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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김수정의 도움으로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일시 머물렀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38년 [[백석]]이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의했으나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1939년 백석이 만주 신찡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바 있고, 1990년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했다.<ref>김자야 「내 사랑 백석」</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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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야는 서점에서 본인이 평소에 애독하던 신간잡지 『문예춘추』와 『여원』 두 권을 사가지고 돌아서는데, 문득 『[http://www.hanjadoc.com/culture/jayaoga.htm 자야오가]』라는 당시선집(唐詩選集)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 타이틀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서 대뜸 사가지고 와서 [[백석]]에게 보였다.<ref>김자야 「내 사랑 백석」 67p</ref> 백석은 이를 보고 진향에게 그 아호를 붙여주었다. 그날부터 '자야'는 이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오직 둘만이 서로 통하는 애칭이 되었다.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서 당신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ref>김자야 「내 사랑 백석」 68p</ref> | ||
− | +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
+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관련된 자세한 서술은 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시와 관련된 이야기|링크]] 참조 | ||
− | + | *'''자야'''와 [[백석]]의 이별 | |
+ | 자야는 귀찮고 역겨운 [[백석]]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작심하고 중국 상해로 떠났다. 그러다가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비천한 여자로서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려온 것"이라는 죄의시에 시달리면서도 [[백석]]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달포 만에 경성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백석]]이 보낸 쪽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갑자기 행방을 감춰버린 연인을 그는 애타게 찾으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야는 신징으로 같이 떠나자는 [[백석]]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자야를 뒤로 하고 백석은 일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야에게서 멀어져갔다. 이것이 [[백석]]과 자야의 마지막이었다. 1939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ref>안도현 「백석평전」 209p</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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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 자야엽서.jpg|궁중무 「춘앵전」을 추고 있는 김자야(장발 화백이 그린 1930년대 엽서).<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Vn2&articleno=15250418&categoryId=606578®dt=20141013192531 다음 블로그]</ref>18세의 나이였다고 한다.<ref>김자야 「내 사랑 백석」 11p</ref> | ||
+ | 파일: 노년자야.jpg|노년의 자야 여사<ref>[http://munhaknews.com/?p=8140 문학뉴스] 백석 · 법정 · 진향 관련 기사들 “대부분 조작되고 윤색됐다”</ref> | ||
+ | 파일: 노년자야2.jpg|노년의 자야 여사<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lthat_art&logNo=221135895468&proxyReferer=&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네이버 포스트] 공연, 전시 매거진, 올댓아트</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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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8F%84%ED%98%84 안도현]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696980 「백석평전」],다산책방, 2014 |
− | * | + | *[[자야|김자야]]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7305 「내 사랑 백석」], 문학동네, 2011 |
=='''기여'''== | =='''기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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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references/> | ||
−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 | +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백석과 '나타샤'와 시(詩)]] [[분류:인물]] [[분류:유재혁]] |
2019년 6월 25일 (화) 23:57 기준 최신판
인물 정보 | |
---|---|
이름 | 본명 김영한, 기명 진향, 아호명 자야, 법명 길상화 |
출생 | 1916년, 서울 관철동 |
사망 | 1999년 11월 14일 |
성별 | 여자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기생, 작가 |
경력 |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내 사랑 백석' 집필, 대원각 시주(現 길상사) |
정의
자야(본명 김영한)는 백석의 연인이었다.
내용
생애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김수정의 도움으로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일시 머물렀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38년 백석이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의했으나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1939년 백석이 만주 신찡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바 있고, 1990년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했다.[1]
백석과의 사랑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
[2] 백석과 자야의 첫만남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 링크 참조
- 자야라는 이름에 얽힌 사연
"나 당신에게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子夜)'라고 합시다!" |
[3] 자야는 서점에서 본인이 평소에 애독하던 신간잡지 『문예춘추』와 『여원』 두 권을 사가지고 돌아서는데, 문득 『자야오가』라는 당시선집(唐詩選集)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 타이틀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서 대뜸 사가지고 와서 백석에게 보였다.[4] 백석은 이를 보고 진향에게 그 아호를 붙여주었다. 그날부터 '자야'는 이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오직 둘만이 서로 통하는 애칭이 되었다.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서 당신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5]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관련된 자세한 서술은 이 링크 참조
- 자야와 백석의 이별
자야는 귀찮고 역겨운 백석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작심하고 중국 상해로 떠났다. 그러다가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비천한 여자로서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려온 것"이라는 죄의시에 시달리면서도 백석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달포 만에 경성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백석이 보낸 쪽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갑자기 행방을 감춰버린 연인을 그는 애타게 찾으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야는 신징으로 같이 떠나자는 백석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자야를 뒤로 하고 백석은 일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야에게서 멀어져갔다. 이것이 백석과 자야의 마지막이었다. 1939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6]
대원각 시주와 자야
대원각 시주와 관련된 자세한 서술은 이 링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