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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환이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당시, 평안도 관찰사는 권환의 오랜 지인(舊要)이었는데 권환의 옷이 더러워지자 새 옷을 보내주었으나 어사에게 가당치 않다며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이로 인해 권환은 청관(淸官)으로 더욱 명망이 높아졌다.
 
권환이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당시, 평안도 관찰사는 권환의 오랜 지인(舊要)이었는데 권환의 옷이 더러워지자 새 옷을 보내주었으나 어사에게 가당치 않다며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이로 인해 권환은 청관(淸官)으로 더욱 명망이 높아졌다.
  
이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637 경신환국(1680, 숙종 6)]으로 남인(南人)에 대한 서인(西人)의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지자 권환 역시 파직되어 김석주(金錫胄) 등에 의해 북관(北關)으로 유배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숙종이 이를 윤허하지 않았기에 유배형에 처해지는 것을 간신히 면하였고 권환은 김포(金浦)의 제남(濟南)으로 잠시 낙향하게 된다. 1682년(숙종 8)에 경기도 이천(伊川)에 유배되었다가, 1683년(숙종 9)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266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방환(放還)되었으나 곧바로 조정으로 복귀하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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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637 경신환국(1680, 숙종 6)]으로 남인(南人)에 대한 서인(西人)의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지자 권환 역시 파직되어 김석주(金錫胄) 등에 의해 북관(北關)으로 유배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숙종이 이를 윤허하지 않았기에 유배형에 처해지는 것을 간신히 면하였고 권환은 김포(金浦)의 제남(濟南)으로 잠시 낙향하게 된다. 1682년(숙종 8)에 경기도 이천(伊川)에 유배되었다가, 1683년(숙종 9)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266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방환(放還)되었으나 곧바로 조정에 복귀하진 못하였다.  
  
 
1689년(숙종 15)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제수되어 조정에 복직했다. 이해에 숙종의 특명으로 승정원(承政院) 관원으로 발탁되었으며,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또 외직으로 나아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며 재정 건전화를 도모했는데 이는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512027_001 『숙종실록』]에 보인다.
 
1689년(숙종 15)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제수되어 조정에 복직했다. 이해에 숙종의 특명으로 승정원(承政院) 관원으로 발탁되었으며,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또 외직으로 나아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며 재정 건전화를 도모했는데 이는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512027_001 『숙종실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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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葬地)는 부평(富平) 계양산(桂陽山) 동울해좌지원(東麓亥坐之原)이다. 현재 해당 지역은 안동 권씨 집장지로 주소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임학동 산 7 -5번지이다. 묘역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철조망으로 막혀 있으며, 묘 16기와 비석 4기, 상석 8기, 망부석 2기 등의 석물이 함께 위치하고 있다.
 
장지(葬地)는 부평(富平) 계양산(桂陽山) 동울해좌지원(東麓亥坐之原)이다. 현재 해당 지역은 안동 권씨 집장지로 주소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임학동 산 7 -5번지이다. 묘역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철조망으로 막혀 있으며, 묘 16기와 비석 4기, 상석 8기, 망부석 2기 등의 석물이 함께 위치하고 있다.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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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6 || 서울 자택에서 사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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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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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49600, 126.734154, 계양산 안동 권씨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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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묘갈명? 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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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는 주로 무덤에 묻힌 사람의 이름, 태어난 날과 죽은 날, 가족관계 등의 내용이 담기고, '''묘지명(墓誌銘)'''은 묻힌 사람에 대한 칭송, 찬양, 추념, 추도의 내용이 추가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묘지는 제목'''인 셈이고, '''묘지명은 문장이 담기는 내용'''인 셈이다. 묘지석(墓誌石)은 앞서 언급한 묘지명을 돌로 새겨 죽은 사람 곁에 묻은 판석을 말하는 것이며, 약어로는 '''석지(石誌)'''라고도 이른다. 혹 묘지명이 자기제일 경우 이를 약어로 '''자지(磁誌)'''로 칭한다. '''묘갈명(墓碣銘)'''은 무덤 앞에 건립된 머리부분이 둥그스름한 비석에 새긴 문장을 이른다. 주로 '''묘비(墓碑)'''라는 단어와 통용되는데 본디 양자는 별도의 개념으로 분류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동의어로 정착되었다. 묘갈명이나 묘지명 모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동일하나 묘갈과 묘지명은 역할이 각각 다르다. 묘갈은 죽은 이의 아름다운 행적을 널리 후세까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해당 인물의 전체적인 삶을 조망하는데 자료로 삼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에 반해 무덤에 부장된 묘지명은  한 사람의 평생 행적에 대한 준엄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래서 묘지명은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중요하며, 실용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 묘지명을 남이 아닌 죽은 자, 즉 자신이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고 미리 써놓아 죽음을 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왕실이나 사대부, 양반이나 서민이나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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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은 한 인물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 이루어진 생활, 문화, 역사 등을 총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대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06029_001 『태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묘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은 피장자의 정확한 행적을 엄정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권환 묘지명'''==
 
=='''권환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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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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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The_Epitaph_of_ KwonHwan_Side.JPG|권환 묘지명 책등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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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콘텐츠'''==
 
=='''연관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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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505A_0200_010_0010_2005_A211_XML 『약산만고』「권환 묘지명」전문]
 
*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505A_0200_010_0010_2005_A211_XML 『약산만고』「권환 묘지명」전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7145 『권환(權瑍)』]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7145 『권환(權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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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유사, [http://blog.daum.net/jsy1851/1801?np_nil_b=-2 『권환묘갈(權瑍墓碣)』]
  
 
=='''주석'''==
 
=='''주석'''==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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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4일 (목) 15:13 기준 최신판


생애

권환(權瑍, 1636 ~ 1716)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일찍이 남인의 중진인 이민구(李敏求)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해 학문을 익혔다. 1668년(현종 9) 33세의 나이로 문과 15위에 급제했으며, 1669년(현종 10)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어 처음으로 조정에 출사했다. 1674년(현종 15)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고, 1675년(숙종 1) 숙종에 의해 전적으로 발탁되어 병조좌랑(兵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병조정랑(兵曹正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겸(兼)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예문관지제교(藝文館知製敎) 등을 두루 역임했으며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으로 선택되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이르렀다. 1676년(숙종 2)에는 숙종의 명을 받아 평안도 암행어사로, 1678년(숙종 4)에 다시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각각 파견되었다.

권환이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당시, 평안도 관찰사는 권환의 오랜 지인(舊要)이었는데 권환의 옷이 더러워지자 새 옷을 보내주었으나 어사에게 가당치 않다며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이로 인해 권환은 청관(淸官)으로 더욱 명망이 높아졌다.

이후 경신환국(1680, 숙종 6)으로 남인(南人)에 대한 서인(西人)의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지자 권환 역시 파직되어 김석주(金錫胄) 등에 의해 북관(北關)으로 유배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숙종이 이를 윤허하지 않았기에 유배형에 처해지는 것을 간신히 면하였고 권환은 김포(金浦)의 제남(濟南)으로 잠시 낙향하게 된다. 1682년(숙종 8)에 경기도 이천(伊川)에 유배되었다가, 1683년(숙종 9)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방환(放還)되었으나 곧바로 조정에 복귀하진 못하였다.

1689년(숙종 15)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제수되어 조정에 복직했다. 이해에 숙종의 특명으로 승정원(承政院) 관원으로 발탁되었으며,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또 외직으로 나아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며 재정 건전화를 도모했는데 이는 『숙종실록』에 보인다.

이때 인현왕후 민씨가 장렬왕후 국상 중 탄일문안(誕日問安)을 받은 문제로 인현왕후를 폐출하려하자 남인에 속했던 권환은 특이하게도 서인에 속한 이상진, 이윤수, 심계량, 오두인 등을 탄원할 것을 청원했다. [1]

1691년(숙종 17) 다시 조정으로 복직하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시작으로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며 소(疏)를 누차 올려 군왕의 덕을 닦을 것을 강조하였다. 숙종은 이를 가납(嘉納)하여 권환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옮겨 제수하였으며 1692년(숙종 18) 다시금 외직으로 나아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됐다. 개성부유수 재직 당시 지역의 군역(軍役)이 막심한 폐해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건전화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이는 『승정원일기』에 상세히 나타난다.

1693년(숙종 19) 다시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면서 전후 3차례 대사성에 임명된 특이한 이력을 남기게 된다. 허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의 발발로 인해 정국의 주도권이 다시 서인에게 넘어가자 권환은 평안도 철산(鐵山)에 유배됐다. 1696년(숙종 22) 방면된 이후 춘천(春川)에 은거하며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으며 1716년(숙종 42) 8월, 81세의 나이로 서울의 집에서 사망했다.

장지(葬地)는 부평(富平) 계양산(桂陽山) 동울해좌지원(東麓亥坐之原)이다. 현재 해당 지역은 안동 권씨 집장지로 주소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임학동 산 7 -5번지이다. 묘역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철조망으로 막혀 있으며, 묘 16기와 비석 4기, 상석 8기, 망부석 2기 등의 석물이 함께 위치하고 있다.

연보

연도 행적 비고
1636 부친 권대윤(權大胤)과 모친 단양우씨(丹陽禹氏) 사이에서 탄생 병자호란 발발년도
1668 문과 15위로 급제 -
1669 승문원 관원으로 첫 조정 출사 -
1676 평안도,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됨 상관과의 불화로 승진에서 미끄러짐
1680 김포 제남으로 낙향 경신환국
1682 경기도 이천으로 유배 이듬해 방면
1689 사간원헌납, 홍문관부응교로 조정에 복직, 이후 황해도관찰사를 맡아 재정 건전화 달성 기사환국
1691 성균관대사성에 첫 임명 -
1692 개성부유수로 나아가 재정 건전화 달성 -
1694 평안도 철산에 유배 갑술환국
1696 방면 후 강원도 춘천에 은거 -
1716 서울 자택에서 사망 -


묘소 위치


묘지명? 묘갈명? 묘지석?

묘지(墓誌)는 주로 무덤에 묻힌 사람의 이름, 태어난 날과 죽은 날, 가족관계 등의 내용이 담기고, 묘지명(墓誌銘)은 묻힌 사람에 대한 칭송, 찬양, 추념, 추도의 내용이 추가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묘지는 제목인 셈이고, 묘지명은 문장이 담기는 내용인 셈이다. 묘지석(墓誌石)은 앞서 언급한 묘지명을 돌로 새겨 죽은 사람 곁에 묻은 판석을 말하는 것이며, 약어로는 석지(石誌)라고도 이른다. 혹 묘지명이 자기제일 경우 이를 약어로 자지(磁誌)로 칭한다. 묘갈명(墓碣銘)은 무덤 앞에 건립된 머리부분이 둥그스름한 비석에 새긴 문장을 이른다. 주로 묘비(墓碑)라는 단어와 통용되는데 본디 양자는 별도의 개념으로 분류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동의어로 정착되었다. 묘갈명이나 묘지명 모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동일하나 묘갈과 묘지명은 역할이 각각 다르다. 묘갈은 죽은 이의 아름다운 행적을 널리 후세까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해당 인물의 전체적인 삶을 조망하는데 자료로 삼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에 반해 무덤에 부장된 묘지명은 한 사람의 평생 행적에 대한 준엄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래서 묘지명은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중요하며, 실용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 묘지명을 남이 아닌 죽은 자, 즉 자신이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고 미리 써놓아 죽음을 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왕실이나 사대부, 양반이나 서민이나 다를 바가 없다.

묘지명은 한 인물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 이루어진 생활, 문화, 역사 등을 총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대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묘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은 피장자의 정확한 행적을 엄정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권환 묘지명

묘지명은 총 6책(冊)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으로 확인되며, 현재 입수된 묘지명은 5책(六冊)에 해당된다. 책등에는 「행(行) 대사성(大司成) 권공(權公) 묘지명(墓誌銘) 모오(茅五)」라 적혀있으며,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 … (전략) …夫人雖屢空不。以告爲母氏憂人皆稱之後。公十一年丁亥生。先公二十八年戊辰卒。享年四十二。墓在公墓下一尺許亥坐原也。兩夫人皆以公貴。追封貞夫人。有男四人女三人。男長應經進士。貞陵參奉。前夫人出也。次憲經。次德經生貟。繼季父忠勳都事公後。次懋經。文科典籍而夭。女長進士沈壽根。次生貟李如晟。次李亨運。應經娶參判申厚命女。生二男五女。世銓進士,世鉉。女洪重謙,李萬鼎,吳弼運進士,李達中進士。憲經初娶參判李壽徵女。無子。後娶掌令鄭有徵女。生二男一女。世鐸,世鏶。女洪㬙文科。德經娶判書李宇鼎女。生三男二女。世鎭,世錫,世欽。女李泰胄。餘幼。懋經娶義禁府都事李相奎女。生二男。世傑,世鎬。沈壽根生二男一女。游仁,游義文科騎省郞。女南泰膺進士。李如晟生四男一女。齊松,友松,惟松。餘幼。李亨運生五男。完,寬,𡩄,寯,㝚。世銓有一女無子。取世鉉第二子景彦爲子。女李益烈。世鉉生三男。最彦,景彦,昌彦。一女幼。洪重謙生一男喆輔。李萬鼎生二男一女。曇,暹。女朴友文。吳弼運生三男二女。大謙,大有。餘幼。側室女曹命運。銘曰。旣和且易。不矜以持。莅下則威。維素其質。不畦而畛。臨事則敏。威生於廉。敏資於勤。元夫所云。克勤克廉。不矯而餙。裘褐飮食。學以武火官 … (후략) …

상술한 묘지명은 특이하게도 권환의 묘지명 전문이 수록되어있는 『약산만고(藥山漫稿)의 글과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다음은 『약산만고』의 해당 부분의 발췌문이다.

  • … (전략) … 後夫人金氏籍順天。㓒原縣監諱斗明之女。事舅孝。撫前夫人子。無間己出。後公十一年丁亥生。先公二十八年戊辰卒。享年四十二。葬於富平乾坐之原。墓在公墓下一尺許。兩夫人皆以公貴。追封貞夫人。有男四人女三人。男長應經進士。貞陵參奉。前夫人出也。次憲經。次德經生貟。繼季父忠勳都事公後。次懋經。文科典籍而夭。女長進士沈壽根。次生貟李如晟。次李亨運。應經娶參判申厚命女。生二男五女。世銓進士,世鉉。女洪重謙,李萬鼎,吳弼運進士,李達中進士。憲經初娶參判李壽徵女。無子。後娶掌令鄭有徵女。生二男一女。世鐸,世鏶。女洪㬙文科。德經娶判書李宇鼎女。生三男二女。世鎭,世錫,世欽。女李泰胄。餘幼。懋經娶義禁府都事李相奎女。生二男。世傑,世鎬。沈壽根生二男一女。游仁,游義文科騎省郞。女南泰膺進士。李如晟生四男一女。齊松,友松,惟松。餘幼。李亨運生五男。完,寬,𡩄,寯,㝚。世銓有一女無子。取世鉉第二子景彦爲子。女李益烈。世鉉生三男。最彦,景彦,昌彦。一女幼。洪重謙生一男喆輔。李萬鼎生二男一女。曇,暹。女朴友文。吳弼運生三男二女。大謙,大有。餘幼。側室女曹命運。銘曰。旣和且易。不矜以持。莅下則威。維素其質。不畦而畛。臨事則敏。威生於廉。敏資於勤。元夫所云。克勤克廉。不矯而餙。裘褐飮食。學以武火。官 … (후략) …

『약산만고』와 『권환 묘지명』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문장의 전문(前文)에 해당한다. 두 문장은 전혀 다른 사실을 기술하거나 혹은 문장의 배치만 바뀐 정도가 포착되는데 과연 이는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는 당시 청화백자 묘지명의 번조(燔造) 프로세스를 이해하면 풀 수 있는 문제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효종대왕 영릉 청화백자 묘지명 3점은, 효종 국장 당시 사왕(嗣王) 현종이 왕릉을 조성하면서 부장할 묘지명을 각기 다른 장인들로 하여금 제작하게 한 뒤 이 가운데 가장 품질이 좋은 묘지명을 부장하고자 시범품을 만들도록 지시한 산물이다.

즉 여러 개의 묘지명을 제작하여 가장 좋은 품질의 묘지명을 부장하였다는 근거가 존재하는 만큼 『권환 묘지명』은 실제 부장품이 아니라 시범품으로 제작되었다가 유출되어 현재까지 전래되는 유물로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정밀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실제 부장품이었는가의 가부에 대해선 유보하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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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