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글씐바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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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원문 | ||
− | <big>八十三歲翁 | + | <big>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big><br/> |
− | + | <big>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big><br/> | |
− | <big>一言胡大罪 | + | <big>北極空瞻月, 南溟但信風</big><br/> |
− | + | <big>貂喪舊萬思在, 感激泣孤哀</big><br/> | |
− | <big>北極空瞻月 | + | <big></bi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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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ig>貂喪舊萬思在</big><br/>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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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번역문 | ||
− | 여든 셋 늙은이가 | + | 여든 셋 늙은이가,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br/> |
− |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br/> | + |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 세 번이나 쫓겨남에 또한 궁한 내 신세여<br/> |
− |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 | + | 북녘 하늘 공연히 달을 바라보면서, 남쪽 바다 순풍이 올 것임을 다만 믿노라<br/> |
− | 세 번이나 쫓겨남에 또한 궁한 내 신세여<br/> | + | 담비갖옷 내려주셨던 옛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니, 북받치는 감정에 이 세상 홀로임을 슬피 우노라<br/> |
− | 북녘 하늘 | + | |
− | 남쪽 바다 | + | |
− | 담비갖옷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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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해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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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비 갖옷(貂喪)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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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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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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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2일 (수) 01:44 판
글씐바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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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
지정일 | |
지정 명칭 | |
한자 명칭 | |
영문 명칭 | |
분류 | |
건립·제작 | |
주소 | |
위도 | 34° 15′ 71″ |
경도 | 126° 62′ 42″ |
웹사이트 |
개요
글씐바위는
위치
Virtual Pavilion
이번 답사의 촬영 결과물로 제작해서 넣을 예정.
글씐바위에 새겨진 오언율시
- 이미지
- 이미지출처:날로 새로워라 블로그 '[1]'
- 원문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北極空瞻月, 南溟但信風
貂喪舊萬思在, 感激泣孤哀
- 번역문
여든 셋 늙은이가,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 세 번이나 쫓겨남에 또한 궁한 내 신세여
북녘 하늘 공연히 달을 바라보면서, 남쪽 바다 순풍이 올 것임을 다만 믿노라
담비갖옷 내려주셨던 옛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니, 북받치는 감정에 이 세상 홀로임을 슬피 우노라
- 해설
담비 갖옷(貂喪)은...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1689년 송시열 관련 승정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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