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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부로의 책에는 1930년 최승희가 《석굴암의 벽조에서(石窟岩の壁彫より)》의 기본 의상을 입고, 보살의 동작을 취한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는《보살》의 시초가 되는 《정토(淨土)의 무희》로 추정되고 있다.<ref>1930년 발표된《정토의 무희》는 석굴암의 「보현보살상」을 착안한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高嶋雄三郞, 앞의 책, 1994, 58·158쪽 ; 「崔承喜孃 新作舞踊公演」, 『조선일보』 1930년 10월 15일 자 ;「崔孃 동정 무용회 옵시요 이밤엔 꼭」, 『동아일보』 1930년 11월 11일 자.</ref>1937년 3월 27~28일 총독부 외사과의 부탁으로 금강산 일대를 시찰한 최승희는<ref>「崔承喜舞踊에 伴奏할 "金剛山의 曲"도 完成 外事課의 觀光客誘致策으로 世界에 宣揚될 靈峰」, 『매일신보』 1937년 4월 9일 자 : 「金剛靈峯의 舞踊化完成 명년 봄 최승희 여사의 손으로 구미 각지에서 선전」, 『조선일보』 1937년 5월 27일 자.</ref>1937년 3월<ref>1937년 3월 31일로 추정되고 있다.</ref>창덕궁 인정전 서행각에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위한 무용 공연 제2부 첫 작품으로 “불교예술의 정적미를 나타낸”《보현보살》을 발표했다.<ref>李王職雅樂部의 아악사, 국립국악원장 故 成慶麟 소장. 김영희, 「최승희 재발견 ⑤ 순종의 왕후 윤비를 위로한 인정전 공연(2011.6월 자 재발표)」, 『춤웹진』143호, 2021.7.</ref>이는 1930년 발표된《정토의 무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5월 27일, 금강산 무용을 완성한 최승희는<ref>「金剛靈峯의 舞踊化完成」, 『조선일보』 1937년 5월 27일 자.</ref>1937년 9월 27~29일 도쿄극장의 고별 신작 무용 발표회에《금강산쌍곡(金剛山雙曲) A. 보살의 그림(菩薩の圖)·B. 천녀의 무용(天女の舞)》을 올렸다.<ref>東京劇場 崔承喜 渡歐 告别 新作 舞踊 發表會 プログラム (1937.9.27.~29) 高嶋雄三郞,『世紀の美人舞踊家崔承喜』, 東京: エムティ出版, 1994, 10쪽.</ref>최승희의 금강산 무용은 영산(靈山) 금강산의 선녀를 모티브한 ‘초자연적인 소질’의 무용으로, 조선의 우의(羽衣) 전설을 소재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ref>《금강산 쌍곡》 중《천녀의 춤》은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모티브한 것으로 추정된다.“崔 : …금강산이라는 靈山이 있는데, 한 옛날 선녀가 내려와서 춤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의 무용은 인간적이라기보다도 초자연적 소질을 가졌다 이렇게 예찬을 했어요. 記 : 그럼 조선의 羽衣 전설을 파리 신문기자가 알았던가요?” 「國除電話線을 타고 온 舞姬崔承喜 音聲」,『조선일보』 1939년 4월 1일 자.</ref>금강산의 신비한 분위기는 최승희만 느꼈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유사부로의 책에는 1930년 최승희가 《석굴암의 벽조에서(石窟岩の壁彫より)》의 기본 의상을 입고, 보살의 동작을 취한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는《보살》의 시초가 되는 《정토(淨土)의 무희》로 추정되고 있다.<ref>1930년 발표된《정토의 무희》는 석굴암의 「보현보살상」을 착안한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高嶋雄三郞, 앞의 책, 1994, 58·158쪽 ; 「崔承喜孃 新作舞踊公演」, 『조선일보』 1930년 10월 15일 자 ;「崔孃 동정 무용회 옵시요 이밤엔 꼭」, 『동아일보』 1930년 11월 11일 자.</ref>1937년 3월 27~28일 총독부 외사과의 부탁으로 금강산 일대를 시찰한 최승희는<ref>「崔承喜舞踊에 伴奏할 "金剛山의 曲"도 完成 外事課의 觀光客誘致策으로 世界에 宣揚될 靈峰」, 『매일신보』 1937년 4월 9일 자 : 「金剛靈峯의 舞踊化完成 명년 봄 최승희 여사의 손으로 구미 각지에서 선전」, 『조선일보』 1937년 5월 27일 자.</ref>1937년 3월<ref>1937년 3월 31일로 추정되고 있다.</ref>창덕궁 인정전 서행각에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위한 무용 공연 제2부 첫 작품으로 “불교예술의 정적미를 나타낸”《보현보살》을 발표했다.<ref>李王職雅樂部의 아악사, 국립국악원장 故 成慶麟 소장. 김영희, 「최승희 재발견 ⑤ 순종의 왕후 윤비를 위로한 인정전 공연(2011.6월 자 재발표)」, 『춤웹진』143호, 2021.7.</ref>이는 1930년 발표된《정토의 무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5월 27일, 금강산 무용을 완성한 최승희는<ref>「金剛靈峯의 舞踊化完成」, 『조선일보』 1937년 5월 27일 자.</ref>1937년 9월 27~29일 도쿄극장의 고별 신작 무용 발표회에《금강산쌍곡(金剛山雙曲) A. 보살의 그림(菩薩の圖)·B. 천녀의 무용(天女の舞)》을 올렸다.<ref>東京劇場 崔承喜 渡歐 告别 新作 舞踊 發表會 プログラム (1937.9.27.~29) 高嶋雄三郞,『世紀の美人舞踊家崔承喜』, 東京: エムティ出版, 1994, 10쪽.</ref>최승희의 금강산 무용은 영산(靈山) 금강산의 선녀를 모티브한 ‘초자연적인 소질’의 무용으로, 조선의 우의(羽衣) 전설을 소재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ref>《금강산 쌍곡》 중《천녀의 춤》은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모티브한 것으로 추정된다.“崔 : …금강산이라는 靈山이 있는데, 한 옛날 선녀가 내려와서 춤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의 무용은 인간적이라기보다도 초자연적 소질을 가졌다 이렇게 예찬을 했어요. 記 : 그럼 조선의 羽衣 전설을 파리 신문기자가 알았던가요?” 「國除電話線을 타고 온 舞姬崔承喜 音聲」,『조선일보』 1939년 4월 1일 자.</ref>금강산의 신비한 분위기는 최승희만 느꼈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
2023년 5월 3일 (수) 19:38 판
최승희의 보살 춤
유사부로의 책에는 1930년 최승희가 《석굴암의 벽조에서(石窟岩の壁彫より)》의 기본 의상을 입고, 보살의 동작을 취한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는《보살》의 시초가 되는 《정토(淨土)의 무희》로 추정되고 있다.[1]1937년 3월 27~28일 총독부 외사과의 부탁으로 금강산 일대를 시찰한 최승희는[2]1937년 3월[3]창덕궁 인정전 서행각에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위한 무용 공연 제2부 첫 작품으로 “불교예술의 정적미를 나타낸”《보현보살》을 발표했다.[4]이는 1930년 발표된《정토의 무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5월 27일, 금강산 무용을 완성한 최승희는[5]1937년 9월 27~29일 도쿄극장의 고별 신작 무용 발표회에《금강산쌍곡(金剛山雙曲) A. 보살의 그림(菩薩の圖)·B. 천녀의 무용(天女の舞)》을 올렸다.[6]최승희의 금강산 무용은 영산(靈山) 금강산의 선녀를 모티브한 ‘초자연적인 소질’의 무용으로, 조선의 우의(羽衣) 전설을 소재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7]금강산의 신비한 분위기는 최승희만 느꼈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림 1은 1919~1939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가 그린 「금강산, 전설적 환상(The Diamond Mountains, A Fantasy)」이다. 사실화를 그렸던 그가, 금강산 그림에서만은 산 위에서 보살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전설에 의탁한 환상적인 장면을 담고 있다.[8]
《석굴암의 벽조》는 최승희가 프랑스 파리에서 창작한 것으로[9]석굴암의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을 무용화한 것이다.[10]《석굴암 보현보살(석굴암의 벽조)》은 주로 벽에 붙어 있는 상태에서 피리 소리에 맞추어 손이 움직이면서 벽에서 떨어져 나와 춤을 추고 끝날 즈음에 다시 벽에 붙어버리는 무용으로 전해진다.[11]
세계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보살》·《보현보살》·《관음보살(觀音善薩)》을 발표하였는데, 《보살》은 1938년 11월 6일 뉴욕 길드 극장 무용 발표회에서부터 공개되었다. 초기에 발표된 《보살》은 1937년 9월에 발표된 금강산을 무용화한 《보살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남미 공연 때부터 등장한 ‘신성한 특성’을 강조한《관음보살》과 내용이 유사하다.[12]일본무용으로 소개된 《관음보살》작품 내용은 쇼와시대 일본이 신격화된 천황을 무기로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보살(Bodhisattva) | 보살은 부처님의 성자이다. 이 춤은 불교예술의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13] |
보현보살(Bodhisattva“Hugen”) | 이것 또한 불교 성도이지만 ‘보현’에서는 ‘관음’(N. 6)의 신성한 특성이 매우 인간적인 속성으로 대체되었습니다.[14] |
관음보살(Bodhisatta“Kwannon”) | 보살은 불교 성자입니다. 이 춤은 일본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교 미술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15] |
그림2 ①·③·④의 최승희《보살》과 ②의 석굴암 「보현보살상」복식은 가슴 중앙의 원형 영락(瓔珞)·목 장식(咽瓔珞) 위치와 형태가 일치한다.[16]연꽃 위에 서서 수인법(手印法)을 행하고 있는 모습은 극락세계의 연꽃에서 만물이 신비롭게 탄생한다는 불교의 생성관 연화화생(蓮華化生)을 상징화하는 것으로, 최승희의 《보살》과 석굴암의 「보현보살상」에서 발견되고 있다.[17]1939년 10월『조선일보』는 그림2 ③·④을 “故鄕의 춤을 추는 崔女史의 포즈(獨文誌『다스·마가친』에서)”라고 설명하였고,[18]최승희는《보살》을 “반도 무용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19]따라서 그림2 ③·④의《보살의 그림》은 최승희가 1937년 9월 발표한 금강산을 무용화한 작품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20] 최승희의 《보살》은 상의는 맨살을 드러낸 채 줄줄이 오색의 구슬을 꿴 장신구를 전신에 휘감고, 두 팔, 다리는 구슬로 만든 팔찌와 발찌로 겹겹이 감쌌으며, 손톱과 발톱은 길게 붙여서 빨간 매니큐어를 발랐다. 찰랑거리는 구슬 치마 속에서 조명을 받아 빛나는 다리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백옥처럼 살짝살짝 엿보였는데, 이국적인 음악 속에 조용한 몸짓으로 일어서 이리저리 상반신만 움직이며 추는《보살》은 경이로웠다고 전해진다.[21]
최승희의 《보살》은 하체는 그대로 두고 주로 손과 상체를 놀리는 것이었는데,[22]그의 엄지와 검지의 끝을 구부려 맞대고 나머지 손가락들을 뻗은 손동작을 두고 인도 무용에서는 함사시야[Haṃsāsya, (हंसास्य)] ‘백조 부리(Swan-beak)’라고 불린다. 이 동작은 ‘축복·축제·띠로 묶기·확실한 가르침·소름·진주·쟈스민’ 등을 표현하는데,[23]이보다 최승희 《보살》의 손동작은 불교 아미타불의 9품 정인(九品定印) 수인법 중 중품상생(中品上生)·하품상생(下品上生)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보살》은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마주 맞물려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 코끼리의 6개의 어금니를 표현하고 있다고 형상화되는데, 이는 최승희 보살의 명칭이 《관음보살》이라기보다 《보현보살》의 행원을 무용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좋은 근거이다. 보현보살은 6개의 어금니를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연화대에 앉은 모습으로도 표현되는데,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향한 실천행, 행원을 상징하는 보살이기 때문이다. 흰 코끼리를 탄 모습은 코끼리처럼 굳건한 행원(行願) 보살도의 실천 자세를 말한다. 행원은 신행(身行)과 심원(心願)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바람과 그 실천의 서원(誓願)이다. 6개의 어금니는 보현보살의 실천행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24]
최승희가 귀국한 이후 《보현보살》은 1942년 12월 17~20일 데에코쿠 극장(帝國劇場)의 최승희 독무 공연 제1회 제1부 5번째로 발표되며, “헤이안 시대의 명화 「보현보살」을 무용화한 일본 불교예술”로 소개되었다. 헤이안 시대 「보현보살」은 그림 4 ①의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국보 헤이안 시대 후기 12세기 「보현보살상」이 대표적이다.[25]그 밖에 그림 4 ②의 돗토리(鳥取)현 부조지(豊乗寺)[26]소장 국보 「보현보살상」과 그림 4-12 ③의 나라(奈良) 국립박물관 소장 중요문화재 헤이안 시대 12세기 「보현보살상」이 있다.[27] 그림 4의 일본 헤이안 시대 「보현보살상」은 모두 흰 코끼리를 타고 앉은 자세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좌상(坐像)으로, 머리에는 정수리 부분이 솟은 영락 장식의 보관(菩冠)을 쓰고 있으며, 귀로부터 머리 뒷부분을 덮는 긴 천의 ‘수(收)’가 덮여있고, 색색의 천으로 장식된 의상을 입고 있다.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에서 발표된 《보살》은 색색의 구슬이 달린 금박 장식 의상과 ‘수’가 덮여있지 않은 넓은 형태의 보관을 쓴[28]수인법을 한 입상(立像)의 형태로, 최승희의《보현보살》에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보현보살》의 특징이 발견되지 않는다.[29] 세계 순회공연에서 추어진 최승희의 《보살》은 금강산·석굴암에서 착안한 불교예술을 무용화한 것으로, 동양적 소재의 조선 고대 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30]
출처: 김연수, 「일제강점기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1938~1940)과 ‘조선무용’」, 건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2, 56~61쪽.
주석
- ↑ 1930년 발표된《정토의 무희》는 석굴암의 「보현보살상」을 착안한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高嶋雄三郞, 앞의 책, 1994, 58·158쪽 ; 「崔承喜孃 新作舞踊公演」, 『조선일보』 1930년 10월 15일 자 ;「崔孃 동정 무용회 옵시요 이밤엔 꼭」, 『동아일보』 1930년 11월 11일 자.
- ↑ 「崔承喜舞踊에 伴奏할 "金剛山의 曲"도 完成 外事課의 觀光客誘致策으로 世界에 宣揚될 靈峰」, 『매일신보』 1937년 4월 9일 자 : 「金剛靈峯의 舞踊化完成 명년 봄 최승희 여사의 손으로 구미 각지에서 선전」, 『조선일보』 1937년 5월 27일 자.
- ↑ 1937년 3월 31일로 추정되고 있다.
- ↑ 李王職雅樂部의 아악사, 국립국악원장 故 成慶麟 소장. 김영희, 「최승희 재발견 ⑤ 순종의 왕후 윤비를 위로한 인정전 공연(2011.6월 자 재발표)」, 『춤웹진』143호, 2021.7.
- ↑ 「金剛靈峯의 舞踊化完成」, 『조선일보』 1937년 5월 27일 자.
- ↑ 東京劇場 崔承喜 渡歐 告别 新作 舞踊 發表會 プログラム (1937.9.27.~29) 高嶋雄三郞,『世紀の美人舞踊家崔承喜』, 東京: エムティ出版, 1994, 10쪽.
- ↑ 《금강산 쌍곡》 중《천녀의 춤》은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모티브한 것으로 추정된다.“崔 : …금강산이라는 靈山이 있는데, 한 옛날 선녀가 내려와서 춤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의 무용은 인간적이라기보다도 초자연적 소질을 가졌다 이렇게 예찬을 했어요. 記 : 그럼 조선의 羽衣 전설을 파리 신문기자가 알았던가요?” 「國除電話線을 타고 온 舞姬崔承喜 音聲」,『조선일보』 1939년 4월 1일 자.
- ↑ 키스는 그의 저서 《동양의 창(Eastern Windows)》(1928)에 금강산 여행기를 남겼다. 엘리자베스 키스, 『올드 코리아』, 책과 함께, 2020, 174~175쪽.
- ↑ 「민족무용의 찬란한 발전에 바친 30년」,『문학신문』, 문학신문사, 1957년 11월 28일 자.
- ↑ 최승희가 프랑스 파리에서 창작한 《석굴암의 벽조》는 《정토의 무희》·《보현보살》을 진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정병호, 앞의 책, 2004, 239쪽 ; 석굴암은 신라 제35대 景德王 시기 재상 金大城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것으로, 석굴암 「보현보살상」은 본존 쪽을 향하여 梵天의 오른쪽에 서 있는 보살상이며 맞은편에 있는 「文殊菩薩상」과 더불어 석가여래의 협시보살을 이룬다. 석굴암 보현보살상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 채희완, 「風流와 힘이 우리의 춤」, 『한국 춤의 정신은 무엇인가』, 명경, 2000, 92쪽.
- ↑ 금강산을 무용화한 《보살의 그림》과 석굴암 「보현보살상」에서 착안한《석굴암의 벽조에서》·《보현보살》과 달리, 일본무용이라는 《관음보살》은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관음보살》의 인기와 무용 평을 분석해보면, 미국·유럽 공연에서 호평을 받았던 금강산을 무용화한 《보살(보살의 그림)》과 같은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 ↑ 「SAI SHOKI」,『The Playbill』, 16쪽 (1939년 12월 28일 세인트 제임스 극장(ST. James Theatre)에서 열린 “A Holiday Dance Festival” 공연 프로그램의 《Bodhisattva》설명 인용.)
- ↑ Alfredo Romero Castilla, “Las An-danzas de Ch’oe Sǔng-Hǔi por teatros de América Latina”, Chakana, Volumen 3, Cátedras Internacionales, Universidad de Costa Rica, 2019, p.161. (1940년 6월 5일 브라질 상파울루의 공연예술 극장 프로그램의 《Bodhisattva “Hugen”》 설명 인용.)
- ↑ Alfredo Romero Castilla, “SAI SHOKI: La princesa danzante de la península en México”, Asociación Latinoamericana de Estudios de Asia y África, XIII Congreso Internacional de ALADAA, 2011,p.33~35. (1940년 6월 5일 브라질 상파울루의 공연예술 극장 프로그램의 《Bodhisattva “Kwonnon”》 설명 인용.)
- ↑ ①『Le Jour』 14 juin 1939 ② 석굴암의 「보현보살상」③『La Petite Gironde』 28 janvier 1939 ④ 《금강산쌍곡》의《菩薩の圖)》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崔承喜(菩薩の圖)」,『婦人畫報』418號, 婦人畫報社(東京社), 1938年 12月, 36쪽.
- ↑ 본 사진에서는 최승희《보살》의 연꽃 단상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세계 순회공연 및 일본 공연의 《보살》 사진에는 연꽃 단상 위에서 《보살》을 추는 최승희를 확인할 수 있다.
- ↑ 타카시마 유사부로는 그림2 ③·④을 《薩埵菩薩》로 게재하였다. 高嶋雄三郞, 앞의 책, 1994, 5쪽「動亂의 歐羅巴에서 “故鄕의 춤”추는 崔承喜」, 『조선일보』 1939년 10월 3일 자.
- ↑ 「半島의舞踊을 歐米에紹介 崔承喜女史橫濱歸着」, 『매일신보』, 1940년 12월 6일 자.
- ↑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에서 주로 그림2 ③·④의 보관을 착용하였다.
- ↑ 1943년 가을, 2차 대전 종전 무렵 최승희의 지방 공연 평을 인용. 박수영, 「무희 최승희」,『큰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시와 산문사, 2004, 202쪽 ; 노명자, 「최승희의 춤사위」,『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 : 최초의 알파걸, 최고의 패션 패셔니스타』, 황금나침반, 2007, 26~27쪽.
- ↑ 최승희는 “상체만 움직이는 율동은 서양사람이 동양사람보다 훨씬 못하기에 《보살》이 問題도 됐고 評判도 좋았다”고 전했다. 「崔承喜의 舞踊과 抱負를 듯는 崔承喜, 成化鎭, 宋錫夏鼎談會」, 『조광』 67호, 1941년 5월, 251쪽.
- ↑ 또 다른 문헌에 따르면 이 손동작은 ‘다끄쉬나-무르띠[Dakṣiṇamūrti (दक्षिणामूर्ति)]’로, 시바(Śiva)신이 니야그로다(Nyagrodha) 나무 앞에서 현자들에게 따뜨와(Tattva)의 원리를 가르칠 때 취한 손짓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용법으로는 ‘현명한 가르침·공양·논지의 제시·말하기·읽기·노래하기·명상·감정의 표현·소름·진주·보석·피리소리·바라문계층·흰색’등을 의미한다. 난디께슈와라, 『표현의 거울』, BLUE LOTUS BOOKS, 2008, 108~109쪽.
- ↑ 이계환, 네이버 카페『최승희조선민족무용기본보존회』에 올린 글, 2011.10.2. https://cafe.naver.com/sis1229
- ↑ 国立文化財機構所蔵 emuseum.nich.go.jp
- ↑ 豊乗寺 : 헤이안 시대 嘉祥 연간(845-851년) 제54대 仁明 天皇(810년– 850년 5월 6일), 일본의 55대 文徳 天皇(826년~858년) 시기 空海의 法帝인 眞雅에 의해 창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 ↑ 奈良国立博物館 narahaku.go.jp
- ↑ Claude Delpeuch, 「EN MARGE DU RÉCITAL SAI SHOKI」, 『Le Petit Journal』 18 Juin 1939.
- ↑ 1942년 帝國劇場에서 발표된 최승희의 《보현보살》은 세계 순회공연에서 발표된 《보현보살》과 다른 작품이거나, 같은 작품을 일본무용으로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 ↑ 崔承喜, 「崔承喜의 舞踊과 抱負를 듯는 崔承喜, 成和鎭, 宋鍚夏 鼎談會-三月三十日 半島호텔 에서-」, 『조광』 67호, 1941년 5월호, 250~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