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월곶동(月串洞)"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새 문서: 116. 월곶동(月串洞278)) 鷰尾亭前鎭月移연미정 앞에는 둥근 달이 기울어 가는데, 黃公舊屋別成規황공의 옛집이 규모 있게 서있네. 一苞奇...)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 | ||
− | + | <big>鷰尾亭前鎭月'''移''' (<small>연미정전진월'''이'''</small>) 연미정 앞에는 둥근 달이 기울어 가는데, <br />黃公舊屋別成'''規''' (<small>황공구옥별성'''규'''</small>) 황공의 옛집이 규모 있게 서있네.<br />一苞奇竹千松樹 (<small>일포기죽천송수</small>) 기이한 대숲과 수천 그루 솔숲은,<br />認是當年種德'''基''' (<small>인시당년종덕'''기'''</small>) 그 당시 덕 베풀던 터인 줄을 알려주네.<br /> | |
− | + | ||
− | + | </big> | |
− | + | ||
○ 성종과 중종 때 창원 황씨 판서 지촌(芝村) 황형(黃衡)279)은 무로써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번 전공을 세워서 관직이 공조판서에까지 | ○ 성종과 중종 때 창원 황씨 판서 지촌(芝村) 황형(黃衡)279)은 무로써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번 전공을 세워서 관직이 공조판서에까지 | ||
14번째 줄: | 14번째 줄: | ||
지금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새집처럼 견고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바꾸려고 하면 재앙이 들었다. 섬돌 아래에는 대나무 숲이 있었는 데 지촌이 직접 심은 것이다. 마도(馬島)에서 군대를 돌릴 때 옮긴 것이다.”라고 한다. 공은 휘가 형(衡)이며 시호가 장무(莊武)이다. | 지금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새집처럼 견고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바꾸려고 하면 재앙이 들었다. 섬돌 아래에는 대나무 숲이 있었는 데 지촌이 직접 심은 것이다. 마도(馬島)에서 군대를 돌릴 때 옮긴 것이다.”라고 한다. 공은 휘가 형(衡)이며 시호가 장무(莊武)이다. | ||
− | + | ==인물== | |
− | + | * 황형(1459∼1520)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언평(彦平). | |
+ | |||
+ | |||
+ | ==참고== | ||
+ | * 월곶동 : 강화읍 월곶리로 예전에 월곶진(月串鎭)이 있었다. | ||
+ | * 上平 支韻 |
2019년 5월 21일 (화) 10:14 기준 최신판
鷰尾亭前鎭月移 (연미정전진월이) 연미정 앞에는 둥근 달이 기울어 가는데,
黃公舊屋別成規 (황공구옥별성규) 황공의 옛집이 규모 있게 서있네.
一苞奇竹千松樹 (일포기죽천송수) 기이한 대숲과 수천 그루 솔숲은,
認是當年種德基 (인시당년종덕기) 그 당시 덕 베풀던 터인 줄을 알려주네.
○ 성종과 중종 때 창원 황씨 판서 지촌(芝村) 황형(黃衡)279)은 무로써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번 전공을 세워서 관직이 공조판서에까지
올랐으며 일찍이 강화도로 물러나 거주하면서 월곶(月串)의 연미정(燕尾亭) 아래에다가 집을 짓고 종을 시켜 나무를 심었는데 수천 그
루에 이르렀다. 어떤 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이 심느냐?”라고 말을 하자 지촌은 “후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 난리 때에 첨병과 의병이 강도에 들어와 지켰는데 배와 목책들이 모두 마련되어서 모자람이 없게 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멀리 보는 식견에 탄복하였다.
○ 월곶에 진을 설치한 후에는 옛 집터를 진(鎭)의 관아로 삼았다. 지금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새집처럼 견고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바꾸려고 하면 재앙이 들었다. 섬돌 아래에는 대나무 숲이 있었는 데 지촌이 직접 심은 것이다. 마도(馬島)에서 군대를 돌릴 때 옮긴 것이다.”라고 한다. 공은 휘가 형(衡)이며 시호가 장무(莊武)이다.
인물
- 황형(1459∼1520)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언평(彦平).
참고
- 월곶동 : 강화읍 월곶리로 예전에 월곶진(月串鎭)이 있었다.
- 上平 支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