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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의 강경의 중심이었던 강경시장은 평양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조선시대 전국의 3대 시장으로 꼽히던 곳이었다. 현재의 강경은 쇠락해졌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에 강경은 골목과 거리를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로 지정해 건물들의 원형을 잘 보존하여 옛 상업도시였던 강경의 모습을 재건하고자 한다. | 충남 논산의 강경의 중심이었던 강경시장은 평양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조선시대 전국의 3대 시장으로 꼽히던 곳이었다. 현재의 강경은 쇠락해졌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에 강경은 골목과 거리를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로 지정해 건물들의 원형을 잘 보존하여 옛 상업도시였던 강경의 모습을 재건하고자 한다. | ||
− | 강경이 조선시대 3대 시장과 포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배경은 금강에 있다. 금강으로 인해 강경은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수상 교통이 발달하여 조선시대에 | + | 강경이 조선시대 3대 시장과 포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배경은 금강에 있다. 금강으로 인해 강경은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수상 교통이 발달하여 조선시대에 평양, 대구와 함께 다양한 지역의 산물들이 거래되는 조선의 3대 시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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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경은 현재 4200여 세대, 인구 8000여 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해의 수산물과 호남지역의 곡물, 포목거래와 중국 상선이 드나들던 충청서부지역의 대표적 무역항이었다. 1870년 무렵 강경시장의 점포 수는 900여 개에 달했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상주인구 3만 명에 유동인구가 하루 1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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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 하류 지역이지만 수심이 깊어 제법 큰 고깃배와 상선이 오갔으며, 충청내륙과 호남지방까지 넓은 시장을 배후에 뒀던 덕분에, 지역의 산물이 강경으로 몰렸던 까닭에 하루 100여 척의 선박이 강경을 오갔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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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년 신미양요 이후 강경은 서해와 중국의 소금을 전국에 공급하면서 더욱 번성했으며, 수백 명의 직원을 데리고 소금을 공급하던 객주들은 대금업과 수산물 도매로 막대한 자본을 형성했다. 인근 군산항 개항으로 수입 화물의 80%가 강경시장을 통해 나가면서 수산물, 곡물, 공산품 등을 아우르는 국제중개항의 역할을 했던 항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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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강경읍에는 옛 강경노동조합(등록문화재 323호),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등록문화재 324호), 강경 옛 연수당 건재약방(등록문화재 10호),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등록문화재 60호)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가 10곳이나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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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강경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전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하던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이 있던 곳이다. 1905년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축물은 3층 높이를 하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단층 짜리 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경 옛 연수당 건재약방은 1920년대 사진 속 풍경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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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8일 (일) 21:14 기준 최신판
Meta Data
- 한글명: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
- 타입: 근현대 문화유적
- 유형: 유적/건물
-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일대
- 시대: 근현대
내용
충남 논산의 강경의 중심이었던 강경시장은 평양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조선시대 전국의 3대 시장으로 꼽히던 곳이었다. 현재의 강경은 쇠락해졌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에 강경은 골목과 거리를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로 지정해 건물들의 원형을 잘 보존하여 옛 상업도시였던 강경의 모습을 재건하고자 한다.
강경이 조선시대 3대 시장과 포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배경은 금강에 있다. 금강으로 인해 강경은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수상 교통이 발달하여 조선시대에 평양, 대구와 함께 다양한 지역의 산물들이 거래되는 조선의 3대 시장이었다.
강경은 현재 4200여 세대, 인구 8000여 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해의 수산물과 호남지역의 곡물, 포목거래와 중국 상선이 드나들던 충청서부지역의 대표적 무역항이었다. 1870년 무렵 강경시장의 점포 수는 900여 개에 달했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상주인구 3만 명에 유동인구가 하루 1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금강 하류 지역이지만 수심이 깊어 제법 큰 고깃배와 상선이 오갔으며, 충청내륙과 호남지방까지 넓은 시장을 배후에 뒀던 덕분에, 지역의 산물이 강경으로 몰렸던 까닭에 하루 100여 척의 선박이 강경을 오갔다고 한다.
1871년 신미양요 이후 강경은 서해와 중국의 소금을 전국에 공급하면서 더욱 번성했으며, 수백 명의 직원을 데리고 소금을 공급하던 객주들은 대금업과 수산물 도매로 막대한 자본을 형성했다. 인근 군산항 개항으로 수입 화물의 80%가 강경시장을 통해 나가면서 수산물, 곡물, 공산품 등을 아우르는 국제중개항의 역할을 했던 항구다.
현재 강경읍에는 옛 강경노동조합(등록문화재 323호),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등록문화재 324호), 강경 옛 연수당 건재약방(등록문화재 10호),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등록문화재 60호)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가 10곳이나 남아 있다.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강경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전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하던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이 있던 곳이다. 1905년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축물은 3층 높이를 하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단층 짜리 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경 옛 연수당 건재약방은 1920년대 사진 속 풍경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물이다.
촬영대상(계획)
강경역사관 |
연수당 |
강경노동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