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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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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밴드, 음악, 보컬, 게임
 
*역사, 밴드, 음악, 보컬,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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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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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_김덕원_과제_1.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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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_김덕원_과제_2.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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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_김덕원_과제_3.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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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_김덕원_과제_4.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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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_김덕원_과제_5.lst]]
  
 
==최부의 표해록==
 
==최부의 표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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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표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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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표해록.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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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sg.aks.ac.kr/data/dir/downloadPdf.do?callNum=K2-4515&volNum=001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1월 16일===
 
===1월 16일===
十六日,到泊于牛頭外洋,是日陰,海色赤黑中全濁,西望連宰疊嶂,撑天包海,意有人煙,駕東風而至,則見山上多有烽燧臺列時,喜復到中國地界,午後,風浪尤緊,雨下漆味,舟從風所驅,瞥然間忽漂至兩島間,傍岸而過,則望見有中船六隻列泊,程保等請於臣曰:“前至下山,不示以官人之儀,以招賊人,幾不免死,今宜從權具冠帶,以示彼船,”臣曰:“爾何以害義之事導我嗽?”保等曰:“當此之時,與死為鄰,何暇治禮義哉?姑當行權,便取生道,然後以禮治喪,不害於義,”臣拒之曰:“釋喪即吉,非孝也,以詐欺人,非信也,寧至於死,不忍處非孝非信之地,吾當順受以正,”安義來請日:“我姑着此冠帶,示若官人然,”臣曰:“非也,彼船若或如前所遇賊,猶之可也,若是好船,必驅我曹訪官府取供辭,將何辭以對?少或不直,彼必生疑,莫如守正之為愈也.”俄而所謂六船,掉圍臣船,一船有人可八九,其衣服語音,亦與下山所遇海賊一般,寫示臣等曰:“看你異類,來從那裏?”臣令程保亦寫以 答曰:“我是朝鮮國朝臣,奉 王事巡海島,奔喪過海,被風而來,不識此海何國地界?”其人答曰:“此海乃牛頭外洋,今隸大唐國台州府臨海縣界也.”程保以手指其口,其人以水桶來遺,又指北有山,曰:“此山有泉,你可取,做飯以吃,你有胡椒,可送我二三兩,”臣答曰:“本國不產胡椒,初不賣來!”其人等遂掉船稍却,圍包臣船,列立下訂,臣船亦依岸而泊,令安義、巨伊山、向理等下舟登山,通望人煙,則果是連陸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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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日,到泊于[http://cds.newsworks.co.kr/news/photo/201608/77579_16938_3411.jpg 牛頭外洋 우두외양],是日陰,海色赤黑中全濁,西望連宰疊嶂,撑天包海,意有人煙,駕東風而至,則見山上多有[http://san.chosun.com/site/data/img_dir/2015/02/03/2015020301912_0.jpg 烽燧臺 봉수대]列時,喜復到中國地界,午後,風浪尤緊,雨下漆味,舟從風所驅,瞥然間忽漂至兩島間,傍岸而過,則望見有中船六隻列泊,程保等請於臣曰:“前至下山,不示以官人之儀,以招賊人,幾不免死,今宜從權具冠帶,以示彼船,”臣曰:“爾何以害義之事導我嗽?”保等曰:“當此之時,與死為鄰,何暇治禮義哉?姑當行權,便取生道,然後以禮治喪,不害於義,”臣拒之曰:“釋[https://lh3.googleusercontent.com/proxy/K4kjgHDhE6b9pEVf5LKWFm3dtVf2UPAKv1ey6pPEY7hWUYHzcUZBZ2J04R2dyIc8gWmCco678X7m41rvJmcbWW20yvZeY2Hep4kDtS7-lzDtlHEx7d27YNI1RFh_sQcjMhrs6smOK68y7RzBhVrV8etXtOz0tKRZ3O2SUitNM5LNll3EOyZbVe0bMb-6aeMqLNA0DQEeV4idbfeije0VKv_uP2KcWnxSn419so0jXHYqF1OdD5gCobBNj7c8zCue4ZE2R9P1law9cdLvu6ai2sIVNaRi5nQQQ1anbWQ 喪 상복]即吉,非孝也,以詐欺人,非信也,寧至於死,不忍處非孝非信之地,吾當順受以正,”安義來請日:“我姑着此冠帶,示若官人然,”臣曰:“非也,彼船若或如前所遇賊,猶之可也,若是好船,必驅我曹訪官府取供辭,將何辭以對?少或不直,彼必生疑,莫如守正之為愈也.”俄而所謂六船,掉圍臣船,一船有人可八九,其衣服語音,亦與下山所遇海賊一般,寫示臣等曰:“看你異類,來從那裏?”臣令程保亦寫以 答曰:“我是[https://lh3.googleusercontent.com/proxy/d8RXc5Jl3zwpWwl51oHybBv95WZnIiI6qSWsqKTt679umaU7oHI5z_nf8gk_SbIh5CSrKVntz5bkeivn5g6AfmR-vGVmZpvrSTMn--WKp9U 朝鮮國 조선국]朝臣,奉 王事巡海島,奔喪過海,被風而來,不識此海何國地界?”其人答曰:“此海乃牛頭外洋,今隸[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Tang_Dynasty_circa_700_CE.png 大唐國 대당국][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2GYH&imgurl=http://cfs7.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JHWUhAZnM3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C5ibXA=&filename=4.bmp 台州府臨海縣 태주부임해현]界也.”程保以手指其口,其人以水桶來遺,又指北有山,曰:“此山有泉,你可取,做飯以吃,你有[https://www.olive-hitomawashi.com/column/assets_c/2019/03/09-0_20190308-thumb-500xauto-89558.jpg 胡椒 후추],可送我二三兩,”臣答曰:“本國不產胡椒,初不賣來!”其人等遂掉船稍却,圍包臣船,列立下訂,臣船亦依岸而泊,令安義、巨伊山、向理等下舟登山,通望人煙,則果是連陸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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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於此行所歷滄波,雖若一海,水性水色,隨處有異,濟州之海,色深青,性暴急,雖少風,濤上駕濤,激浪濡潤,無甚於此,至黑山島之西猶然,行過四畫夜,海色白,越二書夜愈白.又一畫夜還青,又二畫夜還白,又三畫夜赤而濁,又一畫夜赤黑中全濁,臣之行舟,視風從却,東西南北,萍漂無定,其間所見海色,大鑒如此,自由而還青以後,風力雖,濤不甚高,至還白以後,始有島醫,島皆岩壁,谷咸儡,上載土,有雜卉香草,翁蔚長青.水性悠弱,若不遇大風,則罕見驚波駭浪之患,臣於遇賊復漂之海,亦如濟州之海之險,則豈能復見得島津乎?大抵每歲正月,正當隆寒之極,则風怒號,巨濤震激,乘船者所忌,至二月漸得風和,濟州俗猶號為燃燈節,禁不渡海,且江南潮人,亦不於正月浮海,至四月梅雨既過,颯然清風,海舶初回,謂之舶()()風,臣之漂海,適當風波險惡之時,海天霾哇,日復尤甚,橋帆維權,或折或失,飢渴困苦,動經旬日,一日之間,溺敗之機,非一二度矣,然幸僅保性命,得泊海岸者,非特潰雨雨取汁,以沃焦鹏,舟實牢緻價駛,能壓風濤之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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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於此行所歷滄波,雖若一海,水性水色,隨處有異,[https://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2&fname=http%3A%2F%2Fcfile10.uf.tistory.com%2Fimage%2F2314D84754D09D2F3FDCDC 濟州 제주]之海,色深青,性暴急,雖少風,濤上駕濤,激浪濡潤,無甚於此,至黑山島之西猶然,行過四畫夜,海色白,越二書夜愈白.又一畫夜還青,又二畫夜還白,又三畫夜赤而濁,又一畫夜赤黑中全濁,臣之行舟,視風從却,東西南北,萍漂無定,其間所見海色,大鑒如此,自由而還青以後,風力雖,濤不甚高,至還白以後,始有島醫,島皆岩壁,谷咸儡,上載土,有雜卉香草,翁蔚長青.水性悠弱,若不遇大風,則罕見驚波駭浪之患,臣於遇賊復漂之海,亦如濟州之海之險,則豈能復見得島津乎?大抵每歲正月,正當隆寒之極,则風怒號,巨濤震激,乘船者所忌,至二月漸得風和,濟州俗猶號為燃燈節,禁不渡海,且江南潮人,亦不於正月浮海,至四月梅雨既過,颯然清風,海舶初回,謂之舶()()風,臣之漂海,適當風波險惡之時,海天霾哇,日復尤甚,橋帆維權,或折或失,飢渴困苦,動經旬日,一日之間,溺敗之機,非一二度矣,然幸僅保性命,得泊海岸者,非特潰雨雨取汁,以沃焦鹏,舟實牢緻價駛,能壓風濤之故也.
  
우두(牛頭)[1] [2] [3] [4] 앞 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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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ds.newsworks.co.kr/news/photo/201608/77579_16938_3411.jpg 우두(牛頭)앞 바다]정박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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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정보를 시켜 또한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 조신(朝臣)으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면서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이곳에 왔소. 이 바다가 어느 나라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또한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 조신(朝臣)으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면서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이곳에 왔소. 이 바다가 어느 나라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이 바다가 바로 우두 앞바다로서, 지금의 대당국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속해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켰습니다. 그 사람이 물통을 가져와서 주고, 또 북쪽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산에 샘물이 있으니 당신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먹을 수 있소. 당신들에게 후추[6][7]가 있으면 우리에게 두세 냥 정도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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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대답하기를,“이 바다가 바로 우두 앞바다로서, 지금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Tang_Dynasty_circa_700_CE.png 대당국] [http://cfs7.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JHWUhAZnM3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C5ibXAudGh1bWI=&filename=4.bmp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속해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켰습니다. 그 사람이 물통을 가져와서 주고, 또 북쪽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산에 샘물이 있으니 당신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먹을 수 있소. 당신들에게 후추가 있으면 우리에게 두세 냥 정도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후추[8]가 산출되지 않아 애초부터 가지고 오지 않았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조금 물러나 신의 배를 포위하여 죽 늘어서 닻을 내리므로, 신의 배도 또한 언덕을 의지하여 정박하였습니다. 안의, 거이산, 상리 등으로 하여금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 인가를 둘러보게 했더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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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https://img.hankyung.com/photo/201601/AA.11110845.1.jpg 후추]가 산출되지 않아 애초부터 가지고 오지 않았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조금 물러나 신의 배를 포위하여 죽 늘어서 닻을 내리므로, 신의 배도 또한 언덕을 의지하여 정박하였습니다. 안의, 거이산, 상리 등으로 하여금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 인가를 둘러보게 했더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습니다.
  
 
신이 이번에 지나온 바닷물은 비록 동일한 바다지만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신이 이번에 지나온 바닷물은 비록 동일한 바다지만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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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2&fname=http%3A%2F%2Fcfile10.uf.tistory.com%2Fimage%2F2314D84754D09D2F3FDCDC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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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7/7c/Korea-Heuksando_Island-01.jpg/800px-Korea-Heuksando_Island-01.jpg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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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매년 정월은 바로 한창 추울 때로서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큰 물결이 진동하여 부딪치게 되니, 배를 타는 사람들이 꺼리는 때입니다.
 
무릇 매년 정월은 바로 한창 추울 때로서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큰 물결이 진동하여 부딪치게 되니, 배를 타는 사람들이 꺼리는 때입니다.
  
2월에 가서야 점차로 바람이 잦아들지만, 제주 풍속은 오히려 연등절(燃燈__)[9]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강남의 조주(潮州)[10][11][12][13]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4월에 이르러 매우(梅雨)[14]09가 지나가고 난 뒤 시원한 청풍(淸風)이 불면 바다를 다니는 큰 배들이 돌아오니, 이를 '박초풍(舶連風)'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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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가서야 점차로 바람이 잦아들지만, 제주 풍속은 오히려 연등절(燃燈__)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강남의 조주(潮州)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4월에 이르러 매우(梅雨)지나가고 난 뒤 시원한 청풍(淸風)이 불면 바다를 다니는 큰 배들이 돌아오니, 이를 '박초풍(舶連風)'이라 부릅니다.
  
 
신이 표류할 적은 마침 풍랑이 사나울 때로서 바다날씨는 나날이 흐려졌고, 돛과 밧줄과 노가 부러지거나 잃어버렸습니다.
 
신이 표류할 적은 마침 풍랑이 사나울 때로서 바다날씨는 나날이 흐려졌고, 돛과 밧줄과 노가 부러지거나 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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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행히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해안에 배를 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빗물에 옷을 적셔 물을 짜내 타는 창자를 적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가 견고하고 빨라 능히 풍랑을 이겨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해안에 배를 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빗물에 옷을 적셔 물을 짜내 타는 창자를 적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가 견고하고 빨라 능히 풍랑을 이겨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건-중국: 정박
 
지리-중국: 바다,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잇닿아 겹친 산봉우리, 동풍, 풍랑이 더 세고,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빛깔이 푸른 데서 흰 데로 다시 되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섬이 나타났는데,
 
지명-중국: 우두, 중국, 대당국 태주부 임해현(臨海縣),
 
기후: 이 날은 흐리고, 보슬비가 자욱하게 내리는데
 
풍경: 인가(人家)가 있는 듯, 산 위에 봉수대(峰燈臺)가 죽 늘어서, 섬은 모두 층암절벽에 우뚝 솟은 바위더미로 위에는 흙을 이고 있어 잡초와 향초가 무성하게 푸르렀습니다,
 
비유: 인가(人家)가 있는 듯
 
시간: 오후, 풍랑이 사나울 때
 
건축물: 봉수대
 
제도(교통): 중선(中船) 6척
 
기물-중국: 물통, 노, 닻
 
식물-중국: 후추
 
지명-중국: 강남의 조주
 
풍습-중국: 강남의 조주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모화: 기쁘게도 다시 중국 땅에 도착
 
심리(최부): 안심
 
인명-조선: 정보, 안의, 거이산, 상리
 
사회-조선: 벼슬아치의 위의(威儀)
 
유학-조선: 권도(權道),
 
제도(관복)-조선: 관대(冠帶)
 
리더십-조선: 너는 어찌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우리들을 관부(官府)로 데려가 공술서를 받을 것인데, 너는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저들은 반드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유학-조선: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孝)와 신(信)이 아닌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행정-조선: 공술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지명-조선: 조선국
 
제도(관직)-조선: 조신(朝臣)
 
사건-조선: 부친상, 표류
 
식물-조선: 후추
 
지리-조선: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빛깔이 흰 데서부터 푸른 데로 되돌아온 이후 바람의 힘은 비록 세지만, 물결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또한 제주 바다처럼 험했다면 어찌 다시 섬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매우(梅雨), 청풍(淸風), 박초풍(舶連風)
 
비유-조선,중국: 배는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면서, 동, 서, 남, 북으로 부평초처럼 표류하여 정처가 없었으니
 
기물-조선: (강한) 배
 
시간: 정월, 2월, 4월, 풍랑이 사나울 때,
 
풍습-조선: 연등절
 
  
 
16th Day. Arrival and Mooring at Niu-t'ou-wai-yang. This day was cloudy. The sea was red and black and thoroughly muddy.
 
16th Day. Arrival and Mooring at Niu-t'ou-wai-yang. This day was cloudy. The sea was red and black and thoroughly muddy.

2020년 6월 23일 (화) 00:49 기준 최신판

개요

학력

  • 서울원묵고등학교 졸업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경력

  • 2017.01.01~2017.12.31 제 72대 동국대학교 사학과 학생회 문화부장
  • 2020.01.01~ 제 75대 동국대학교 사학과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좋아하는 것

  • 역사, 밴드, 음악, 보컬, 게임

기말과제

최부의 표해록

재미있는표해록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1월 16일

十六日,到泊于牛頭外洋 우두외양,是日陰,海色赤黑中全濁,西望連宰疊嶂,撑天包海,意有人煙,駕東風而至,則見山上多有烽燧臺 봉수대列時,喜復到中國地界,午後,風浪尤緊,雨下漆味,舟從風所驅,瞥然間忽漂至兩島間,傍岸而過,則望見有中船六隻列泊,程保等請於臣曰:“前至下山,不示以官人之儀,以招賊人,幾不免死,今宜從權具冠帶,以示彼船,”臣曰:“爾何以害義之事導我嗽?”保等曰:“當此之時,與死為鄰,何暇治禮義哉?姑當行權,便取生道,然後以禮治喪,不害於義,”臣拒之曰:“釋喪 상복即吉,非孝也,以詐欺人,非信也,寧至於死,不忍處非孝非信之地,吾當順受以正,”安義來請日:“我姑着此冠帶,示若官人然,”臣曰:“非也,彼船若或如前所遇賊,猶之可也,若是好船,必驅我曹訪官府取供辭,將何辭以對?少或不直,彼必生疑,莫如守正之為愈也.”俄而所謂六船,掉圍臣船,一船有人可八九,其衣服語音,亦與下山所遇海賊一般,寫示臣等曰:“看你異類,來從那裏?”臣令程保亦寫以 答曰:“我是朝鮮國 조선국朝臣,奉 王事巡海島,奔喪過海,被風而來,不識此海何國地界?”其人答曰:“此海乃牛頭外洋,今隸大唐國 대당국台州府臨海縣 태주부임해현界也.”程保以手指其口,其人以水桶來遺,又指北有山,曰:“此山有泉,你可取,做飯以吃,你有胡椒 후추,可送我二三兩,”臣答曰:“本國不產胡椒,初不賣來!”其人等遂掉船稍却,圍包臣船,列立下訂,臣船亦依岸而泊,令安義、巨伊山、向理等下舟登山,通望人煙,則果是連陸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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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於此行所歷滄波,雖若一海,水性水色,隨處有異,濟州 제주之海,色深青,性暴急,雖少風,濤上駕濤,激浪濡潤,無甚於此,至黑山島之西猶然,行過四畫夜,海色白,越二書夜愈白.又一畫夜還青,又二畫夜還白,又三畫夜赤而濁,又一畫夜赤黑中全濁,臣之行舟,視風從却,東西南北,萍漂無定,其間所見海色,大鑒如此,自由而還青以後,風力雖,濤不甚高,至還白以後,始有島醫,島皆岩壁,谷咸儡,上載土,有雜卉香草,翁蔚長青.水性悠弱,若不遇大風,則罕見驚波駭浪之患,臣於遇賊復漂之海,亦如濟州之海之險,則豈能復見得島津乎?大抵每歲正月,正當隆寒之極,则風怒號,巨濤震激,乘船者所忌,至二月漸得風和,濟州俗猶號為燃燈節,禁不渡海,且江南潮人,亦不於正月浮海,至四月梅雨既過,颯然清風,海舶初回,謂之舶()()風,臣之漂海,適當風波險惡之時,海天霾哇,日復尤甚,橋帆維權,或折或失,飢渴困苦,動經旬日,一日之間,溺敗之機,非一二度矣,然幸僅保性命,得泊海岸者,非特潰雨雨取汁,以沃焦鹏,舟實牢緻價駛,能壓風濤之故也.

우두(牛頭)앞 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잇닿아 겹친 산봉우리가 하늘을 버티고 바다를 둘러쌌는데 인가(人家)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동풍을 타고 이르러, 산 위에 봉수대(峰燈臺)가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니 기쁘게도 다시 중국 땅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오후에는 풍랑이 더 세고 보슬비가 자욱하게 내리는데, 배는 바람이 모는 방향대로 나아갔습니다.

잠깐 동안에 갑자기 표류하여 두 섬 사이에 이르러 기슭을 옆으로 지나가니, 중선(中船) 6척이 죽 늘어서 정박하고 있는 것이 멀리 보였습니다.

정보 등이 신에게 청하기를,“전일 하산(下山)에 이르렀을 때엔 벼슬아치의 위의(威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해적을 불러들여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권도(權道)를 따라 관대(冠帶)를 갖춰서 저들의 배에 보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죽음이 임박했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리겠습니까? 일단 권도를 행하여 살길을 찾은 뒤에 예로써 상사(喪事)를 치르더라도 의리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효(孝)가 아니고[5],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孝)와 신(信)이 아닌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나는 마땅히 정당한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와서 청하기를, “제가 일단 이 관대를 착용하여 관인(官人)처럼 보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 된다. 저 배가 혹시 전에 만났던 해적과 같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만약 좋은 사람의 배라면 반드시 우리들을 관부(官府)로 데려가 공술서를 받을 것인데, 너는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저들은 반드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조금 후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와서 신의 배를 둘러쌌는데 한 배에 8-9인이 있었고, 그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하산에서 만났던 해적과 같았습니다.

글을 써서 신 등에게 보이기를,“보아하니 그대들은 다른 나라 사람 같은데 어디에서 왔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또한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 조신(朝臣)으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면서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이곳에 왔소. 이 바다가 어느 나라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이 바다가 바로 우두 앞바다로서, 지금의 대당국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속해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켰습니다. 그 사람이 물통을 가져와서 주고, 또 북쪽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산에 샘물이 있으니 당신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먹을 수 있소. 당신들에게 후추가 있으면 우리에게 두세 냥 정도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후추가 산출되지 않아 애초부터 가지고 오지 않았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조금 물러나 신의 배를 포위하여 죽 늘어서 닻을 내리므로, 신의 배도 또한 언덕을 의지하여 정박하였습니다. 안의, 거이산, 상리 등으로 하여금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 인가를 둘러보게 했더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습니다.

신이 이번에 지나온 바닷물은 비록 동일한 바다지만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신의 배는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면서, 동, 서, 남, 북으로 부평초처럼 표류하여 정처가 없었으니, 그동안에 본 바다 빛깔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빛깔이 흰 데서부터 푸른 데로 되돌아온 이후 바람의 힘은 비록 세지만, 물결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빛깔이 푸른 데서 흰 데로 다시 되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섬이 나타났는데, 섬은 모두 층암절벽에 우뚝 솟은 바위더미로 위에는 흙을 이고 있어 잡초와 향초가 무성하게 푸르렀습니다.

물살은 느리고 약하므로 만약 큰바람만 만나지 않는다면 거센 물결로 인한 재난은 드뭅니다. 신이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바다가 또한 제주 바다처럼 험했다면 어찌 다시 섬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무릇 매년 정월은 바로 한창 추울 때로서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큰 물결이 진동하여 부딪치게 되니, 배를 타는 사람들이 꺼리는 때입니다.

2월에 가서야 점차로 바람이 잦아들지만, 제주 풍속은 오히려 연등절(燃燈__)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강남의 조주(潮州)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4월에 이르러 매우(梅雨)가 지나가고 난 뒤 시원한 청풍(淸風)이 불면 바다를 다니는 큰 배들이 돌아오니, 이를 '박초풍(舶連風)'이라 부릅니다.

신이 표류할 적은 마침 풍랑이 사나울 때로서 바다날씨는 나날이 흐려졌고, 돛과 밧줄과 노가 부러지거나 잃어버렸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받은 것이 열흘이었으며, 하루에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해안에 배를 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빗물에 옷을 적셔 물을 짜내 타는 창자를 적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가 견고하고 빨라 능히 풍랑을 이겨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th Day. Arrival and Mooring at Niu-t'ou-wai-yang. This day was cloudy. The sea was red and black and thoroughly muddy.

To the west we saw rows of peaks, range behind range, reaching up to the sky and cradling the sea. They gave an impression of people living there. When we rode in on the east wind, we saw that on top of the mountains there were many beacon towers in a line along the peaks. We were overjoyed to have reached the shores of China again. After noon, the wind and waves were exceedingly rough. Rain fell in a drizzle, and it was dark. The boat being driven by the wind, in the twinkling of an eye, we drifted between two islands. As we passed by a shore, we saw that there were six boats moored in a row. Chòng Po and others made a request of me, saying, “Previously, when we reached Hsia-shan, you did not display the signs of an official, and we attracted pirates. We barely escaped dying. Now you should follow the exception to the rule. Put on your cap and sash and show them to those boats.” I said, “How dare you suggest to me a thing harmful to morals?” Chòng Po said, “This moment we are close to death. What time is there to observe propriety and morality? For the time being, practice the exceptions so that we can survive; later observe your mourning with propriety. That is not harmful to morals.” I disagreed with him. I said, “To take off mourning clothes and put on festive ones goes against filial piety. To take advantage of men by deceit goes against sincerity. I would rather die than oppose filial piety and sincerity. I must conform to what is right.” An Ui came and made a request, saying, “For the time being, let me wear this cap and gown and appear to be an official.” I said. “No. If those boats are of the type in which we met the pirates before, something like that would be all right. If they are loyal boats, they will surely drive us on to a public office to take a deposition. What statement would you make then? If there was the slightest discrepancy, it would give rise to suspicion. It is better to observe the strictest honesty.” Suddenly the six boats rowed up and encircled my boat. There were about eight or nine men in each boat, and their clothing and speech were of the kind of the pirates we had met at Hsia-shan. They wrote and showed us a note that said, “We see you are foreigners. Where do you come from?” I ordered Chòng Po likewise to write and answer them. We said, “I am a minister of the Court of Korea. I had undertaken to tour an island in the King's service and was hurrying across the sea into mourning when I was blown here by a wind. I do not know this sea or what country this land belongs to.” The men answered, “This sea is Niu-t’ou-wai-yang. It is now part of the land of Lin-hai County, T'ai-chou Prefecture, China.”[15] Chòng Po pointed to his mouth. The men brought buckets of water and gave them to us and then pointed to the north, where there were mountains, and said, “Those mountains have springs, where you can draw water and cook a meal to eat. If you have black pepper, give us two or three ounces.”[16]

I answered, “My country does not produce black pepper. I did not start out with any." The men then rowed their boats off a little, surrounded my boat, and dropped anchor. My boat, too, drew near the shore and moored. I ordered An Ŭi, Kõisan, and Sang-ni to disembark and climb a mountain. They looked round for human settlement. This was, indeed, a place joined to the mainland. XXX26 Though the vast expanse of water through which I had passed on this voyage seemed to be a single sea, the current and color of the water differed according to the place. In the sea of Cheju, the color was deep green and the current violent and swift. Though the wind was slight, wave climbed over wave, boiling and swirling. There was nothing to equal it. It was like that as far as west of Hŭksan Island. When we had gone four days and nights, the color of the sea was white. In two more days and nights it became whiter, and in another day and night it was green again. In two more days and nights it was white again. Three days and nights after that it was red and muddy. One more day and night and it was red and black mixed with mud.

In sailing the boat we simply followed the wind, north, south, east, or west, drifting aimlessly. The colors of the sea that I saw in that time were generally as above, going from white back to green.

Though the force of the wind was strong, the waves were not very high. There were first islands from the time that the sea became white again. The islands were all precipitous, with cavernous valleys and masses of stones. On the tops lay earth, and there was a variety of plants and fragrant grasses, luxuriously green and vigorous. The current was very weak. When we did not meet high winds, we had little trouble with violent waves. If the sea in which I met the pirates and was set adrift again had been as perilous as the Cheju sea, we could never have sighted islands again. XXX XXX In general, the First Month of every year being the middle of winter, violent winds rage, and enormous seas run. That is the season that travellers avoid. With the Second Month, the winds gradually grow calmer. In Cheju it is popularly called the Festival of Lights.27 But even then it is forbidden to cross the sea. Men in the bays of Kangnam28 do not sail the sea in the First Month either. After the rainy season of the Fourth Month has passed, the winds suddenly become steady, and ocean junks begin to cross. They are called the junk-driving winds.

I drifted to sea in the season of dangerous wind and waves. The sea and sky were darkened by violent storms for days on end. The masts, sails, lines, and oars were either broken or lost. We spent ten days at a time suffering from hunger and thirst, and more than once or twice a day we came close to sinking. But fortunately we were just able to survive and moor on a seashore. That was not only because we collected rain water that had soaked us to wet our parched insides but also because the boat was truly sound and nimble and could withstand the wind and waves. XXX

1월 17일

十七日, 捨舟登陸, 是日雨, 遲明, 所謂六船擁來, 語臣等曰:“看你也是好人,隨我可行,你有奇物,送些與我:”臣答曰:“漂流已久,所賣之物,盡撒海中,若指我生路,所乘船楫,皆焦的所有.”因問人居遠近,其一人曰:“此地也,近官,你要去不妨,一人曰:“過前一里,便有人家,一人曰:“此處人家便遠,不可止此,”臣又問官路遠近,其一人曰:“台州府距此一百八十里,” 一人曰:“一百五十里,一人曰:“二百四十里,”其語端彼此有違,不可信也.

其人等相率鬧擾,爭入臣船,目前寓雖些小物,無不壤歌,謂臣等曰:“不同我去,我當作怒,安義請舍船,乘其人船,隨其所去,李植欲擊殺一人以却之,臣曰:“爾等之計皆非也,觀彼人其言不實,劫奪又甚,情偽淺深,未可知也,彼若昔者下山海賊之類,則從安義之計而從歸,則彼必掉至絕島,沈殺我等,以減其跡,彼若或漁船若防禦之船,則從李慎之計而擊殺,則彼必掩其所為,反以我為異國人來劫殺人云爾,則大國之邊境騷然,我為戚,語且不通,難以辨明,必皆為邊將所戮,爾等之計,皆自取死途也,莫若權辭以 觀其勢,”臣謂其人曰:“我浮海日多,飢渴困德之極,危命僅一線耳,請做飯療飢,然後同行.”其人等復曰:“你少留緩行”即掉舟少却,可二三里許,復環臣船而泊,以兩故皆入船倉中,無觀望者,臣謂同舟人曰:“看彼人言語動止,也甚荒唐,看此山已連陸路,必通人居,不於此時善處,則我等之命,懸其掌握,終必為海曲之鬼,”遂率陪吏等先下船,諸軍人接踵而下,冒雨穿林,逃遁奔匿,過二嶺,領皆枕海,有石如甬道,行六七里,得一里社,臣謂陪史軍人等日:“同此生死之苦,無異骨肉之親,自此相保,則可以全身而還,汝等若遇患難則同救之,得一飯則分吃之,有疾病則相扶持之,無一人亡失可也.”皆曰:“唯命.”又曰:“我國本禮義之國,雖漂奔窘遠之間,亦當示以威儀,使此地人知我國禮節如是,凡所到處,陪吏等拜跪於我,軍人等拜跪於陪史,無有過差,且或於里前,或於城中,有墓聚來觀者,必作揖禮,無

p.366 敢肆突.”皆曰:“唯命.”至其里,則里中人老少男女爭怪臣等,觀者如墙,臣與從者而辑,皆合袖鞠躬以答之,臣即告以來自朝鮮之故,有二人,其容貌該非庸人,謂臣等:“你是朝鮮國人,緣何入我國界?你若是賊人,若是進貢之人,若是被風無定之人,逐一寫來,遞送還國.”臣曰:“我本朝鮮國臣,奉王命往海島,奔父喪過海,遭風風見漂,得到海岸,舍舟緣陸,望尋人煙而來,乞諸大人,聞于官府,以活垂死之命,”即以所費印信、冠帶、文書示之,其二人覽畢,指臣前鎮撫、陪吏等以次羅跪,末端軍人等亦以次俯 伏,謂臣曰:“聞貴國禮義邦久矣,果所聞,”即叫家僮,將米漿茶酒以體偏及軍人,任其所飲,指里前佛堂,曰:“你可住此堂安歇.”臣至佛堂,解濕衣以風,未幾,其二人又做飯來饋,果皆忠厚人也,而亡其職姓名,俄而其二人來言:“你可起身,送你好處,” 臣問曰:“好處幾里?”其二人謊辭曰:“還有二里,”曰:“其地名何?”曰:“西里堂也”曰:“雨甚路濤,時又向晚,奈何?” 曰:“去處不遠,不須憂矣.”臣從其言,率從者登途而行,則里中人或帶杖劍,或擊鋅鼓,前途有聞鋅鼓之聲者,羣聚如雲,叫號虞突,夾左右擁前後而驅,次次遞送,前里如是,後里又如是,行過五十餘里,夜已央矣,

배를 버려두고 상륙하였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날이 샐 녘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빙 둘러싸고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당신들은 좋은 사람들 같소. 우리를 따라 오시오.

당신들에게 진기(珍奇)한 물건[1][2]이 있으면 조금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바다에 표류한 지 이미 오래라, 가졌던 물건은 모두 바다에 버렸소. 만약 우리의 살길을 가르쳐 준다면 타고 온 배와 노는 모두 당신들에게 주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마을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관부(官府)에 가까우니 당신들이 갈 수도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으로 1리[3]만 가면 곧 인가가 있소”라 하고, 한 사람은 “여기는 인가와 먼 곳이니,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오”라 하였습니다.

신이 또 관청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은 "태주부(台州府)는 이곳에서 180리나 떨어졌소”라 하고, 한 사람은 150리오.”라 하고, 한 사람은 “240리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서로 어긋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신의 배에 다투어 들어와, 눈에 보이는 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물건일지라도 모두 빼앗았습니다.

신 등에게 말하기를,“우리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를 내고 말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배를 버려두고 그들의 배에 타고 따라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정은 그중 한 사람을 쳐 죽여서 그들을 물리치자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옳지 않다. 살펴보건대 저들은 그 말이 성실하지 못하고 물건을 겁탈하는 것 또한 심하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이 전일의 하산의 해적과 같은 부류라면, 안의의 계책대로 저들을 따라 가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노를 저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이르러 우리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는 흔적을 없애버릴 것이다. 저들이 어선(漁船)이나 방어선(防禦船)이라면, 이정의 계책에 따라 쳐 죽이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한 짓은 숨기고 도리어 우리 이국인(異國人)이 와서 약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할 것이니, 그렇다면 대국(大國)의 변경이 시끄러워지는 결과가 된다. 우리를 도적으로 무고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아 해명하기가 어렵게 되면 반드시 모두가 변장(邊將)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스스로 죽을 길을 취하는 것이니, 임시변통의 말을 하여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조)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조선선비의 정도, 학문하는 이유=격몽요결[4]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바다에 떠다닌 지 오래고, 굶주리고 목말라 피곤함이 극도에 이르러, 위태한 목숨은 겨우 한 오라기 실과 같소. 청컨대 밥을 지어먹어 시장기를 면하고 난 후에 같이 가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를, “당신들은 조금 머물렀다가 천천히 가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노를 저어 2-3리가량 조금 물러가더니 다시 신의 배를 둘러싸고 정박하였습니다.

비 때문에 모두 선창(船__)속에 들어갔으므로 망을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은 같이 배를 탄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저 사람들의 말과 거동이 매우 황당하다. 이 산을 살펴보면 육로에 잇닿아 있으니 반드시 인가에 통할 것이므로, 이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목숨은 저들의 손에 달려 있어, 끝내는 반드시 바다 한 모퉁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배리(陪吏) 등을 거느리고 먼저 배에서 내리고, 여러 군인들도 잇달아 내려 비를 무릅쓰고 숲 사이를 뚫고 도망해 숨어 들어갔습니다.

두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는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길 양쪽으로 돌담을 쌓아 놓았습니다.

6-7리를 가니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신은 배리와 군인들에게 말하기를,“이처럼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재난을 당한다면 함께 구조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돌보아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5][6]이니 비록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한 가운데 놓이더라도, 또한 마땅히 위의(威儀)를 보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 같은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배리들은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고, 군인들은 배리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틀림이 없도록 하라. 또 마을 앞에서나 성(城) 안에서나 떼 지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읍하는 예의를 차리고 감히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 마을에 이르니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신은 종자(從者)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 읍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7]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조선에서 온 연유를 알렸습니다.

용모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두 사람이 신 등에게 말하기를,“당신들이 조선국 사람이라면 어떤 사연으로 우리나라 국경을 넘어 들어오게 되었소? 당신들이 해적인지 진공(進貢)하는 사람인지, 혹은 바람을 만나 정처 없이 표류해 온 사람인지, 낱낱이 써 내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본디 조선국 신하로 왕명을 받들어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던 중, 바다를 건너다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해안에 도착하여 배를 버려두고 육지를 따라 인가를 바라보고 찾아 왔으니, 원컨대 대인(大人)[8]들께서는 관부(官府)에 알려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곧 가지고 온 인신(印信)·관대(冠帶)· 문서(文書)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다 보고 나서, 신의 앞에 진무(鎭撫), 배리 등이 차례로 늘어 꿇어앉고, 말단 군인들도 차례로 부복한 것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라고 하였습니다.

곧 가동(家童)[9]을 불러 미음[10]과 다주(茶酒)를 가져다 접대케 하는데, 군인들에게까지도 두루 마시게 하였습니다.

미음=米漿미장 마을 앞의 불당(佛堂)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들은 이 불당에 머물러 편히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불당에 이르러 젖은 옷을 벗어서 바람을 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은 또 밥을 지어 와 접대했는데 과연 모두 충후(忠厚)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관직과 성명은 잊어버렸습니다.

조금 후에 그 두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떠나야만 하겠습니다. 당신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리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곳이 몇 리나 됩니까?”

그 두 사람은 속여서 말하기를, “2리쯤 더 가면 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지명은 무엇입니까?”

“서리당(西里堂)입니다.”

“비가 많이 오고 길이 진흙길인 데다 해가 또 저물어 가는데 어찌하겠습니까?”

“가는 곳이 멀지 않으니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신은 그 말에 따라 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니,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와 칼을 집어 들고 징과 북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앞길에서 그 징과 북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소란스럽게 큰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에서 밀려들어 차례로 교대하며 호송하였습니다.

앞마을에서도 뒷마을에서도 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50여 리를 지나니 밤이 벌써 깊었습니다.

사건: 상륙, 약탈, 도망 기후: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많이 오고, 시간: 날이 샐 녘, 해가 또 저물어, 밤이 벌써 깊었습니다 제도(교통)-중국: 6척의 배 지명-중국: 태주부(台州府),서리당(西里堂) 지리-중국: 두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는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6-7리를 가니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50여 리를 지나니 풍경-중국: 길 양쪽으로 돌담을 쌓아 놓았습니다, 길이 진흙길 사회-중국: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해적, 진공하는 사람, 표류해 온 사람, 비유-중국: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유학-중국: 나아가 읍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 풍습(음식)-중국: 미음, 다주, 밥 의전-중국 인물-중국 심리-중국: 감동(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속임, 기물-중국: 몽둥이와 칼을 집어 들고 징과 북, 행정-중국: 교대하며 호송하였습니다

심리(최부): 의심 인명-조선: 안의, 이정 모화: 대국 리더십-조선: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스스로 죽을 길을 취하는 것이니, 임시변통의 말을 하여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보아하니 저 사람들의 말과 거동이 매우 황당하다. 이 산을 살펴보면 육로에 잇닿아 있으니 반드시 인가에 통할 것이므로, 이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목숨은 저들의 손에 달려 있어, 끝내는 반드시 바다 한 모퉁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재난을 당한다면 함께 구조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돌보아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이니 비록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한 가운데 놓이더라도, 또한 마땅히 위의(威儀)를 보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 같은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배리들은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고, 군인들은 배리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틀림이 없도록 하라. 또 마을 앞에서나 성(城) 안에서나 떼 지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읍하는 예의를 차리고 감히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유학-조선: 골육, 위의(威儀), 예절, 예의, 나아가 읍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 왕명, 진무(鎭撫), 배리 등이 차례로 늘어 꿇어앉고, 말단 군인들도 차례로 부복한 것, 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지명-조선: 조선 제도(관직)-조선: 신하, 진무(鎭撫), 배리, 군인 기물-조선: 인신(印信)·관대(冠帶)· 문서(文書) 지리-조선: 해도 17th Day. Leaving the Boat and Landing. This day it rained. At dawn the six boats came crowding round. They addressed us: “You are law-abiding men, we see. Come with us; if you have rare things, give us a few.” I answered, “We have drifted a long time. All the things we had have been scattered in the sea. If you show me the way to rescue, the boat and oars by which we sailed are all yours as they are.” Then I asked how far we were from the nearest settlement. One of the men said, “This place is near a public office. If you want to go there, it is no trouble.” Another man said, “If you go ahead one li there is a settlement.” Another said, “Even though a settlement is far from here, you must not stop here.” Then I asked whether the public road was far. One of the men said, “T'ai-chou Prefecture is 180 li from here.” Another said, “150 li.” Another said, “240 li.” There were contradictions among them, and they could not be trusted. The men, jostling and shoving one after the next, fought to come into my boat. Whatever their eyes fell on, though small, worthless things, they seized. They said to us, “If you do not go with us, we shall be angry.” An Ŭi asked me, “Leave the boat, get into their boat, and go where they go.” Yi Chồng wanted to attack one man and kill him, to drive them away. I said, “Neither of your plans will do. It seems to me that since what they say is untrue and since they have been robbing us greedily, it is impossible to tell how honest they are. If they are of the type of the previous ones, the Hsia-shan pirates, and we follow An Ui's plan and go with them, they will row to a remote island and drown us to cover their tracks. If they are fishing boats or defense boats and we follow Yi Chong's plan and attack and kill [a man], they will cover up what they have done and instead will make us out to be foreigners who have come to plunder and kill men. Then there will be an uproar along the coast of China and we shall be falsely accused of being pirates. Our language, moreover, is different, so that it will be hard for us to argue our case. We shall all be executed by the coast guards. By either of your plans, we should bring death upon ourselves. For the time being, it is best to refuse and see what their attitude is.” I said to the men, “We have sailed on the sea for many days. In extremities of hunger, thirst, and suffering, our lives hung by a thread. Please let us make a meal to satisfy our hunger, and after that we shall go with you.” The men replied, “Stay here a little and do not go.” They rowed their boats off a bit and about two or three li away encircled my boat again and anchored. Because of the rain they all went into the cabins of the boats. No one was looking out. I said to the men in the boat with me, “I see that the speech and actions of those men are untrustworthy. I see that this mountain joins a way to the mainland: it must lead to a settlement. If we do not make the best of this moment, our lives will lie in their grasp, and eventually we shall be ghosts in the briny deep.” I then led the secondary officials off the boat first, and the troops followed in our footsteps. We fled hiding into the rain and woods. We crossed two ridges that overlooked the sea. There were rocks like those of a walled road. When we had gone six or seven li, we reached a village. I said to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e troops, “You share with me this mortal suffering;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us. If we defend each other from now on, we can return home safe and sound. If, when you meet troubles you overcome them together, when you get a meal you divide it to eat, when there is sickness you support each other, we can manage without losing a single man.” They all said, “As you command.” I said, “Our country is a country of propriety and morality. Though we are in flight and distressed, we ought still to show a dignified bearing and let the people of this land know that the formality of our country is as it is. Whereever we go, the secondary officials should bow to me, and the troops should bow to the secondary officials. There should be no skipping over ranks. When, moreover, crowds come and look at us in front of villages or in walled towns, we must bow with hands folded and not venture to be too abrupt.” They all said. “As you command.” When we came to the village, the people, young and old, male and female, all marveled at us. The onlookers were like a wall. I and my staff advanced and folded our hands in greeting. They all brought their sleeves together and bowed in answer. Then I informed them about how we had come from Korea. There were two men whose appearance showed that they were not common. They said to us, “If you are Koreans, why did you enter our country? Write it all out for us, whether you are pirates, or bringers of tribute, or men displaced by a wind. We shall send you back to your country.” I said, “I am a minister of Korea.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and went to an island. Hurrying into mourning for my father, I was crossing the sea and met a wind. I was blown adrift and came to a sea coast. I left the boat, went ashore, and, seeking human settlement, came here. I beg you gentlemen to inform the public office of this and save us from impending death.” Then I showed them the seal, cap, sash, and documents that I had. When the two men had finished looking at them, they pointed to the Security Officer and secondary officials in front of me, who were prostrated in order of rank. [The two men) said to me, “We have long heard that your country is a land of protocol and morality. This indeed proves what we have heard.” Then they summoned house servants and had rice water, tea, and wine brought to us all, including the troops. They let us drink and then pointed to a Buddhist temple in front of the village. They said, “You may stay in that temple and rest.” I went to the temple, took off my damp clothes, and aired them. Soon the two men had more food prepared, brought, and served to us. They were truly worthy men, but I have forgotten their names and positions. Suddenly, the two men came and said, “You must get up. We shall send you to a good place.” I asked, “How many li away is this good place?” They lied and said, “It is two li more.” I said, “What is the name of the place?” They said, “Hsi-li-t'ang." I said, “It is raining hard, and the road is muddy, and, too, it is toward evening. How can we go now?” They said, “The place where you are going is not far. You must not worry.” I did as they said. As I set out at the head of my staff, some of the people of the village took up staves and swords and some beat gongs and drums. I heard the sound of gongs and drums on the road ahead, [and when we advanced that far] people gathered round like clouds and shouted at us threateningly. They pressed in on our left and right, crowded before and behind us, and drove us on. They passed us on successively, each new village like the previous one. When we had gone more than fifty li, the night was already well advanced.

1월 18일

十八日,遇千戶許清於路上,是日大雨,子半,臣等因為里人所驅,路經一高阜,松竹成數,遇有自稱隱儒姓王名乙源者,憐臣冒夜衝雨,艱楚被驅,止里人少住,問臣所從來,臣亦告以漂風之故,乙源爛然,即呼酒勸臣,臣曰:“我朝鮮人守親喪,不飲酒食肉茹董及甘旨之味,以終三年,蒙饋酒,感恩則已深矣,然我今當要,敢辭,乙源遂饋臣以茶,體從者以酒,因問曰:“你國亦有佛否?”答曰:“我國不崇佛法,專尚儒術,家家皆以孝悌忠信為業,乙源握臣手眷顧相別,其里人驅臣等至一大嶺,臣足如蘭,不能前進,里人擁抱臣臂,前引後推而過,又遞至二十餘里,其里中有大橋,里人皆揮偶枚亂擊臣等,肆劫奪大甚,吳山者負臣馬鞍,有一人毆擊壤去,臣等被枚前驅,顛仆哭泣,過二嶺,見遞他里,向曙,問其有大橋之里,則人曰:“仙岩里也.”自登陸以來,道傍觀者,皆揮臂指頭,作斬頭之狀以示,臣等莫知其意,行至蒲室里,雨少止,有官人率軍史而來,問臣曰:“你是何國人?怎麼到此?”臣曰:“我乃朝鮮國人,再登文科, 為國王近臣,奉事巡海島,奔喪出陸,遭風漂到于此,飢渴萬死之餘,僅續殘命,復為里人所驅,辛苦萬端之極,得遇宫人於此,是我得生之時也.”其官人即先饋臣以粥,隨以飯具,又令臣從者做飯以吃,臣間官人姓名職事,有王适者曰:“此乃海門衛千戶許清也,守塘頭寨,聞倭犯界,專為捕獲而來,汝其慎之,臣困欧路周四肢莫舉,許清謂臣曰:“我大唐法度嚴切,你別處人,不可久在此亂為攪擾良民,”令軍史等疾驅臣等,行五里許有官廨,乃唐頭塞也,過一長堤,可十餘里,雨復大作,臣跛行蹣跚,(專)(全)未動脚,中途僵仆,曰:“我之筋力竭矣,將及於死,早知若此,莫如死於海上之為便,”程保以下,亦對臣痛哭,被軍吏甚督,莫能少留,李楨、孝枝、尚理、玄山等身實者,相遞負臣以行,過二嶺,幾至三十餘里,有人居甚繁盛,前有佛宇,天將暮,雨不止,故許清欲留臣等于佛宇以經夜,其里人皆以謂不可,許清謂臣曰:“此方人皆疑你為劫財,故不許留,你雖艱步,不可不行!”令軍史驅臣等,過一大嶺,夜二更,至一川邊,

p.368 ________________

李楨等亦力盡,身且不保,不克負臣,從者等亦皆疲贏不能行,許清親執臣手以,臣之兩足梗塞,不運一步,高福大怒,指臣曰:“此漢此漢,無乃病狂嗽?汝若艱苦,宜委四肢,莫之能起可也.”臣辱其言,自以謂:我寧至死,宜死於此地,復臥不起,從者率皆顯队狼藉,許清軍吏或督或歐,而不得驅焉,良久,又有一官人領兵擁炬而至,甲胄、鎗劍、彭排之盛,嗩吶、喀曬、喇叭、鋅鼓、銳痛之聲,卒然重,拔劍使鎗,以試擊刺之狀,臣等驚駭耳目,喪魂飛魄,罔知所為,官人與許清整軍威驅臣等,可三四里,有大屋舍,以城郭,如關防然,問之則乃於賣場見桃知所,或云批驗所也,城中又有安性寺,止臣等于寺,許留宿焉,臣問其官人為誰,則有僧云:“此乃桃渚所千戶也,聞倭人犯境,領器械以備于此,因許千戶之報,率兵往驅你難以來,然未知你心真詐,明日到桃渚所,將訊汝.”

천호(千戶)114 허청(許淸)을 노상에서 만났습니다.

이 날은 큰 비가 내렸습니다.

한밤중에 신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서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은사(隱土)를 자칭하는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신이 밤에 비를 맞으며 고생스럽게 마을 사람에게 내몰려 온 것을 불쌍히 여겨, 마을 사람을 제지시켜 조금 멈추게 하고는 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신은 풍랑에 표류된 사연을 고하였습니다.

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을원은 마침내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이어서 묻기를,“당신 나라에도 불법(佛法)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을원은 신의 손을 잡고 뒤돌아보면서 작별하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신 등을 몰아 큰 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그 마을에는 큰 다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신 등을 마구 치면서 함부로 겁탈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오산이란 자는 신의 말안장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오산을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신 등은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체송(遞送)되니,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큰 다리가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물었더니,“선암리(仙岩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육지에 오른 이후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을 지어 보였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다가 포봉리(蒲峯里)에 이르니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관인(官人)이 군리(軍史)를 거느리고 와서 신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이곳에 도착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곧 조선국 사람으로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18 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친상을 당하여 육지로 나오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서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기갈로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잔명(殘命)을 겨우 이어오다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천신만고 끝에 관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살길을 찾은 듯합니다.”

그 관인은 곧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이어 밥 지을 그릇을 주어 신의 종자들에게도 밥을 지어서 먹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관인의 성명과 직업을 물으니 왕괄(王适)이란 자가 말하기를,

“이 분은 곧 해문위9 천호(海門衛千戶) 허청(許淸)인데, 당두채(塘頭寨)를 지키다가 왜적(倭賊)이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잡기 위해 왔으니 당신들은 조심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피곤하여 길가에 드러누워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대당(大唐)의 법도는 엄격하니, 당신들 딴 지방 사람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양민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군리(軍吏) 등에게 신 등을 빨리 내몰게 하였습니다. 5리가량을 가니 관해(官__)120가 있었는데 바로 당두채였습니다.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신은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전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중도에서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나의 근력이 다하였으니 곧 죽겠구나. 이럴 줄 일찍 알았더라면 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이하가 신을 마주하고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리들이 심히 독촉하므로 조금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현산 등 몸이 튼튼한 자들이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인가가 매우 많고 그 앞에는 불사(佛寺)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허청은 신 등을 불사에 머물러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당신이 비록 걷기가 힘들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밤 2경에 어느 한 냇가에 이르자 이정 등도 또한 힘이 다하여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였으니 신을 업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자들 또한 모두 피곤하여 걷지 못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신의 두 다리가 절룩거려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습니다.

고이복이 크게 성을 내며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미쳐버린 것이겠지! 당신이 그렇게 힘들다면 사지를 뻗어버리고 일어서지도 못해야 할 것 아니겠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굴욕을 느끼고, '내가 차라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여기서 죽으리라' 하고 다시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자들도 모두 쓰러져 여기저기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허청이 군리들을 시켜 독려하기도 하고 구타하기도 했지만 몰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또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갑옷, 창검, 방패의 위세와 쇄납(瑣吶)(태평소의 일종)122[1], 발라(__)123, 나팔, 징, 북, 총통(銃痛)의 소리와 함께 갑자기 겹겹 둘러싸더니, 칼을 빼고 창을 써서 치고 찌르는 동작을 해 보였습니다.

신 등은 눈과 귀가 몹시 놀라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관인은 허청과 함께 군사의 위용(威容)을 정돈하고 나서 신 등을 몰았습니다.

3-4리쯤 가니, 큰 옥사(屋舍)가 있고, 성곽이 빙 둘러서 관방(關防)124과 같기에 물었더니,

곧 두독장(杜瀆場)125으로 현재 도지소(桃知所) 도조서126 라고도 하고 비험소(批驗所)라고도 하였습니다.

성안에 안성사(安性寺)란 절도 있었는데, 신 등을 절에 머물러 유숙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그 관인이 누구인가 물으니,

어떤 중이 말하기를,“이 분은 곧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를 가지고서 여기에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허천호(許千戶)의 보고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들을 몰고 온 것이오.

그러나 아직 당신 마음이 진실된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내일 도저소에 이르면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사건: 쫓김(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구타하기도 했지만,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신 등을 몰았습니다) 제도(관직): 천호, 관인(官人), 군리(軍史),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 인명: 허청,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 왕괄(王适) 기후: 큰 비,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시간: 한밤중, 새벽녘, 날은 저물어 가는데, 밤 2시 식물: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리: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냇가, 3-4리쯤 가니 풍경: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심리: 동정(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의전: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풍습(음식)-중국: 술, 차 토목: 큰 다리,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행정: 체송(遞送), 대당의 법도는 엄격하니, 지명: 선암리, 포봉리(蒲峯里), 해문위, 대당(大唐), 두독장(杜瀆場)=도지소(桃知所)=도조서=비험소(批驗所) 기물: 밥지을 그릇, 갑옷, 창검, 방패, 쇄납(瑣吶), 발라, 나팔, 징, 북, 총통(銃痛) 건축물: 당두채(塘頭寨) 사회: 왜적,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 제도(관직): 군리 기후: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풍경: 인가가 매우 많고 불교: 불사, 안성사

사건-조선: 친상을 당하여, 표류 사회-조선: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풍습(음식)-조선: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유학-조선: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사회-조선: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유학-조선: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비유-조선: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인명-조선: 오산, 정보, 이정, 효지, 상리, 현산 기물-조선: 말안장 제도(시험)-조선: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 행정-조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제도(관직)-조선: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심리(최부): 좌절, 허탈(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 굴욕, 놀람(몹시 놀라 넋을 잃고) 심리(고이복): 분노, 놀람(몹시 놀라 넋을 잃고)

18th Day. An Encounter with Chiliarch Hsü Ch’ing on the Road. This day it rained hard.

By midnight, then, as we were driven on by villagers, the road passed over a high hill, where pines and bamboo grew thickly. We met a man, named Wang I-yüan, who described himself as a recluse scholar. He pitied us for braving the night and the rain and being driven on painfully. He stopped the villagers briefly and asked me what had happened, and I informed him, too, of the circumstances of our being blown adrift by the wind. I-yüan grieved for me; he called for wine and urged it on me. I said, “When we Koreans observe mourning for parents, we do not drink wine or eat meat, garlic, oniony plants, or sweet things for fully three years. I am deeply grateful for your kindness in offering me wine, but I am in mourning now, and I venture to decline.” l-yuan then served me tea and my staff wine.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the Buddha, too?” I answered, “My country does not revere the Buddhist law, it honors only the Confucian system. All its families make filial piety, fraternal duty, loyalty, and sincerity their concern.” I-yüan took my hands and looked at me compassionately, and we parted. The villagers drove us on, and we came to a large mountain range. My feet were swollen like cocoons, and I could not go forward. The villagers seized my arms, pulled me from in front, pushed me from behind, and over we went. We were passed on for over twenty li [and came to another village, where] there was a big bridge. The villagers, who struck us indiscriminately with crooked sticks, were recklessly cruel and plundered greedily. O San was carrying my horse saddle, but a man beat him off, seized it, and took it away. Beaten forward with sticks, we fell down and wept. We crossed two ranges and were turned over to another village. It was approaching dawn. When I asked what the vilļage with the big bridge had been, a man said, “Hsien-yen Village.” Ever since we had landed, all the onlookers by the road had sawed their arms across their throats, making gestures at u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and we did not know what they meant. We reached P’u-fêng Village. The rain let up a little. An official came with military officers and asked me, “What is your nationality? How did you come here?” I said, “I am a Korean. I have placed in the examinations twice and am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f the country. I had been given the state duty of touring an island, but hurrying into mourning, I put out from land, encountered a wind, and drifted here. Through hunger and thirst enough for dying many times, I have barely clung to life. I have been repeatedly driven on by villagers. In this extremity of suffering, I am fortunate enough to meet an official here, making it the moment of my rescue.” The official first served me congee and then solid food. He also ordered my staff to prepare food and eat. When I asked the official's name and position, one Wang Kua said, “He is Hsü Ch’ing, Chiliarch [Ch’ien-hu] of Hai-men Garrison [Wei].29 He defends T’ang-t’ou Stockade; having heard that Japanese were raiding the coast, he came specifically to take them prisoner. Take care.” I lay down exhausted at the side of the road; my four limbs would not move. Hsü Ch’ing said to me, “The laws of China are strict. You strangers may not stay here long upsetting the law-abiding people.” He ordered military officers to drive us on quickly. When we had gone about five li, there was a public office, which was T’ang-t’ou Stockade. We passed a long embankment, somewhat over ten li long. Rain fell heavily again.

I hobbled along, crippled, moving my legs hardly at all. I fell in the road and said, “My strength is gone, I am going to die. If I had known earlier that it was to be like this, it would have been easier to die at sea.” Chòng Po and those below him wept bitterly for me again. We were urged on by the military officers and could not delay a moment. Yi Chong, Hyo-ji, Sang-ni and Hyon San, men with sound bodies, took turns carrying me along.

We crossed two ranges, and when we had gone almost thirty li, there were many houses, in front of which was a Buddhist temple. Since it was about to get dark and the rain did not stop, Hsü Ch’ing wanted to put us up in the temple. All the villagers felt that could not be permitted. Hsü Ch’ing said to me, “All the people here suspect that you are bandits and, therefore, will not let you be put up. Though it is hard for you to walk, we have no choice but to go on.” He ordered the military officers to drive us on.

We crossed a large range and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came to the bank of a river. Yi Chong and the others had also exhausted their strength and could not take care of themselves, nor could they carry me. My whole staff, too, were weary and wasted and could not go on. Hsü Ch’ing himself took my hands and raised me. Both my feet were swollen and lame, and I could not move them a step. Ko I-hok was enraged. He pointed at me and said, “These Chinese! They must be mad! If you are really at the end of your strength, you had better just drop and not get up.” I agreed with what he said. I would rather die, I felt, and it was just as well to die here, so I lay down again and did not get up. Most of the rest fell down helter-skelter. Hsü Ch’ing ordered the officers to urge some of us on and strike at others, but they could not make us move. After some time, another official came with soldiers carrying torches. They were impressive with their armor and helmets, their spears, swords, and shields. Their gongs, drums, and firearms30 made a tumult. Without warning they surrounded us, drawing their swords and handling their spears in motions as if to practice attacking and cutting. The shock to our eyes and ears terrified us, and we did not know what to do.

The official and Hsü Ch'ing drew their forces up in formation and drove us on. In about three or four li, there was a big house, surrounded by a wall like a fortified pass. I asked about it. It was Yü-tu-ch’ang, the present T'ao-chih Chiliad;31 some said it was P’i-yen Chiliad.32 Inside the wall was An-hsing Temple. They stopped us at the temple and let us stay there for the night. When I asked who the official was, a priest said, “He is the Chiliarch of T’aochu Chiliad. He heard that Japanese were raiding the borders and had weapons brought here and set up. Then, receiving Chiliarch Hsü’s report, he led soldiers out to drive you on and bring you here. But he does not know yet whether you are honest or dishonest. Tomorrow you will reach T’ao-chu Chiliad, and he will question you.”

1월 19일

十九日,到桃渚所,是日大雨,兩千戶並馬驅臣等,冒雨以行,臣令程保告許清曰:“我等漂海,浮沈飢渴,臨死復甦,僅保餘喘,得到貴境,得遇官人,得飽昨朝之飯,以為得再生之地,乃於霖溪之雨,寧療之途,颠坑仆谷,撥石衝泥,體凍脚微,心焦力盡,昨夕不得食,今早又不得食,又驅出冒大雨而行,我其殆將半途而斃矣.”許清復曰:“昨因你走不到官司,自取飲,今若便到,則官自供給,速去速去”臣運步不得,仆路喂,四體委地不收,孝子、程保、金重、莫金、萬山、巨伊山等,環坐痛哭,適有牽牛而過者,程保 告諸千戶曰:“請解衣買此牛,以騎我員,”許清曰:“我亦豈不憐你難受此苦乎?緣拘國法,未得護汝耳,”李楨、孝枝、尚理等,又相代負臣過一嶺,可二十餘里,至一城,乃海門衛之桃渚所,行將近城七八里間,軍卒帶甲束乾號桶彭排夾道填街,至其城,則城有重門,門有鐵局,城上列建警成之樓,城中市店聯絡,人物繁富,引臣等至一公館許留焉,臣之形容枯,冠服塗泥,觀者絕倒,有姓名王碧者寫謂臣曰:“昨日已報上司,倭船十四隻,犯邊劫人,你果是倭乎?”臣曰:“我非倭,乃朝鮮國文士也.”又有姓名盧夫容者,自种措大,謂臣曰:“車同軌,書同文,獨你語音,不同中國,何也?”臣答曰: “千里不同風,百里不同俗,足下怪聽我言,我亦怪聽足下之言,習俗然也,然同得天所賦之性,則我之性,亦堯舜孔顏之性,豈嫌於語音之有異哉?”其人撫掌,曰:“你奔喪,可行朱文公《家禮》乎?”臣答曰:“我國人守喪,皆一遊《家禮》,我當從之,但為風所逆,今不得哭于柩前,所以痛哭.”其人又 問曰:“你作詩否?”臣答曰:“詩詞乃輕薄子嘲弄風月之資,非學道篤實君子所為也,我以格致誠正為學,不用意學夫詩詞也,若或有人先倡,不得不和耳.”又有一人寫臣掌上日:“看你也不是(反)(59人,只以言語不同,實同肯吃,誠可憐也,我告你一言,你其記之,善自處,慎勿輕與人言,自古倭賊____我邊境,故國家設備倭都指揮、備倭把總官以備之,若獲倭則皆先斬後聞,今你初繫舟處,轄獅子寒之地,守塞官汝為倭,欲獻截圖功,故先報云:“倭船十四隻,犯邊劫人,將領兵往捕汝汝之時,你輩先自捨,投入人多之里,故不得逞其謀矣,明日把總官來訊你輩,你其詳辨之,少有違

p.370 誤,事在不測云云,問其姓名,則曰:“我所以言之者,愛汝也,危之也.”掉頭而去,臣聞其言,毛髮豎立,即語程保等,保等曰:“路人指我等為斬伐之狀者,皆惑此謀故耳”日夕,千戶等官員七八人,置一大享,環立卓邊,引程保於前,問曰:“你一起一十四隻船,實否?”保對曰:“否,但一隻而已.”揮程保以出,又引臣問曰:“你眾所駕原船幾隻?”臣曰:“只一隻耳.”問曰:“我邊上瞭見倭船一十四隻,同泊處海洋,我因寺案官之報,已報于上司大人,你船十三隻,置之何地?”臣曰:“我之到海岸時,有貴人等乘船六隻,同泊一海,若要究六船人,則我之船數可知矣.”問曰:“你倭人,登劫此處,何也?”臣曰:“我乃朝鮮人也,與倭語音有異,衣冠殊制,以此可辨.”問日:“倭之神於為盜者,或有變服,似若朝鮮人者,安知你非其倭乎?”臣曰:“觀我行止舉動,證我印牌、冠帶、文書,則可辨情傷,”千戶等即令臣拿印信等物來以質之,因問曰:“你無乃以倭劫朝鮮人,得此物乎?”臣曰:“若少有 疑我之心,姑令送我北京,與朝鮮通事員一話,情實立見.”問曰:“你姓何名 誰?何州縣人?何職官?因何事幹到我邊境?開寫情狀,母敢謊虛,我其申報上司:”臣曰:“姓崔名溥,住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签仕朝著者有年,去丁未秋九月,奉國王命往濟州等處海島,今閏正月初三日,父喪,顛倒還家,遭風漂海,得到于此,”曰:“你父名何?職何?死在何地?”臣曰:“父名澤,格進士試,以養親不仕,閔孝服僅四載,又死于羅州.”供畢後,館臣于別館,以供臣及從者,我國人為公為私往來濟州,或遭風無去處者,不可枚悉,終能生還者,十百僅一二,是豈盡沈於海波乎?其漂入島夷若暹羅、占城之國者,無復望還,雖或漂至中國之界,亦為邊人所誤,以倭賊,折敵受賞,則誰能辨其情乎?如臣等者,若不先自下陸,若無印牌之信,__復免於禍哉? 我國家若依中朝制,凡百官給號牌、錫牌,篆書職姓名以異之,奉使臣無大小給節鉞,以王命,抑又沿海住人,雖以私商過海者,皆給號牌,書某國某州縣某姓名某形某年甲以別之,又置通事一員於濟州,凡奉使臣及三邑守合往還,常川帶行,以圖後慮, 然後庶可免於患,

도저소[1][2][3][4][5][6][7][8][9][10]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천호(千戶)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타고 신 등을 몰아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알리기를,

“우리들은 바다에 표류하여, 풍랑과 기갈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 겨우 잔명을 보전하여 귀국의 땅에 도착하게 되어 관인을 만나 어제 아침에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맛비와 진흙길에서 구덩이에 엎어지고 골짜기에 넘어지며 돌에 긁히고 진흙에 빠져, 몸은 얼고 발은 이지러졌으며 가슴이 타고 힘은 다 빠졌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밥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지 못했는데, 또 몰아내어 큰비를 무릅쓰고 떠나게 하니 우리는 아마 도중에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당신들이 관사(官司)[11]에 도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을 자초한 것이오. 이제 관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관에서 지급할 것이니 빨리 빨리 갑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길모퉁이에 넘어져서 땅바닥에 사지를 뻗어버렸습니다.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등이 빙 둘러앉아서 통곡하였습니다.

때마침 소를 끌고 지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정보가 천호에게 고하기를, "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당신들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당신들을 감싸줄 수 없을 뿐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한 성(城)에 이르니,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였습니다.

성에 이르기 7-8리 앞에서부터 갑옷을 입고 창칼과 총통이나 방패를 든 군졸들이 길거리 양 옆을 꽉 메웠습니다.

그 성에 이르니, 성에는 겹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성 위에는 경수루(警成樓)가 죽 늘어 있고 성안에는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신 등을 이끌어 한 공관(公館)128에 이르러 유숙케 하였습니다.

신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왕벽(王碧)이란 자가 글을 써서 신에게 보이기를,“어제 이미 상사(上司)에게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신은 정말 왜인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인이 아니라 곧 조선국 문사(文士)요.”

또 노부용(虛夫容)이란 자가 자칭 가난한 선비라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文字)가 같은데129,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천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백리에 습속이 같지 않은 것이오.130 족하(足下)는 내 말을 괴이하게 듣고, 나 또한 족하의 말을 괴이하게 듣는 것은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하늘이 준 성품을 같이 얻었으니 나의 성품 또한 요(堯)132 · 순(舜)133 · 공자(孔子)134 · 안회(顔回)135의 성품인데, 어찌 말소리가 다름을 의심하겠소?”

그 사람은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나도 마땅히 이를 따라야하는데 다만 역풍을 만나 지금까지 널 앞에 울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오.”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나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12]을 공부하였지 시사를 배우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소. 먼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13] -->사림파는 경학 우선, 사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이 손바닥 위에 글을 썼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불쌍하오.

(조) 여기서 나쁜 사람을 호인이라고 함: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사람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할테니 당신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처신을 잘 하고 부디 다른 사람과 경솔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도록 하시오.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번 우리의 변경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138 와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을 두어 왜적을 방비하게 했소.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이번에 당신이 처음 배를 맨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지인데, 수채관(守寨官)140은 당신을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그러므로 먼저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고 보고했던 것이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을 잡아 목 베려는 참에 당신들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갔던 까닭에 그들은 계략을 펴지 못했던 것이오.

내일은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니 당신은 자세히 해명하시오.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으니,“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을 아끼고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이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갔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하여 바로 정보 등에게 얘기했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길가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목 베는 시늉을 했던 것은 모두 이 계략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저녁 천호 등 관원 7-8인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탁자 가에 죽 둘러서 더니, 정보를 앞에 끌어내어 심문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함께 온 배가 14척이라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아닙니다. 한 척뿐입니다”라 대답하자 손을 휘둘러서 정보를 내보내었습니다.

또 신을 끌어내어 심문하기를, "너희들이 타고 온 원래의 선박이 몇 척이나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한 척뿐입니다.”

“우리의 변경에서 왜선 14척이 어제 그 곳 바다에 함께 정박한 것을 분명히 보았고, 내가 수채관(守寨官)의 보고에 따라 이미 상급 관청의 영감님께 보고를 올렸다. 너희 배 13척은 어디에 두었는가?”

“우리가 해안에 도착할 때 귀국 사람들이 탄 배 6척이 한 바다에 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6척의 배에 탄 사람을 조사한다면 우리 배의 수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왜인으로 이곳에 상륙하여 약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곧 조선 사람으로서 왜인과는 언어도 다르고 의관도 다르니, 이것으로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인으로서 도적질에 교묘한 놈은 혹 변장을 해서 조선 사람처럼 가장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그 왜인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나의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를 조사한다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호 등이 즉시 신에게 인신 등의 물건을 가져오게 하고는 대조한 뒤, 이어서 묻기를,“네가 왜인으로서 조선 사람에게서 이 물건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선 나를 북경(北京)으로 보내서 조선 통사원(通事員)[14]과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면, 실상이 즉시 드러날 것입니다.”

“너는 성은 뭐고, 이름은 뭐며, 어느 주현(州縣) 사람이고, 무슨 관직이며, 무슨 일로 인하여 우리 변경에 도착했는가? 그 정상(情狀)을 쓰되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상사(上司)에게 보고하겠다.”

“저는 성은 최, 이름은 부로[15],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성내에 거주하였습니다. 두 번 문과[16]에 올라 조정의 반열에 올라 처음으로 벼슬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17].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네 부친의 이름은 뭐고, 관직은 뭐며, 어느 곳에서 죽었는가?”

“아버지 이름은 택(澤)인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키 위하여 벼슬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공초(供招)를 마친 뒤 신을 별관(別館)에 숙박하게 하고,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공무로든 사무로든 제주도에 왕래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행방불명된 자가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열 명, 백 명 가운데 겨우 1-2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어찌 모두 바다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표류해서 도이(島夷)들이 사는 섬라(羅__), 점성(占城)국과 같은 나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었고, 혹시 표류해서 중국 땅에 이르게 된 사람도 국경지대 사람들이 잘못 왜적으로 무고하고 목을 베어 상을 받는다고 해도 누가 그 실정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 등과 같은 사람도 만약 먼저 스스로 육지에 내려오지 않았거나, 인신과 마패와 같은 신표(信標)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18]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명: 도저소, 해문위, 사자채, 북경(北京) 기후: 큰비가 내렸습니다 제도(관직): 천호(千戶),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 수채관, 파총관, 조선 통사원(通事員) 제도(교통): 말을 나란히 타고, 인명: 허청, 왕벽, 노부용 행정: 관에서 지급할 것,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동물: 소 심리: 동정 지리: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성에 이르기 7-8리 앞 기물: 갑옷, 창, 칼, 총통, 방패 건축물: 성에는 겹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경수루(警成樓) 사회: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언어: 문자(文字)가 같은데,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 유학: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 시: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비유: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 시간: 저녁 기물: 큰 탁자 하나 의전: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지명-조선: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인명-조선: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이정, 효지, 상리, 최부, 최택(澤) 심리-조선: 기진맥진, 좌절, 간절(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 공포(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비유-조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유학-조선: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 공자(孔子), 안회(顔回)의 성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경세제민(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천-조선: 하늘이 준 성품 모화-조선: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 공자(孔子), 안회(顔回)의 성품 사회-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풍습-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시-조선: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 기물-조선: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 호패, 석패, 절월 심리(최부): 당당함(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제도(관직)-조선: 두번 문과에 올라, 통사, 봉명사신, 3읍 수령 제도(시험)-조선: 진사시 행정-조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사건-조선: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 표류 19th Day. Arrival at T’ao-chu Chiliad. This day there was heavy rain.

The two Chiliarchs, riding abreast, drove us on, into the face of the rain. I ordered Chong Po to say to Hsü Ch’ing, “Hungry and thirsty, we drifted at sea, staring at death and regaining life. Barely staving off our dying gasps, we reached your border, met an official, and, yesterday morning, ate a full meal. We thought we had got to a place of rescue, where now, in continuous rain and muddy roads we stumble and fall in gullies and strike rocks and mud. Our bodies are frozen, our legs have sores, our hearts are anxious, and our strength is exhausted. Last night we did not eat, nor did we eat this morning, yet we are driven on, into the rain. We shall probably die on the way.” Hsü Ch’ing replied, “Yesterday you brought hunger on yourselves by not walking far enough to reach the authorities. Now, if you get there in good order, the authorities themselves will supply you. Hurry, hurry!" I took a step, failed, and lay down at the side of the road. My whole body had collapsed and would not rally. Hyo-ja, Chòng Po, Kim Chung, Makkům, Mansan, and Kõisan sat round me and wept bitterly. Just then, a man leading an ox happened to pass by. Chồng spoke to the Chiliarch: “Please let us take off our clothes and buy this ox to carry our chief.” Hsü Ch’ing said, “How can I, too, help but pity you all for the suffering you are undergoing? But since I am bound by the laws of the country, I cannot take your part.” Yi Chong, Hyo-ji, and Sang-ni again took turns carrying me. We crossed one range and in somewhat more than twenty li came to a wall, which was T’aochu Chiliad of Hai-men Garrison. As we approached the wall, for seven or eight li there were troops wearing armor and holding lances. Fire weapons and bold shields filled the roads. When we arrived at the wall, it had a double gate, and the gates had iron knockers. Watch towers were built along the top of the wall, and within it markets and shops were continuous and the people prosperous. We were led to a public guest house and allowed to stay there. My appearance was emaciated, my hat and gown muddy. The onlookers doubled up with laughter. One Wang Pi wrote a statement to me: “Yesterday it was reported to the authorities that fourteen Japanese boats had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re you really Japanese?” I said, “I am not Japanese, I am a Korean gentleman.” There was also a Lu Fu-yung who called himself a scholar. He said to me, "Why, when your carriages have the same axle-width and your books the same writing as those of China, is your speech not the same?” I answered, “The same wind does not blow over a thousand li, the same customs do not obtain over a hundred. If you wonder at the sound of my words, I wonder at the sound of yours. It is a matter of custom. But if we share the nature given by Heaven, my nature, too, is the nature of Yao, Shun, K’ung, and Yen.33 How can one object to a difference in speech?” The man applauded and said, “When you go into mourning, do you observe the [rules of] Chu Wen Kung's Chia li?” I answered, “In observing mourning, every one of my countrymen respects the Chia li. I should have followed it, but being driven off by winds, I have not yet been able to weep before the coffin. For that I grieve bitterly.” The man then asked, “Do you write poetry?” I answered, “Poetry is something by which the frivolous moan about the wind and moon and not a thing indulged in by sincere men devoted to the Way. I take as my study the investigation of things, extension of knowledge, and pursuit of truth. I do not pay much attention to poetry, but if someone addresses a poem to me, I am bound to respond with one of my own; that is all.” Another man wrote on my palm: “I see that you are not an evil man. But simply because your speech is not the same, you are really like someone blind and deaf. I truly pity you, and I shall tell you something; remember it. Be very careful of yourself. Do not talk freely to people. From olden times, Japanese bandits have repeatedly raided our borders. The state, therefore, has set up Anti-Japanese Commissioners and Anti-Japanese Commanders34 to cope with them. If they seize Japanese, they behead them all first and report it later. “Now the place where you first tied your boat was in the area of Shih-tzu Stockade. The Stockade Commander falsely accused you of being Japanese. He wanted your heads for the reward, and in his first report, therefore, he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have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s he was about to lead soldiers out to take you and behead you, your group left the boat and ran into a village, where many people were. He could not, therefore, perpetrate his scheme. Tomorrow, the Commander will come and question your group. Explain things to him minutely. If there is the slightest discrepancy or error, there is no telling what might happen.” When I asked his name, he said, “I have told you this because I like you. I have risked danger.”35 He turned and left. When I heard what he said, my hair stood up on end; so I said to Chòng Po and others, “When the people on the road pointed at us and made gesture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it was because all of them were deluded by this plot.” In the evening, seven or eight officials, including the Chiliarch, had a large table put in place and stood round it. They had Chong Po brought before them and asked, “Is it true that your group had fourteen boats ?” Chong Po replied, “No. We had only one boat.” They motioned Chòng Po out, had me brought in, and asked, “How many boats did you start out in?”' I said, “Only one.” They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were sighted from above our coast. They were anchored together at sea yesterday. Because of the Stockade Commander's report, therefore, we have already reported the fact to our superiors. Where did you put the other thirteen boats?” I said, “When I arrived at the coast, men of your country were sailing there in six boats. We moored together. If you question the men of those six boats, you will know how many boats we had.” They said, “Why have you Japanese come here to raid?” I said, “I am a Korean. My speech is different from Japanese, my hat and gown are of different style. By those things you can tell us apart.” They said, “Some of the Japanese who are clever at banditry change their clothes and pose as Koreans. How do we know that you are not a Japanese like that?” I said, “If you observe my conduct and examine my seal, permit, cap, sash, and documents, you can tell the true from the false.” The Chiliarch and others then ordered me to bring my seal and other things and present them as evidence. They asked, “Are you not perhaps Japanese who robbed Koreans and got these things?” I said, “If you doubt me in the slightest, order me sent to Peking. A word with a Korean interpreter, and the truth will be apparent.” They asked, “What is your name? What are your department and county? What is your official position? On what business did you come to our border? Explain the facts in writing and dare not lie. We shall report this to our superiors.”

I said, “My name is Ch'oe Pu.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I have served notably at Court for some years. In the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go to Cheju and other islands, but on the 3rd Day of this Intercalary First Month I was setting out to mourn for my father. Returning home in confusion, I met a wind and was blown to sea, and I happened to come here."

They said, “What was your father's name? What was his position? Where did he die?” I said, “My father's name was T'aek. He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36 but in order to care for his parents did not take an appointment. He had laid aside his mourning clothes scarcely four years when he, too, died in Naju.”

When the deposition was finished, they lodged me in the guest house annex and gave me and my staff food. The people of our country go on official and private business to and from Cheju, and those who meet winds and get lost are beyond counting. Those who finally return home alive are barely one or two in a hundred; is it likely that all of them drown at sea? Those who drift to the island barbarian countries like Siam and Champa have no further hope of returning. Even if they drift to the borders of China, they are still wrongly accused by the people on the coast of being Japanese pirates. If their ears are cut off for the reward, who can tell the truth? How could people like us, if we had not landed beforehand by ourselves or did not have such signs as seals and permits, have escaped disaster?

Let our state follow the system of the Chinese Court and issue to all officials number tablets and pewter tablets with their names and positions thereon in seal characters to identify them. When any official, great or small, is sent anywhere, tallies and halberds should be provided to honor the King's command. Let even people living by the sea, though they cross the sea in private trade, be issued number tablets, inscribed such-and-such country, such-and-such department and district, such-and-such name, such-and-such appearance, and such-and-such date, to identify them. A consul should also be put at Cheju, and all commissioned ministers and magistrates of the three cities should always, coming or going, carry [their tablets] with them to provide for what may happen. If all that is done, then and only then will everyone be able to avoid tragedy.

1월 20일

二十日, 在桃诸所, 是日午陰乍晴, 臣問桃诸所千戶姓名,則乃陳華也,華與一官人來看臣,指臣笠,曰:“此何帽子?”臣曰:“此喪笠也,國俗皆慮墓三年,不幸如我漂流,或不得已有遠行者,則不敢仰見天日,以堅泣血之心, 所以有此深笠也,”及至飯時,許清引臣同桌,座有一人以筋畫卓上曰:“你吃猪肉否?”臣曰:“我國人守喪三年,不食魚肉蘸董”其人以別器盛素,以饋臣. 許清又見臣之衣服沾濕未乾,謂臣曰:“今日有陽, 可脫衣以晒之.” 臣答日:“我衣皆濕,脫此則無可穿者,不能晒也.” 許清引臣坐諸面陽之地,以令晒乾, 有一官人來問曰:“你國 王稱皇帝否?”臣答曰:“天無二日,安有一天之下有二皇帝乎?我 王心誠事大而已,”又問曰:“你國官人果皆星帶乎?”曰:“一二品着金,三四品着銀,五六六品以下,皆着烏角而無厘帶,”又問日:“你國有金銀否?”曰:“金銀非本國所產,”曰:“然則何以有金銀帶?”曰:“皆來貿上國,所以貴也.”臣問其官人為何人,其人即出公文以示,則乃把總官先差此官人,給牌星馳前去桃诸所,護住臣等,按臨重解,毋得違恨者,姓名即薛景,又有一人來,曰:“我寧波府定海衛人,因此處都司公差到此.”

p.372 臣即問曰:“寧波府有下山否?”曰:“有之.” 臣因言前日到泊下山逢海賊復漂之故,其人曰:“我當持此文字,告知府往問之,臣問其姓名,則王海也,又有外人羣聚而至,爭持紙筆以問,不可勝對,有官人密書以示曰:“此處人輕薄,休與開講.”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다 개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도저소 천호의 성명을 물으니 진화(陳華)라고 하였습니다.

진화는 한 관인과 함께 신을 보러 와서 신의 갓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이것은 무슨 모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립(喪笠)[1] 43입니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모두 3년 동안 여묘(廬墓) 44를사는데, 불행히 나처럼 바다에 표류하거나, 부득이 멀리 여행하게 된 사람은 감히 하늘과 해를 우러러 보면서는 비통한 마음을 견지할 수 없기 때문에 깊은 상립[2]을 쓰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가 되자, 허청(許淸)은 신을 인도하여 식탁을 같이 하였습니다.

좌중의 어떤 사람이 탁자 위에 젓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묻기를,

“당신은 돼지고기를 먹습니까?”[3][4][5][6][7]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8]를 먹지 않습니다.”그 사람은 다른 그릇에 채소 반찬을 담아서 신을 접대하였습니다.

허청은 또 신의 의복이 젖어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햇볕이 있으니 옷을 벗어서 햇볕에 쪼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옷이 모두 젖었으니 이 옷을 벗으면 입을 것이 없으므로 햇볕에 쪼일 수 없습니다.” 허청은 신을 이끌어 햇볕이 드는 곳에 앉히고 옷을 말리게 하였습니다.

한 관인이 와서 묻기를, “당신 나라의 왕도 황제라 일컫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는데,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황제[9]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은 성심껏 대국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 나라의 관인들은 모두 서대(犀帶)를 맵니까?”

“1품·2품은 금대(金帶), 3품·4품은 은대(銀帶), 5품·6품 이하는 모두 오각대(烏角帶)를 매지만 서대는 없습니다.[10] 145

“당신 나라에는 금은이 있습니까?”[11]

“금은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습니다.” [12]

“그렇다면 어떻게 금대, 은대가 있습니까?”

“모두 상국(上國)에 와서 매입하므로 귀한 것입니다.”

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곧 공문(公文)을 내어 보였는데, 바로 파총관이 먼저 이 관인에게 패문(牌文)을 주어 도저소에 빨리 달려가 신 등을 잡아두고 조시하여 압송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한 자이니 성명은 설민(薛旻)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영파부[13] 정해위(定海衛)148의 사람인데, 이곳 도사(都司)149가 파견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곧 묻기를, “영파부에 하산(下山)이란 곳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있습니다.”

신은 이어서 전일 하산에 정박했다가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知府)150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왕해(王海)라고 하였습니다. 또 바깥사람들이 떼지어 와서 앞을 다투어 종이와 붓을 가지고 물으니 일일이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관인이 가만히 써 보이기를, “이곳 사람들은 경박하니,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흐렸다 개었다 지명: 도저소, 영파부 정해위(定海衛), 영파부 하산(下山) 인명: 진화(陳華), 설민(薛旻), 왕해(王海) 제도(관직): 천호, 파총관, 도사(都司), 지부 시간: 밥 먹을 때 기물: 식탁 풍습(음식): 돼지고기 의전: 다른 그릇에 채소 반찬을 담아서 신을 접대하였습니다. 심리: 동정(허청은 신을 이끌어 햇볕이 드는 곳에 앉히고 옷을 말리게 하였습니다.) 언어(어원): 당신 나라의 왕도 황제라 일컫습니까? 기물: 서대(犀帶), 금은, 종이, 붓 행정: 공문(公文), 패문(牌文),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知府)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 사회: 해적, 이곳 사람들은 경박하니 풍습(의복)-조선: 상립(喪笠) 유학-조선: 여묘(廬墓) 경천-조선: 하늘과 해를 우러러 풍습(음식)-조선: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풍습-조선: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모화: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황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은 성심껏 대국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모두 상국(上國)에 와서 매입하므로 귀한 것입니다 기물-조선: 1품·2품은 금대(金帶), 3품·4품은 은대(銀帶), 5품·6품 이하는 모두 오각대(烏角帶)를 매지만, 금은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습니다. 경제-조선: 모두 상국(上國)에 와서 매입하므로, 사건-조선: 표류

20th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alternately cloudy and fair.

I asked the name of the Chiliarch of T'ao-chu Chiliad; it was Ch'ên Hua. Ch'ên Hua came with an official to see me. He pointed to my bamboo hat and said, “What kind of hat is that?” I said, “This is a mourning hat. It is a national custom for everyone to dwell in a hut by the grave for three years. If, unfortunately, one should be cast adrift like me or must travel far, in order to maintain the mood of grief, one dare not look up at the sun and sky. That is why we have these deep hats.” At meal time, Hsü Ch’ing led me to his table. A man seated there wrote with his chopstick on the table, “Do you eat pork?” I said, “The people of my country observe mourning for three years and do not eat fish, meat, preserved meat, oniony plants, or garlic.” The man took separate plates, loaded them with vegetable courses, and served them to me. Hsü Ch’ing then saw that my clothing was not yet dry. He said to me, “It is sunny today; you might take off your clothes and dry them.” I answered, “All my clothes are damp. If I take these off, there is nothing I can wear. I cannot dry them.” Hsü Ch’ing led me to a sunny place and seated me so that I might dry out. An official came and asked, “Is the King of your country called Emperor?” I answered, “In Heaven there are not two suns; how under the same Heaven can there be two Emperors? My King's one purpose is to serve your country devotedly.” Then he asked, “Do all the officials of your country really wear rhinoceros [horn] girdles?” I said, “The first and second ranks wear gold, the third and fourth silver, the fifth and sixth and all those below black horn, but there are no rhinoceros [horn] girdles. 37 He asked, “Are there gold and silver in your country?” I said, “Gold and silver are not products of my country.”'38 He said, “But then, how are there gold and silver girdles?” I said, “They all come in trade from your country. That is why they are prized.” When I asked the official who he was, he took out a public document and showed it to me. It [showed that] the Commander had previously dispatched this official with a permit, sending him on to T’ao-chu Chiliad posthaste. He was to place us under guard, question us, and bring us back without fail. This, then, was that Hsieh Min. Another man came and said, “I am from Ting-hai Garrison, Ning-po Prefecture. I was sent here by the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Tu-chih-hui shih-ssu] of that place.” I then asked, “Is there a Hsia-shan in Ning-po Prefecture?” He said, “There is.” I told him about our previous arrival and mooring at Hsia-shan, meeting pirates, and being set adrift again. The man said, “I shall take this paper and inform the Prefect so that he will make inquiries.” I asked his name, which was Wang Hai.

Other outsiders came in crowds and eagerly took paper and brush and asked questions. I could not keep up with them in my answers. An official secretly wrote and showed me a note that said, “The people here are a bad lot. Do not talk with them.”

1월 21일

二十一日,在桃诸所,是日晴,外人麋至觀臣,王海指壁上真像,曰:“你知此畫乎否?”曰:“不曉得,”海曰:“此乃唐朝進士鍾馗也.”臣曰:“鍾馗平生不得進士,何以謂之進士?”海等喧噪大笑,又有白髮老翁來,臣問曰:“天台、腐蕩等山,距此地幾里?”翁答曰:“天台山在天台縣北,距此二日程,天台山之南一日程,有隔蕩山:”臣又問:“此城主山何?”曰:“石柱山也.”引臣出門,指點石柱山,則果石壁作,當山頂有大石如柱形,臣曰:“自此距北京幾里?”翁曰:“五千八百有餘里,”問:“距楊子大江幾里?”翁曰:“在北二千有餘里,臣又舉李暹所泊楊州府以問曰:“距此幾里?”翁曰:“在楊子江之北,你去過江,則便是揚州之境也.”又問:“距南京幾里?”翁曰:“在西北二千餘里,然皆腹料耳,未敢的知”云云,有大官人前後擁,軍儀整肅而至,坐 于皇華館,問之則乃把總松門等處備指揮劉澤也,招“臣等來前,日:“以汝類私越邊境,本當處以軍法,恐其中情有可粉,站未盡数,有無侵犯上國情狀,從實供寫施行:”臣供曰:“姓崔名溥,居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為國王近臣,去丁未九月十七日,奉王命為濟州等處敬差官,濟州今戊申正月三十日,聞父喪,正月初三日,不候風便,顛倒過海,為風所逆,驚濤掀浪,載沈載傾,飲食渴水,十生九死,以今月十二日到泊名不知海島,有漁船來問曰:“你是何人?”答以朝鮮國人漂流之故,因問:「此何國地面?”其人答曰:此大唐國寧波府下山云云,其夜有賊船二十餘人來,以研刀恐嚇欲斬,攘奪衣粮行裝等物,遂截去繼而去,復漂流大洋,十七日,又到泊地名不知海岸,又有漁船六隻列立,恐其如前所遇海賊之類,捨丹緣陸,過二嶺六七里許有人居,相次遞送,夜至仙岩里,其里人爭以偶枚亂擊劫体,遞至一處,遇有官人,驅至于此城,”又問曰:“你登第何年?歷仕幾官? 所帶人住何川縣地?行李有何器械?原有船幾隻?”臣曰:“我於成化丁酉,格進士試第三人; 壬寅, 中文科乙科第一人, 為校書館著作,為博士, 為軍資監主簿, 為成均館典籍,為司憲府監察,為弘文館副修撰,為修撰,丙午,中文科重試乙科第一人,為弘文館副校理,為龍襄衛司果,為副司直,所帶人陪吏四人,光州牧吏程保、(化)(和順縣吏金重、羅州牧吏孫孝子、濟州 收吏李孝枝,伴率一人李慎,京都人,鎮撫一人安義,濟州人,驛吏一人崔巨伊山,羅州青農驛人,奴子莫金等二人,濟州官奴權松等四人,(好)[護]送軍金來等九人,船格軍許尚理等二十人,皆濟州人,所乘船只一大隻,橋帆危样,遭風而失, 牆__遇賊失. 所賣之物, 印信一顆、馬牌一隻、紗__ 、角帶、所治文書、重試榜錄、書册、弓一張、刀一把及各人所穿衣

p.374 裳外, 無他器械,”把總官配點印信等物, 又問曰: “汝國地方遠近幾何? 府州幾何?兵粮約有幾何?本地所產,何物為貴?所讀詩書,尊崇何典?衣冠、禮樂,從何代之制?一一寫述,以憑查考:”臣曰:“本國地方,則無慮數千餘里,有八道,所屬州府郡縣,總三百有餘,所產即人材、五穀、馬牛雞犬,所讀而尊崇者,四書五經,衣冠、禮樂,則一遭華制,兵粮則我以儒臣,未會經請,未詳其數,”又問曰:“汝國與日本、琉球、高麗相通乎?”臣曰:“日本、琉球,俱在東南大海中,相距隔遠,未相通信,高麗革爲今我朝鮮,”又問曰:“汝國亦朝貢我朝廷否?”臣曰:“我國每歲如聖節、正朝,貢獻愈謹,”又問曰:“汝國用何法度?別有年號乎?”臣曰:“年號、法度,一大明.”把總官問罪,因曰:“汝邦屢歲朝貢,義有君臣之好,既無侵逆之情,當遇以禮,各宜安心,勿生他慮,轉送赴京,遣還本土,急促行裝,不許稽緩,”即饋以茶果.臣即做謝詩以拜,把總官曰:“不要拜,“臣不知所言,敢拜之,把總官亦起, 相對答禮.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왕해(王海)가 벽의 한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 그림을 압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은 곧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151랍니다.”[1][2][3][4][5][6][7][8]

“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또 백발노인이 왔기에 신이 묻기를, “천태산(天台山)[9][10]과 안탕산(雁蕩山)[11] 등은 이곳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천태산[12][13][14][15][16][17][18]은 천태현(天台縣)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이틀 거리이고, 천태산의 남쪽으로 하루 거리에 안탕산이 있습니다.”

“이 성(城)의 주산(主山)은 무슨 산입니까?”

“석주산(石柱山)152 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19]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5천8백여 리입니다.”

“양자강(揚子江)[20][21]은 몇 리쯤에 있습니까?”

“북쪽 2천여 리에 있습니다.”

신은 또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22]를 들어 묻기를, “여기에서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23]입니다.”

“남경[24][25]과는 몇 리나 됩니까?”

“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고관이 앞에선 갈도(喝道/喝導)54하고 뒤에선 옹위하며 엄정하게 군대를 정렬시켜 오더니 황화관(皇華館)155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물어보았더니 곧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156 유택(劉澤)이었습니다.

그는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말하기를,

“너희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어왔으니,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혹 불쌍히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을까 싶어 아직 죽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사실대로 공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공술하기를, “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 성내에서 살았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국왕의 근신(近臣)이 되었습니다. 지난 정미년 9월 17일에 왕명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경차관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남해 가운데 있으므로 나주와는 거리가 수로로 천여 리입니다. 그 해 11월 12일에 바다를 건너가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일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금년 무신년 정월 30일에 아비의 상을 듣고 윤정월 3일에 순풍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났습니다. 노도와 격랑 속에 배는 잠겼다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달 12일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섬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어선이 와서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하고 묻기에, 조선국 사람으로서 표류해 온 까닭을 들어 답변하고 이어서 '이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오?'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이곳은 대당국 영파부의 하산이오'라는 등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해적선의 20여 인이 와서 칼로 위협하며 목을 베려다가 의복, 양식, 행장 등의 물건을 빼앗고 마침내 배의 노와 닿을 끊어버리고 떠나가 버려 다시 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7일에는 또 지명을 알 수 없는 해안에 이르러 정박하니, 또 어선 6척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앞서 만났던 해적과 같은 무리인 듯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고개 둘을 넘어 6-7리가량 가니 인가가 있었으며, 서로 차례로 번갈아 가며 다음 마을로 보냈습니다. 밤에 선암리에 이르니 그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각진 몽둥이로 함부로 치면서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체송(遞送)되어 한 곳에 이르자 한 관인을 만났으니 그가 이 성까지 몰아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는 어느 해에 등과하고, 어떠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느 주현에 거주하고, 행장에는 무슨 무기가 있으며, 원래 있던 배는 몇 척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 (乙科)58의 제1등으로 합격하여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160,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164, 수찬(修撰)165이 되었으며, 병오년(1486)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 제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166,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168이 되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으로는 배리(陪吏)가 4인으로,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상앗대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과 노는 해적을 만나 잃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169, 서책, 활 1장, 칼 1자루와 각자가 입는 의상 이외에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파총관(把總官)은 즉시 인신 등 물건을 점검하고는 또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토는 얼마나 되며, 부·주(府州)는 몇이나 되며, 군량은 대략 얼마나 있으며, 그 땅에서 생산되는 물품에는 어느 물품이 귀한 것이며, 읽는 시서(詩書)는 어느 경전을 존숭하며, 의관과 예악(禮樂)은 어느 시대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낱낱이 써 내어 조사하는데 근거가 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26][27]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이고,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군량은 내가 유신(儒臣)으로서 일찍이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너희 나라는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너희 나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는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28][29]

“너희 나라는 어떤 법도를 사용하며, 별도의 연호가 있는가?”

“연호[30]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어서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해마다 조공을 하여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침범하거나 반역한 정상은 없어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이니, 각자 안심하고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급히 행장을 차리고 지체하지 마오”라고 하고 곧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려고 하니, 파총관은 “절할 필요는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기후: 맑았습니다 지명: 도저소, 천태현(天台縣), 양주부(揚州府), 대당국 영파부 하산, 북경, 남경, 선암리 지리: 천태산, 안탕산, 북쪽, 석주산, 5천8백여 리, 양자강(揚子江), 서북 2천여 리 언어(어원):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인명: 왕해(王海), 종규(鍾道), 유택(劉澤) 풍습: 부적(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역사: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 심리: 즐거움(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건축물: 황화관(皇華館), 제도(관직): 진사(進士),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 사회: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갈도(喝道/喝導), 해적선, 약탈 행정: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체송(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기물: 초상화 제도(교통): 어선 6척 유학: 갈도(喝道/喝導),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인물: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심리(안심) 비유: 기둥처럼 생긴 큰 돌, 제도(외교):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의전: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인명-조선: 이섬, 최부,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 제도(관직)-조선: 경차관,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이 되었습니다,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 제도(시험)-조선: 두 번 문과에 올라,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乙科)의 제1등으로 합격, 지명-조선: 조선국 전라도 나주, 제주 유학-조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 시간-조선: 정미년 9월 17일, 11월 12일, 무신년 정월 30일,윤정월 3일, 이 달 12일, 17일, 지리-조선: 남해,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행정-조선: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주(州).부(府)·군(郡)·현(縣)이 300이 넘고, 사건-조선: 부친상, 역사-조선: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 제도(교통)-조선: 큰 배 1척 기물-조선: 돛대, 상앗대, 노, 닻,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 서책, 활 1장, 칼 1자루, 각자가 입는 의상 모화: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 연호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제도(외교)-조선: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 역사-조선: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시-조선: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21st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fair.

People came in crowds to look at me. Wang Hai pointed to a portrait on the wall and said, “Do you know that picture?” I said, “I am not acquainted with it.”

Hai said, “It is Chung K’uei, a Chin-shih of the T’ang Dynasty.” I said, “Never in his life did Chung K’uei rise to Chin-shih. How can you call him a Chin-shih?” Wang Hai and the others laughed uproariously. 39 Then a white-haired old man came, and I asked him, “How many li from here are the T’ien-t'ai and Yen-tang mountains ?”?40 The old man answered, “Mt. T’ien-t’ai is north of T’ien-t’ai County, two days' journey from here. Mt. Yen-tang is one day's journey south of Mt. Tien-t'ai. I then asked, “What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is town?” He said, “Mt. Stone Pillar.” He led me outside the gate and pointed out Mt. Stone Pillar, which was, indeed, a mountain of stone cliffs, at the peak of which there was a great stone shaped like a pillar. I sai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o Peking?” The old man said, “Over 5,800 li.”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the Yangtze River.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 I mentioned Yang-chou Prefecture, at which Yi Sõm had landed, and aske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he old man said, “After you cross to the north of the Yangtze River, you are in Yang-chou.”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Nanking.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west. But all these are only estimates; I should not presume to know.” A great official came, heralds before him and throngs behind, troops impressively drawn up in display. He sat in the Huang-hua-kuan, and I asked about him. He was Liu Tse, Anti-Japanese Commander for Sung-men and Other Places.41 He called us before him and said, “Since you crossed the border illegally, you ought to be judged by military law, but because I think that some of the circumstances in the case may warrant sympathy, I have not, for the time being, put you to death. State truthfully whether or not you encroached on China, so that we can act accordingly.” I stated, “My name is Ch’oe Pu, and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was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n the 17th Day,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be a Commissioner for Cheju and other places. Cheju is in the South Sea and is over one thousand li from Naju by sea. On the 12th Day, Eleventh Month of the same year I crossed the sea. I was correcting entries on registers and the work was not completed when I heard, on the 30th Day of this First Month, that my father had died. On the 3rd Day, Intercalary First Month, not waiting for a favorable wind, I set out in confusion to cross the sea. We were driven off course by the wind and in the terrible, mountainous waves, would first almost sink and then almost capsize. We hungered for food, thirsted for water, and almost died. On the 12th Day of this month we arrived at an island,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moored there. Fishing boats came and asked, “What country are you from?' We answered that we were Koreans and [told] how we came to have gone adrift. “Then we asked, 'What country's territory is this?' "The men answered, 'It is Hsia-shan, Ning-po Prefecture, China.' "That night pirate boats and over twenty men came. They scared us with their swords and wanted to cut off our heads. They seized our clothing, rations, and baggage and then cut away our oars and anchor and left, and we drifted again in the open ocean. "On the 17th Day we came again to land and moored on a shore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gain there were fishing boats, six in a row, and I was afraid that they were of the type of the pirates we had met previously. We left the boat, went ashore, and crossed two ranges. In about six or seven li there was a settlement, from which we were passed along successively, reaching Hsien-yen Village at night. The villagers fought to beat us with crooked sticks and rob us. They turned us over to a place where we met an official, and he drove us on to this town.” He then asked, “What was the year in which you placed on the examination list? What offices have you held? In what departments and districts do the men who accompany you live? What articles are in your baggage? How many boats did you have originally?”.

I said, “I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 in third place in 1477, and 1482 I was the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 have been writer and Doctor of Learning in the Printing Office, Auditor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Archivist in the National Academy, Supervisor in the Office of the Inspector-General, and Assistant Writer and Writer in the Oslice of Special Counselors. In 1486 I was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Second Examination. I was Junior Fifth Counselor in the Ollice of Special Counselors, and Lieutenant and Assistant Captain of the Yongyang Garrison. "Of the men with me, there are four secondary officials – Chòng Po,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Kwangju; Kim Chung, an official of Hwasun District; Son Hyo-ja,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Naju; and Yi Hyo-ji,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Cheju. There is one companion, Yi Chòng, from the capital. There is one Security Officer, An Úi, from Cheju; one Station Master, Ch’oe Kõisan, from Ch’ongam Station, Naju; and two slaves, Makkům and another. There are four Cheju public slaves, Kwon Song and others; nine loyal escort troops, Kim Sok and others; and twenty marine privates, Hồ Sang-ni and others. They are all from Cheju. “We sailed in only one large boat. Masts, sails,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wind, and anchor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pirates. “As to the things we have, there are one seal, one horse permit, silk gauze hats, horn girdles, pertinent documents, an examination list for my Second Examination, books, one bow, one knife, and the clothes worn by the individual men. There is nothing else.” The Commander checked over the seal and other things. He asked, “How far away is your country? How many prefectures and departments are there? About how great are the military supplies? What things produced in your country do you prize? Which of the books you read do you revere? Y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follow the styles of what dynasty? Answer in writing, one by one, as a basis for verification.” I said, “My country is some several thousand li away. It has eight provinces, in which the prefectures, departments, counties, and districts total more than three hundred. Our products are talented men, the five grains, horses, oxen, fowls and dogs. The things read and revered are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ll 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honor the Chinese styles. As to military supplies, being a Confucian minister, I have had no experience with them and do not know the figures exactly.”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relations with Japan, Ryukyu and Koryo?”:42 I said, “Japan and Ryukyu are in the great sea to the southeast. They are far away, and we do not communicate with them.43 Koryo has become our present Choson.” He asked, “Does your country, too, pay tribute to our Court?”. I said, “Every year at such times as the Imperial Birthday and the New Year, we most respectfully pay tribute.” He asked, “What regulations does your country have? Do you have your own reign-titles?” I said, “In our reign-titles and regulations we follow Ming completely.” When the Commander had ended his questioning, he said, “Your state has paid tribute for years; you have acted as a good subject state. Since there is nothing to indicate seditious intent, you shall be treated courteously. Be at ease, each of you, and do not worry; we shall send you to the capital and let you go home. Hurry with your baggage. I will permit no delay.” He served us tea and cakes.

I wrote a poem of thanks and bowed. The Commander said, “You need not bow," but I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and ventured to continue bowing. The Commander rose, too, and returned the courtesy.

1월 22일

二十二日,在桃诸所,是日陰,把官又引臣於前,將昨日招辭,删削下山遇賊、仙岩威擊等事及文繁處,令臣更寫一幅,薛曼立卓邊謂臣曰:“此文字報上司,以達于皇帝,文宜簡略,故我老爹册删繁就簡,令你改寫,你勿疑也,臣不肯寫,曰:“供辭當以直,文雖繁何害也?且所删者,乃遇賊之事,却添一言曰:“軍人衣服俱有云云,沒我遇賊情實,抑何意軟?”薛曼密寫示曰:“ 今皇帝新即位,法令嚴肅,若見你前所供辭,帝意必謂盜賊盛行,歸罪邊將,非細事也,為你計,當以生返本國為心,不宜好為生事也“臣聞其言以為然,即學筆隨所删寫之,薛曼又謂臣曰:“你既為軍資监主簿,何以日不知兵之败?”臣曰:“我為軍資監,未滿月見遞,故未詳其數,”又問曰: “你浮海上, 不食幾日?” 臣曰: “自初三日至十一日.” 曰: “然則何不至於餓死?”:“間或噴乾米,飲尿,尿又盡,待天雨清衣汁飲,以續一髮之命, 不死幸耳.” 又問曰: “你年齒幾何?” 臣曰: “三十有五歲,”又問: “你辭家幾日?” 臣曰: “月已六度圓矣.” 曰: “你思家山否?” 臣曰: “父已云亡, 慈母在堂, 哭之已變國俗, 又以我為溺死, 益篤傷慟之心. 我今生到異邦, 念及至此, 無日不痛哭,” 曰:“為人臣者,國耳忘家,你因王事,漂到于此,當移孝為忠,何憶家為?” 臣曰:“求忠臣於孝子之門,未有不盡孝於親而忠於君者,况風樹不止,日迫西山,安得而不思吾亡父與慈母乎?”又問曰:“你國王姓譯何?”臣曰: “孝子不忍擧父母之名, 故聞人過失, 如聞父母之名. 况為臣子, 其可以國君之諱, 輕與人說?”曰:“越界無妨.” 臣曰: “我不是朝鮮之臣乎? 為人臣者, 其可以越界而負其國, 異其行, 變其言乎? 我則不如是也,”薛曼卽精與臣問答之辭呈于把總官,把總官或讀或點頭,顧謂臣曰:“明日差官送你起程,凡有隨身行李依件寫來,免致前路失所,”臣退舍館,有王者,許清之鷹犬也,或嚇或誘,誅求無厭,臣之行李無物,無以應之,至是又來,言曰:“我每天人之恩不可不報,”臣解所着構帖裏,以與許清之子隆.台州,古東國之地,在閩之東越之南,而牛頭外洋等處轄臨海縣地,又在台州東南絕微,風氣溫暖, 亘雨少日,實炎瘴癘之方,臣當正月而

p.376 到,氣候與三四月同,车麥欲穗,笋芽方盛,桃杏滿開,又山川高大,林數屏騎,人物繁夥,弟宅壯麗,別是一區天地也.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파총관은 또 신을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어제의 공술서 가운데 하산에서 해적을 만난 일과 선암에서 구타를 당한 등의 일 및 문장이 번거로운 대목을 삭제하고 신에게 다시 한 장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설민(薛旻)이 탁자 옆에 섰다가 신에게 말하기를,“이 글은 상사에게 보고하여 황제에게 전달되는 것이니 간결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으리께서 번거로운 것은 지워버리고 간략히 해서 당신에게 고쳐 쓰게 한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쳐 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공술서는 바른 대로 써야 하니 글자가 비록 많다 해도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또 지워 버린 것은 바로 해적을 만났던 일인데, 도리어 한마디를 보태어 '군인의 의복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운운하면서 내가 해적을 만났던 사실은 없애 버렸으니 이 또한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설민은 몰래 글을 써서 보이기를, “지금 황제께서 새로 즉위해서 법령이 엄숙하니 만약 당신이 전일에 진술한 공술서를 보신다면 황제께서는 틀림없이 '도적이 횡행하고 있구나'하고 여기시고 변장(邊將)에게 죄를 돌릴 터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 헤아린다면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갈 것만을 염두에 두어야지, 일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여 곧 붓을 들어 몇 곳을 뺀 대로 썼습니다.

설민이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했는데, 어째서 군량의 수량을 모른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군자감주부가 된 지 한 달이 채 차기 전에 직책이 바뀌었던 까닭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바다 위에서 밥을 먹지 못한 것이 며칠이나 됩니까?”

“3일부터 11일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간혹 마른 쌀을 씹고 오줌을 마시기도 하였으며, 오줌도 없어지면 비 오기를 기다려서 옷을 적셔 짜내어 마시고는 한 가닥 터럭과도 같은 목숨을 이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입니다.”

“당신의 나이는 몇입니까?”

“35세입니다.”

“당신은 집을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습니까?”

“여섯 달입니다."

“당신은 고향집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이미 별세하셨고 살아 계신 어머니는 슬피 울어 이미 나라의 풍속을 바꾸었고 또 내가 물에 빠져 죽었으리라 여겨 슬퍼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 살아 이국(異國)에 이르렀지만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신하된 사람은 나라만을 위하고 자기 집은 잊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왕사(王事)로 인해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마땅히 효도를 충성으로 옮겨야 할 것인데, 어찌 집을 생각합니까?”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15 하니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않고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1] 하물며 나무에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고 해는 서산에 지려 하니, 어찌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아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국왕은 성명이 무엇입니까?”[2]

“효자는 타인이 부모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참지 못하니, 타인의 과실을 듣기를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름을 경솔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경을 넘었으니 지장 없을 것입니다.”

“나는 조선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신하된 사람이 국경을 넘었다고 나라를 저버리고 행동을 달리하고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설민이 곧 신과 문답한 글을 가져다 파총관에게 바치니 파총관은 읽다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일 관원을 시켜서 당신을 떠나보낼 것입니다. 휴대한 모든 물건은 건수(件數)에 따라 기록해, 앞길에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사관(舍館)으로 물러 나왔습니다.

왕광(王匡)이란 자는 허청(許淸)의 사나운 앞잡이로서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염치없이 물건을 요구함이 끝이 없었습니다.

신의 행장에는 줄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에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와서 말하기를,“우리 대인(大人)의 은혜는 갚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입었던 솜으로 댄 철릭을 벗어서 허청의 아들 융(隆)에게 주었습니다.

태주(台州)는 옛날 동구국(東歐國)의 땅으로서 민(圃)180 지방의 동쪽과 월(越)지방의 남쪽에 있고, 우두(牛頭) 앞 바다 등지는 임해현(臨海縣) 관할이며 또 태주 동남방으로 가장 먼 변방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고 늘 비가 와서 햇볕은 적었으니 실로 염황장려(炎荒障薦)의 땅이었습니다.

신은 정월에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기후는 3-4월과 같아서 보리가 이삭이 패려고 하고 죽순 싹이 한창 무성하게 크고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또 산은 높고 내는 크며 수풀은 무성한데다, 인구가 많고 물자는 풍부하며, 주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니 하나의 별천지였습니다.

기후: 흐렸습니다 인명: 왕광(王匡), 허청(許淸), 허청의 아들 융(隆) 지명: 도저소, 태주(台州) 행정: 황제께서 새로 즉위해서 법령이 엄숙, 행정: 문장이 번거로운 대목을 삭제하고 신에게 다시 한 장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휴대한 모든 물건은 건수(件數)에 따라 기록해, 앞길에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두(牛頭) 앞 바다 등지는 임해현(臨海縣) 관할 제도(관직): 황제 유학: 신하된 사람은 나라만을 위하고 자기 집은 잊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효도를 충성으로 옮겨야 할 것인데, 어찌 집을 생각합니까? 지리: 민(圃)지방의 동쪽과 월(越)지방의 남쪽에 있고, 우두(牛頭) 앞 바다 등지는 임해현(臨海縣) 관할이며 또 태주 동남방으로 가장 먼 변방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고 늘 비가 와서 햇볕은 적었으니 실로 염황장려(炎荒障薦)의 땅, 산은 높고 내는 크며 수풀은 무성 인물: 왕광은 염치없이 물건을 요구함이 끝이 없었습니다 역사: 옛날 동구국(東歐國)의 땅 식물: 보리가 이삭이 패려고 하고 죽순 싹이 한창 무성하게 크고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시간: 3일부터 11일까지, 정월 사회: 인구가 많고 물자는 풍부하며, 주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니 하나의 별천지 비유: 하나의 별천지 심리(최부): 안 내킴, 슬픔, 제도(관직)-조선: 군자감주부, 인물-조선: 35세 유학-조선: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하니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않고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효자는 타인이 부모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참지 못하니, 타인의 과실을 듣기를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름을 경솔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된 사람이 국경을 넘었다고 나라를 저버리고 행동을 달리하고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풍습(의복)-조선: 솜으로 댄 철릭 22nd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cloudy. The Commander had me brought before him again. He took the statement of the previous day and scratched off the parts about meeting the bandits at Hsia-shan and being driven and beaten at Hsien-yen and the wordy passages and ordered me to rewrite the sheet. Hsieh Min was standing by the table and said to me, “This document will be presented to the authorities and passed to the Emperor, so the text must be terse. That is why our chief erased the wordy parts, made them more concise, and asked you to rewrite them. You ought not to have misgivings.” I would not write it. I said, “A deposition ought to be honest. Even if it is wordy, what is wrong with that? The part erased, moreover, was the matter of meeting the bandits, yet he has added a line saying, 'The soldiers' clothes were all intact...' He has suppressed the truth about my meeting the bandits; what does he mean by that?” Hsieh Min wrote something secretly and showed it to me. It said, “The present Emperor has recently ascended the throne, and the laws and ordinances are strict. If he were to see what you wrote previously, His Majesty would infer that bandits are rampant and would punish the border commanders. That would be no small matter. As far as you are concerned, you should concentrate on returning home alive instead of making trouble.” I listened to what he said and, thinking it was so, took up the brush and rewrote the statement as revised. Hsieh Min said to me, “You were Auditor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why do you say that you do not know the amount of military stores?” I said, “Before I had been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a full month, I was transferred. That is why I do not know the exact figures.” He asked, “When you were sailing at sea, how many days was it that you did not eat?” I said, “From the 3rd Day to the 11th Day.” He said, “But how did you keep from starving to death?” I said, “For a while we chewed dried rice grains and drank urine. When the urine was gone, we waited for it to rain. We soaked our clothes and drank the moisture from them and prolonged our lives a hair's length. It was just fortunate that we did not die.” He asked, “How old are you?” I said, “Thirty-five.” He asked, “How many days have you been away from home?” I said, “There have been six full moons.” He said, “Do you think of home?" I said, “My father is dead, and my dear mother has already deviated from the custom of our country in weeping for him at home.44 Now, in addition, she has been led to believe that I have been drowned, so she must be grieving all the more. When I, having now reached a foreign country alive, think of these things, there is not a day that I do not weep bitterly.” He said, “Among those who serve, the state is all, the family forgotten. You drifted here in the King's service; you should turn your filial piety into loyalty. Why brood over family matters ?” I said, “Look for the loyal subject at the gate of the filial son. Never was a man not thoroughly filial to his parents yet loyal to his lord. How can I help but think of my dead father and dear mother, especially when it is already too late to care for one and death from age approaches the other?”. He asked, “What are your King's surname and taboo name?” I said, “The son in mourning cannot bear to mention the names of his father and mother; he would as soon, therefore, hear of the scandals of others as hear the names of his father and mother. How much less can a subject speak loosely to anyone the taboo name of the ruler of his country?”. He said, “It does no harm when you are beyond the borders.” I said, “Am I not a Korean subject? As one who serves, can I, by crossing the border, turn my back on my country and change my actions and words? I am not like that.” Hsieh Min gave the statement of questions and my answers to the Commander, who alternately read and nodded his head. He turned to me and said, “Tomorrow I shall commission an official to start out with you. Write out, item by item, and bring a list of the baggage that accompanies you, so as to avoid losing it on the road ahead.” I withdrew to my quarters. One Wang K’uang, Hsü Ch’ing's henchman, was there. He had been first intimidating and then beguiling us with insatiable appetite, but in my baggage there was nothing for me to satisfy him with. Now he came again and said, “You must repay my chief's favors.” I took off the padded, figured lining I was wearing and gave it to him for Ch’ing's son Lung. XXX. T'ai-chou is the land of the old Tung-ou-kuo.45 It was east of Min and south of Yüeh. But such places as Niu-t’ou-wai-yang are in Lin-hai County. In the extreme southeast region of T'ai-chou, then, the wind is warm. It rains most of the time, and it is seldom sunny. It is, in fact, a jungle-like, malarial region. I arrived in the First Month, but the weather was the same as that of the Third or Fourth Month. The barley and wheat were about to come to head, bamboo shoots were at their height, and peaches and apricots were in full bloom. The mountains were high, the rivers large, and woods and preserves formed screens and shades. The people were thriving and the houses splendid. XXX

1월 23일

二十三日, 自桃诸所登程, 是日陰, 把總官又引臣及從者於前, 今臣叫姓名點數,差千戶霍勇及軍史二十餘人,護送臣等于總兵官,臣及陪吏等,俱乘轎以行,梁達海奸狡者,托病扶杖,似不能步,把總官亦許轎,乘轎者凡八人,翟勇、許清、王臣等與臣等過山場、烏頭二嶺,間有三大川,烏頭嶺下又有鑑溪,許清邀臣等于溪邊人家,做飯以饋,又行過塘頭、蒲宰等地,犯夜至一道傍佛宇而宿,其前里開即仙岩里,自桃渚所至此,乃臣前此被驅所經之路也,夜,許清、霍勇,鞠其里長,捕其奪馬鞍者,報于官,還馬鞍于臣,軍人所見奪金子網巾等物,俱不得.

凡為劫盜者殺越人于貨,肆暴無忌,今江南人雖或被利心所使,為盗為劫者有之, 然下山之盗不殺臣等, 且有遺物, 仙岩之人不隱所劫, 竟還奪鞍,可以觀風氣柔弱, 人心不甚暴惡之驗也.

도저소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파총관이 또 신과 종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신에게 이름을 불러 인원을 일일이 세게 하였습니다. 천호 적용(望勇)과 군리(軍火) 20여 인을 차출하여 신 등을 총병관(總兵官)182에게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신과 배리 등은 모두 가마[1][2]를 타고 갔습니다. 양달해는 간교한 자로서 병을 핑계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을 수 없는 척하니 파총관이 또 가마를 타도록 허가하여, 가마 탄 사람이 모두 8인이었습니다.

적용, 허청, 왕광 등이 신 등과 함께 산장(山場)과 오두(烏頭) 두 고개를 지나가는데 그 사이에 큰 내가 셋이 있었습니다.

오두령(烏頭嶺) 아래에는 또 감계(鑑溪)가 있었는데, 허청이 신 등을 감계 가의 민가로 데려가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또 길을 떠나 당두(塘頭)와 포봉(蒲峯) 등을 지나 밤을 타서 가다가 길가의 한 불사(佛寺)에 이르러 잠을 잤습니다.

그 앞마을이 바로 선암리인데 도저소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곧 신이 전에 내몰리며 지나갔던 길이었습니다.

밤에 허청과 적용이 그곳 이장(里長)을 국문하여 제 말안장을 빼앗은 사람을 잡아서 관사에 보고하고 말안장을 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군인들의 빼앗긴 갓과 망건 등은 모두 찾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강도질을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포학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지금 강남 지방 사람들 중에는 비록 더러 이익을 탐하는 마음 때문에 도적질을 하고 약탈하는 자가 있지만 하산의 해적은 신 등을 죽이지 않았고 또 남겨준 물건도 있었으며, 선암 사람은 약탈한 것을 숨기지 않고 빼앗았던 말안장을 마침내 돌려주었으니, 기풍이 부드럽고 인심이 그다지 포악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지명: 도저소, 선암리, 기후: 흐렸습니다 제도(관직): 파총관, 천호, 군리(軍火),총병관(總兵官) 인명: 적용(望勇), 허청, 왕광 인물: 양달해는 간교한 자, 행정: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허청과 적용이 그곳 이장(里長)을 국문하여 제 말안장을 빼앗은 사람을 잡아서 관사에 보고하고 말안장을 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제도(교통):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의전: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지리: 산장(山場)과 오두(烏頭) 두 고개를 지나가는데 그 사이에 큰 내가 셋이 있었습니다, 오두령(烏頭嶺) 아래에는 또 감계(鑑溪)가 있었는데, 당두(塘頭)와 포봉(蒲峯) 등을 지나 사회: 대개 강도질을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포학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지금 강남 지방 사람들 중에는 비록 더러 이익을 탐하는 마음 때문에 도적질을 하고 약탈하는 자가 있지만 하산의 해적은 신 등을 죽이지 않았고 또 남겨준 물건도 있었으며, 선암 사람은 약탈한 것을 숨기지 않고 빼앗았던 말안장을 마침내 돌려주었으니, 기풍이 부드럽고 인심이 그다지 포악하지 않다 시간: 밤 불교: 불사(佛寺) 기물-조선: 말안장, 갓, 망건 제도(관직)-조선: 군인 23rd Day. Setting out from T’ao-chu Chiliad. This day was cloudy. The Commander again had me and my staff brought before him and ordered me to call out the names [of the men] and check their number. He commissioned Chiliarch Chai Yung and over twenty military officers to escort us to the Regional Commander [Tsung-ping kuan]. I and the subordinate officials rode in sedan-chairs. Yang Tal-hae, a crafty one, pleading illness and leaning on a stick, appeared to be unable to walk, and the Commander allowed him a sedan-chair, too. In all, eight people rode in sedan-chairs. Chai Yung, Hsü Ch’ing, and Wang K’uang crossed with us over Shan-ch'ang and Wu-t’ou ranges. Between them were three large rivers, and below Wu-t'ou Range was Chien Stream. Hsü Ch’ing took us to a house at the edge of the stream and had food cooked and served to us. Even though it was night we went on, across T’ang-t’ou-p’u Ridge and other places. We came to a Buddhist temple by the road and lodged there. The village gate in front of it was that of Hsien-yen Village, and the road there from T’sochu Chiliad was that along which I had previously been driven. That night, Hsü Ch’ing and Chai Yung questioned the head of the village, arrested the fellow who had stolen the horse saddle, reported him to the officials, and returned the saddle to me. We did not get any of the rain hats, net wraps, or other things that had been stolen from the soldiers. XXX Generally, bandits kill and plunder, and there is no limit to their violence. Now, though some of the Chiang-nan people, driven perhaps by motives of gain, rob and steal, the robbers of Hsia-shan did not kill us, and they even left some things behind. The men of Hsien-yen did not hide what they had stolen and in the end returned the saddle they had taken. From this we can see that their nature is mild and their hearts not wicked. XXX

3월 3일

初三日, 過徐州, 是日雨大風, 曉過九女、子(方)「房」山, 至雲龍山, 山上有石佛寺, 甚華麗,其西有戲馬臺、拔劍泉,又過蝗虫集、夫廠、廣運倉、國儲門、火星廟,至彭城驛,登庸門、進士100%軒在驛前,徐州府城在曝西北二三里,徐州,古大彭氏國,項羽自稱西楚霸王,定都於此,城

p.410 之東有護城堤,又有黃樓舊基,即蘇軾守徐時所建,蘇轍有《黃樓賦》,至今稱道,臣等自曝過夫廠,廠在兩水交流之中,過至百步洪,泗、淋、濟、汶、沛水合流,自東北、雌二水合流,自西北至徐州城北,泗清濁,會流南注于是洪, 洪之湍急處, 雖不及呂梁之遠, 其險峻尤甚, 亂石錯雜, 嘉如虎頭鹿角, 人呼為‘離船石’. 水勢奔突,轉折壅遏, 激為驚湍, 湧為急溜, 轟震霆,噴霧霜,衝決倒瀉,舟行甚難,臣船自工部分司清風堂之前,用人奖百餘,兩岸手牽路,以竹索轉舟,逆挽而上,臣與傅榮等上岸,由于牵路步行,見鋪石堅整,問於榮曰:“治此路者其有功於後世乎!”榮曰:“在昔此路湫险,稍遇水漲,無路可尋,水退則土去石出,艱於步履,近年郭昇、尹庭用相繼修補,用石板砌,以鐵鏟,灌以以石灰,故若此堅且固矣.”夜至汴、泗交流之會留泊.

서주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새벽에 구녀총(九女塚)과 자방산(子房山)을 지나 운룡산(雲龍山)362에 이르렀습니다.

운룡산 위에는 석불사(石佛寺)가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그 서쪽에는 희마대(戱馬臺)[1]363와 발검천(拔劍泉)364 이 있었습니다.

또 황충집(堤蟲集)·부창(夫廠)·광운창(廣雲倉)·국저문(國儲門)·화성묘(火星廟)365를 지나 팽성역(彭城驛)에 이르렀는데 등용문(登庸門), 진사주헌(進士朱軒)은 팽성역 앞에 있었습니다.

서주부성(徐州府城)은 팽성역 서북방의 2-3리에 있었습니다.

서주는 옛날의 대팽씨국(大彭氏國)으로, 항우(項羽)[2]366가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자칭하고는 이곳에 도읍을 정했었는데367, 성의 동쪽에는 성을 보호하는 제방이 있었습니다.

또 황루(黃樓)의 옛터가 있었으니, 이는 소식(蘇軾)[3]이 서주의 지주(知州)였을 때 368 세운 것이었습니다.

369 소철(蘇轍)370에겐 〈황루부(黃樓賦)>가 있어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신 등은 팽성역(彭城驛)에서 부창(夫__)을 지났는데, 부창은 두 강물이 서로 만나서 흐르는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백보홍(百步洪)을 지나가니 사수(泗水)·수수(洙水)·제수(濟水)·문수(汶水)·패수(流水)가 합류하여 동북방으로부터, 변수(沐水)·수수(唯水)는 합류하여 서북방으로부터 서주성 북쪽에 이르렀습니다.

사수는 맑고 변수는 흐렸으나 한곳에 모여 흘러 남쪽으로 이홍에 들어가는데, 홍의 물이 빨리 흐르는 곳이 비록 여량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 험준한 것이 더욱 심하여 난잡한 돌이 뒤섞여 많이 쌓여서 범의 머리나 사슴의 뿔과 같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배를 뒤집어엎는 바위 번석석[飜船石]이라고 불렀습니다.

물 흐르는 기세가 급하게 흐르다가 꺾이어 구부러지면서 막히기도 하고 세차게 부딪치면서 빠르게 흐르고 솟아오르면서 급류가 되어 벼락 치는 소리처럼 진동하고 물보라를 뿜어내며 맞부딪치며 뚫려 흐르다 엎어져 쏟아지니 배를 움직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신의 배는 공부분사(工部分司) 청풍당(淸風堂)의 앞에서 인부 100여 명을 써서 양쪽 언덕의 좁은 길을 따라 대로 꼰 새끼로 배를 얽어매어 당기면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신은 부영 등과 함께 언덕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걸어 가다가 돌을 단단하고 가지런히 깔아 놓은 것을 보고 부영에게 묻기를,

“이 길을 닦은 사람은 후세에 공로를 남긴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 길이 지형이 낮고 좁아서 조금만 물이 불어도 길을 찾을 수가 없으며, 물이 물러가면 흙은 사라지고 돌이 솟아나와 걸어가기가 고생이었습니다. 근년에 곽승(郭昇)과 윤정용(尹庭用)이 서로 잇달아 보수하여 석판(石板)을 깔고 이어 철정(鐵銃)을 두드려 박고 석회로 땜질을 한까닭에 이같이 단단하고 굳게 된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밤에 변수와 사수가 서로 만나 흐르는 곳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3rd Day. Passing Hsü-chou. This day it rained, and there were high winds.

[We went from Chiu-nü-chung to Peng-ch'eng Station, two or three li southeast of Hsü-chou Prefecture.] Hsü-chou was the old Ta-p'eng-shih-kuo. When Hsiang Yü called himself Dictator King of Western Ch’u, he put his capital west of that wall.73 There is a levee to protect the wall, and there are the old foundations of the Yellow Tower, which was built when Su Shih was governor of Hsü. Su Che [wrote) a Yellow Tower Fu, praised to the present day.74 From the station we passed workers' quarters that were at the junction of two rivers and came to Hundred-Yard Flood. From the northeast the Ssu, Chu, Chi, Wen, and Pei rivers flowed together; and from the northwest the Pien and Sui flowed together. Arriving north of Hsü-chou wall, the Ssu, Ch’ing, Pien, and Cho converged and flowed south into this flood. The swift part of the flood, though not as long as that of Lü-liang, was extremely dangerous. Great numbers of rocks, like tigers' heads and deers' antlers, lay scattered in disorder. People called them the Boat-tipping Rocks. The water ran swiftly, twisting and turning past obstacles, turbulent with startling rushes, rumbling and shaking like thunder, and spuming like sleet and hail. It burst through some places and seeped through others, making it very hard for boats to pass. From in front of Ch’ing-feng Hall, a local post of the Ministry of Works, it took over one hundred laborers, following the tow-paths on both banks, to pull the boats upstream with bamboo ropes that had been fastened to them. I, Fu Jung, and others climbed onto the bank and walked along the tow-path. I saw that the paving-stones were firm and in good repair, and I asked Fu Jung about them: “I imagine that the people who made this path must have bestowed a blessing on later generations.” Fu Jung said, “In olden times, this path was low and narrow. When the river rose a little, there was no path that could be used. When the water receded, the earth came away and the stones came out, and it was hard to walk. In recent years, Kuo Sheng and Yin T'ing-yung in turn have repaired it. 75 They used stone slabs laid in layers, fastened them with iron bolts and cemented them with lime. That is why they are as strong and firm as they are.” At night we came to the junction of the Pien and Ssu and stayed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