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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가야금(伽倻琴)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오동나무로 만든 판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기러기 발 모양의 안족에 얹어 놓고 손가락으로 뜯거나 튕겨서 소리 를 내는 악기로 전통음악과 민속음악, 창작음악에 이르기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삼현삼죽 (三絃三竹)의 하나였으며, 그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통음악에서 주요하게 쓰이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춤이나 노래 반주를 주로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선비들이 손수 연주하며 즐기거나 노래 반주 악기로 애호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말엽에 산조라는 기악독주곡 형태가 탄생됨으로써 가야금은 한국음악 전 반에서 노래 반주와 풍류 등의 실내악뿐만 아니라 독주악기로서도 각광받는 악기가 되었 고, 고도의 훈련과 기교를 요하는 전문가를 위한 악기로 변신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와 해방 후에 가야금은 무용 반주 음악으로서 큰 몫을 하게 된다. 이때 기존의 명주 실 대신 구리줄을 사용하여 철가야금이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음악의 용도에 따라 새로 운 모습으로 개량되기 시작한다. 이렇듯 한국음악 전반에서 노래 반주와 풍류 등의 실내 악뿐 아니라 독주악기로도 각광받는 악기가 되어 고도의 훈련과 기교를 요하는 악기로 변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변천을 거친 가야금은 현재 창작음악 연주를 위하여 현이나 음역, 음량 등을 다양하게 개량하였고,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지고 보급된 대표적 악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ref>[https://www.ntok.go.kr/kr/Orchestra/Introduction/Instrument 국립국악관현악단 가야금]</ref> | |
− |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으며,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지었는데,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토우(土偶)에서 가야금이 발견되고, 중국의 『삼국지』 중 위지 동이전에 삼한시대에 이미 한국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사용된 민족 고유의 현악기가 가실왕 때 중국의 쟁(箏)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했다는 것이 오늘날 국악학계의 통설이다. 진흥왕 이후 가야금은 신라에 널리 퍼져 그 곡수가 185곡에 이르렀다고 하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궁정과 민간에서 크게 애호되었다. 19세기 말 김창조(金昌祖)에 의해 가야금산조가 창시되면서, 전통적인 가야금, 즉 법금보다 빠르고 다양한 산조 기교에 적합한 소형의 산조가야금이 만들어져 널리 보급되었다.<ref>[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26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금]</ref> | + | |
+ | ===기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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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으며,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지었는데,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토우(土偶)에서 가야금이 발견되고, 중국의 『삼국지』 중 위지 동이전에 삼한시대에 이미 한국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사용된 민족 고유의 현악기가 가실왕 때 중국의 쟁(箏)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했다는 것이 오늘날 국악학계의 통설이다. 진흥왕 이후 가야금은 신라에 널리 퍼져 그 곡수가 185곡에 이르렀다고 하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궁정과 민간에서 크게 애호되었다. 19세기 말 김창조(金昌祖)에 의해 가야금산조가 창시되면서, 전통적인 가야금, 즉 법금보다 빠르고 다양한 산조 기교에 적합한 소형의 산조가야금이 만들어져 널리 보급되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26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야금]</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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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량 가야금의 성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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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면서 초대 단장인 박범훈이 가야금 개량을 악기제작자에게 의뢰하여 22현 가야금이 만들어졌다. 22현 가야금은 당시 국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창작곡과 외국곡을 연주함으로써 국악의 대중화 시대를 여는 데에 한몫을 하기도 했다. 전통가야금으로는 전조(轉調 악곡의 도중 진행되던 조가 다른 조로 바뀌는 일, 조바뀜)나 조옮김의 한계에 부딪쳐 왔고, 음악 적 표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문제점이 있었다. 관현악이 구성되어지고 음악의 세계화에 맞추어 폭넓은 연주를 하려는 악단 입장에 서는 개량악기의 절실함을 느낀 것이다. 개량악기에 대해 전통 국악의 구성진 맛과 고유한 특성의 장점을 잃을까 우려하는 반대 입장 도 있었지만, 개량가야금은 1995년 3월 개량국악기 시범연주회를 통해 전통음악이 아닌 다양한 곡들을 연주함으로써 발전의 가능성 을 보여 주었다. |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면서 초대 단장인 박범훈이 가야금 개량을 악기제작자에게 의뢰하여 22현 가야금이 만들어졌다. 22현 가야금은 당시 국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창작곡과 외국곡을 연주함으로써 국악의 대중화 시대를 여는 데에 한몫을 하기도 했다. 전통가야금으로는 전조(轉調 악곡의 도중 진행되던 조가 다른 조로 바뀌는 일, 조바뀜)나 조옮김의 한계에 부딪쳐 왔고, 음악 적 표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문제점이 있었다. 관현악이 구성되어지고 음악의 세계화에 맞추어 폭넓은 연주를 하려는 악단 입장에 서는 개량악기의 절실함을 느낀 것이다. 개량악기에 대해 전통 국악의 구성진 맛과 고유한 특성의 장점을 잃을까 우려하는 반대 입장 도 있었지만, 개량가야금은 1995년 3월 개량국악기 시범연주회를 통해 전통음악이 아닌 다양한 곡들을 연주함으로써 발전의 가능성 을 보여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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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4일 (월) 18:29 기준 최신판
물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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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명 | 가야금(伽倻琴) |
유형 | 물품, 소재 |
시대 | 고대~삼국 |
성격 | 악기, 현악기 |
용도 | 아악 연주, 민속악 연주 |
정의
우리나라 고유의 대표적인 현악기
내용
개요
가야금(伽倻琴)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오동나무로 만든 판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기러기 발 모양의 안족에 얹어 놓고 손가락으로 뜯거나 튕겨서 소리 를 내는 악기로 전통음악과 민속음악, 창작음악에 이르기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삼현삼죽 (三絃三竹)의 하나였으며, 그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통음악에서 주요하게 쓰이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춤이나 노래 반주를 주로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선비들이 손수 연주하며 즐기거나 노래 반주 악기로 애호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말엽에 산조라는 기악독주곡 형태가 탄생됨으로써 가야금은 한국음악 전 반에서 노래 반주와 풍류 등의 실내악뿐만 아니라 독주악기로서도 각광받는 악기가 되었 고, 고도의 훈련과 기교를 요하는 전문가를 위한 악기로 변신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와 해방 후에 가야금은 무용 반주 음악으로서 큰 몫을 하게 된다. 이때 기존의 명주 실 대신 구리줄을 사용하여 철가야금이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음악의 용도에 따라 새로 운 모습으로 개량되기 시작한다. 이렇듯 한국음악 전반에서 노래 반주와 풍류 등의 실내 악뿐 아니라 독주악기로도 각광받는 악기가 되어 고도의 훈련과 기교를 요하는 악기로 변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변천을 거친 가야금은 현재 창작음악 연주를 위하여 현이나 음역, 음량 등을 다양하게 개량하였고,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지고 보급된 대표적 악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
기원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으며,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지었는데,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토우(土偶)에서 가야금이 발견되고, 중국의 『삼국지』 중 위지 동이전에 삼한시대에 이미 한국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사용된 민족 고유의 현악기가 가실왕 때 중국의 쟁(箏)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했다는 것이 오늘날 국악학계의 통설이다. 진흥왕 이후 가야금은 신라에 널리 퍼져 그 곡수가 185곡에 이르렀다고 하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궁정과 민간에서 크게 애호되었다. 19세기 말 김창조(金昌祖)에 의해 가야금산조가 창시되면서, 전통적인 가야금, 즉 법금보다 빠르고 다양한 산조 기교에 적합한 소형의 산조가야금이 만들어져 널리 보급되었다.[2]
개량 가야금의 성과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면서 초대 단장인 박범훈이 가야금 개량을 악기제작자에게 의뢰하여 22현 가야금이 만들어졌다. 22현 가야금은 당시 국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창작곡과 외국곡을 연주함으로써 국악의 대중화 시대를 여는 데에 한몫을 하기도 했다. 전통가야금으로는 전조(轉調 악곡의 도중 진행되던 조가 다른 조로 바뀌는 일, 조바뀜)나 조옮김의 한계에 부딪쳐 왔고, 음악 적 표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문제점이 있었다. 관현악이 구성되어지고 음악의 세계화에 맞추어 폭넓은 연주를 하려는 악단 입장에 서는 개량악기의 절실함을 느낀 것이다. 개량악기에 대해 전통 국악의 구성진 맛과 고유한 특성의 장점을 잃을까 우려하는 반대 입장 도 있었지만, 개량가야금은 1995년 3월 개량국악기 시범연주회를 통해 전통음악이 아닌 다양한 곡들을 연주함으로써 발전의 가능성 을 보여 주었다.
1995년 10월 한ㆍ중ㆍ일 개량가야금 축제에서 산조를 주제로 하여 작곡된 22현 가야금 협주곡 ‘새산조’가 연주됨으로써 개량가야금 으로 전통음악의 연주도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는 7음 음계로 음역이 확대된 개량가야금 덕택에 작곡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우리의 악기 가야금이 다른 나라의 악기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볼 수 있 었다. 이 후 저음을 조금 더 보완하여 3줄을 늘린 25현 가야금이 등장하였는데, 25현을 사용하는 연주 단체가 늘어갔고 새로운 작품 도 많이 창작됨으로써 다양한 연주가 시도되었다. 지금은 22현보다 25현의 사용이 활발하다. 개량악기의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완하여 더 좋은 악기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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