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충신 이춘일(李春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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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황상의 병인년(1866, 고종 3) 9월에 서양인의 도적들의 난리를 일으켰을 때 유수 이인기(李寅夔)·판관 김세헌(金世獻)·중군 이아무개 등이 수비를 하지 않고 도적떼가 이르자마자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그때 남문의 수문장인 이춘일(李春一)이 도적떼가 이르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너희들이 감히 이곳에 들어오려 하려느냐.”라고 하며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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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알려지자 공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 일이 알려지자 공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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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47316, 126.487190, [[강화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1003-15 | () 37.747316, 126.487190, [[강화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1003-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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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37.733851, 126.476067, [[52. 남산동(南山洞_수록암)]] 현 강화읍 화성길 | ||
+ | (B) 37.739427, 126.482456, [[53. 구춘당(九春堂*)]] 현 강화읍 남산리 산21 | ||
+ | (C) 37.738121, 126.482706, [[54. 청송심씨(靑松沈氏*)]] 현 강화읍 부조고개길 | ||
+ | (D) 37.742052, 126.487058, [[55. 부내12동(府內12洞*)]] 현 강화읍 남문로 | ||
+ | (E) 37.734451, 126.516065, [[56. 진보 돈대(鎭堡墩臺*)]] 현 강화읍 갑곳리 갑곶돈대 | ||
+ | (F) 37.744102, 126.487152,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강화산성남문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일원 | ||
+ | (G) 37.739253, 126.474012, [[58. 남대제월(南臺霽月)]]강화읍 남산리 남산 | ||
+ | (H) 37.747762, 126.476693, [[59. 서문동(西門洞)]]강화읍 신문리 621-4 연무당 옛터 | ||
+ | (I) 37.741810, 126.459236, [[60. 국정동(國淨洞)]] 현 강화읍 국화리 349-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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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인물== | ||
− | * | + | * 유수 이인기(李寅夔) |
+ | * 판관 김세헌(金世獻) | ||
+ | * 중군 이아무개 | ||
+ | * 수문장 이춘일(李春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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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참고== | ||
+ | * 구창서발문본에는 제 2구의 ʻ羞ʼ가 ʻ愁ʼ로 되어 있다. |
2019년 4월 27일 (토) 12:16 기준 최신판
粵在丙寅失此門 (월재병인실차문) 병인년 난리 통에 남문을 못 지켜서,
鑰魚堞雉帶羞痕 (약어첩치대수흔) 자물쇠와 치첩에는 상처가 둘러 있네.
大呼拔劍忠臣李 (대호발검충신리) 호령하며 칼을 뽑던 충성신하 이춘일은,
泉下應歸不死魂 (천하응귀불사혼) 구천으로 돌아갔으련만 혼은 죽지 않았네.
○ 황상의 병인년(1866, 고종 3) 9월에 서양인의 도적들의 난리를 일으켰을 때 유수 이인기(李寅夔)·판관 김세헌(金世獻)·중군 이아무개 등이 수비를 하지 않고 도적떼가 이르자마자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그때 남문의 수문장인 이춘일(李春一)이 도적떼가 이르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너희들이 감히 이곳에 들어오려 하려느냐.”라고 하며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일이 알려지자 공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기행지도
인물
- 유수 이인기(李寅夔)
- 판관 김세헌(金世獻)
- 중군 이아무개
- 수문장 이춘일(李春一)
참고
- 구창서발문본에는 제 2구의 ʻ羞ʼ가 ʻ愁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