, the boatmen's loyalty as uncertain as it is, how can I in foolish pride sit and wait for death?”' Then with Chòng Po and five other men I myself bailed the water almost all out. More than ten men, from Sang-ni down, also regained a little of their strength and got up. At night there was no wind, but it rained. We came to a large island, and though we wanted to approach and moor, we could not, since the evening tide was against us. We rode in the current at sea.
3월 2일
- 원문:初二日,過房村疇,是日少雨大風,自新安驛,過馬家淺、雙溝、豐·沛·蕭·陽四縣大廠及房村集,又過金龍顯聖靈廟,至呂梁小洪,以竹索練舟而上,過尼陀寺,西岸有關羽、(蔚)尉遲公、趙昂之廟,又過房村驛,至呂梁大洪,洪在呂梁山之間,洪之兩傍,水底亂石,噬嚴峭立,有起而高聳者,有伏而森列者,河流盤折,至此開岸,豁然奔放,怒氣噴風,聲如萬雷,過者心悸神怖,間有覆舟之患,東岸築石堤,鑿翻翻以決水勢,雖鼻居舠,必用竹綱,演十牛之力,然後可挽而上,臣等自青山龍神祠前,逆洪水過形勝樓,夜過工部分司、王家橋、李家橋、老聃廟,至水首廟前,洪之湍急處可八九里,陳萱謂臣曰:“此呂梁洪也,大禹疏鑒以後,有秦叔寶者,管修此洪”云云,臣曰:“《禹貢》‘治梁及岐’注云: ‘梁, 呂梁山也.’ 勵道元云: ‘呂梁之石崇鍊,河流激盪,震動天地,此洪無奈是乎?”蕾曰:“果若然也,但《禹貢》呂梁載在冀州,此洪轄徐州,為可疑耳.”
- 국역:방촌역(房村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조금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신안역에서 마가천(馬家淺)·쌍구(雙溝)·풍현(豊縣)·패현(流縣)·소현(蕭縣)·탕현(陽縣) 등 4현의 부창(夫__)352과 방촌집(房村集)353을 지나고, 또 금룡현성령묘(金龍顯聖靈廟)를 거쳐 여량소홍(呂梁小洪)54에 이르러 대로 만든 새끼로 배를 끌고 올라가서 이타사(尼陀寺)를 지나니, 서쪽 언덕에 관우(關羽)와 울지공(尉遲公)355과 조앙(趙鬪)356의 사당이 있었습니다.
또 방촌역(房村驛)을 지나 여량대홍(呂梁大洪)에 이르니, 홍은 여량산(呂梁山)의 사이에 있었습니다.
홍(洪)의 양쪽 가의 물밑에는 여기저기 흩어진 돌과 가파른 바위가 높이 서 있었는데, 일어나서 높이 솟은 것도 있고 엎드려 죽 늘어선 것도 있었습니다.
강의 흐름이 꼬불꼬불하다가 이곳에 와서야 언덕이 탁 트여서 세차게 흐르는데, 세찬 기세는 바람을 뿜고 소리는 우레와 같아 지나가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간혹 배가 뒤집힐까 걱정했습니다.
동쪽 언덕에는 돌 제방을 쌓았는데 서로 어긋나게 파내어 물살을 터놓았습니다.
비록 작은 거룻배일지라도 반드시 대로 만든 새끼를 사용하여 소 열 마리라야만 배를 당겨서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신 등은 청산용신사(靑山龍神祠)357 앞에서 홍수(洪水)를 거슬러 형승루(形勝樓)를 지나서 밤에 공부분사(工部分司)·왕가교(王家橋) · 이가교(李家橋)·노담묘(老聃廟)를 지나 수수묘(水首廟) 앞에 이르렀습니다.
홍의 여울이 급한 곳은 8-9리나 되었습니다.
진훤은,
“이것이 여량홍입니다. 우왕이 땅을 뚫어 막힌 물을 통하게 한 이후에 진숙보(秦叔寶)359 란 사람이 이 홍을 맡아 수리하였습니다” 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공〉의 ‘양(梁)과 기(岐)를 다스린 다'는 구절의 주에, 양은 여량산이다'라 했으며, 역도원(鄭道元)은, 여량의 돌이 우뚝 솟았으므로, 강물이 이에 부딪쳐서 천지를 진동시킨다'고 했으니, 이 홍이 그게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과연 그럴 듯합니다. 다만 우공>의 여량은 기주(__州)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 홍은 서주(徐州)에 관할되어 있어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 영역: 2nd Day. Passing Fang-ts’un Station. This day there were light rain and high winds.
From Hsin-an Station we (went past Fang-ts’un Station) and came to Lüliang Great Flood. The flood was in Lü-liang Mountains, and on both sides of it, scattered rocks jutted up sharply in the river bed. Some rose up high, and some were in low-lying clusters. The river twisted and turned, and when it came to those open banks it burst out free, angry and fuming, its voice like ten thousand claps of thunder. The hearts of those who passed pounded, and their spirits quaked. Boats occasionally met disaster. A stone levee that had been built on the east bank had been cut irregularly to check the force of the water, but even for tenders, it was necessary to use twisted bamboo rope and the power of ten oxen before they could be pulled up. From in front of Ch’ing-shan-lung-shen Shrine, we went up the flood past [several places] and arrived in front of Shui-shou Shrine. The fastest part of the flood was eight or nine li long. Ch’en Hsüan said to me, “That was Lü-liang Flood. After the Great Yü did the dredging and channelling, there was a Ch'in Shu-pao who supervised the repairing of this flood.”70
I said, “In Yü kung [after the passage], [He] took effective measures at Liang and Ch'i' [Legge, III: 94], a note says, ““Liang” is Lü-liang Mountain.' Li Tao-yüan says, “The rocks of Lü-liang rise up high. The flow of the river us turbulent and shakes heaven and earth.'71 This flood must be none other than that one.” Hsüan said, “So it seems, indeed, but in Yü kung [it says], 'Lü-liang lies in Chi-chou. '72 These rapids are in Hsü-chou, so it is somewhat puzz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