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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1 | + | h1 대한제국, 예복에 정체성을 수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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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0-901 Story | + | S0-901 Story 대한제국,_예복에_정체성을_수놓다 |
E0-901A Episode Episode_1:_일본의_개항과_서구식_예복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hanyang&key=E0-901A | E0-901A Episode Episode_1:_일본의_개항과_서구식_예복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hanyang&key=E0-901A | ||
− | E0-901B Episode Episode_2: | + | E0-901B Episode Episode_2:_새로운_예복에_대한_거부감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hanyang&key=E0-901B |
− | E0-901C Episode Episode_3: | + | E0-901C Episode Episode_3:_조선_수신사의_새로운_문물을_향한_탐방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hanyang&key=E0-901C |
− | E0-901D Episode Episode_4: | + | E0-901D Episode Episode_4:_조선의_복식_제도_개혁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hanyang&key=E0-901D |
− | E0-901E Episode Episode_5: | + | E0-901E Episode Episode_5:_대한제국,_예복에_정체성을_수놓다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hanyang&key=E0-901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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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 ==Theme== | ||
− | + | 대한제국, 예복에 정체성을 수놓다 | |
==Synopsis== | ==Synopsis== | ||
− | + | 대한제국기 문관대례복이 제정된 배경과 역사를 알아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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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line== | ==Storyline== | ||
===[[E0-901A.episode | Episode 1: 일본의 개항과 서구식 예복]]=== | ===[[E0-901A.episode | Episode 1: 일본의 개항과 서구식 예복]]=== | ||
− | 19세기 서양은 근대화를 이루고, '유럽공법'이라는 문명국 간의 법에 의거한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ref>김용구, 『세계관 충돌의 국제정치학―동양 禮와 서양 公法』, 나남출판, 1997, 49쪽.</ref> 이 | + | 19세기 서양은 근대화를 이루고, '유럽공법'이라는 문명국 간의 법에 의거한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ref>김용구, 『세계관 충돌의 국제정치학―동양 禮와 서양 公法』, 나남출판, 1997, 49쪽.</ref> 이 공법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월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丁韙良, 1827∼1916)이 1864년 미국의 국제법 저서 『국제법 원리, 국제법학사 개요 첨부』를 한역(漢譯)하여 출판하면서 ‘만국공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ref>조성윤, ‘만국공법(萬國公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9.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6389</ref> 그렇게 함으로써 이 공법이 온 세계만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37쪽.</ref> <br/> |
− | 이러한 | + |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하여 불평등조약을 맺었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근대화를 이룬다. 이후 일본은 대규모 사절단을 서양에 파견하여 그들의 서구세계 경험에 의거한 서구식 대례복을 제정하게 된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44쪽.</ref> 이 대례복에는 자국을 상징하는 문양을 자수함으로써 다른 나라와 구별짓도록 하였고, 이러한 근대적 대례복 제도에 따라 일본은 오동과 국화를 채택하여 사용하였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85쪽.</ref> |
− | ===[[E0-901B.episode | Episode 2: | + | ===[[E0-901B.episode | Episode 2: 새로운 예복에 대한 거부감]]=== |
− | 조선은 일본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마도는 조선이 수여한 인장(印章)을 사용하고 있었다.<ref>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 지성사, 2001, 149쪽.</ref>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본 스스로를 황실로 칭하고, 대마도 도주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받은 인장을 쓰지 않고 새로운 인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된 정책을 | + | 조선은 일본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마도는 조선이 수여한 인장(印章)을 사용하고 있었다.<ref>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 지성사, 2001, 149쪽.</ref>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본 스스로를 황실로 칭하고, 대마도 도주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받은 인장을 쓰지 않고 새로운 인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된 정책을 알리고자 새로운 형식의 서계(書契)를 조선에 보내오지만, 조선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으므로 서계 접수를 거부하며<ref>"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鄭顯德狀啓, …以爲, 對馬島主平義達書啓中, 以「左近衛少將」書來者. …大違格例. 令任譯等, 嚴加責諭, 使改修正呈納, 爲辭矣. …允之." 『高宗實錄』 6년(1869) 12월 13일 庚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612013_002</ref> 갈등을 빚게 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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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갈등은 고종의 친정 시작과 함께 우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ref>"右議政朴珪壽曰, …而謂以違式, 遽却其書, 至今多年, 仍無究竟。 海外異俗, 安得不致生嫌隙乎? 雖尋常朋友之間, 人遣書札, 拒之不納, 必當含慍, 而況交隣講好之地乎?" 『高宗實錄』 11년(1874) 6월 29일 庚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6029_001</ref><ref>"領議政李裕元曰, …聘使入送, 雖非靳施之事, 旣云書契, 更修以來, 則其相和之意, 於此可見矣。 …又曰, …而今若改修以來, 則從此可復講舊, 好矣." 『高宗實錄』 11년(1874) 8월 9일 己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8009_001</ref> 덮어지는 듯 하다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측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향<ref>"議政府啓, …而第其積年相阻之餘, 彼旣爲此幹事, 遠勞涉海, 交修隣誼, 則在我誠信之道, 合施拔例之擧. 令府使出往館所, 別設宴餉, 以示朝家慰恤之厚意." 『高宗實錄』 12년(1875) 2월 5일 癸酉;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2005_002</ref> 준비 과정에서 복식으로 | + | 이 갈등은 고종의 친정 시작과 함께 우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ref>"右議政朴珪壽曰, …而謂以違式, 遽却其書, 至今多年, 仍無究竟。 海外異俗, 安得不致生嫌隙乎? 雖尋常朋友之間, 人遣書札, 拒之不納, 必當含慍, 而況交隣講好之地乎?" 『高宗實錄』 11년(1874) 6월 29일 庚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6029_001</ref><ref>"領議政李裕元曰, …聘使入送, 雖非靳施之事, 旣云書契, 更修以來, 則其相和之意, 於此可見矣。 …又曰, …而今若改修以來, 則從此可復講舊, 好矣." 『高宗實錄』 11년(1874) 8월 9일 己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8009_001</ref> 덮어지는 듯 하다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측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향<ref>"議政府啓, …而第其積年相阻之餘, 彼旣爲此幹事, 遠勞涉海, 交修隣誼, 則在我誠信之道, 合施拔例之擧. 令府使出往館所, 別設宴餉, 以示朝家慰恤之厚意." 『高宗實錄』 12년(1875) 2월 5일 癸酉;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2005_002</ref> 준비 과정에서 복식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갈등을 빚게 된다.<ref>"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則彼人之宴饗日諸條儀例, 預先講定云者, 俱違舊例, 亦涉叵測. …後弊所關, 有難遽行設宴" 『高宗實錄』 12년(1875) 3월 4일 辛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3004_002</ref> 일본은 새로 제정한 서구식 대례복을 입고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전의 규례와 어긋나는 것이라며 계속해 거부하면서 결국 정상적인 교섭은 중단되고 만다.<ref>"議政府啓, …取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故該譯官以爲「禮服不可許接, 書契無以取見」云矣." 『高宗實錄』 12년(1875) 7월 9일 癸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7009_001</ref> 이후 일본측이 결렬된 협상 결과를 가지고 부산을 떠나 귀국하는 당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ref>김원모, “운요호사건(─號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358</ref>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다.<ref>이원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508</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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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 교린상의 연향의례에서 일본의 복색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한 바가 없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쪽.</ref> 그런데 개항 직전 시기의 조선은 일본측이 착용하겠다고 하는 서구식 예복에 대해서 유독 | + | 사실 교린상의 연향의례에서 일본의 복색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한 바가 없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쪽.</ref> 그런데 개항 직전 시기의 조선은 일본측이 착용하겠다고 하는 서구식 예복에 대해서 유독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1866)<ref>김원모, “병인양요(丙寅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142</ref>와 신미양요(1871)<ref>김원모, “신미양요(辛未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961</ref>,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ref>김원모,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589</ref>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정도로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된 것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서양복을 입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일본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105쪽.</ref> |
− | ===[[E0-901C.episode | Episode 3: 새로운 문물을 향한 탐방]]=== | + | ===[[E0-901C.episode | Episode 3: 조선 수신사의 새로운 문물을 향한 탐방]]=== |
1876년 조일수호조규 당시 회담모습을 스케치한 것으로 알려진 일러스트를 보면 전통복식을 입고 있는 조선 측과 서양복식을 입고 있는 일본 측으로 양자가 구별되고 있다. 이는 1856년 미국과 일본 간에 맺어졌던 조약 상황과도 같은 모습이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03쪽.</ref><br/> | 1876년 조일수호조규 당시 회담모습을 스케치한 것으로 알려진 일러스트를 보면 전통복식을 입고 있는 조선 측과 서양복식을 입고 있는 일본 측으로 양자가 구별되고 있다. 이는 1856년 미국과 일본 간에 맺어졌던 조약 상황과도 같은 모습이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03쪽.</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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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은 개항 이후 1876년 4월에서 5월(음력)에 걸쳐 김기수를 | + | 조선은 개항 이후 1876년 4월에서 5월(음력)에 걸쳐 김기수를 수신사로 하여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이어서 1880년 6월부터 8월(음력)에 걸쳐 김홍집을 수신사로 하여 일본으로 파견하였다.<ref>조항래, “수신사(修信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506</ref> 그리고 1881년 4월초부터 윤 7월까지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고자 조사시찰단(소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다.<ref>정옥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036</ref> 이 때까지 이들은 공무를 볼 때는 전통식 관복인 사모와 흉배가 달린 단령을 입었고, 그 외의 상황에서는 전통식 편복을 입고 지냈다.<ref>"飯後與諸公着道服 出赤坂城外東區 向文廟" 『日槎集略』 1881년 5월 3일 甲子;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06A_0020_040_0030_2003_011_XML</ref><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05~114쪽.</ref> 1882년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는 10월 26일(음력 9월 15일)에 동경 구단자카의 스즈키 신이치가 운영하는 스즈키 사진관에서 사진을 촬영한 바 있다. 이 사진에는 상투를 자른 짧은 머리에 양복차림을 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수신사들과는 다른 행동이라 볼 수 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14~117쪽.</ref><br/> |
− | +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405A_0010_120_0010<br/> | |
− | 1882년 | +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406A_002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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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조미수호조약<ref>김원모, “조미조약(朝美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767</ref>의 비준을 위해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하여 미국으로 견미사절단(보빙사)<ref>정경숙, “보빙사(報聘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371</ref>을 파견하였다.<ref>『高宗實錄』 20년(1883) 6월 5일 癸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006005_001</ref> 9월 2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시카고, 워싱턴을 거쳐 9월 18일 뉴욕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국서를 봉정하였다.<ref>손정숙, 「한국 최초 미국 외교사절 보빙사의 견문과 그 영향」, 『한국사상사』 Vol.29, 한국사상사학회, 2007, 260쪽.</ref> 대통령과의 만남은 『뉴욕 타임즈』에 자세하게 묘사되었으며,<ref>“Orient Salaans and Dress -The Corean Embassy Received By Presidene Arthur”, ''New York Times'', 1883.09.18.(이민식, 『근대 한미관계 연구』, 백산자료원, 1998, 115~124쪽 재인용.)</ref><ref>''New York Times'', 1883.09.17.(김원모, 「朝鮮 報聘使의 美國使行(1883) 硏究(上)」, 『동방학지』 Vol.4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5, 58쪽 재인용.)</ref> 일러스트로도 묘사되어 『Frank Leslie의 그림 신문』 9월 29일자에 실렸다.<ref>''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83.09.29.(김원모, 「朝鮮 報聘使의 美國使行(1883) 硏究(上)」, 『동방학지』 Vol.4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5, 78쪽 재인용.)</ref> 여러 기록을 통해 보빙사 일행도 앞선 수신사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식 복장으로 공무를 행하고 평상시에도 전통식 편복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서양 현지에서 서구 복식 체계를 경험하였다는 것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19~122쪽.</ref> | 1883년 조미수호조약<ref>김원모, “조미조약(朝美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767</ref>의 비준을 위해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하여 미국으로 견미사절단(보빙사)<ref>정경숙, “보빙사(報聘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371</ref>을 파견하였다.<ref>『高宗實錄』 20년(1883) 6월 5일 癸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006005_001</ref> 9월 2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시카고, 워싱턴을 거쳐 9월 18일 뉴욕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국서를 봉정하였다.<ref>손정숙, 「한국 최초 미국 외교사절 보빙사의 견문과 그 영향」, 『한국사상사』 Vol.29, 한국사상사학회, 2007, 260쪽.</ref> 대통령과의 만남은 『뉴욕 타임즈』에 자세하게 묘사되었으며,<ref>“Orient Salaans and Dress -The Corean Embassy Received By Presidene Arthur”, ''New York Times'', 1883.09.18.(이민식, 『근대 한미관계 연구』, 백산자료원, 1998, 115~124쪽 재인용.)</ref><ref>''New York Times'', 1883.09.17.(김원모, 「朝鮮 報聘使의 美國使行(1883) 硏究(上)」, 『동방학지』 Vol.4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5, 58쪽 재인용.)</ref> 일러스트로도 묘사되어 『Frank Leslie의 그림 신문』 9월 29일자에 실렸다.<ref>''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83.09.29.(김원모, 「朝鮮 報聘使의 美國使行(1883) 硏究(上)」, 『동방학지』 Vol.4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5, 78쪽 재인용.)</ref> 여러 기록을 통해 보빙사 일행도 앞선 수신사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식 복장으로 공무를 행하고 평상시에도 전통식 편복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서양 현지에서 서구 복식 체계를 경험하였다는 것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19~122쪽.</ref> | ||
− | ===[[E0-901D.episode | Episode 4: | + | ===[[E0-901D.episode | Episode 4: 조선의 복식 제도 개혁]]=== |
+ | 조선은 서구식 예복을 받아들이기 전에 전통복식에 대한 간소화를 실시하였다.<br/> | ||
+ | <br/> | ||
+ | 1884년 윤 5월 24일 '관복(官服)은 흑단령(黑團領)으로 통일하되 착수(窄袖)로 만들도록 하라'<ref>『高宗實錄』 21년(1884) 윤5월 24일 丁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05124_001</ref>는 고종의 명이 있었고, 윤 5월 25일 '사복(私服) 중에서 도포, 직령, 창의, 중의와 같이 겹겹으로 입고 소매가 넓은 옷은 일하는데 불편하므로 약간 변통시켜서 오직 착수의(窄袖衣)와 전복(戰服)을 입고 사대(絲帶)를 대어 간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세우라'<ref>『高宗實錄』 21년(1884) 윤5월 25일 戊辰;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05125_001</ref>는 고종의 명에 따라 예조에서 6월 3일에 '사복 변제 절목(私服變制節目)'을 정하여 올린다.<ref>『高宗實錄』 21년(1884) 6월 3일 戊辰;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06003_004</ref> 그러나 이 갑신년의 의제개혁은 많은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고, 고종은 일관된 입장으로 반대의견을 고수해 가면서 수개월간 의견대립이 지속된다.<ref>최연우,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6839</ref> 그러다가 10월에 갑신정변<ref>신용하, “갑신정변(甲申政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922</ref>이 일어났다가 실패하면서 선비 및 서민들은 다시 옛날 의복을 입는 것으로 돌아간다.<ref>황현(저)/김준(역), 『梅泉野錄』, 교문사, 1994, 164쪽.</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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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제개혁은 이로부터 10년 뒤 1894년에 다시 논의된다. 이 때는 갑오개혁(소위 '갑오경장')<ref>유영익, “갑오개혁(甲午改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925</ref>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갑오개혁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일본에 의해 집권하게 된 정권에 의해 진행되었다. 초정부적인 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안건을 올리면 고종이 윤허하는 형식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갑오의제개혁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좀 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36~138쪽.</ref> 그 내용은 갑신의제개혁에서 정하였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흑단령 복장을 '대례복(大禮服)'이라 하고, 공무복을 '통상예복(通常禮服)'이라 한 것에서 차이가 있다. 통상예복으로는 주의(周衣), 답호, 사모, 화(靴)를 착용하게 하였다.<ref>“朝臣大禮服, 用黑團領, 進宮通常禮服, 周衣撘護, 用黑色土産紬布及紗帽靴子.” 『高宗實錄』 31년(1894) 12월 16일 戊午;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12016_001</ref><br/> | ||
+ | <br/> | ||
+ | 다음해인 1895년에도 의제개혁 내용은 계속해서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먼저 3월 29일 '공사예복(公私禮服)'에서 답호를 제외하고, 궁에 들어갈 때만 사모, 화(靴), 사대(絲帶)를 사용하도록 하고, 주의(周衣)는 모두 검은색으로 할 것을 명했다.<ref>“自今公私禮服中 褡護를 除하고 進宮時뿐 帽靴絲帶를 用하고 周衣는 官民이 一體로 黑色類를 從하라.” 『高宗實錄』 32년(1895) 3월 29일 庚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203029_001</ref> 그 다음, 8월 10일 '조신 이하 복장식(朝臣以下服章式)'이라는 규정을 발표하여 조복(朝服), 제복(祭服) 제도는 모두 그대로 유지하고, 갑오년 의제개혁에서 대례복만 정했던 복식제도의 형식을 대례복(大禮服), 소례복(小禮服), 통상복색(通常服色)으로 하여 근대적 개념에 대응시켰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0쪽.</ref> 대례복은 소매가 넓은 흑단령, 사모, 품대(品帶), 화(靴)를 착용하고, 소례복은 소매가 좁은 흑단령(黑盤領窄袖袍), 사모, 속대, 화를 착용하고, 통상복은 주의(周衣), 답호, 사대(絲帶) 차림으로 하도록 했다.<ref>『高宗實錄』 32년(1895) 8월 10일 戊寅;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208010_001</ref><br/> | ||
+ | <br/> | ||
+ | 갑오의제개혁<ref>최연우, “갑오의제개혁(甲午衣制改革)”,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6840</ref>과 을미의제개혁<ref>최연우, “을미의제개혁(乙未衣制改革)”,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7142</ref>이 일본의 간섭하에 진행된 개혁이라 하더라도 고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갑신의재게혁의 내용을 이어받고 있으며, 전통식 복식제도의 바탕 위에 서양식 형식을 가미하는 것으로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0쪽.</ref><br/> | ||
+ | <br/> | ||
+ | 이러한 의제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ref>이민원, “을미사변(乙未事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948</ref>이 발생하였고, 갑신정변 때 부터 문제로 떠오르던 단발문제가 대두되면서 복식제도 개혁은 다시 한 번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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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기록 중 '경성의 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신문기사 내용을 보면, 1월 1일 단발령을 내려 국왕, 대원군, 관리, 병사가 단발하고 인민은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내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ref>“『日本』 25일 京城發 來一日國王, 大院君, 官吏, 兵士は斷髮し, 人民は自由にする事に內定せり.” 『明治編年史』 9권, 341面, 明治 28년(1895) 12월 26일.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2쪽 재인용.)</ref> 그러나 본래 계획하던 것보다 이른 12월 30일, 유길준, 조희연 등과 일본인의 협박으로 고종부터 강제로 단발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백성들도 체두관에 의해 마구 머리를 깎였다. 갑자기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ref>윤병석, “단발령(斷髮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3579</ref>에 거리에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거의 끊겼고, 결국 나라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5쪽.</ref> 그리하여 결국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백성들이 전국각지에서 을미의병으로 일어났다.<ref>유영익, “을미의병(乙未義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949</ref><br/> | ||
+ | <br/> | ||
+ | 단발령 직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여 단발령 철회 조치를 내린다. 당시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상복 차림 사진에서 백립에 흰색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이미 단발을 한 상태지만 백립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망건을 사용하여 머리를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고종이 단발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옷차림이라고 볼 수 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9쪽.</ref><br/> | ||
+ | <br/> | ||
+ | 단발령은 고종의 철회 조치로 인해 일시적으로 복구되지만, 점차 단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조선인들에게는 단발이 개화의 상징 보다는 친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져서 의제개혁과 단발이 모두 시행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8~150쪽.</ref> | ||
− | ===[[E0-901E.episode | Episode 5: | + | ===[[E0-901E.episode | Episode 5: 대한제국, 예복에 정체성을 수놓다]]=== |
− | + |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등극하였다. 대한제국은 서구식 관복제도로 먼저 고종황제의 양복 착용을 진행했다. 『대한예전』 권5 「군례」에 '황제육군대례복'이라는 명칭을 기록하고,<ref>“皇帝陸軍大禮服 當考 陸軍服裝 當考” 『大韓禮典』 卷5 軍禮;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시대 법령자료. http://db.history.go.kr/id/jlawb_280_0050_0030_0010</ref> 원수부 관제를 바탕으로 육군 대원수복을 정하였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59쪽.</ref> 황제의 서구식 대례복은 군복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군복의 경우는 갑오경장 이후 양복으로 변화된 상황이었다. 원수부 창설은 1899년 6월이었지만, 『대한예전』 편찬시기<ref>『대한예전』은 1898년 연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김문식, 「장지연이 편찬한 『대한예전』」, 『문헌과 해석』 통권 35호, 태학사, 2006, 111쪽.)</ref>를 근거로 하여 황제의 군복형 양복 착용은 원수부 창설이 공식화되기 전에 이미 체계를 갖추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57쪽.</ref> 황제의 대원수 복식은 고종과 순종이 예복(禮服)과 상복(常服)을 착용하고 촬영한 사진으로 남아 있다.<br/> | |
− | === | + | <br/> |
+ | 대한제국 문관의 서구식 대례복은 1900년 4월 17일에 칙령 제14호로써 의정부참정 김성근의 봉칙(奉勅)으로 발표된다.<ref>“勅令 제14호 文官服裝規則”, 『官報』 號外, 1900년 4월 19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s://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17289_00&vol_no=0056</ref> 대례복을 착용하는 상황은 문안드릴 때(問安時), 동가동여할 때(動駕動輿時), 공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因公陛見時), 궁중에서 사연할 때(宮中賜宴時) 등 모두 궁궐에서 황제를 알현하는 상황에서 착용하도록 하고 있다. 대례복 일습은 대례모(大禮帽), 대례의(大禮衣), 하의(下衣, 조끼), 대례고(大禮袴, 바지), 검(劍), 검대(劍帶), 백포하금(白布下襟, 칼라 아래에 덧붙이는 땀받이용 흰색 천), 백색수투(白色手套, 흰색 장갑)로 구성된다. 복식 구성품의 자세한 모양은 칙령 제15호를 통해 발표되었고,<ref>“勅令 제15호 文官大禮服製式”, 『官報』 號外, 1900년 4월 19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s://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17289_00&vol_no=0056</ref> 해당 도식은 9월 3일자 『관보(官報)』의 부록에 실렸다.<ref>“文官大禮服圖式”, 『官報』 附錄, 1901년 9월 3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17289_00&vol_no=0073</ref><br/> | ||
+ | <br/> | ||
+ | 서구식 대례복의 전체적인 형태와 세부 규정은 일본의 1886년(明治 19) 개정된 문관대례복 제도와 유사하다. 이에 대한 근거로 현재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소장문서(朝鮮王室所藏文書)』 중 「관복장도안(官服章圖案)」을 들 수 있는데, 도안은 근화(槿花), 이화(李花), 일본의 대례복 제도 등의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대례복 도안을 위해 일본의 양장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자 제작했거나, 혹은 일본 제도를 참고하기 위해 제작했던 자료로 보인다.<ref>최규순, 「藏書閣 소장 『官服章圖案』 연구」, 『藏書閣』 제19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ref>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에서 대례복의 도안으로 근화와 이화 둘 다 디자인해 본 다음 근화를 선택해 제작했던 모습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문양을 복식에 나타냄으로써 독립된 주권 국가의 복식제도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73~174쪽.</ref><br/> | ||
+ | <br/> | ||
+ |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1905년 11월 강제로 을사조약<ref>조항래, “을사조약(乙巳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958</ref>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에서 서구식 문관 대례복은 전반적인 수정을 거치게 된다.<ref>칙령 제14호 문관복장규칙에 대한 정오(正誤). 內閣記錄課 編, 『法規類編』 二, 1908, 307~311쪽.</ref><ref>칙령 제15호 문관복장제식에 대한 정오(正誤). 『官報』 제2790호, 1904년 4월 2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17289_00&vol_no=0104</ref><ref>칙령 제15호 문관복장제식에 대한 정오(正誤). 『官報』 제3037호, 1905년 1월 16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17289_00&vol_no=0113</ref><ref>칙령 제75호 문관대례복 개정 제식과 도안. 『官報』 제3646호, 1906년 12월 26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17289_00&vol_no=0136</ref><ref>칙령 제75호 문관대례복 채색 도안. 『勅令』 18책, 1906년 12월 12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s://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17706_00&vol_no=0018</ref> 그리고 당시의 상황상 서구식 대례복 착용자들은 친일파들이 많았기 때문에 1900년 복식 제도를 처음 제정할 때의 자주국가로서의 의미는 친일파의 제복과 같은 의미로 왜곡되기 시작하였고,<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224쪽.</ref> 1910년 한일병합이 체결되고, 12월 17일 발표된 일본 황실령 제22호에 의해 일본의 유작자 대례복에 흡수되면서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의 역사는 마감된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207쪽.</ref> 이후 일본이 펼치는 정체성 말살 정책을 통해 대례복이 가지고 있던 국가 정체성을 잃게 되었고, 전통 복식에 대해서는 정복자의 눈을 통한 비하를, 새롭게 제시되는 복식 문명에 대해서는 반감을 체득하게 되는, 왜곡되고 굴절된 복식관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209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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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김현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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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현승]] | [[분류:김현승]] |
2022년 6월 9일 (목) 01:15 기준 최신판
목차
Theme
대한제국, 예복에 정체성을 수놓다
Synopsis
대한제국기 문관대례복이 제정된 배경과 역사를 알아본다.
Storyline
Episode 1: 일본의 개항과 서구식 예복
19세기 서양은 근대화를 이루고, '유럽공법'이라는 문명국 간의 법에 의거한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1] 이 공법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월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丁韙良, 1827∼1916)이 1864년 미국의 국제법 저서 『국제법 원리, 국제법학사 개요 첨부』를 한역(漢譯)하여 출판하면서 ‘만국공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2] 그렇게 함으로써 이 공법이 온 세계만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3]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하여 불평등조약을 맺었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근대화를 이룬다. 이후 일본은 대규모 사절단을 서양에 파견하여 그들의 서구세계 경험에 의거한 서구식 대례복을 제정하게 된다.[4] 이 대례복에는 자국을 상징하는 문양을 자수함으로써 다른 나라와 구별짓도록 하였고, 이러한 근대적 대례복 제도에 따라 일본은 오동과 국화를 채택하여 사용하였다.[5]
Episode 2: 새로운 예복에 대한 거부감
조선은 일본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마도는 조선이 수여한 인장(印章)을 사용하고 있었다.[6]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본 스스로를 황실로 칭하고, 대마도 도주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받은 인장을 쓰지 않고 새로운 인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된 정책을 알리고자 새로운 형식의 서계(書契)를 조선에 보내오지만, 조선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으므로 서계 접수를 거부하며[7] 갈등을 빚게 된다.
이 갈등은 고종의 친정 시작과 함께 우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8][9] 덮어지는 듯 하다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측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향[10] 준비 과정에서 복식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갈등을 빚게 된다.[11] 일본은 새로 제정한 서구식 대례복을 입고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전의 규례와 어긋나는 것이라며 계속해 거부하면서 결국 정상적인 교섭은 중단되고 만다.[12] 이후 일본측이 결렬된 협상 결과를 가지고 부산을 떠나 귀국하는 당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13]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다.[14]
사실 교린상의 연향의례에서 일본의 복색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한 바가 없었다.[15] 그런데 개항 직전 시기의 조선은 일본측이 착용하겠다고 하는 서구식 예복에 대해서 유독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1866)[16]와 신미양요(1871)[17],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18]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정도로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된 것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서양복을 입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일본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9]
Episode 3: 조선 수신사의 새로운 문물을 향한 탐방
1876년 조일수호조규 당시 회담모습을 스케치한 것으로 알려진 일러스트를 보면 전통복식을 입고 있는 조선 측과 서양복식을 입고 있는 일본 측으로 양자가 구별되고 있다. 이는 1856년 미국과 일본 간에 맺어졌던 조약 상황과도 같은 모습이다.[20]
조선은 개항 이후 1876년 4월에서 5월(음력)에 걸쳐 김기수를 수신사로 하여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이어서 1880년 6월부터 8월(음력)에 걸쳐 김홍집을 수신사로 하여 일본으로 파견하였다.[21] 그리고 1881년 4월초부터 윤 7월까지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고자 조사시찰단(소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다.[22] 이 때까지 이들은 공무를 볼 때는 전통식 관복인 사모와 흉배가 달린 단령을 입었고, 그 외의 상황에서는 전통식 편복을 입고 지냈다.[23][24] 1882년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는 10월 26일(음력 9월 15일)에 동경 구단자카의 스즈키 신이치가 운영하는 스즈키 사진관에서 사진을 촬영한 바 있다. 이 사진에는 상투를 자른 짧은 머리에 양복차림을 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수신사들과는 다른 행동이라 볼 수 있다.[25]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405A_0010_120_0010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406A_0020
1883년 조미수호조약[26]의 비준을 위해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하여 미국으로 견미사절단(보빙사)[27]을 파견하였다.[28] 9월 2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시카고, 워싱턴을 거쳐 9월 18일 뉴욕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국서를 봉정하였다.[29] 대통령과의 만남은 『뉴욕 타임즈』에 자세하게 묘사되었으며,[30][31] 일러스트로도 묘사되어 『Frank Leslie의 그림 신문』 9월 29일자에 실렸다.[32] 여러 기록을 통해 보빙사 일행도 앞선 수신사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식 복장으로 공무를 행하고 평상시에도 전통식 편복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서양 현지에서 서구 복식 체계를 경험하였다는 것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33]
Episode 4: 조선의 복식 제도 개혁
조선은 서구식 예복을 받아들이기 전에 전통복식에 대한 간소화를 실시하였다.
1884년 윤 5월 24일 '관복(官服)은 흑단령(黑團領)으로 통일하되 착수(窄袖)로 만들도록 하라'[34]는 고종의 명이 있었고, 윤 5월 25일 '사복(私服) 중에서 도포, 직령, 창의, 중의와 같이 겹겹으로 입고 소매가 넓은 옷은 일하는데 불편하므로 약간 변통시켜서 오직 착수의(窄袖衣)와 전복(戰服)을 입고 사대(絲帶)를 대어 간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세우라'[35]는 고종의 명에 따라 예조에서 6월 3일에 '사복 변제 절목(私服變制節目)'을 정하여 올린다.[36] 그러나 이 갑신년의 의제개혁은 많은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고, 고종은 일관된 입장으로 반대의견을 고수해 가면서 수개월간 의견대립이 지속된다.[37] 그러다가 10월에 갑신정변[38]이 일어났다가 실패하면서 선비 및 서민들은 다시 옛날 의복을 입는 것으로 돌아간다.[39]
의제개혁은 이로부터 10년 뒤 1894년에 다시 논의된다. 이 때는 갑오개혁(소위 '갑오경장')[40]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갑오개혁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일본에 의해 집권하게 된 정권에 의해 진행되었다. 초정부적인 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안건을 올리면 고종이 윤허하는 형식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갑오의제개혁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좀 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41] 그 내용은 갑신의제개혁에서 정하였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흑단령 복장을 '대례복(大禮服)'이라 하고, 공무복을 '통상예복(通常禮服)'이라 한 것에서 차이가 있다. 통상예복으로는 주의(周衣), 답호, 사모, 화(靴)를 착용하게 하였다.[42]
다음해인 1895년에도 의제개혁 내용은 계속해서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먼저 3월 29일 '공사예복(公私禮服)'에서 답호를 제외하고, 궁에 들어갈 때만 사모, 화(靴), 사대(絲帶)를 사용하도록 하고, 주의(周衣)는 모두 검은색으로 할 것을 명했다.[43] 그 다음, 8월 10일 '조신 이하 복장식(朝臣以下服章式)'이라는 규정을 발표하여 조복(朝服), 제복(祭服) 제도는 모두 그대로 유지하고, 갑오년 의제개혁에서 대례복만 정했던 복식제도의 형식을 대례복(大禮服), 소례복(小禮服), 통상복색(通常服色)으로 하여 근대적 개념에 대응시켰다.[44] 대례복은 소매가 넓은 흑단령, 사모, 품대(品帶), 화(靴)를 착용하고, 소례복은 소매가 좁은 흑단령(黑盤領窄袖袍), 사모, 속대, 화를 착용하고, 통상복은 주의(周衣), 답호, 사대(絲帶) 차림으로 하도록 했다.[45]
갑오의제개혁[46]과 을미의제개혁[47]이 일본의 간섭하에 진행된 개혁이라 하더라도 고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갑신의재게혁의 내용을 이어받고 있으며, 전통식 복식제도의 바탕 위에 서양식 형식을 가미하는 것으로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48]
이러한 의제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49]이 발생하였고, 갑신정변 때 부터 문제로 떠오르던 단발문제가 대두되면서 복식제도 개혁은 다시 한 번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의 기록 중 '경성의 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신문기사 내용을 보면, 1월 1일 단발령을 내려 국왕, 대원군, 관리, 병사가 단발하고 인민은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내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50] 그러나 본래 계획하던 것보다 이른 12월 30일, 유길준, 조희연 등과 일본인의 협박으로 고종부터 강제로 단발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백성들도 체두관에 의해 마구 머리를 깎였다. 갑자기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51]에 거리에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거의 끊겼고, 결국 나라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52] 그리하여 결국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백성들이 전국각지에서 을미의병으로 일어났다.[53]
단발령 직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여 단발령 철회 조치를 내린다. 당시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상복 차림 사진에서 백립에 흰색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이미 단발을 한 상태지만 백립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망건을 사용하여 머리를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고종이 단발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옷차림이라고 볼 수 있다.[54]
단발령은 고종의 철회 조치로 인해 일시적으로 복구되지만, 점차 단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조선인들에게는 단발이 개화의 상징 보다는 친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져서 의제개혁과 단발이 모두 시행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55]
Episode 5: 대한제국, 예복에 정체성을 수놓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등극하였다. 대한제국은 서구식 관복제도로 먼저 고종황제의 양복 착용을 진행했다. 『대한예전』 권5 「군례」에 '황제육군대례복'이라는 명칭을 기록하고,[56] 원수부 관제를 바탕으로 육군 대원수복을 정하였다.[57] 황제의 서구식 대례복은 군복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군복의 경우는 갑오경장 이후 양복으로 변화된 상황이었다. 원수부 창설은 1899년 6월이었지만, 『대한예전』 편찬시기[58]를 근거로 하여 황제의 군복형 양복 착용은 원수부 창설이 공식화되기 전에 이미 체계를 갖추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59] 황제의 대원수 복식은 고종과 순종이 예복(禮服)과 상복(常服)을 착용하고 촬영한 사진으로 남아 있다.
대한제국 문관의 서구식 대례복은 1900년 4월 17일에 칙령 제14호로써 의정부참정 김성근의 봉칙(奉勅)으로 발표된다.[60] 대례복을 착용하는 상황은 문안드릴 때(問安時), 동가동여할 때(動駕動輿時), 공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因公陛見時), 궁중에서 사연할 때(宮中賜宴時) 등 모두 궁궐에서 황제를 알현하는 상황에서 착용하도록 하고 있다. 대례복 일습은 대례모(大禮帽), 대례의(大禮衣), 하의(下衣, 조끼), 대례고(大禮袴, 바지), 검(劍), 검대(劍帶), 백포하금(白布下襟, 칼라 아래에 덧붙이는 땀받이용 흰색 천), 백색수투(白色手套, 흰색 장갑)로 구성된다. 복식 구성품의 자세한 모양은 칙령 제15호를 통해 발표되었고,[61] 해당 도식은 9월 3일자 『관보(官報)』의 부록에 실렸다.[62]
서구식 대례복의 전체적인 형태와 세부 규정은 일본의 1886년(明治 19) 개정된 문관대례복 제도와 유사하다. 이에 대한 근거로 현재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소장문서(朝鮮王室所藏文書)』 중 「관복장도안(官服章圖案)」을 들 수 있는데, 도안은 근화(槿花), 이화(李花), 일본의 대례복 제도 등의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대례복 도안을 위해 일본의 양장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자 제작했거나, 혹은 일본 제도를 참고하기 위해 제작했던 자료로 보인다.[63]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에서 대례복의 도안으로 근화와 이화 둘 다 디자인해 본 다음 근화를 선택해 제작했던 모습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문양을 복식에 나타냄으로써 독립된 주권 국가의 복식제도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64]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1905년 11월 강제로 을사조약[65]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에서 서구식 문관 대례복은 전반적인 수정을 거치게 된다.[66][67][68][69][70] 그리고 당시의 상황상 서구식 대례복 착용자들은 친일파들이 많았기 때문에 1900년 복식 제도를 처음 제정할 때의 자주국가로서의 의미는 친일파의 제복과 같은 의미로 왜곡되기 시작하였고,[71] 1910년 한일병합이 체결되고, 12월 17일 발표된 일본 황실령 제22호에 의해 일본의 유작자 대례복에 흡수되면서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의 역사는 마감된다.[72] 이후 일본이 펼치는 정체성 말살 정책을 통해 대례복이 가지고 있던 국가 정체성을 잃게 되었고, 전통 복식에 대해서는 정복자의 눈을 통한 비하를, 새롭게 제시되는 복식 문명에 대해서는 반감을 체득하게 되는, 왜곡되고 굴절된 복식관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73]
Storytelling Network
Metaverse 구현 예시
Virtual Classroom: 대한제국, 정체성을 예복에 수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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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김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