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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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천지의 사이는 오직 리일(理一)일 뿐이다. 그러나 “건(乾)의 도리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리는 여자를 이루어 <ref>『周易』 「繫辭上」1章, “是故, 剛柔相摩, 八卦相盪. 鼓之以雷霆, 潤之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暑, 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ref> 음양이라는 두 기가 교감해 만물을 화생시킨다.”<ref> 『太極圖說』,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ref> 그렇다면 대소의 구별과 친소의 등급은 수 천만가지의 경우에 이르러 똑같을 수 없다. 만약 성현께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면 누가 차이점과 공통점을 회합시킬 수 있었겠는가? 「서명西銘」이라는 작품은 의미가 대개 이와 같다. | 논: 천지의 사이는 오직 리일(理一)일 뿐이다. 그러나 “건(乾)의 도리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리는 여자를 이루어 <ref>『周易』 「繫辭上」1章, “是故, 剛柔相摩, 八卦相盪. 鼓之以雷霆, 潤之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暑, 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ref> 음양이라는 두 기가 교감해 만물을 화생시킨다.”<ref> 『太極圖說』,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ref> 그렇다면 대소의 구별과 친소의 등급은 수 천만가지의 경우에 이르러 똑같을 수 없다. 만약 성현께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면 누가 차이점과 공통점을 회합시킬 수 있었겠는가? 「서명西銘」이라는 작품은 의미가 대개 이와 같다. | ||
− | + | 程子以為明理一而分殊, 可謂一言以蔽之矣. 盖以乾為父, 以坤為母, 有生之類, 無物不然, 所謂‘理一’也. 而人物之生, 血脈之屬, 各親其親, 各子其子, 則其分亦安得而不殊哉! 一統而萬殊, 則雖天下一家ㆍ中國一人, 而不流於兼愛之弊; 萬殊而一貫, 則雖親疎異情ㆍ貴賤異等, 而不梏於為我之私. 此「西銘」之大指也. 觀其推親親之厚, 以大無我之公, 因事親之誠, 以明事天之道, 盖無適而非所謂分立而推理一者 <ref>【교감기5】‘立’이 대전본에는 ‘殊’로 되어 있다. ‘者’는 대전본, 서본, 만력본에는 ‘也’로 되어 있다.</ref>. 夫豈專以民吾同胞ㆍ長長幼幼為理一, 而必黙識於言意之表, 然後知其分之殊哉! <br> | |
− | + | 정자程子께서는 「서명」이 '리일분수理一分殊'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았으니, 전체내용을 한마디 말로 다 정리했다고 일컬을 수 있다. 건乾을 아버지로 삼고 곤坤을 어머니로 삼는 것은 생명이 있는 부류라면 어떠한 것이든 다 그러하니 이른바 ‘리일理一’이다. 그러나 인간과 만물이라는 생명은 혈맥의 등속에 따라 각각 가까운 이를 더 가깝게 여기며 자기의 자식을 자식으로 대우하니 그 분수가 역시 어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의 이치로 관통되지만 부류에 따라 온갖 경우로 나뉘니 비록 천하가 하나의 가족이며 중국이 하나의 사람일지라도 겸애兼愛의 폐단에 흘러가지 않으며, 온갖 경우로 나뉘지만 하나로 관통되어 있으니 비록 친소에 따라 감정을 달리하고 귀천에 따라 등급을 나누지만 ‘위아爲我’의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서명」의 대략적인 요지다. 친속을 친애하는 두터움을 미루어서 공적인 ‘무아無我’ <ref>여기서 ‘無我’의 의미는 자기중심적인 자아(私我)의 탈각을 의미하는 것 같다. </ref>를 확대시키고, 부모님을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에 기인해서 하늘을 섬기는 도를 밝힌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이른바 분수가 확립되면서 동시에 이치가 하나로 관통되지 않는 경우 <ref>『二程文集』卷10, 「答楊時論西銘書」, “《西銘》之論則未然. 横渠立言誠有過者, 乃在《正夢》, 《西銘》之為書, 推理以存義, 擴前聖所未發, 與孟子性善養氣之論同功, (二者亦前聖所未發.) 豈墨氏之比哉? 《西銘》明理一而分殊, 墨氏則二本 而無分. (老幼及人, 理一也; 愛無差等. 本二也.) 分殊之蔽, 私勝而失仁; 無分之罪. 兼愛而無義. 分立而推理一以止私勝之流, 仁之方也; 無别而迷兼愛, 至於無父之極, 義之賊也. 子比而同之, 過矣. 且謂言體而不及用, 彼則使人推而行之, 本為用也, 反謂不及, 不亦異乎?“《서명》에 대한 이야기는 틀렸네. 횡거 선생이 입언한 것 가운데 진실로 지나친 것이 『정몽』에 있지만, 《서명》의 글은 理를 미루어 義를 보존하였고 이전 성인께서 드러내지 않으신 것을 넓히셨으니, 맹자의 性善·養氣의 말씀과 공이 같은데, (두 경우 또한 이전 성인께서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다.) 어찌 [횡거 선생을] 묵자에 견주겠는가? 《서명》은 “리일분수”를 밝힌 것이고, 묵자는 근본을 둘로 하고 구분이 없는 것이네. (노인을 노인 대접하고 아이를 아이 대접하기를 남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리일”이고, 사랑에 차등이 없는 것은 근본을 둘로 한 것이다.) 분수의 폐단은 사욕[자기중심성]이 이겨 인을 잃는 것이고, 구분이 없는 것의 문제는 겸애하여 의가 없는 것이네. 구분이 세워지고서 “리일”을 미루어 사욕이 이기는 것을 막는 것이 仁의 방법이고, 분별이 없어 겸애에 미혹돼 無父의 극단에 이르는 것이 義를 해치는 것이네. 그대는 [횡거 선생을 묵자에] 비겨 같다고 여기는데, 지나친 것일세. [그대가] 또 말하길: “體만 말하고 用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서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루어 실천하게 한 것이니 본래부터 用이거늘 도리어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ref>가 없을 것이다. 어찌 오직 ‘백성은 나의 동포이며 어른을 어른대접하며 아이를 아이답게 대하는 것’을 ‘리일(理一)’로 여기고 반드시 언어로 드러난 의미에 대하여 묵묵하게 기억한 연후에야 분수가 나뉘어짐을 알겠는가? | |
− | 를 확대시키고, 부모님을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에 기인해서 하늘을 섬기는 도를 밝힌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이른바 분수가 확립되면서 동시에 이치가 하나로 관통되지 않는 경우 『二程文集』卷10, 「答楊時論西銘書」, “《西銘》之論則未然. 横渠立言誠有過者, 乃在《正夢》, 《西銘》之為書, 推理以存義, 擴前聖所未發, 與孟子性善養氣之論同功, (二者亦前聖所未發.) 豈墨氏之比哉? 《西銘》明理一而分殊, 墨氏則二本 而無分. (老幼及人, 理一也; 愛無差等. 本二也.) 分殊之蔽, 私勝而失仁; 無分之罪. 兼愛而無義. 分立而推理一以止私勝之流, 仁之方也; 無别而迷兼愛, 至於無父之極, 義之賊也. 子比而同之, 過矣. 且謂言體而不及用, 彼則使人推而行之, 本為用也, 反謂不及, 不亦異乎?“《서명》에 대한 이야기는 틀렸네. 횡거 선생이 입언한 것 가운데 진실로 지나친 것이 『정몽』에 있지만, 《서명》의 글은 理를 미루어 義를 보존하였고 이전 성인께서 드러내지 않으신 것을 넓히셨으니, 맹자의 性善·養氣의 말씀과 공이 같은데, (두 경우 또한 이전 성인께서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다.) 어찌 [횡거 선생을] 묵자에 견주겠는가? 《서명》은 “리일분수”를 밝힌 것이고, 묵자는 근본을 둘로 하고 구분이 없는 것이네. (노인을 노인 대접하고 아이를 아이 대접하기를 남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리일”이고, 사랑에 차등이 없는 것은 근본을 둘로 한 것이다.) 분수의 폐단은 사욕[자기중심성]이 이겨 인을 잃는 것이고, 구분이 없는 것의 문제는 겸애하여 의가 없는 것이네. 구분이 세워지고서 “리일”을 미루어 사욕이 이기는 것을 막는 것이 仁의 방법이고, 분별이 없어 겸애에 미혹돼 無父의 극단에 이르는 것이 義를 해치는 것이네. 그대는 [횡거 선생을 묵자에] 비겨 같다고 여기는데, 지나친 것일세. [그대가] 또 말하길: “體만 말하고 用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서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루어 실천하게 한 것이니 본래부터 用이거늘 도리어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 + | |
− | 가 없을 것이다. 어찌 오직 ‘백성은 나의 동포이며 어른을 어른대접하며 아이를 아이답게 대하는 것’을 ‘리일(理一)’로 여기고 반드시 언어로 드러난 의미에 대하여 묵묵하게 기억한 연후에야 분수가 나뉘어짐을 알겠는가? | + | |
− | 且所謂“稱物平施”者, 正謂稱物之宜, 以平吾之施云爾. 若無稱物之義, 則亦何以知夫所施之平哉? 龜山第二書盖欲發明此意, 然言不盡而理有餘也, 故愚得因其說而遂言之如此. 同志之士, 幸相與折衷哉 【교감기6】‘哉’가 대전본, 서본, 만력본에는 ‘焉’로 되어 있다. | + | 且所謂“稱物平施”者, 正謂稱物之宜, 以平吾之施云爾. 若無稱物之義, 則亦何以知夫所施之平哉? 龜山第二書盖欲發明此意, 然言不盡而理有餘也, 故愚得因其說而遂言之如此. 同志之士, 幸相與折衷哉 <ref>【교감기6】‘哉’가 대전본, 서본, 만력본에는 ‘焉’로 되어 있다.</ref> <br/> |
− | + | 또 이른바 ‘칭물평시(稱物平施)’<ref> 『周易』 「謙」, “《象》曰: 地中有山, 謙,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 【易傳】 地體卑下, 山之高大而在地中, 外卑下而內蘊高大之象, 故為謙也. 不云山在地中, 而曰地中有山, 言卑下之中蘊其崇高也. 若言崇高蘊於卑下之中, 則文理不順. 諸象皆然, 觀文可見.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 君子觀謙之象. 山而在地下, 是高者下之, 卑者上之, 見抑高舉下ㆍ損過益不及之義; 以施於事, 則裒取多者, 增益寡者, 稱物之多寡以均其施與, 使得其平也.</ref>라는 것은 바로 [각] 사물의 마땅함을 헤아려서 나의 베풀어줌을 공평히 한다는 말일 뿐이다. <ref>『龜山集』卷16, 「答伊川先生」, “‘古之人所以大過人者, 無他, 善推其所為而已.’, ‘老吾老以及人之老, 幼吾幼以及人之幼’, 所謂推之也. 孔子曰: ‘老者安之, 少者懐之’, 則無事乎推矣. 無事乎推者, 理一故也. 理一而分殊, 故聖人稱物而平施之, 兹所以為仁之至、義之盡也. 何謂稱物? 親疎逺近各當其分, 所謂稱也; 何謂平施? 所以施之, 其心一焉, 所謂平也. 某昔者竊意『西銘』之書有平施之方, 無稱物之義, 故曰: “言體而不及用”, 蓋指仁義為說也. 故仁之過, 其蔽無分, 無分則妨義; 義之過, 其流自私, 自私則害仁. 害仁則楊氏之為我也; 妨義則墨氏之兼愛也. 二者其失雖殊, 其所以得罪於聖人則均矣.““옛 사람들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하는 바를 남에게 잘 미루어봤을 뿐이다.”와 “우리 집의 어르신들을 공경하여 남의 어르신을 공경하는데 미치고, 우리 집 어린 자식들을 보살펴서 남의 어린 자식들을 보살피는 데 미친다.”는 것이 이른바 ‘미루어보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고 젊은이를 감싸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미루어봄에 일삼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루어 봄에 일삼을 것이 없는 이유는 이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치는 하나지만 나뉨은 다르기 때문에 성인이 사물을 저울질하여 고르게 베푸시니 이에 인(仁)의 지극함과 의(義)의 극진함이 되는 것입니다. 稱物(사물을 저울질함)이 무엇입니까? 친하고 소원하며 멀고 가까움이 각각 그 분수에 마땅한 것이 이른바 稱(저울질)입니다. 平施(고르게 베품)가 무엇입니까? 베푸는 것에 그 마음이 그것에 한결같은 것이 이른바 平(고르다)입니다. 제가 예전에 마음속으로 『서명』이라는 책은 고르게 베푸는 방법은 있고 사물을 저울질하는 뜻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체(體)는 말하였으나 용(用)은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이니, 대개 인의를 가리켜 설명한 것입니다. 인이 지나치면 그 폐단은 구분이 없는 것이니, 구분이 없으면 의를 방해합니다. 의가 지나치면 그 폐단은 자신의 이익만을 따지는 것이니, 자신의 이익만 따진다면 인을 해치게 됩니다. 인을 해치는 것은 양주의 위아설이요, 의를 방해하는 것은 묵자의 겸애설입니다. 이 둘은 그 잘못이 비록 다르더라도 성인에게 죄를 얻은 까닭은 같습니다.</ref> 만약 [각] 사물의 마땅함을 헤아리는 과정이 없다면 또한 어떻게 베풀어주는 것의 공평함을 알겠는가? 양시의 두 번째 편지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려고 했지만 말이 미진할 뿐 아니라 논리에 있어서도 결여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설명을 바탕으로 마침내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사인(士) 동지들이 서로 절충해주기를 바라노라. | |
− | 또 이른바 ‘칭물평시(稱物平施)’ 『周易』 「謙」, “《象》曰: 地中有山, 謙,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 【易傳】 地體卑下, 山之高大而在地中, 外卑下而內蘊高大之象, 故為謙也. 不云山在地中, 而曰地中有山, 言卑下之中蘊其崇高也. 若言崇高蘊於卑下之中, 則文理不順. 諸象皆然, 觀文可見.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 君子觀謙之象. 山而在地下, 是高者下之, 卑者上之, 見抑高舉下ㆍ損過益不及之義; 以施於事, 則裒取多者, 增益寡者, 稱物之多寡以均其施與, 使得其平也. | + | |
− | 라는 것은 바로 [각] 사물의 마땅함을 헤아려서 나의 베풀어줌을 공평히 한다는 말일 뿐이다. 『龜山集』卷16, 「答伊川先生」, “‘古之人所以大過人者, 無他, 善推其所為而已.’, ‘老吾老以及人之老, 幼吾幼以及人之幼’, 所謂推之也. 孔子曰: ‘老者安之, 少者懐之’, 則無事乎推矣. 無事乎推者, 理一故也. 理一而分殊, 故聖人稱物而平施之, 兹所以為仁之至、義之盡也. 何謂稱物? 親疎逺近各當其分, 所謂稱也; 何謂平施? 所以施之, 其心一焉, 所謂平也. 某昔者竊意『西銘』之書有平施之方, 無稱物之義, 故曰: “言體而不及用”, 蓋指仁義為說也. 故仁之過, 其蔽無分, 無分則妨義; 義之過, 其流自私, 自私則害仁. 害仁則楊氏之為我也; 妨義則墨氏之兼愛也. 二者其失雖殊, 其所以得罪於聖人則均矣.““옛 사람들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하는 바를 남에게 잘 미루어봤을 뿐이다.”와 “우리 집의 어르신들을 공경하여 남의 어르신을 공경하는데 미치고, 우리 집 어린 자식들을 보살펴서 남의 어린 자식들을 보살피는 데 미친다.”는 것이 이른바 ‘미루어보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고 젊은이를 감싸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미루어봄에 일삼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루어 봄에 일삼을 것이 없는 이유는 이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치는 하나지만 나뉨은 다르기 때문에 성인이 사물을 저울질하여 고르게 베푸시니 이에 인(仁)의 지극함과 의(義)의 극진함이 되는 것입니다. 稱物(사물을 저울질함)이 무엇입니까? 친하고 소원하며 멀고 가까움이 각각 그 분수에 마땅한 것이 이른바 稱(저울질)입니다. 平施(고르게 베품)가 무엇입니까? 베푸는 것에 그 마음이 그것에 한결같은 것이 이른바 平(고르다)입니다. 제가 예전에 마음속으로 『서명』이라는 책은 고르게 베푸는 방법은 있고 사물을 저울질하는 뜻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체(體)는 말하였으나 용(用)은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이니, 대개 인의를 가리켜 설명한 것입니다. 인이 지나치면 그 폐단은 구분이 없는 것이니, 구분이 없으면 의를 방해합니다. 의가 지나치면 그 폐단은 자신의 이익만을 따지는 것이니, 자신의 이익만 따진다면 인을 해치게 됩니다. 인을 해치는 것은 양주의 위아설이요, 의를 방해하는 것은 묵자의 겸애설입니다. 이 둘은 그 잘못이 비록 다르더라도 성인에게 죄를 얻은 까닭은 같습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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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7일 (월) 02:47 기준 최신판
해제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원문 및 주석
乾稱父, 坤稱母, [1] 予茲藐焉, 乃混然中處.
건(하늘)은 아버지라 하고 곤(땅)은 어머니라고 하니, 나는 이처럼 작지만 혼연히 그 가운데에 있도다.
- 天, 陽也, 以至徤而位乎上, 父道也; 地, 隂也, 以至順而位乎下, 母道也. 人禀氣於天, 賦形於地, 以藐然之身, 混合無間而位乎中, 子道也. 然不曰天地而曰乾坤者, 天地其形體也, 乾坤其性情也. 乾者, 徤而無息之謂, 萬物之所資以始者也. 坤者, 順而有常之謂, 萬物之所資以生者也. 是乃天地之所以為天地, 而父母乎萬物者, 故指而言之.
- 하늘은 양이니 지극히 굳세어 위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비의 도이다. 땅은 음이니 지극히 순하여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어미의 도이다. 사람이 하늘에서 기를 품부받고, 땅에서 형체(몸)를 품부받아 작은 몸으로써 (천지와) 혼합하여 틈이 없어서 (천지의) 가운데에 위치하니, 자식의 도이다. 그러나 천지라고 말하지 않고 건곤이라고 말한 것은, 천지는 그 형체이고, 건곤은 그 성정이기 때문이다. 건이라는 것은 굳세고 쉬지 않음을 이르는 것이니, 만물이 의지하여 시작되는 바의 것이다. 곤이라는 것은 순하고 항상됨이 있음을 이르는 것이니, 만물이 의지하여 생겨나는 바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가 천지가 되고, 만물에게 부모가 되는 까닭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늘은 기를 부여하고 땅은 형체를 부여한다.-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강조)
故天地之塞, 吾其[2]體; 天地之帥, 吾其性.
그러므로 천지간을 채우고 있는 것, 나는 그것을 내 육체로 삼고, 천지를 이끌어가는 것, 나는 그것을 내 본성으로 삼도다.
- 乾陽坤隂, 此天地之氣, 塞乎兩間, 而人物之所資以為體者也. 故曰‘天地之塞, 吾其體’. 乾健坤順, 此天地之志, 為氣之帥, 而人物之所得以為性者也. 故曰‘天地之帥, 吾其性’. 深察乎此, 則父乾母坤, 混然中䖏之實可見矣.
- 건은 양이고 곤은 음이니, 이는 천지의 기가 둘 사이에 가득하여, 사람과 만물이 자뢰하여 몸으로 삼는 바의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간을 채우고 있는 것을 나는 내 육체로 삼는다.’고 하였다. 건은 건하고 곤은 순하니, 이는 천지의 뜻이 기의 장수가 되어, 사람과 만물이 얻어서 성으로 삼는 바의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를 이끌어가는 것을 나는 내 본성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깊이 살핀다면 부건모곤과 혼연중처의 실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民吾同胞, 物吾與也.
백성은 나의 형제요, 만물은 나의 벗이로다.
- 人、物竝生於天地之間, 其所資以為體者, 皆天地之塞; 其所得以為性者, 皆天地之帥也. 然體有偏正之殊, 故其於性也, 不無明暗之異. 惟人也, 得其形氣之正, 是以其心最靈, 而有以通乎性命之全, 體於竝生之中, 又為同類而最貴焉, 故曰‘同胞’. 則其視之也, 皆如己之兄弟矣. 物則得夫形氣之偏, 而不能通乎性命之全, 故與我不同類, 而不若人之貴. 然原其體性之所自, 是亦本之天地而未嘗不同也. 故曰‘吾與’. 則其視之也, 亦如己之儕軰矣. 惟同胞也, 故以天下為一家, 中國為一人, 如下文所云. 惟吾與也, 故凡有形於天地之間者, 若動若植, 有情無情, 莫不有以若[3]其性、遂其宜焉. 此儒者之道, 所以必至於参天地 [4]、贊化育, 然後為功用之全, 而非有所强於外也.
- 사람과 만물이 함께 천지간에 태어나 그 자뢰하여 몸으로 삼는 것이 모두 천지에 가득 찬 것이요, 그 얻어서 성으로 삼는 것이 모두 천지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몸에는 치우치고 올바름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그 성에 대하여 명암의 다름이 없을 수 없다. 오직 사람만이 그 형기의 올바름을 얻었는지라 이 때문에 그 마음이 가장 신령하여 성명의 완전함을 통달할 수 있고 함께 태어난 것들 중에서 체현할 수 있다, 또 나와 동류이면서 가장 귀하다. 그러므로 동포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즉 사람들을 보는 것을 모두 마치 자신의 형제처럼 여기는 것이다. 물건은 형기의 편벽된 것을 얻어서 성명의 완전함을 통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와 동류가 되지 못하여 사람처럼 귀하지는 않으나 그 형체와 성이 말미암은 바를 근원해 보면 또한 천지에 근본하여 일찍이 같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벗이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즉 이들을 보기를 또한 자신의 동아리처럼 여기는 것이다. 동포이기 때문에 천하를 한 집안으로 여기고 중국을 한 사람으로 여기기를 아래 글에 말한 바와 같이 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천지 사이에 형체가 있는 것은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정이 있거나 정이 없거나 모두 그 성을 순히 하고 그 마땅함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는 유자의 도가 반드시 천지와 삼재를 이루어 화육을 돕는 데에 이른 뒤에야 공용의 온전함이 되는 것이요, 밖에서 억지로 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大君者, 吾父母宗子; 其大臣, 宗子之家相也. 尊髙年, 所以‘長其長’; 慈孤弱, 所以‘幼其幼.’[5]聖其合徳 [6], 賢其秀也. 凡天下疲癃殘疾、惸獨鰥寡, [7] 皆吾兄弟之顚連[8]而無告者也.
임금은 내 부모의 장자요, 대신은 장자의 가상이로다.어른을 높이는 것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이요, 고아와 약자는 아껴주는 것이 ‘아이를 아이로 대접하는 것’이로다. 성인은 [부모 즉 천지의] 덕에 합치하는 자요, 현인은 [형제 즉 사람 가운데] 뛰어난 자이며,천하의 피곤한 자·병든 자·고아·외로운 자·홀아비·과부는 모두 내 형제 중에 고통에 빠졌지만 하소연할 데 없는 자이다.
- 乾父坤母而人生其中, 則凡天下之人, 皆天地之子矣. 然繼承天地, 統理人物, 則大君而已, 故為父母宗子; 輔佐大君, 綱紀[9]衆事, 則大臣而已, 故為宗子之家相. 天下之老一也, 故凡尊天下之髙年者, 乃所以長吾之長; 天下之幼一也, 故凡慈天下之孤弱者, 乃所以幼吾之幼. 聖人與天地合其徳, 是兄弟之合徳乎父母者也; 賢者才德過於常人, 是兄弟之秀出乎等夷[10]者也. 是皆以天地之子言之, 則凡天下之疲癃殘疾, 惸獨鰥寡, 非吾兄弟無告者而何哉!
- 건이 아비가 되고 곤이 어미가 되어 사람이 그 가운데에 태어났으니, 모든 천하 사람이 다 천지의 자식인 것이다. 그러나 천지를 계승하여 사람과 만물을 통치하는 것은 군주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장자가 되는 것이요, 군주를 보좌하여 여러 일을 관리하는 것은 대신일 뿐이다. 그러므로 장자의 가상이 되는 것이다. 천하의 노인들은 천지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모든 천하의 나이가 많은 사람을 높임은 바로 나의 어른을 어른으로 대하는 것이요, 천하의 어린이들도 천지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모든 천하의 고아와 약한 자를 사랑함은 바로 나의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는 것이다. 성인은 천지와 덕이 합치하니 이는 형제 중에 부모와 덕이 합치한 자요, 현자는 재주와 덕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니 이는 형제 중에 동배보다 빼어난 자이다. 이것은 모두 천지의 자식이란 입장으로 말한 것이니 모든 천하의 피곤한 자·병든 자·고아·외로운 자·홀아비·과부는 나의 형제 중에 하소연 할 데가 없는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于時保之,[11] 子之翼 [12] 也; 樂且不憂, [13] 純乎孝者也.
이에 [천명을] 보존하는 것은 자식의 공경함이요, [천명을] 즐겨 근심하지 않는 것은 효에 독실한 것이다.
- 畏天以自保者, 猶其敬親之至也; 樂天而不憂者, 猶其愛親之純也.
- 천명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보전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함이 지극함과 같고, 천명을 즐거워하여 근심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사랑함이 독실함과 같은 것이다.
違曰悖德, 害仁曰賊 [14], 濟惡者不才 [15], 其踐形 [16]惟肖者也.
[천리를] 어기는 자를 ‘悖德(덕을 해친다)’이라고 하고, 인을 해치는 자는 ‘賊(도적)’이라고 하며, 악을 이루는 자는 ‘不才(못났다)’라 하고, 타고난 것을 실천하는 자는 ‘肖(닮았다)’라고 한다.
- 不循天理而徇人欲者, 不愛其親而愛他人也 [17], 故謂之悖徳.; 戕滅天理、自絶本根者, 賊殺其親, 大逆無道也, 故謂之賊; 長惡不悛、不可敎訓者, 世濟其凶, 增其惡名也, 故謂之不才. 若夫盡人之性, 而有以充人之形, 則與天地相似而不違矣, 故謂之肖.
- 천리를 따르지 않고 인욕을 따르는 자는 자기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悖徳이라 이르고, 천리를 해치고 멸하여 스스로 근본을 끊는 자는 그 부모를 해치고 죽여 대역무도하므로 賊이라 이르고, 악을 조장하고 고치지 않아 가르칠 수 없는 자는 대대로 흉함을 이루어 악명을 더하므로 不才(부모의 재주를 타고나지 못함)라 이르며, 만약 사람의 性을 다하여 사람의 형체를 채울 수 있다면 천지와 서로 같아져서 어기지 않을 것이므로 肖라 이른 것이다.
知化則善述其事; 窮神則善繼其志. [18]
변화를 안다면 부모의 일을 잘 이을 것이요, 신명한 덕을 궁구한다면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할 것이다.
- 孝子,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 聖人知變化之道, 則所行者無非天地之事矣; 通神明之徳, 則所存者無非天地之心矣. 此二者, 皆樂天踐形之事也.
- 효자는 사람(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고 사람의 일을 잘 잇는 자이다. 성인이 변화의 도를 아니, 곧 행하는 것이 천지의 일이 아님이 없고, 신명의 덕에 통달하니 곧 마음에 보존한 것이 천지의 마음이 아님이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천명을 즐거워하고 타고난 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不愧屋漏, [19] 爲無忝; [20] 存心養性, [21] 爲匪懈. [22]
으슥한 곳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것은 [부모를] 욕보이지 않는 것이요,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는 것은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
- 『孝經』引詩曰‘無忝爾所生’[23], 故事天者仰不愧、俯不怍 [24], 則不忝乎天地矣. 又曰‘夙夜匪懈’[25], 故事天者存其心、養其性, 則不懈乎事天矣. 此二者, 畏天之事, 而君子所以求踐夫形者也.
- 『효경』에 『시경』의 ‘너를 낳아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구절을 인용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늘을 섬기는 자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 부끄럽지 않으면 천지에게 욕되지 않은 것이요, 또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인용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늘을 섬기는 자가 그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면 하늘을 섬김에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이니, 군자가 타고난 것을 실천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惡旨酒, 崇伯子之顧養; [26] 育英材, 穎封人之錫類. [27]
맛난 술을 싫어하는 것은 곤의 아들(즉 禹)이 부모 봉양을 돌본 것이요,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봉인이 선을 베푸는 것이다.
- 好飲酒而不顧父母之養者, 不孝也. 故遏人欲如禹之惡旨酒, 則所以‘顧天之養’[28]者至矣. 性者, 萬物之一源, 非有我之得私也. 故育英才如頴考叔之及莊公, 則所以‘永錫爾類’[29]者廣矣.
-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은 불효이다. 그러므로 인욕을 막는 것이 우임금이 맛있는 술을 싫어한 것과 같으면 ‘하늘의 봉양을 돌아봄’이 지극한 것이요, 性은 만물의 한 근원이니 내가 사사로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재를 기르기를 영고숙이 장공에게 미치듯이 한다면 ‘길이 너에게 좋음을 줌’이 넓은 것이다.
不弛勞而底豫, 舜其功也. [30] 無所逃而待烹, 申生其恭也.
수고를 게을리하지 않고 부모가 기뻐하는데 이르게 한 것은 순의 공적이요, 도망가지 않고 죽기를 기다린 것은 신생의 공손함이다.
- 舜盡事親之道而瞽瞍底豫, 其功大矣. 故事天者盡事天 [31]之道, 而天心豫焉, 則亦天之舜也. 申生無所逃而待烹, 其恭至矣. 故事天者夭夀不貳 [32], 而修身以俟之 [33], 則亦天之申生也.
- 순임금이 부모 섬기는 도리를 다하자 고수가 기뻐함에 이르렀으니 그 공이 크다. 그러므로 하늘을 섬기는 자가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 천심이 기뻐하면 또한 하늘의 순임금인 것이다. 신생이 도망가지 않고 팽형을 기다렸으니 공손함이 지극하다. 그러므로 하늘을 섬기는 자가 요절하든 장수하든 의심하지 않고 몸을 닦아 (천명을) 기다린다면 또한 하늘의 신생인 것이다.
體其受而歸全者, 參乎! [34] 勇於從而順令者, 伯奇也. [35] 받은 것을 지켜 온전히 돌아간 분은 증자로다! 따르는데 용감해 명령에 순종한 자는 백기이다.
- 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36], 若曾參之啓手啓足, 則體其所受乎親者而歸其全也. 况天之所以與我者, 無一善之不備, 亦全而生之也. 故事天者能體其所受於天者而全歸之, 則亦天之曾子矣. 子於父母, 東西南北, 唯令之從 [37], 若伯竒之履霜中野 [38], 則勇於從而順令也. 况天之所以命我者, 吉凶禍福, 非有人欲之私. 故事天者能勇於從而順受其正 [39], 則亦天之伯竒矣.
- 부모가 온전히 하여 낳아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히 하여 돌려드림이 마치 증자가 임종할 적에 이불을 걷어 수족을 보여 준 것처럼 한다면 부모에게서 받은 것을 지켜 온전한 상태로 돌려드리는 것이다. 더구나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은 한 가지 선도 구비하지 않음이 없으니, 또한 온전히 하여 낳아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섬기는 자가 하늘에게서 받은 것을 지켜 온전히 돌려준다면 또한 하늘의 증자인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 있어 동서남북(으로 가라는 것)을 오직 명령하시는 대로 따르기를 백기가 들 가운데에서 리상조를 연주했던 것처럼 한다면 따름에 용감하여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더구나 하늘이 나에게 명하는 것은 길흉화복이니 인욕의 사사로움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하늘을 섬기는 자가 따름에 용감하여 그 바름을 순순히 받는다면 또한 하늘의 백기인 것이다.
富貴福澤, 將厚吾之生也; 貧賤憂戚, 庸[40]玉汝 [41]於 [42]成也.
부귀와 복택은 내 삶을 두텁게 할 것이고, 빈천과 근심은 너를 옥처럼 만들어 줄 것이다.
- 富貴福澤, 所以大奉於我, 而使吾之為善也輕; 貧賤憂戚, 所以拂亂 [43]於我, 而使吾之為志也篤. 天地之於人, 父母之於子, 其設心 [44]豈有異哉! 故君子之事天也, 以周公之富而不至於驕, 以顔子之貧而不改其樂; 其事親也, 愛之則喜而不忘, 惡之則懼而無怨. 其心亦一而已矣.
- 부귀에 복택은 나를 크게 봉양하여 내가 선을 행함을 쉽게 하는 것이요, 빈천과 근심은 나를 불란하게 하여 내가 뜻을 세움을 독실하게 하는 것이니, 천지가 사람에게 있어서와 부모가 자식에게 있어서 그 마음을 씀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가 하늘을 섬길 적에 주공의 부유함으로도 교만함에 이르지 않고, 안자의 가난함으로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은 것이요, 부모를 섬길 적에 사랑해 주시면 기뻐하여 잊지 않고, 미워하시면 두려워하고 원망함이 없는 것이니, 그 마음이 또한 동일할 뿐이다.
存, 吾順事; 沒, 吾寧也.
살아있을 때는 나 [부모의 뜻을] 순히 섬길 것이요, 죽게 되어서는 나 편안하리라.
- 孝子之身存, 則其事親者, 不違其志而已; 沒, 則安而無所愧於親也. 仁人之身存, 則其事天者不逆其理而已; 没, 則安而無愧於天也. 盖所謂朝聞夕死 [45], 吾得正而斃焉 [46]者. 故張子之銘以是終焉.
- 효자의 몸이 살아 있으면 부모를 섬김에 그 뜻을 어기지 않을 뿐이요, 죽으면 편안하여 부모에게 부끄러운 바가 없으며, 인한 사람의 몸이 살아 있으면 하늘을 섬김에 그 이치를 어기지 않을 뿐이요, 죽으면 편안하여 하늘에 부끄러운 바가 없다. 이것은 이른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과 ‘내 바름을 얻고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의 銘이 이것으로 끝마친 것이다.
論曰: 天地之間, 理一而已. 然“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則其大小之分, 親疎之等, 至於十百千萬而不能齊也. 不有聖賢者出, 孰能合其異而會其同哉! 「西銘」之作, 意盖如此.
논: 천지의 사이는 오직 리일(理一)일 뿐이다. 그러나 “건(乾)의 도리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리는 여자를 이루어 [47] 음양이라는 두 기가 교감해 만물을 화생시킨다.”[48] 그렇다면 대소의 구별과 친소의 등급은 수 천만가지의 경우에 이르러 똑같을 수 없다. 만약 성현께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면 누가 차이점과 공통점을 회합시킬 수 있었겠는가? 「서명西銘」이라는 작품은 의미가 대개 이와 같다.
程子以為明理一而分殊, 可謂一言以蔽之矣. 盖以乾為父, 以坤為母, 有生之類, 無物不然, 所謂‘理一’也. 而人物之生, 血脈之屬, 各親其親, 各子其子, 則其分亦安得而不殊哉! 一統而萬殊, 則雖天下一家ㆍ中國一人, 而不流於兼愛之弊; 萬殊而一貫, 則雖親疎異情ㆍ貴賤異等, 而不梏於為我之私. 此「西銘」之大指也. 觀其推親親之厚, 以大無我之公, 因事親之誠, 以明事天之道, 盖無適而非所謂分立而推理一者 [49]. 夫豈專以民吾同胞ㆍ長長幼幼為理一, 而必黙識於言意之表, 然後知其分之殊哉!
정자程子께서는 「서명」이 '리일분수理一分殊'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았으니, 전체내용을 한마디 말로 다 정리했다고 일컬을 수 있다. 건乾을 아버지로 삼고 곤坤을 어머니로 삼는 것은 생명이 있는 부류라면 어떠한 것이든 다 그러하니 이른바 ‘리일理一’이다. 그러나 인간과 만물이라는 생명은 혈맥의 등속에 따라 각각 가까운 이를 더 가깝게 여기며 자기의 자식을 자식으로 대우하니 그 분수가 역시 어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의 이치로 관통되지만 부류에 따라 온갖 경우로 나뉘니 비록 천하가 하나의 가족이며 중국이 하나의 사람일지라도 겸애兼愛의 폐단에 흘러가지 않으며, 온갖 경우로 나뉘지만 하나로 관통되어 있으니 비록 친소에 따라 감정을 달리하고 귀천에 따라 등급을 나누지만 ‘위아爲我’의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서명」의 대략적인 요지다. 친속을 친애하는 두터움을 미루어서 공적인 ‘무아無我’ [50]를 확대시키고, 부모님을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에 기인해서 하늘을 섬기는 도를 밝힌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이른바 분수가 확립되면서 동시에 이치가 하나로 관통되지 않는 경우 [51]가 없을 것이다. 어찌 오직 ‘백성은 나의 동포이며 어른을 어른대접하며 아이를 아이답게 대하는 것’을 ‘리일(理一)’로 여기고 반드시 언어로 드러난 의미에 대하여 묵묵하게 기억한 연후에야 분수가 나뉘어짐을 알겠는가?
且所謂“稱物平施”者, 正謂稱物之宜, 以平吾之施云爾. 若無稱物之義, 則亦何以知夫所施之平哉? 龜山第二書盖欲發明此意, 然言不盡而理有餘也, 故愚得因其說而遂言之如此. 同志之士, 幸相與折衷哉 [52]
또 이른바 ‘칭물평시(稱物平施)’[53]라는 것은 바로 [각] 사물의 마땅함을 헤아려서 나의 베풀어줌을 공평히 한다는 말일 뿐이다. [54] 만약 [각] 사물의 마땅함을 헤아리는 과정이 없다면 또한 어떻게 베풀어주는 것의 공평함을 알겠는가? 양시의 두 번째 편지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려고 했지만 말이 미진할 뿐 아니라 논리에 있어서도 결여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설명을 바탕으로 마침내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사인(士) 동지들이 서로 절충해주기를 바라노라.
주석
- ↑ 『周易』 「說卦」 乾,天也,故稱乎父。坤,地也,故稱乎母。
- ↑ 목적어이거나 지시사
- ↑ 1. 順;順從。
- ↑ 『中庸章句』 22 唯天下至誠,為能盡其性;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 ↑ 『孟子』 「梁惠王上」 老吾老,以及人之老;幼吾幼,以及人之幼。
- ↑ 『周易』 「乾卦」 <文言> 夫「大人」者、與天地合其德,與日月合其明,與四時合其序,與鬼神合其吉凶,先天而天弗違,後天而奉天時。天且弗違,而況於人乎?況於鬼神乎?
- ↑ 『孟子』 「梁惠王下」 老而無妻曰鰥。老而無夫曰寡。老而無子曰獨。幼而無父曰孤。此四者,天下之窮民而無告者。文王發政施仁,必先斯四者。
- ↑ 1. 困頓不堪;困苦。
- ↑ 3. 治理;管理。
- ↑ 1. 同等;同輩;同等的人。
- ↑ 『詩』 「周頌」 《我將》 我其夙夜、畏天之威、于時保之。(내 밤낮으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에 보전할 지어다.)
- ↑ 16. 恭敬, 謹肅.
- ↑ 『周易』 「繫辭上」 樂天知命,故不懮。
- ↑ 『孟子』 「梁惠王下」 曰:「賊仁者謂之賊,賊義者謂之殘,殘賊之人謂之一夫。聞誅一夫紂矣,未聞弒君也。」
- ↑ 【案】 좌전에 전거가 있다는데 찾지 못함
- ↑ 『孟子』 「盡心上」 孟子曰:「形色,天性也;惟聖人,然後可以踐形。」 ; 『孟子集註』 人之有形有色,無不各有自然之理,所謂天性也。踐,如踐言之踐。蓋眾人有是形,而不能盡其理,故無以踐其形;惟聖人有是形,而又能盡其理,然後可以踐其形而無歉也。(사람이 지닌 형체와 색은 각각 자연의 이치를 갖고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천성이다. 踐은 ‘말을 實踐한다’의 踐이다. 뭇 사람들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치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형체를 실천할 수 없다. 오직 성인만이 형체를 가지면서 그 이치를 다할 수 있으니, 그런 연후에야 형체를 실천하여 부족함이 없을 수 있다.)
- ↑ 『孝經』 「聖治」 故不愛其親而愛他人者,謂之悖德;不敬其親而敬他人者,謂之悖禮。
- ↑ 『周易』 「繫辭下」 窮神知化,德之盛也。; 『禮記』 「中庸」 19 夫孝者:善繼人之志,善述人之事者也。; (효자는 선조의 뜻과 일을 잘 계승하는 자이다. 성인은 변화의 도를 알아서 행하는 것이 천지의 일이 아님이 없고, [성인은] 신명의 덕에 통달해서 보존하는 것이 천지의 마음이 아닌 것이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천리를 즐기고 형체를 실천하는 일이다.)
- ↑ 『詩』 「大雅」 《抑》 相在爾室, 尚不媿于屋漏。(네가 방에 있음을 보건데, 거의 옥루에 부끄럽지 않다.)
- ↑ 『詩』 「小雅」 《小宛》 夙興夜寐、無忝爾所生。(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준 분 욕되게 하지 말라.)
- ↑ 『孟子』 「盡心上」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殀壽不貳,修身以俟之,所以立命也。」
- ↑ 『詩』 「大雅」 《烝民》 夙夜匪解、以事一人。(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한 사람[천자]를 섬기도다)
- ↑ 『孝經注疏』 「士」 資於事父以事母,而愛同;資於事父以事君,而敬同。故母取其愛,而君取其敬,兼之者父也。故以孝事君則忠,以敬事長則順。忠順不失,以事其上,然後能保其祿位,而守其祭祀。蓋士之孝也。《詩》云:「夙興夜寐,無忝爾所生」。아버지를 섬기는 것에 자뢰하여 어머니를 섬기니, 사랑함이 동일한 것이요, 아버지를 섬기는 것에 자뢰하여 임금을 섬기니, 공경함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그 사랑을 취하고, 임금은 그 공경을 취하는데, 이 둘을 겸한 자는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효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忠이요, 敬으로서 어른을 섬기는 것은 順이다. 忠順함을 잃지 않고서 그 윗사람을 섬긴 연후에야 능히 그 녹봉과 지위를 보전할 수 있고, 그 제사를 지킬 수 있다. 이것이 士의 효이다. 『시경』에서 말하길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준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 ↑ 『孟子』 「盡心上」 孟子曰:「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父母俱存,兄弟無故,一樂也。仰不愧於天,俯不怍於人,二樂也。得天下英才而教育之,三樂也。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
- ↑ 『孝經』 「卿大夫」 非先王之法服不敢服,非先王之法言不敢道,非先王之德行不敢行。是故非法不言,非道不行;口無擇言,身無擇行。言滿天下無口過,行滿天下無怨惡。三者備矣,然後能守其宗廟。蓋卿、大夫之孝也。《詩》云:「夙夜匪懈,以事一人。」 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으며, 선왕의 법언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으며,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서 입에는 법도에 맞지 않는 말이 없고 몸에는 법도에 맞지 않는 행동이 없어서 말이 천하에 가득해도 실언이 없고 행동이 천하에 가득해도 원망과 증오가 없다. 세 가지가 갖추어진 연후에야 그 종묘를 지킬 수 있다. 이것이 경과 대부의 효이다. 『시경』에서 말하길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한 사람을 섬긴다.’고 하였다.
- ↑ 『孟子』 「離婁下」 孟子曰:「禹惡旨酒而好善言。」
- ↑ 『左傳』 「隱公元年」 鄭武公娶于申,曰武姜。生莊公及共叔段。莊公寤生,驚姜氏,故名曰寤生,遂惡之。愛共叔段,欲立之。…… 大叔完聚,繕甲兵,具卒乘,將襲鄭。夫人將啟之。公聞其期,曰:「可矣。」 …… 遂寘姜氏于城潁,而誓之曰:「不及黃泉,無相見也!」既而悔之。潁考叔為潁谷封人,聞之。有獻於公,公賜之食。食舍肉,公問之,對曰:「小人有母,皆嘗小人之食矣,未嘗君之羹。請以遺之。」公曰:「爾有母遺,繄我獨無!」潁考叔曰:「敢問何謂也?」公語之故,且告之悔,對曰:「君何患焉?若闕地及泉,隧而相見,其誰曰不然?」公從之。…… 君子曰:「潁考叔純孝也,愛其母,施及莊公。《詩》曰:『孝子不匱,永錫爾類。』其是之謂乎!」 (정 무공이 신나라에 장가갔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무강이다. 무강은 장공과 공숙단을 낳았다. 장공이 寤生해 무강을 놀래켰으므로 ‘寤生’이라 이름 짓고 미워하고서, 공숙단을 아껴 그를 옹립하려고 했다. …… 태숙[공숙단]이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모으며 병장기를 수선하고 보병·전차를 갖춰 정나라 도성을 습격하려 했는데, 무강이 성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장공이 그 시기를 듣고서 “태숙을 공격하라!”고 하였다. …… 마침내 장공이 무강을 성영에 위폐하고 맹세하길 “黃泉에 이르기 전에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윽고 후회하였다. 영고숙이 영곡봉인이 되어 이 이야기를 들었다. 장공에게 예물을 바치니 장공이 음식을 내려주었는데 영고숙이 고기는 제쳐두고 먹지 않았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영고숙이 대답했다: “소인의 모친은 항상 제 음식을 맛보았습니다만 아직 임금님의 고깃국은 맛보지 못해 남겨가려고 합니다.” 장공이 말했다: “그대에게는 음식 남겨갈 모친이 있는데, 유독 나만 없구나!” 영고숙이 말했다: “감히 여쭈건대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공이 그 까닭과 후회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영고숙이 대답했다: “임금님께서는 무얼 걱정하십니까? 물길에 닿을 때까지 땅을 파고서 땅굴을 뚫어 만나신다면 누가 옳지 않다 하겠습니까?” 장공이 이 말을 따랐다. …… 군자가 평한다: “영고숙은 독실한 효자로다! 제 모친을 사랑함이 장공에게까지 미쳤구나! 『시』에 이르길: ‘효자가 끊이지 않으니, 길이 네게 善을 주리라’라고 하니, 이것을 말한 것일 것이다!”)
- ↑ 【案】 전거를 찾지 못함.
- ↑ 『詩』 「大雅」 《既醉》 威儀孔時、君子有孝子。 孝子不匱、永錫爾類。(위의가 심히 제때에 맞:거늘 군자가 효자를 두었도다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좋음을 주리로다.)
- ↑ 『孟子』 「離婁上」 舜盡事親之道而瞽瞍厎豫,瞽瞍厎豫而天下化,瞽瞍厎豫而天下之為父子者定,此之謂大孝。
- ↑ 『孟子』 「盡心上」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殀壽不貳,修身以俟之,所以立命也。」
- ↑ 『漢語大詞典』 9. 不信任;懷疑。
- ↑ 『孟子』 「盡心上」 각주 30 참고.
- ↑ 『論語』 『泰伯』 曾子有疾,召門弟子曰:「啓予足!啓予手!《詩》云: 『戰戰兢兢,如臨深淵,如履薄冰。』而今而後,吾知免夫!小子!」
- ↑ 『漢語大詞典』 1. 古代孝子. 相傳為周宣王時重臣尹吉甫之長子. 母死, 后母欲立其子伯封為太子, 乃譖伯奇, 吉甫怒, 放伯奇於野. ; 『說苑』 「佚文」 王國子前母子伯奇,後母子伯封。後母欲其子立為太子,說王曰:「伯奇好妾。」王不信,其母曰:「令伯奇於後園,妾過其旁,王上臺視之,即可知。」王如其言。伯奇入園,後母陰取蜂十數置單衣中,過伯奇邊曰:「蜂螫我。」伯奇就衣中取蜂殺之。王遙見之,乃逐伯奇也。(왕의 자제로 전처 소생 백기와 후처 소생 백봉이 있었다. 후처가 제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해서 왕에게 말했다: “백기가 신첩을 좋아합니다.” 왕이 믿지 않자 후처가 말했다: “백기를 후원에 있게 해주시면 제가 그 옆을 지나가보겠습니다. 왕께서 누대에 올라 보시면 곧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그 말대로 했다. 백기가 후원에 오자 후처가 몰래 벌 십여 마리를 잡아 홑옷 속에 넣고서 백기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벌이 나를 쏘는구나!” 백기가 옷 속의 벌을 잡아 죽이려고 했다. 왕이 멀리서 이를 바라보고서 이에 백기를 쫓아버렸다.)
- ↑ 『禮記』 「祭義」 樂正子春下堂而傷其足,數月不出,猶有憂色。門弟子曰:「夫子之足瘳矣,數月不出,猶有憂色,何也?」樂正子春曰:「善如爾之問也!善如爾之問也!吾聞諸曾子,曾子聞諸夫子曰:『天之所生,地之所養,無人為大。』父母全而生之,子全而歸之,可謂孝矣。不虧其體,不辱其身,可謂全矣。故君子頃步而弗敢忘孝也。
- ↑ 『莊子』 「大宗師」 子來曰:「父母於子,東西南北,唯命之從。陰陽於人,不翅於父母,彼近吾死而我不聽,我則悍矣,彼何罪焉!夫大塊載我以形,勞我以生,佚我以老,息我以死。故善吾生者,乃所以善吾死也。今之大冶鑄金,金踊躍曰『我且必為鏌鋣』,大冶必以為不祥之金。今一犯人之形,而曰『人耳人耳』,夫造化者必以為不祥之人。今一以天地為大鑪,以造化為大冶,惡乎往而不可哉!成然寐,蘧然覺。」
- ↑ https://baike.baidu.com/item/履霜操
- ↑ 『孟子』 「盡心上」 孟子曰:「莫非命也,順受其正。是故知命者,不立乎巖牆之下。盡其道而死者,正命也。桎梏死者,非正命也。」
- ↑ 用
- ↑ 『詩經』 「大雅」 <民勞> 民亦勞止、汔可小安。 惠此中國、國無有殘 。 無縱詭隨、以謹繾綣。 式遏寇虐、無俾正反 。 王欲玉女、是用大諫。
- ↑ 『漢語大詞典』 22. 助詞。用於句首或句中, 無義。
- ↑ 『漢語大詞典』 違反其意願以亂之。
- ↑ 『漢語大詞典』 1. 用心;居心。
- ↑ 『論語』 「里仁」 子曰:「朝聞道,夕死可矣。」
- ↑ 『禮記』 「檀弓上」 曾子寢疾,病。樂正子春坐於床下,曾元、曾申坐於足,童子隅坐而執燭。童子曰:「華而睆,大夫之簀與?」子春曰:「止!」曾子聞之,瞿然曰:「呼!」曰:「華而睆,大夫之簀與?」曾子曰:「然,斯季孫之賜也,我未之能易也。元,起易簀。」曾元曰:「夫子之病帮矣,不可以變,幸而至於旦,請敬易之。」曾子曰:「爾之愛我也不如彼。君子之愛人也以德,細人之愛人也以姑息。吾何求哉?吾得正而斃焉斯已矣。」舉扶而易之。反席未安而沒。증자가 병이 심해져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증자의 제자인 악정자춘은 침상 아래에 앉아있고 아들인 증원과 증신은 발 끝에 앉아 있었으며, 동자는 침상 모퉁이에 않아 촛불을 들고 있었다. 동자가 말했다. “선생님이 누우신 대자리의 무늬가 아름다우며 결이 매끄럽고 윤택이 나니 대부들이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자춘이 말하였다. “닥쳐라!” 증자가 들으시고는 놀라서 “하!”하고 탄식하셨다. 동자가 다시 말하엿다. “무늬가 아름다우며 결에는 윤택이 나니 대부들이 사용하는 대자리가 아닙니까?” 증자가 대답했다. “그렇다. 이것은 계손씨가 하사해 준 것인데 내가 아직 바꾸지 못했다. 원은 일어나서 이 대자리를 바꿔라.” 증원이 대답했다. “아버님은 병이 위급하여 움직일 수 없으시니 다행히 내일 아침까지 병세가 좋아지시면 그 때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증자가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저 아이만도 못하구나. 군자는 사람을 사랑함에 덕으로써 하고 소인은 사람을 사랑함에 고식지계로써 하니, 내가 어떤 것을 구하겠느냐? 내가 올바름을 얻고 죽는다면 이것만으로 족하다.” 이에 모두가 그를 부축하여 들어서 대자리를 바꾸었더니, 다시 자리에 편안히 눕기 전에 돌아가셨다.
- ↑ 『周易』 「繫辭上」1章, “是故, 剛柔相摩, 八卦相盪. 鼓之以雷霆, 潤之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暑, 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
- ↑ 『太極圖說』,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
- ↑ 【교감기5】‘立’이 대전본에는 ‘殊’로 되어 있다. ‘者’는 대전본, 서본, 만력본에는 ‘也’로 되어 있다.
- ↑ 여기서 ‘無我’의 의미는 자기중심적인 자아(私我)의 탈각을 의미하는 것 같다.
- ↑ 『二程文集』卷10, 「答楊時論西銘書」, “《西銘》之論則未然. 横渠立言誠有過者, 乃在《正夢》, 《西銘》之為書, 推理以存義, 擴前聖所未發, 與孟子性善養氣之論同功, (二者亦前聖所未發.) 豈墨氏之比哉? 《西銘》明理一而分殊, 墨氏則二本 而無分. (老幼及人, 理一也; 愛無差等. 本二也.) 分殊之蔽, 私勝而失仁; 無分之罪. 兼愛而無義. 分立而推理一以止私勝之流, 仁之方也; 無别而迷兼愛, 至於無父之極, 義之賊也. 子比而同之, 過矣. 且謂言體而不及用, 彼則使人推而行之, 本為用也, 反謂不及, 不亦異乎?“《서명》에 대한 이야기는 틀렸네. 횡거 선생이 입언한 것 가운데 진실로 지나친 것이 『정몽』에 있지만, 《서명》의 글은 理를 미루어 義를 보존하였고 이전 성인께서 드러내지 않으신 것을 넓히셨으니, 맹자의 性善·養氣의 말씀과 공이 같은데, (두 경우 또한 이전 성인께서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다.) 어찌 [횡거 선생을] 묵자에 견주겠는가? 《서명》은 “리일분수”를 밝힌 것이고, 묵자는 근본을 둘로 하고 구분이 없는 것이네. (노인을 노인 대접하고 아이를 아이 대접하기를 남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리일”이고, 사랑에 차등이 없는 것은 근본을 둘로 한 것이다.) 분수의 폐단은 사욕[자기중심성]이 이겨 인을 잃는 것이고, 구분이 없는 것의 문제는 겸애하여 의가 없는 것이네. 구분이 세워지고서 “리일”을 미루어 사욕이 이기는 것을 막는 것이 仁의 방법이고, 분별이 없어 겸애에 미혹돼 無父의 극단에 이르는 것이 義를 해치는 것이네. 그대는 [횡거 선생을 묵자에] 비겨 같다고 여기는데, 지나친 것일세. [그대가] 또 말하길: “體만 말하고 用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서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루어 실천하게 한 것이니 본래부터 用이거늘 도리어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 ↑ 【교감기6】‘哉’가 대전본, 서본, 만력본에는 ‘焉’로 되어 있다.
- ↑ 『周易』 「謙」, “《象》曰: 地中有山, 謙,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 【易傳】 地體卑下, 山之高大而在地中, 外卑下而內蘊高大之象, 故為謙也. 不云山在地中, 而曰地中有山, 言卑下之中蘊其崇高也. 若言崇高蘊於卑下之中, 則文理不順. 諸象皆然, 觀文可見.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 君子觀謙之象. 山而在地下, 是高者下之, 卑者上之, 見抑高舉下ㆍ損過益不及之義; 以施於事, 則裒取多者, 增益寡者, 稱物之多寡以均其施與, 使得其平也.
- ↑ 『龜山集』卷16, 「答伊川先生」, “‘古之人所以大過人者, 無他, 善推其所為而已.’, ‘老吾老以及人之老, 幼吾幼以及人之幼’, 所謂推之也. 孔子曰: ‘老者安之, 少者懐之’, 則無事乎推矣. 無事乎推者, 理一故也. 理一而分殊, 故聖人稱物而平施之, 兹所以為仁之至、義之盡也. 何謂稱物? 親疎逺近各當其分, 所謂稱也; 何謂平施? 所以施之, 其心一焉, 所謂平也. 某昔者竊意『西銘』之書有平施之方, 無稱物之義, 故曰: “言體而不及用”, 蓋指仁義為說也. 故仁之過, 其蔽無分, 無分則妨義; 義之過, 其流自私, 自私則害仁. 害仁則楊氏之為我也; 妨義則墨氏之兼愛也. 二者其失雖殊, 其所以得罪於聖人則均矣.““옛 사람들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하는 바를 남에게 잘 미루어봤을 뿐이다.”와 “우리 집의 어르신들을 공경하여 남의 어르신을 공경하는데 미치고, 우리 집 어린 자식들을 보살펴서 남의 어린 자식들을 보살피는 데 미친다.”는 것이 이른바 ‘미루어보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고 젊은이를 감싸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미루어봄에 일삼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루어 봄에 일삼을 것이 없는 이유는 이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치는 하나지만 나뉨은 다르기 때문에 성인이 사물을 저울질하여 고르게 베푸시니 이에 인(仁)의 지극함과 의(義)의 극진함이 되는 것입니다. 稱物(사물을 저울질함)이 무엇입니까? 친하고 소원하며 멀고 가까움이 각각 그 분수에 마땅한 것이 이른바 稱(저울질)입니다. 平施(고르게 베품)가 무엇입니까? 베푸는 것에 그 마음이 그것에 한결같은 것이 이른바 平(고르다)입니다. 제가 예전에 마음속으로 『서명』이라는 책은 고르게 베푸는 방법은 있고 사물을 저울질하는 뜻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체(體)는 말하였으나 용(用)은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이니, 대개 인의를 가리켜 설명한 것입니다. 인이 지나치면 그 폐단은 구분이 없는 것이니, 구분이 없으면 의를 방해합니다. 의가 지나치면 그 폐단은 자신의 이익만을 따지는 것이니, 자신의 이익만 따진다면 인을 해치게 됩니다. 인을 해치는 것은 양주의 위아설이요, 의를 방해하는 것은 묵자의 겸애설입니다. 이 둘은 그 잘못이 비록 다르더라도 성인에게 죄를 얻은 까닭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