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지리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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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9일 (목) 15:25 판
문화유산 해설
1454년(단종 2)에 완성된『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8권에 실려 있는 전국 지리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수도였던 경도 한성부(漢城府)와 준수도의 지위를 갖고 있던 구도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 이어 경기도(41)·충청도(55)·경상도(66)·전라도(56)·황해도(24)·강원도(24)·평안도(47)·함길도(21) 등의 334개 고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1481년(성종 12)에 1차로 완성되고 여러 차례 증보하여 1530년(중종 25)에 최종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교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공물·조세·군역 등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총 정리해 놓았다는 점이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 항목이 중앙에 보관되어 있던 공안(貢案)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반면에『세종실록지리지』의 통계 대부분이 전국의 모든 고을에 일정한 규식을 내려 조사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어 당시의 인문지리적 내용과 실제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신찬팔도지리지』에 기초하면서 일부 지역의 변화 상황을 교정·첨가하여 수록한『세종실록지리지』의 존재는 지방관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려 했던 조선 초기의 지방행정의 방향성과 전국적인 규모의 인문지리 정보를 잘 보여주는 자료 중의 하나로서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1]
아차산과의 관련성
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에 "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제일(第一)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제오(第五)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봉화와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현재의 광진구의 유래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있는데, 경기편에서 "사포(蛇浦)로 들어가서 두 물이 합하여 흘러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다음에 광나루[廣津]가 되었으며" 는 기록이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