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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을 세우고 동향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한데 반해, 정도전은 백악산(白岳,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으로 정궁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ref>「사실(事實)」,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ref> |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을 세우고 동향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한데 반해, 정도전은 백악산(白岳,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으로 정궁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ref>「사실(事實)」,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ref> | ||
− |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은 백악을 등지고 남향을 바라보게 되었고 | + |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은 백악을 등지고 남향을 바라보게 되었고, 북악산은 주산(主山), 남산(南山)은 안산(案山), 낙산(駱山)은 좌청룡(左靑龍), 그리고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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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궁이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자, 무학대사는 “신라(新羅)의 고승 의상대사가 지은 《산수비기(山水祕記)》를 보면 도읍을 선택하는 자가 만일 중의 말을 믿게 되면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고, 정가(鄭哥) 사람이 나와 시비를 하게 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00년이 못 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 것이니 조심조심 하라.” 고 하였다. <ref>「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대동야승(大東野乘)』</ref> 무학대사의 주장을 일정부분 받아들여 경복궁을 지을 때 무학대사의 의견을 반영하여 궁궐의 화기를 막기 위해 정문에 돌로 만든 해태상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동으로 만든 용을 넣어두었다. 그러나 과연 ‘5대 후의 자리다툼’은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의 왕위찬탈(1453년)이 일어났고, 1592년‘200년 후의 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 ||
정도전의 주장은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라는 유학의 이념과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ref> 「경도(京都)」,『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ref> 이외에도 정도전은 유학을 대표하는 경서 중 『주례(周禮)』의 원리인 ‘左廟右社 面朝後市(좌묘우사, 면조후시)’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4가 자리에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 정도전의 주장은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라는 유학의 이념과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ref> 「경도(京都)」,『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ref> 이외에도 정도전은 유학을 대표하는 경서 중 『주례(周禮)』의 원리인 ‘左廟右社 面朝後市(좌묘우사, 면조후시)’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4가 자리에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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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서울특별시는 옥인시범아파트 건립을 위하여 계곡 일부를 메우고 기린교에 난간을 설치하는 등 수성동을 훼손하였으나, 2012년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을 복원하였다. 이때 옛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기 위해 정선의 《수성동도》를 참고하여 복원하였으며, 이후 수성동 계곡은 2010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 1971년 서울특별시는 옥인시범아파트 건립을 위하여 계곡 일부를 메우고 기린교에 난간을 설치하는 등 수성동을 훼손하였으나, 2012년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을 복원하였다. 이때 옛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기 위해 정선의 《수성동도》를 참고하여 복원하였으며, 이후 수성동 계곡은 2010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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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201C.episode | Episode 3: 맑은 바람이 부는 청풍계]]=== | ===[[E0-201C.episode | Episode 3: 맑은 바람이 부는 청풍계]]=== | ||
− | + |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인 청풍계는 조선 때 인왕산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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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청풍계에는 김상용(金尙容)의 집터가 있다. 김상용과 그 동생 김상헌은 조선 후기의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 가운데 서울 서촌에 살았던 일파)의 시조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강화도에서 자결했고,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거부했다. 김상용의 자결은 인조실록(인조 15년 1637년 1월)에도 기술<ref>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上)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前議政府右議政金尙容死之。 亂初, 尙容因上敎, 先入江都. 及賊勢已迫, 入分司, 將欲自決, 仍上城南門樓, 前置火藥, 麾左右使去, 投火自燒. 其一孫、一僕從死)</ref>되어 있을만큼 당시 최고의 충절을 보였고, 훗날 인조가 김상용을 충신으로 인정하면서 장동김씨의 가세는 강해졌다. 덕분에 청풍계는 (율곡학파) 노론(서인 중 송시열학파)의 성지가 되어 청풍계는 충절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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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이 일대의 지형은 완전히 바뀌고 김상용 집의 여러 건물이 사라졌지만, 어느 주택 앞에 ‘백세청풍’(영원한 맑은 바람)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있다. | ||
+ | 그러나 우리는 권신응이 그린 《청풍계》를 통해 김상용의 집을 세세하게 엿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작품 안에 건물의 이름과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림의 맨 위 능선에는 ‘인왕산’이란 글씨가, 그 아래 바위엔 ‘백세청풍’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 권신응의 그림을 보면, 백세청풍 바위 바로 아래 건물의 용마루 위엔 ‘선원영당’(仙源影堂)이란 글씨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 시냇가(청풍계) 오른쪽엔 짚으로 지붕을 올린 정자가 하나 서 있고, 그 지붕 위에 ‘태고정’(太古亭)이라고 적혀 있다. 태고정은 청풍계의 건물 가운데 가장 소박하지만, 김상용 집 전체의 중심 공간으로 김상용 집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김상용 집은 조선 후기 서인의 중심 공간이었고, 그 집의 중심 공간이 태고정이다. 그래서 태고정에는 서인 노론 계열의 대신과 명사들만 방문할 수 있었다. 정조(정조 14년 1790년 2월 28일), 순조(순조 28년 1828년 3월 13일)도 이곳을 찾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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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고정 오른쪽에는 3개의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이 세 연못의 오른쪽에 청풍지각(靑楓池閣 또는 淸風池閣)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다. 권신응의 그림에도 이 건물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데, 1766년 김양근이 지은 책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서 함벽지 옆에 청풍지각이 있다고 한 것으로 미뤄 알 수 있다. <ref>최완수, 『겸재의 한양 진경』, 동아일보사, 2018.</ref> 이 청풍지각은 김상용 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정선의 《청풍계도(淸風溪圖)》와 《청풍계지각(淸風溪池閣)》 등에 그려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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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의 《청풍계도》는 1730년대 초반에 그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과 1730년대 후반에 그린 간송미술관 소장본이 있다. 고려대 소장본은 보다 근접한 시점에서 그려졌고, 수목과 바위 표현이 더 과감하고 인물이 있다. 반면 간송미술관 소장은이 적묵법을 적용한 정선의 개성적인 화풍을 잘 보여주어 보물 제1952호로 지정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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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201D.episode | Episode 4: 봄날 꽃이 흩날리는 필운대]]=== | ===[[E0-201D.episode | Episode 4: 봄날 꽃이 흩날리는 필운대]]=== | ||
− | + | 지금처럼 한양인들도 봄날 꽃구경을 좋아했는데, 봄나들이를 '상춘(賞春)', 꽃구경을 '상화(賞花)'라 하였다. 경복궁을 포함한 도성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인왕산의 필운대 일대는 살구꽃과 복사꽃 등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유난히도 많아 봄 꽃구경의 명소로 유명했다. 봄철이 되면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라 하여 도성의 풍류객들이 이곳을 찾아 술과 시로 춘흥을 즐겼다. 특히 '필운대 부근의 살구꽃'(弼雲杏花)은 '행촌(杏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박지원을 비롯한 많은 한양 선비들의 시문에 등장하며, 정선도 필운대의 모습을 《필운대》,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렸다. 《필운대》는 사직동에서 인왕산을 향해 오르며 필운대를 바라보며 그린 것으로 필운대가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놀 수 있는 공간임을 알 수 있고, 《필운대상춘》은 선비 여러 명이 필운대에 올라 자연을 즐기며 모여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또한 1786년에 임득명(林得明, 1767~?)의 시화첩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ref>임득명은 여항 문인들의 시사인 옥계시사(玉溪詩社, 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시사 모임의 내용을 기록한 서화첩</ref>에 수록된 《등고상화(登高賞華)》에는 필운대에서 시화 모임을 갖는 모습을 그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비 갠 듯한 봄날 인왕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수채화처럼 맑게 그려져서 필운대의 아름다운 봄날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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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면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은 '난후필운춘망(亂後弼雲春望-전쟁 뒤 필운대의 봄 경치)'라는 시를 지어 임진왜란 후 필운대에서 바라본 황량한 한양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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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운대라는 이름은 중종 때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인왕산의 이름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은 것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 32년(1537) 3월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용경에게 북쪽의 백악산(북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을 가리키며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당시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극진한 예우였다. 이에 공용경은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하고,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은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온 것인데, ‘운룡’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백악산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필운산이라는 이름은 별로 쓰이지 않았고, 필운대 및 필운동이라는 이름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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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운대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터로도 유명한데,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의 오성대감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權慄, 1537-1599)의 사위이다. 이항복은 19살 때 권율의 딸과 혼인한 후 필운대에서 가까운 행촌동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권율의 집터는 현재 사직터널 위쪽인 종로구 행촌동1-18로 알려져 있는데, 필운대와 직선거리로 약 600미터로 걸어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인왕산 밑 필운대는 이항복이 처가를 나와 젊은 시절 관직생활을 하며 지내던 사가일 것으로 짐작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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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필운대에는 배화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배화여고는 1898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Peel Campbell) 여사가 세운 캐롤라이나학당에서 이름을 바꾼 배화학당이 전신이다. 배화여자고등학교 별관 뒤쪽에 위치한 바위벽에는 이항복의 글씨라는 ‘필운대’ 석 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ref>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아들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ref>단단한 힘과 반듯한 균제미가 돋보이는 해서체의 글씨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의와 도리에 맞게 정견을 펼쳤던 이항복의 성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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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운대’글씨 오른쪽에는 몇 줄의 싯구가 적혀있는데, 이 제명은 1873년에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이 터에 들른 후 그 느낌을 글로 지어 새긴 것이다. 가장 우측에는 조선후기 가객 박효관(朴孝寬, ?-?)과 연관된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누가 썼는 지 알 수 없다. 박효관과 관련된 글씨가 있는 것은 이유원과의 인연에서 생긴 것이다. 이유원은 악부를 비롯하여 우리말 노래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유원이 필운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박효관이 감동(監董)의 역할을 맡으면서 교유하게 된다. 그래서 박효관은 필운대 주변에서 가곡을 향유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고, 이 모임이 유명한 '승평계(昇平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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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2일 (목) 13:07 기준 최신판
목차
Theme
조선의 우백호, 인왕산을 그리다.
Synopsis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인왕산은 예로부터 조선시대 한양인들도 조선의 우백호라 부르며 즐겨 찾는 장소였다.[1]
인왕산이 조선의 우백호가 된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도읍을 정할 때 무악대사와 정도전이 설전을 벌인 것과 관련이 있다.
맑은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수성동(水聲洞), 산수의 풍광도 빼어나지만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별장으로 충절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이 된 청풍계(淸風溪) [2],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터이자 봄날 꽃 구경의 명소로 기록된 필운대(弼雲臺) 등 인왕산에는 수많은 명소가 존재한다.
현실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화를 통하여 300년 전 옛 한양인들이 사랑한 명소를 살펴보도록 한다.
Storyline
Episode 1: 태조 이성계의 양팔, 산으로 설전을 벌이다
인왕산이 조선의 우백호가 된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정궁의 위치를 정할 때 태조의 양팔인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설전을 벌인 것과 관련이 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을 세우고 동향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한데 반해, 정도전은 백악산(白岳,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으로 정궁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은 백악을 등지고 남향을 바라보게 되었고, 북악산은 주산(主山), 남산(南山)은 안산(案山), 낙산(駱山)은 좌청룡(左靑龍), 그리고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가 되었다.
정궁이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자, 무학대사는 “신라(新羅)의 고승 의상대사가 지은 《산수비기(山水祕記)》를 보면 도읍을 선택하는 자가 만일 중의 말을 믿게 되면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고, 정가(鄭哥) 사람이 나와 시비를 하게 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00년이 못 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 것이니 조심조심 하라.” 고 하였다. [4] 무학대사의 주장을 일정부분 받아들여 경복궁을 지을 때 무학대사의 의견을 반영하여 궁궐의 화기를 막기 위해 정문에 돌로 만든 해태상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동으로 만든 용을 넣어두었다. 그러나 과연 ‘5대 후의 자리다툼’은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의 왕위찬탈(1453년)이 일어났고, 1592년‘200년 후의 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정도전의 주장은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라는 유학의 이념과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5] 이외에도 정도전은 유학을 대표하는 경서 중 『주례(周禮)』의 원리인 ‘左廟右社 面朝後市(좌묘우사, 면조후시)’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4가 자리에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또한 정도전은 궁궐의 주요 건물 하나하나에 유교적 이념과 민본주의 의지를 새겨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란 이름은 유학의 삼경(三經) 중 하나인 『시경(詩經)』의 ‘기취(旣醉 : 이미 술에 취하다)’라는 시의 구절 중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곧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네. 군자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에서 뜻을 취하고 글자를 따와 경복궁(景福宮)이라고 하였다. [6]
이처럼 궁궐의 위치 및 이름 등 한양의 건설은 유학의 사상과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pisode 2: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인왕산의 수성동
인왕산에는 맑고 경쾌한 물(水) 소리(聲)가 인상적인 계곡(洞)인 '수성동(水聲洞)'이 있다. 이 계곡은 인왕산 아래 첫번째 계곡으로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인왕산을 받치고 있는 그 모습이 호연지기를 가르치며 절로 한적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선비들이 여름철에 휴양을 즐기러 방문하였으며, 빼어난 경관으로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한경지략(漢京識略)』 등에서 '명승지'로 소개되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집인 비해당(匪懈堂)의 옛 집터이다. [7] 안평대군을 비롯한 당대 많은 문인들은 수성동의 자연 경관에서 48가지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이를 극찬하며 '비해당사십팔영시(匪懈堂四十八詠詩)'를 남겼고, 비해당사십팔영시는 인조의 명으로 이광이 만든 《열성어제》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鄭敾, 1676~1759)은 수성동 계곡의 아름다움을 담아 《수성동도(水聲洞圖)》를 그렸고, 이는 돌다리인 기린교(麒麟橋)를 비롯하여 나무 한 그루까지 매우 상세하게 묘사했으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 《수성동도》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장동팔경첩에 수록되어 있다.[8]
1971년 서울특별시는 옥인시범아파트 건립을 위하여 계곡 일부를 메우고 기린교에 난간을 설치하는 등 수성동을 훼손하였으나, 2012년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을 복원하였다. 이때 옛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기 위해 정선의 《수성동도》를 참고하여 복원하였으며, 이후 수성동 계곡은 2010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Episode 3: 맑은 바람이 부는 청풍계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인 청풍계는 조선 때 인왕산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이 청풍계에는 김상용(金尙容)의 집터가 있다. 김상용과 그 동생 김상헌은 조선 후기의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 가운데 서울 서촌에 살았던 일파)의 시조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강화도에서 자결했고,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거부했다. 김상용의 자결은 인조실록(인조 15년 1637년 1월)에도 기술[9]되어 있을만큼 당시 최고의 충절을 보였고, 훗날 인조가 김상용을 충신으로 인정하면서 장동김씨의 가세는 강해졌다. 덕분에 청풍계는 (율곡학파) 노론(서인 중 송시열학파)의 성지가 되어 청풍계는 충절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이 되었다.
현재 이 일대의 지형은 완전히 바뀌고 김상용 집의 여러 건물이 사라졌지만, 어느 주택 앞에 ‘백세청풍’(영원한 맑은 바람)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권신응이 그린 《청풍계》를 통해 김상용의 집을 세세하게 엿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작품 안에 건물의 이름과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림의 맨 위 능선에는 ‘인왕산’이란 글씨가, 그 아래 바위엔 ‘백세청풍’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 권신응의 그림을 보면, 백세청풍 바위 바로 아래 건물의 용마루 위엔 ‘선원영당’(仙源影堂)이란 글씨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 시냇가(청풍계) 오른쪽엔 짚으로 지붕을 올린 정자가 하나 서 있고, 그 지붕 위에 ‘태고정’(太古亭)이라고 적혀 있다. 태고정은 청풍계의 건물 가운데 가장 소박하지만, 김상용 집 전체의 중심 공간으로 김상용 집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김상용 집은 조선 후기 서인의 중심 공간이었고, 그 집의 중심 공간이 태고정이다. 그래서 태고정에는 서인 노론 계열의 대신과 명사들만 방문할 수 있었다. 정조(정조 14년 1790년 2월 28일), 순조(순조 28년 1828년 3월 13일)도 이곳을 찾았다.
태고정 오른쪽에는 3개의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이 세 연못의 오른쪽에 청풍지각(靑楓池閣 또는 淸風池閣)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다. 권신응의 그림에도 이 건물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데, 1766년 김양근이 지은 책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서 함벽지 옆에 청풍지각이 있다고 한 것으로 미뤄 알 수 있다. [10] 이 청풍지각은 김상용 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정선의 《청풍계도(淸風溪圖)》와 《청풍계지각(淸風溪池閣)》 등에 그려져 있다.
정선의 《청풍계도》는 1730년대 초반에 그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과 1730년대 후반에 그린 간송미술관 소장본이 있다. 고려대 소장본은 보다 근접한 시점에서 그려졌고, 수목과 바위 표현이 더 과감하고 인물이 있다. 반면 간송미술관 소장은이 적묵법을 적용한 정선의 개성적인 화풍을 잘 보여주어 보물 제1952호로 지정되어 있다.
Episode 4: 봄날 꽃이 흩날리는 필운대
지금처럼 한양인들도 봄날 꽃구경을 좋아했는데, 봄나들이를 '상춘(賞春)', 꽃구경을 '상화(賞花)'라 하였다. 경복궁을 포함한 도성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인왕산의 필운대 일대는 살구꽃과 복사꽃 등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유난히도 많아 봄 꽃구경의 명소로 유명했다. 봄철이 되면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라 하여 도성의 풍류객들이 이곳을 찾아 술과 시로 춘흥을 즐겼다. 특히 '필운대 부근의 살구꽃'(弼雲杏花)은 '행촌(杏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박지원을 비롯한 많은 한양 선비들의 시문에 등장하며, 정선도 필운대의 모습을 《필운대》,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렸다. 《필운대》는 사직동에서 인왕산을 향해 오르며 필운대를 바라보며 그린 것으로 필운대가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놀 수 있는 공간임을 알 수 있고, 《필운대상춘》은 선비 여러 명이 필운대에 올라 자연을 즐기며 모여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또한 1786년에 임득명(林得明, 1767~?)의 시화첩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11]에 수록된 《등고상화(登高賞華)》에는 필운대에서 시화 모임을 갖는 모습을 그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비 갠 듯한 봄날 인왕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수채화처럼 맑게 그려져서 필운대의 아름다운 봄날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면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은 '난후필운춘망(亂後弼雲春望-전쟁 뒤 필운대의 봄 경치)'라는 시를 지어 임진왜란 후 필운대에서 바라본 황량한 한양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필운대라는 이름은 중종 때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인왕산의 이름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은 것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 32년(1537) 3월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용경에게 북쪽의 백악산(북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을 가리키며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당시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극진한 예우였다. 이에 공용경은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하고,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은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온 것인데, ‘운룡’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백악산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필운산이라는 이름은 별로 쓰이지 않았고, 필운대 및 필운동이라는 이름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필운대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터로도 유명한데,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의 오성대감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權慄, 1537-1599)의 사위이다. 이항복은 19살 때 권율의 딸과 혼인한 후 필운대에서 가까운 행촌동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권율의 집터는 현재 사직터널 위쪽인 종로구 행촌동1-18로 알려져 있는데, 필운대와 직선거리로 약 600미터로 걸어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인왕산 밑 필운대는 이항복이 처가를 나와 젊은 시절 관직생활을 하며 지내던 사가일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필운대에는 배화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배화여고는 1898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Peel Campbell) 여사가 세운 캐롤라이나학당에서 이름을 바꾼 배화학당이 전신이다. 배화여자고등학교 별관 뒤쪽에 위치한 바위벽에는 이항복의 글씨라는 ‘필운대’ 석 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12]단단한 힘과 반듯한 균제미가 돋보이는 해서체의 글씨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의와 도리에 맞게 정견을 펼쳤던 이항복의 성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필운대’글씨 오른쪽에는 몇 줄의 싯구가 적혀있는데, 이 제명은 1873년에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이 터에 들른 후 그 느낌을 글로 지어 새긴 것이다. 가장 우측에는 조선후기 가객 박효관(朴孝寬, ?-?)과 연관된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누가 썼는 지 알 수 없다. 박효관과 관련된 글씨가 있는 것은 이유원과의 인연에서 생긴 것이다. 이유원은 악부를 비롯하여 우리말 노래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유원이 필운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박효관이 감동(監董)의 역할을 맡으면서 교유하게 된다. 그래서 박효관은 필운대 주변에서 가곡을 향유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고, 이 모임이 유명한 '승평계(昇平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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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1.21 사태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다시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 ↑ 애초의 이름은 ‘푸른 단풍나무이 우거진 골짜기’라는 뜻의 ‘청풍계’(靑楓溪) 였으나, 김상용이 이 곳에 별장을 꾸민 이후 선조가 ‘맑은 바람’, ‘충절’이라는 뜻이 담긴 청풍계(淸風溪)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그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강화도에서 자결했고,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거부했다. 이것으로 인조는 훗날 김상용을 충신으로 인정하며 장동김씨의 가세는 강해졌고, 덕분에 청풍계는 서인과 노론의 성지가 되었다.
- ↑ 「사실(事實)」,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대동야승(大東野乘)』
- ↑ 「경도(京都)」,『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
- ↑ 태조4년 1395년 10월 7일, 『태조실록』
- ↑ 안평대군의 호도 비해당이다. 비해(匪懈)는 게으름없이 라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인 '숙야비해 이사일인(夙夜匪懈 以事一人)'에서 따온 말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사람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 ↑ 장동팔경첩은 두 개의 본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간송미술관, 또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上)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前議政府右議政金尙容死之。 亂初, 尙容因上敎, 先入江都. 及賊勢已迫, 入分司, 將欲自決, 仍上城南門樓, 前置火藥, 麾左右使去, 投火自燒. 其一孫、一僕從死)
- ↑ 최완수, 『겸재의 한양 진경』, 동아일보사, 2018.
- ↑ 임득명은 여항 문인들의 시사인 옥계시사(玉溪詩社, 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시사 모임의 내용을 기록한 서화첩
- ↑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아들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