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충신 이춘일(李春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57. 충신 이춘일(忠臣 李春一*) 粵在丙寅失此門병인년 난리 통에 남문을 못 지켜서, 鑰魚堞雉帶羞149)痕자물쇠와 치첩에는 상처가 둘러 있...)
 
(기행지도)
 
(같은 사용자에 의한 5개의 중간 편집이 숨겨짐)
1번째 줄: 1번째 줄:
57. 충신 이춘일(忠臣 李春一*)
+
 
粵在丙寅失此門병인년 난리 통에 남문을 못 지켜서,
+
<big>粵在丙寅失此'''門''' (<small>월재병인실차'''문'''</small>)   병인년 난리 통에 남문을 못 지켜서, <br />鑰魚堞雉帶羞'''痕''' (<small>약어첩치대수'''흔'''</small>)   자물쇠와 치첩에는 상처가 둘러 있네.<br />大呼拔劍忠臣李 (<small>대호발검충신리</small>)    호령하며 칼을 뽑던 충성신하 이춘일은,<br />泉下應歸不死'''魂''' (<small>천하응귀불사'''혼'''</small>)   구천으로 돌아갔으련만 혼은 죽지 않았네.<br />
鑰魚堞雉帶羞149)痕자물쇠와 치첩에는 상처가 둘러 있네.
+
</big>
大呼拔劍忠臣李호령하며 칼을 뽑던 충성신하 이춘일은,
+
 
149) 구창서발문본에는 ʻ羞ʼ가 ʻ愁ʼ로 되어 있다.
+
○ 황상의 병인년(1866, 고종 3) 9월에 서양인의 도적들의 난리를 일으켰을 때 유수 이인기(李寅夔)·판관 김세헌(金世獻)·중군 이아무개 등이 수비를 하지 않고 도적떼가 이르자마자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그때 남문의 수문장인 이춘일(李春一)이 도적떼가 이르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너희들이 감히 이곳에 들어오려 하려느냐.”라고 하며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부내면(府內面) 83
+
泉下應歸不死魂구천으로 돌아갔으련만 혼은 죽지 않았네.
+
○ 황상의 병인년(1866, 고종 3) 9월에 서양인의 도적들의 난리를
+
일으켰을 때 유수 이인기(李寅夔)150)·판관 김세헌(金世獻)·중군
+
아무개 등이 수비를 하지 않고 도적떼가 이르자마자 모두 성을 버리
+
달아나버렸다. 그때 남문의 수문장인 이춘일(李春一)이 도적떼가
+
이르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너희들이
+
감히 이곳에 들어오려 하려느냐.”라고 하며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
 
일이 알려지자 공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일이 알려지자 공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
 +
==기행지도==
 +
<googlemap width="700" height="390" lat="37.746287" lon="126.488011"  type= "normal"  zoom="13.7"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
 +
() 37.747316, 126.487190, [[강화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1003-15
 +
() 37.737915, 126.497717, [[51. 조산평(造山坪)]]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
 +
 +
3#000000
 +
 +
(A) 37.733851, 126.476067, [[52. 남산동(南山洞_수록암)]] 현 강화읍 화성길
 +
(B) 37.739427, 126.482456, [[53. 구춘당(九春堂*)]] 현 강화읍 남산리 산21
 +
(C) 37.738121, 126.482706, [[54. 청송심씨(靑松沈氏*)]] 현 강화읍 부조고개길
 +
(D) 37.742052, 126.487058, [[55. 부내12동(府內12洞*)]] 현 강화읍 남문로
 +
(E) 37.734451, 126.516065, [[56. 진보 돈대(鎭堡墩臺*)]] 현 강화읍 갑곳리 갑곶돈대
 +
(F) 37.744102, 126.487152,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강화산성남문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일원
 +
(G) 37.739253, 126.474012, [[58. 남대제월(南臺霽月)]]강화읍 남산리 남산
 +
(H) 37.747762, 126.476693, [[59. 서문동(西門洞)]]강화읍 신문리 621-4 연무당 옛터
 +
(I) 37.741810, 126.459236, [[60. 국정동(國淨洞)]] 현 강화읍 국화리 349-2
 +
 +
 +
</googlemap>
 +
 +
==인물==
 +
* 유수 이인기(李寅夔)
 +
* 판관 김세헌(金世獻)
 +
* 중군 이아무개
 +
* 수문장 이춘일(李春一)
 +
 +
==참고==
 +
* 구창서발문본에는 제 2구의 ʻ羞ʼ가 ʻ愁ʼ로 되어 있다.

2019년 4월 27일 (토) 12:16 기준 최신판

粵在丙寅失此 (월재병인실차)    병인년 난리 통에 남문을 못 지켜서, 
鑰魚堞雉帶羞 (약어첩치대수) 자물쇠와 치첩에는 상처가 둘러 있네.
大呼拔劍忠臣李 (대호발검충신리) 호령하며 칼을 뽑던 충성신하 이춘일은,
泉下應歸不死 (천하응귀불사) 구천으로 돌아갔으련만 혼은 죽지 않았네.

○ 황상의 병인년(1866, 고종 3) 9월에 서양인의 도적들의 난리를 일으켰을 때 유수 이인기(李寅夔)·판관 김세헌(金世獻)·중군 이아무개 등이 수비를 하지 않고 도적떼가 이르자마자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그때 남문의 수문장인 이춘일(李春一)이 도적떼가 이르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너희들이 감히 이곳에 들어오려 하려느냐.”라고 하며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일이 알려지자 공조참의에 추존되었고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기행지도

인물

  • 유수 이인기(李寅夔)
  • 판관 김세헌(金世獻)
  • 중군 이아무개
  • 수문장 이춘일(李春一)

참고

  • 구창서발문본에는 제 2구의 ʻ羞ʼ가 ʻ愁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