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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 Data
타입 : 인물 한글항목명 : 김수흥 한자항목명 : 金壽興 편자 : 자운서원팀 김소희
내용
- 요약 : 조선 중기의 문신. 효종 ·현종 때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74년 영의정으로 자의대비 복상문제를 정할 때, 남인의 기년설에 대해 대공설을 주장하다가 부처될 뻔 하였다. 1689년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출생~사망 | 1626~1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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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안동 |
자 | 기지 |
호 | 퇴우당,동곽산인 |
시호 | 문익 |
활동분야 | 행정,정치 |
주요저서 | 《퇴우당집》 |
본관 안동. 자 기지(起之). 호 퇴우당(退憂堂)·동곽산인(東郭散人). 시호 문익(文翼). 영의정 수항(壽恒)의 형. 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수항과 함께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敎理)·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현종 7) 호조판서, 1673년 의금부판사가 되었으며, 영릉(寧陵:효종릉)의 석재(石材)가 갈라진 사건으로 인책되어 수항이 우의정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천릉(遷陵)이 결정되자 총호사(摠護使)를 겸임하였다.
1674년 영의정으로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를 정할 때, 남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에 대해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다가 부처(付處)될 뻔하였고, 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중추부영사, 1688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689년 다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 이듬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