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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성]]은 4~5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이르러 문장이 대성하였다. 특히 시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가 지은 시는 속세를 벗어난 것같이 맑고 깨끗하였다. 기묘명현이었던 김정(金淨)은 일찍이 [[최수성]]의 시를 사랑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이름을 시문학에 남길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 [[최수성]]은 4~5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이르러 문장이 대성하였다. 특히 시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가 지은 시는 속세를 벗어난 것같이 맑고 깨끗하였다. 기묘명현이었던 김정(金淨)은 일찍이 [[최수성]]의 시를 사랑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이름을 시문학에 남길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 ||
− | [[최수성]]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배출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 학자로서 [[조광조]] | + | [[최수성]]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배출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 학자로서 [[조광조]]·김정 등과 교유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동지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술과 여행, 시서화(詩書畫), 음악으로 일생을 보냈다. |
남탄현(南炭峴)에 집을 마련해서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며, 원정이라는 아호는 그것에서 연유하였다. 젊어서부터 세속을 멀리하여 명산승경을 유람하며 술과 거문고, 시를 즐겼고 뜻이 맞는 교우들과는 만남에서 화흥(畫興)을 폈다. | 남탄현(南炭峴)에 집을 마련해서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며, 원정이라는 아호는 그것에서 연유하였다. 젊어서부터 세속을 멀리하여 명산승경을 유람하며 술과 거문고, 시를 즐겼고 뜻이 맞는 교우들과는 만남에서 화흥(畫興)을 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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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수성은 중종 35년(1540)에 신원(伸冤)되어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인종 원년(1545)에 의정부 영의정에 더 추증되었다. 선조 11년(1578)에는 [[율곡 이이|율곡]]이 선조에게 계청(啓請)하여 불천위(不遷位)의 명이 내렸고, 인조 23년(1645)에는 최치운, 최응현, 박공달, 박수량, 최운우와 함께 [[향현사|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강릉 삼현비각]]에 [[최치운]], [[최응현]], [[최수성]]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 | 최수성은 중종 35년(1540)에 신원(伸冤)되어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인종 원년(1545)에 의정부 영의정에 더 추증되었다. 선조 11년(1578)에는 [[율곡 이이|율곡]]이 선조에게 계청(啓請)하여 불천위(不遷位)의 명이 내렸고, 인조 23년(1645)에는 최치운, 최응현, 박공달, 박수량, 최운우와 함께 [[향현사|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삼현비각|강릉 삼현비각]]에 [[최치운]], [[최응현]], [[최수성]]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참고== | ==참고== |
2022년 10월 18일 (화) 10:30 기준 최신판
최수성(崔壽峸) | |
대표명칭 | 최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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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崔壽峸 |
출생일 | 1487년 |
사망일 | 1521년 10월 21일 |
본관 | 강릉(江陵) |
호 |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 |
자 | 가진(可鎭)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부 | 생원 최세효(崔世孝) |
모 | 철원최씨 승지 철관(哲寬)의 딸 |
최수성(崔壽峸, 1487년 ~ 1521년 10월 21일)은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학자이다.
생애
최수성은 조선전기 신사무옥과 관련된 학자이자 화가이다. 필달의 20세 손으로 강릉 출신인데, 만년에 경기도 평택 진위(振威)의 남탄현(南炭峴)에 살았다. 자는 가진(可鎭)이고,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이다. 최치운의 증손자로 생원 최세효(崔世孝)의 아들이며 모친은 철원 최씨로 승지(承旨)를 지낸 철관(哲寬)의 딸이다.
최수성은 4~5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이르러 문장이 대성하였다. 특히 시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가 지은 시는 속세를 벗어난 것같이 맑고 깨끗하였다. 기묘명현이었던 김정(金淨)은 일찍이 최수성의 시를 사랑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이름을 시문학에 남길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최수성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배출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 학자로서 조광조·김정 등과 교유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동지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술과 여행, 시서화(詩書畫), 음악으로 일생을 보냈다.
남탄현(南炭峴)에 집을 마련해서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며, 원정이라는 아호는 그것에서 연유하였다. 젊어서부터 세속을 멀리하여 명산승경을 유람하며 술과 거문고, 시를 즐겼고 뜻이 맞는 교우들과는 만남에서 화흥(畫興)을 폈다.
중종 16년(1521) 35세 때 신사옥사(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형되었다. 문장·시·서화·음률이 모두 뛰어난 절세의 기재(奇才)로 평가되었으나 유작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 추모사업
최수성은 중종 35년(1540)에 신원(伸冤)되어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인종 원년(1545)에 의정부 영의정에 더 추증되었다. 선조 11년(1578)에는 율곡이 선조에게 계청(啓請)하여 불천위(不遷位)의 명이 내렸고, 인조 23년(1645)에는 최치운, 최응현, 박공달, 박수량, 최운우와 함께 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강릉 삼현비각에 최치운, 최응현, 최수성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