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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 ||
− |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 + |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ref> [https://namu.wiki/w/%EB%85%B8%EA%B7%BC%EB%A6%AC%20%EC%96%91%EB%AF%BC%20%ED%95%99%EC%82%B4%20%EC%82%AC%EA%B1%B4 나무위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전개]</ref> |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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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경과'''== | =='''사건 경과'''== | ||
*사건의 은폐 | *사건의 은폐 | ||
− |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 + |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 |
*피해자들의 노력 | *피해자들의 노력 | ||
− |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 + |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
*AP통신의 보도 | *AP통신의 보도 | ||
− |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에이피(AP)통신>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 + |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에이피(AP)통신>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ref>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
*한미 합동조사 | *한미 합동조사 | ||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 |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 | ||
− |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 + |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007.html#csidx78d06e445651349aff8c39b2c348e32 한겨레-68년 전 오늘, 노근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학살됐다.]</ref> |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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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 | 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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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근리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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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9년 6월 25일 (화) 23:59 기준 최신판
정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학살 과정과 결과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1]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사건 경과
- 사건의 은폐
전쟁 중 신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 역시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진급을 우려한 군인 가해자들의 은폐로 한 동안 묻혀있었다.
- 피해자들의 노력
이 사건이 세상에 달려지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 AP통신의 보도
특히 1999년 9월29일, 미국 <에이피(AP)통신>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2] 이 기사를 통해 노근리사건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 한미 합동조사
1999년 10월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아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보고 피해자와 유족으로부터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3]
-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그러던 중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증언
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4] |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5] |
멀티미디어
학살 관련 영상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 작은연못
노근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로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제작비를 국민들이 성금으로 모아 화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