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파 KU"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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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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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 Data==
*조선 중기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이(李珥)·성혼(成渾) 학파를 통칭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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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입 :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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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 기호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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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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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 :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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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원래 기호지방은 경기도와 호서지방·해서지방을 포괄하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역사적 개념에서 기호학파는 경기도·충청도 지역의 이이·성혼의 문인과 학자들의 집단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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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
*조선 전기에 영남지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학자군이 형성되고, 조선 중기에 이황(李滉)이 배출되면서 영남학파가 성립되었지만 기호학파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후기에 동서분당이 형성되고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이 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서인]]세력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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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기호지방 KU|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이 KU|이이(李珥)]]·[[성혼 KU|성혼(成渾)]] 학파를 통칭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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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속한 학자로는 [[김장생 KU|김장생(金長生)]]·[[김집 KU|김집(金集)]]·[[김창협 KU|김창협(金昌協)]]·[[송시열 KU|송시열(宋時烈)]]·[[송익필 KU|송익필(宋翼弼)]] 등이 대표적이다.
  
=== 참고자료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673&cid=40942&categoryId=31450 두산백과 기호학파]
 
  
[[201310212 이지형 | 201310212 이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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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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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학자 [[이이 KU|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을 일컬으며, 영남지방의 [[이황 KU|이황(李滉)]])을 주축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인 영남학파와 구별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기호지방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충청도 일원으로서, 이곳에서 이이의 성리설을 추종하는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후기에 이르면서 그 학통을 전수하여 하나의 학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려말에 정주학이 전래되고, 조선조 건국과 더불어 유교적 학풍이 적극 장려되면서 유교의 학술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기묘사화를 전후하여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의 현실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지조를 돈독히 함과 동시에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도 큰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김안국(金安國) · 김정국(金正國) · 서경덕(徐敬德) 등을 들 수 있지만, 좀더 성숙된 성리학자로서 영남에는 이황 · 조식(曺植), 호남에는 이항(李恒) · 김인후(金鱗厚) · 기대승(奇大升), 기호에는 이이와 성혼(成渾) · 송익필(宋翼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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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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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지방의 중심인물은 이이·성혼·송익필의 세 사람이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은 비록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지만, 그와 논변을 벌인 성혼이나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성혼이 이이와 논변을 벌였다 해도 대립적 입장만은 아니었고, 또 송익필의 사단칠정 이기설이 이이의 견해와 같았던 점으로 보아, 서로 학문적 갈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후학들이 세 학자에게서 두루 배워 기호의 학문을 형성하였으니, 이를 율곡학파라 하지 않고 기호학파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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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 학자는 김장생(金長生)·정엽(鄭曄)·한교(韓嶠)·이귀(李貴)·조헌(趙憲)·안방준(安邦俊)·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 등이다. 이들은 기호의 서인으로서 동서분당의 당쟁에 관련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그것은 송시열 이후에 더욱 심했다. 특히, 이이의 문인 김장생으로부터 송시열·권상하·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김원행(金元行) 등이 학파 흐름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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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의 학문적 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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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이기설이 이황의 입장과 비교되어 주기적(主氣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가장 크지만, 불교나 도교적 요소에서도 본질적인 이해를 모색했다는 점에서부터 일반 유학자와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이나 『순언(醇言)』의 저술 등은 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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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이는 종래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서경덕·이황 등의 학설에 대해, “나정암이 가장 높고 다음이 퇴계·화담의 순이 된다.”고 평가하면서, “정암과 화담의 학설은 독창적 자득(自得)의 맛이 많고, 퇴계는 주자의 학설에 한결같이 따르는 의양(依樣)의 맛이 많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이황을 비교해서, “재주와 기국(器局)은 퇴계가 정암에 미치지 못하고, 학문의 정미함은 정암이 퇴계를 따를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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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학문적 입장은 자주적이고 비판적이며 논리성을 강조하는 것이어서, 어느 한편의 좋은 점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 점은 도가적 주기론을 강조했던 서경덕에 대한 평가에서도 알 수 있다. 이이는 서경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그의 철학적 특이성을 칭송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여러 학설을 평가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논리적 견해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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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적 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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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철학적 전제는 본질에 있어 두 근원[二元]을 상정하지 않는 데 있다. 비록 양면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일원적 본원성(本源性)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이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말한다 해도, 그 원초적 작위인 발(發)이 이원(二源)일 수 없으며, 이기가 서로 발할 수 없다고 하여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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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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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이도 발할 수 있다고 보면서 동시에, 이에 능동성을 부여해 이를 높이는 견해(尊理說)였으나, 이이는 기 이전에 이가 별도로 존재할 수 없음을 들어, 이가 발한다는 이발설(理發說)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이황의 “이가 발하는 데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탄다(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는 학설 가운데, 후자는 인정되지만 전자는 모순되는 것이라 한다. 소위 “발하는 것이 기이고, 발하게 하는 소이가 이이다(發之者氣, 所以發者理).”라는 원칙에 근거해서 발의 속성을 오직 기에만 인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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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칠정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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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칠정설에 있어서도 이황이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고 말한 데 대해,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이 다 같이 기가 발한 것”이라 하고, “칠정 가운데 사단을 말할 수 있으니 그 순선한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이에 근본작위로서의 발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는 형체나 작위가 없는 것이고(無形無爲), 기는 형체와 작위가 있는 것(有形有爲)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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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 이기가 모두 발한다는 이기호발(理氣互發)을 강조할 때, 주자의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는 말을 인용한 바 있다. 그런데 이이는 이에 관해 “주자가 참으로 그와 같이 생각했다면 주자도 잘못된 것이니 어찌 주자답겠느냐.”고 하였다.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모순이 있을 때, 주자라고 해도 비판적 견해를 회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기에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던 송시열은 그러한 이이의 말에 자극되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를 지어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 될 수 있음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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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이이의 존재론·인성론의 기본 입장은 기가 발함은 타당하지만, 이가 발할 수 없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자의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지거나 혼잡될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불상잡(理氣不相離不相雜)의 학설 가운데 ‘불상리’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이황이 ‘불상잡’을 높이는 입장과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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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나흠순이나 서경덕의 철학적 견해를 칭송한 이유도 바로 그들이 불상리의 묘체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은 그러한 자리를 ‘이기의 묘처(理氣之妙處)’라 하여 보기도 말하기도 어려운 곳이라 하면서, 그곳을 체인(體認)하고 체득(體得)함이 학자의 본령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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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생성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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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주생성론의 입장에서도 태극음양에 그 선후나 상호작위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 역시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타는 것뿐이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일치된 해석으로 보인다. 모든 현상적 차별상은 기의 발위(發爲)에 달려 있으나, 그와 동시에 존재하는 이와 선후본말의 관계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기의 영원성이 함께 인정된다. 심성정(心性情)의 인성론적 입장에서도 두 개의 마음이나 두 개의 정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그 근원적 작위[動]에서 선악의 성향이 갈라진다고 하는 일원적 견해가 이이의 주된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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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이의 사상적 표현은 그의 교우인 성혼과 주고받은 논변서(論辯書)를 중심으로 하여 잘 드러난다. 이에 앞서 이기설적 논변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오랫동안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자연히 이이는 기대승의 입장을, 성혼은 이황의 입장을 전제하게 된다. 그러나 이이가 기대승의 견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학설은 지지했으나, 이가 발한다는 ‘이발’의 논리는 부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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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학자들의 이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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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성리설이 이황과 함께 한국 성리학의 정상을 이룬 것은 후기 학자들의 이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정주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정립한 학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학했던 영남과 기호를 중심으로 각각 후기학파를 형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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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호발설을 이이가 비판한 이후, 영남학파의 이현일(李玄逸) 등이 그 호발설을 옹호하기 위해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기호학파를 주기파 또는 기학파(氣學派)라 부르기도 하였다. 후기 당쟁유학에 편승해 주리적 입장과 주기적 입장으로 학문적 성향의 차이를 보인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영남학파가 기호학파를 주기파라고 비난하고, 기호학파도 본래의 이기일원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말 그대로 주기적 성향으로 대립한 것은 당쟁이라는 편협성에 기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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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발을 부정한다 하여 초기 기호의 학자나 이이를 주기적이라고 단정하면 그 논설의 본질에 어긋난 것이라 할 것이다. 이의 발을 부정했지만, 기를 이보다 높이 여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리적이니 주기적이니 하는 이기설의 논란은 편협한 후기 유자(儒者)들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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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과 학문적 특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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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문하에서 그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은 [[김장생 KU|김장생]]이다. 김장생은 선조 때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송익필에게서 『근사록』과 예학을 배우고, 이이에게서 경학과 성리학을 배워 통달했는데, 특히 예학에 밝아 예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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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예학은 송익필에게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김계휘에게서도 영향 받은 바가 크다고 한다. 당시 국가 전례(典禮)에 관한 일은 모두 [[김장생 KU|김장생]]에게 물을 정도로 박학해, 여러 의례규범을 정립하고 『의례문해(疑禮問解)』·『가례집람(家禮集覽)』·『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을 저술하여 후기 예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전례를 말할 때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중론에 좌우되지 않고, 타당한 원칙을 밝혀 관직을 그만두고서라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정도로 엄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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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자득하고 조심스레 삼가고 덕행군자로 유명해져 많은 후학들이 찾아와 배웠다. 그는 아들 [[김집 KU|김집(金集)]]과 더불어 문묘에 배향될 정도의 학덕인(學德人)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예학은 송시열에게 전해져 당시 서인을 중심한 기호학파에서 널리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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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송시열 KU|송시열]]에 이르러 예론을 중심으로 한 당파유교(黨派儒敎)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송시열 KU|송시열]]의 생애도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에게서 배운 뒤 [[김장생 KU|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心經)』·『근사록』·『가례(家禮)』 등을 배우고, 그 뒤로는 연산(連山)에 있는 [[김장생 KU|김장생]]의 아들 [[김집 KU|김집(金集)]]에게 배워 대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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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KU|송시열]]은 주자학에 심취하면서 이이의 이기설을 따라, 이황의 이발기수설(理發氣隨說)은 큰 착오라 하였다. 이는 정의(情意)·운용(運用)·조작(造作)이 없는 것으로 기 가운데 있다고 보며, 기는 운용·작위할 수 있어, 이가 여기에 부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마음이 곧 기이다(心是氣).”는 이이의 학설도 옹호해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자언론동이고』에서 『주자어류(朱子語類)』 가운데 있는 “사단은 이의 발(四端是理之發)”이라는 문구는 『주자어류』의 기록자인 보한경(輔漢卿)의 착오라고 고증해 이발설을 극구 부정함으로써 이이의 학설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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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외적 견해에서는 명나라를 높이기 때문에 모화사상을 고취하였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효종과 더불어 북벌을 밀의해 호란에 보복하려 했던 점은 춘추대의 정신의 구현으로 평가된다. 그의 인생관은 그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죽음에 임해서 문인 권상하에게 말한 ‘직(直)’자의 강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강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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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 KU|권상하]]는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총애를 받은 대표적 학자이다. 그는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괴산(槐山)의 화양동에다 부근의 유생들과 함께,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기 위해서 1717년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1704년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신종·의종에게 제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양동의 만동묘는 부근 유자들의 근거지로서, 지나치게 세도를 부리거나 당론을 일삼는 등 폐단이 없지 않았다. 권상하의 문인에는 한원진과 이간이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문제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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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기 기호학파의 중심인물로 [[조헌 KU|조헌]]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성혼 KU|성혼]]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성혼·이이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을 돈독히 하면서,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당론에 휩싸여 공론(公論)이 없음을 걱정하는 한편, 왕의 불공(佛供)을 극간하는 등 자신의 중립적 입장과 강직성을 드러냈다. 외세의 침입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요구하면서,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모든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충의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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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절의를 드높이고 유고를 모아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한 이가 안방준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힘쓰고, 인조반정 때는 공신인 김류(金瑬)에게 당쟁과 인사등용 및 공사분별의 문제 등에 관해 진언한 바 컸다. 그밖에 이이·성혼 또는 송익필의 문하에 출입하여 배우고, 당시의 명류(名流)들과 사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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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의 연원은 이이에서 비롯되었으나, 주로 서인 중심이었다. 이이는 이미 시작된 동서분당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후기로 내려올수록 기호학파의 흐름과 병행해 기호인에서 서인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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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의와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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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의 흐름은 예학과 의리학으로 발전해왔으나, 당파적 갈등과 당쟁의 사상적 입장에 편승해 성리설의 진면목을 잃은 감이 있다.
  
 
[[분류:서원 KU]]
 
[[분류:서원 KU]]

2014년 6월 10일 (화) 00:57 판

Meta Data



요약

조선 중기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이(李珥)·성혼(成渾) 학파를 통칭한 말. 여기에 속한 학자로는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김창협(金昌協)·송시열(宋時烈)·송익필(宋翼弼) 등이 대표적이다.


개설

조선시대 유학자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을 일컬으며, 영남지방의 이황(李滉))을 주축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인 영남학파와 구별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기호지방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충청도 일원으로서, 이곳에서 이이의 성리설을 추종하는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후기에 이르면서 그 학통을 전수하여 하나의 학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려말에 정주학이 전래되고, 조선조 건국과 더불어 유교적 학풍이 적극 장려되면서 유교의 학술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기묘사화를 전후하여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의 현실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지조를 돈독히 함과 동시에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도 큰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김안국(金安國) · 김정국(金正國) · 서경덕(徐敬德) 등을 들 수 있지만, 좀더 성숙된 성리학자로서 영남에는 이황 · 조식(曺植), 호남에는 이항(李恒) · 김인후(金鱗厚) · 기대승(奇大升), 기호에는 이이와 성혼(成渾) · 송익필(宋翼弼)이 있었다.


내용

기호지방의 중심인물은 이이·성혼·송익필의 세 사람이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은 비록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지만, 그와 논변을 벌인 성혼이나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성혼이 이이와 논변을 벌였다 해도 대립적 입장만은 아니었고, 또 송익필의 사단칠정 이기설이 이이의 견해와 같았던 점으로 보아, 서로 학문적 갈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후학들이 세 학자에게서 두루 배워 기호의 학문을 형성하였으니, 이를 율곡학파라 하지 않고 기호학파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 대표적 학자는 김장생(金長生)·정엽(鄭曄)·한교(韓嶠)·이귀(李貴)·조헌(趙憲)·안방준(安邦俊)·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 등이다. 이들은 기호의 서인으로서 동서분당의 당쟁에 관련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그것은 송시열 이후에 더욱 심했다. 특히, 이이의 문인 김장생으로부터 송시열·권상하·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김원행(金元行) 등이 학파 흐름의 중심이 되었다.


이이의 학문적 입장

이이의 이기설이 이황의 입장과 비교되어 주기적(主氣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가장 크지만, 불교나 도교적 요소에서도 본질적인 이해를 모색했다는 점에서부터 일반 유학자와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이나 『순언(醇言)』의 저술 등은 그 좋은 예이다.

한편, 이이는 종래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서경덕·이황 등의 학설에 대해, “나정암이 가장 높고 다음이 퇴계·화담의 순이 된다.”고 평가하면서, “정암과 화담의 학설은 독창적 자득(自得)의 맛이 많고, 퇴계는 주자의 학설에 한결같이 따르는 의양(依樣)의 맛이 많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이황을 비교해서, “재주와 기국(器局)은 퇴계가 정암에 미치지 못하고, 학문의 정미함은 정암이 퇴계를 따를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이의 학문적 입장은 자주적이고 비판적이며 논리성을 강조하는 것이어서, 어느 한편의 좋은 점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 점은 도가적 주기론을 강조했던 서경덕에 대한 평가에서도 알 수 있다. 이이는 서경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그의 철학적 특이성을 칭송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여러 학설을 평가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논리적 견해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철학적 전제

그의 철학적 전제는 본질에 있어 두 근원[二元]을 상정하지 않는 데 있다. 비록 양면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일원적 본원성(本源性)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이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말한다 해도, 그 원초적 작위인 발(發)이 이원(二源)일 수 없으며, 이기가 서로 발할 수 없다고 하여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이기설

이황은 이도 발할 수 있다고 보면서 동시에, 이에 능동성을 부여해 이를 높이는 견해(尊理說)였으나, 이이는 기 이전에 이가 별도로 존재할 수 없음을 들어, 이가 발한다는 이발설(理發說)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이황의 “이가 발하는 데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탄다(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는 학설 가운데, 후자는 인정되지만 전자는 모순되는 것이라 한다. 소위 “발하는 것이 기이고, 발하게 하는 소이가 이이다(發之者氣, 所以發者理).”라는 원칙에 근거해서 발의 속성을 오직 기에만 인정하였던 것이다.

사단칠정설

사단칠정설에 있어서도 이황이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고 말한 데 대해,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이 다 같이 기가 발한 것”이라 하고, “칠정 가운데 사단을 말할 수 있으니 그 순선한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이에 근본작위로서의 발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는 형체나 작위가 없는 것이고(無形無爲), 기는 형체와 작위가 있는 것(有形有爲)이기 때문이다.

이황이 이기가 모두 발한다는 이기호발(理氣互發)을 강조할 때, 주자의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는 말을 인용한 바 있다. 그런데 이이는 이에 관해 “주자가 참으로 그와 같이 생각했다면 주자도 잘못된 것이니 어찌 주자답겠느냐.”고 하였다.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모순이 있을 때, 주자라고 해도 비판적 견해를 회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기에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던 송시열은 그러한 이이의 말에 자극되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를 지어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 될 수 있음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이의 존재론·인성론의 기본 입장은 기가 발함은 타당하지만, 이가 발할 수 없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자의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지거나 혼잡될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불상잡(理氣不相離不相雜)의 학설 가운데 ‘불상리’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이황이 ‘불상잡’을 높이는 입장과 대조된다.

이이가 나흠순이나 서경덕의 철학적 견해를 칭송한 이유도 바로 그들이 불상리의 묘체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은 그러한 자리를 ‘이기의 묘처(理氣之妙處)’라 하여 보기도 말하기도 어려운 곳이라 하면서, 그곳을 체인(體認)하고 체득(體得)함이 학자의 본령임을 밝히고 있다.

우주생성론

한편, 우주생성론의 입장에서도 태극음양에 그 선후나 상호작위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 역시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타는 것뿐이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일치된 해석으로 보인다. 모든 현상적 차별상은 기의 발위(發爲)에 달려 있으나, 그와 동시에 존재하는 이와 선후본말의 관계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기의 영원성이 함께 인정된다. 심성정(心性情)의 인성론적 입장에서도 두 개의 마음이나 두 개의 정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그 근원적 작위[動]에서 선악의 성향이 갈라진다고 하는 일원적 견해가 이이의 주된 이론이다.

이러한 이이의 사상적 표현은 그의 교우인 성혼과 주고받은 논변서(論辯書)를 중심으로 하여 잘 드러난다. 이에 앞서 이기설적 논변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오랫동안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자연히 이이는 기대승의 입장을, 성혼은 이황의 입장을 전제하게 된다. 그러나 이이가 기대승의 견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학설은 지지했으나, 이가 발한다는 ‘이발’의 논리는 부정했던 것이다.


후기 학자들의 이론

이이의 성리설이 이황과 함께 한국 성리학의 정상을 이룬 것은 후기 학자들의 이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정주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정립한 학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학했던 영남과 기호를 중심으로 각각 후기학파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황의 호발설을 이이가 비판한 이후, 영남학파의 이현일(李玄逸) 등이 그 호발설을 옹호하기 위해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기호학파를 주기파 또는 기학파(氣學派)라 부르기도 하였다. 후기 당쟁유학에 편승해 주리적 입장과 주기적 입장으로 학문적 성향의 차이를 보인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영남학파가 기호학파를 주기파라고 비난하고, 기호학파도 본래의 이기일원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말 그대로 주기적 성향으로 대립한 것은 당쟁이라는 편협성에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발을 부정한다 하여 초기 기호의 학자나 이이를 주기적이라고 단정하면 그 논설의 본질에 어긋난 것이라 할 것이다. 이의 발을 부정했지만, 기를 이보다 높이 여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리적이니 주기적이니 하는 이기설의 논란은 편협한 후기 유자(儒者)들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이후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과 학문적 특성

이이의 문하에서 그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은 김장생이다. 김장생은 선조 때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송익필에게서 『근사록』과 예학을 배우고, 이이에게서 경학과 성리학을 배워 통달했는데, 특히 예학에 밝아 예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예학은 송익필에게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김계휘에게서도 영향 받은 바가 크다고 한다. 당시 국가 전례(典禮)에 관한 일은 모두 김장생에게 물을 정도로 박학해, 여러 의례규범을 정립하고 『의례문해(疑禮問解)』·『가례집람(家禮集覽)』·『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을 저술하여 후기 예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전례를 말할 때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중론에 좌우되지 않고, 타당한 원칙을 밝혀 관직을 그만두고서라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정도로 엄정하였다.

한편, 그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자득하고 조심스레 삼가고 덕행군자로 유명해져 많은 후학들이 찾아와 배웠다. 그는 아들 김집(金集)과 더불어 문묘에 배향될 정도의 학덕인(學德人)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예학은 송시열에게 전해져 당시 서인을 중심한 기호학파에서 널리 성행하였다.

문인 송시열에 이르러 예론을 중심으로 한 당파유교(黨派儒敎)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송시열의 생애도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에게서 배운 뒤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心經)』·『근사록』·『가례(家禮)』 등을 배우고, 그 뒤로는 연산(連山)에 있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에게 배워 대성하였다.

송시열은 주자학에 심취하면서 이이의 이기설을 따라, 이황의 이발기수설(理發氣隨說)은 큰 착오라 하였다. 이는 정의(情意)·운용(運用)·조작(造作)이 없는 것으로 기 가운데 있다고 보며, 기는 운용·작위할 수 있어, 이가 여기에 부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마음이 곧 기이다(心是氣).”는 이이의 학설도 옹호해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자언론동이고』에서 『주자어류(朱子語類)』 가운데 있는 “사단은 이의 발(四端是理之發)”이라는 문구는 『주자어류』의 기록자인 보한경(輔漢卿)의 착오라고 고증해 이발설을 극구 부정함으로써 이이의 학설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한편, 대외적 견해에서는 명나라를 높이기 때문에 모화사상을 고취하였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효종과 더불어 북벌을 밀의해 호란에 보복하려 했던 점은 춘추대의 정신의 구현으로 평가된다. 그의 인생관은 그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죽음에 임해서 문인 권상하에게 말한 ‘직(直)’자의 강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강직하였다.

권상하는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총애를 받은 대표적 학자이다. 그는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괴산(槐山)의 화양동에다 부근의 유생들과 함께,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기 위해서 1717년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1704년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신종·의종에게 제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양동의 만동묘는 부근 유자들의 근거지로서, 지나치게 세도를 부리거나 당론을 일삼는 등 폐단이 없지 않았다. 권상하의 문인에는 한원진과 이간이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문제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편, 전기 기호학파의 중심인물로 조헌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성혼·이이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을 돈독히 하면서,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당론에 휩싸여 공론(公論)이 없음을 걱정하는 한편, 왕의 불공(佛供)을 극간하는 등 자신의 중립적 입장과 강직성을 드러냈다. 외세의 침입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요구하면서,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모든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충의를 드러냈다.

그의 절의를 드높이고 유고를 모아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한 이가 안방준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힘쓰고, 인조반정 때는 공신인 김류(金瑬)에게 당쟁과 인사등용 및 공사분별의 문제 등에 관해 진언한 바 컸다. 그밖에 이이·성혼 또는 송익필의 문하에 출입하여 배우고, 당시의 명류(名流)들과 사귀었다.

기호학파의 연원은 이이에서 비롯되었으나, 주로 서인 중심이었다. 이이는 이미 시작된 동서분당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후기로 내려올수록 기호학파의 흐름과 병행해 기호인에서 서인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기호학파의 흐름은 예학과 의리학으로 발전해왔으나, 당파적 갈등과 당쟁의 사상적 입장에 편승해 성리설의 진면목을 잃은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