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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pisode 4: 조선왕조의 복식 개혁 | + | Episode 4: 조선왕조의 복식 제도 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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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몇 차례의 해외 탐방을 거치면서 서구식 예복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였고, 그 전에 전통복식에 대한 간소화를 실시하였다. 1884년 윤 5월 24일 '관복()은 흑단령()으로 통일하되 착수()로 만들도록 하라'는 고종의 명이 있었고, 윤 5월 25일 '사복() 중에서 도포, 직령, 창의, 중의와 같이 겹겹으로 입고 소매가 넓은 옷은 일하는데 불편하므로 약간 변통시켜서 오직 착수의()와 전복()을 입고 사대()를 대어 간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세우라'는 고종의 명에 따라 예조에서 6월 3일에 사복변통절목()을 정하여 올린다. 그러나 이 갑신년의 의제개혁은 많은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고, 고종은 일관된 입장으로 반대의견을 고수해 가면서 수개월간 의견대립이 지속된다. 그러다가 10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가 실패하면서 선비 및 서민들은 다시 옛날 의복을 입는 것으로 돌아간다. 이후 10년 동안 복식제도의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조선은 몇 차례의 해외 탐방을 거치면서 서구식 예복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였고, 그 전에 전통복식에 대한 간소화를 실시하였다. 1884년 윤 5월 24일 '관복()은 흑단령()으로 통일하되 착수()로 만들도록 하라'는 고종의 명이 있었고, 윤 5월 25일 '사복() 중에서 도포, 직령, 창의, 중의와 같이 겹겹으로 입고 소매가 넓은 옷은 일하는데 불편하므로 약간 변통시켜서 오직 착수의()와 전복()을 입고 사대()를 대어 간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세우라'는 고종의 명에 따라 예조에서 6월 3일에 사복변통절목()을 정하여 올린다. 그러나 이 갑신년의 의제개혁은 많은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고, 고종은 일관된 입장으로 반대의견을 고수해 가면서 수개월간 의견대립이 지속된다. 그러다가 10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가 실패하면서 선비 및 서민들은 다시 옛날 의복을 입는 것으로 돌아간다. 이후 10년 동안 복식제도의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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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제개혁은 1894년에 다시 논의된다. 이 때의 의제개혁은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갑오경장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일본에 의해 집권하게 된 정권에 의해 진행되었다. 초정부적인 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안건을 올리면 고종이 윤허하는 형식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갑오의제개혁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좀 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138쪽.<> 그 내용은 갑신의제개혁에서 정하였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흑단령 복장을 '대례복'이라 하고, 공무복을 '통상예복'이라 한 것에서 차이가 있다. 통상예복으로는 주의(), 답호, 사모, 화()를 착용하게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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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속해서 다음해인 1895년에도 의제개혁 내용은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먼저 3월 29일 '공사예복()'에서 답호를 제외하고 궁에 들어갈 때만 사모, 화, 사대()를 사용하도록 하고, 주의()는 모두 검은색으로 할 것을 명했다. 그 다음, 8월 10일 '조신 이하 복장식'이라는 규정을 발표하였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복(), 제복(), 상복() 제도는 모두 그대로 유지하고, 갑오년 의제개혁에서 대례복만 정했던 복식제도의 형식을 대례복, 소례복, 통상복색으로 하여 근대적 개념에 대응시켰다.<>28~29쪽.<> 구체적으로는 대례복은 소매가 넓은 흑단령, 사모, 품대, 화를 착용하고, 소례복은 소매가 좁은 흑단령, 사모, 속대, 화를 착용한다. 통상복은 주의, 답호, 사대 차림으로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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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오의제개혁과 을미의제개혁이 일본의 간섭하에 진행된 개혁이라 하더라도 고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갑신의재게혁의 내용을 이어받고 있으며, 전통식 복식제도의 바탕 위에 서양식 형식을 가미하는 것으로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2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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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의제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였고, 갑신정변 때 부터 문제로 떠오르던 단발문제가 대두되면서 복식제도 개혁은 다시 한 번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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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기록 중 '경성의 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신문기사 내용을 보면, 1월 1일 단발령을 내려 국왕, 대원군, 관리, 병사가 단발하고 인민은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내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계획하던 것보다 이른 12월 30일, 유길준, 조희연 등과 일본인의 협박으로 고종부터 강제로 단발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백성들도 체두관에 의해 마구 머리를 깎였다. 갑자기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에 거리에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거의 끊겼고, 결국 나라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백성들이 전국각지에서 을미의병으로 일어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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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발령 직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여 단발령 철회 조치를 내린다. 당시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상복 차림 사진에서 백립에 흰색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이미 단발을 한 상태지만 백립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망건을 사용하여 머리를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고종이 단발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옷차림이라고 볼 수 있다.<>14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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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발령은 고종의 철회 조치로 인해 일시적으로 복구되지만, 점차 단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조선인들에게는 단발이 개화의 상징 보다는 친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져서<>148쪽.<> 의제개혁과 단발이 모두 시행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150<> | ||
==Storytelling Network== | ==Storytelling Network== |
2022년 4월 27일 (수) 02: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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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Episode 4: 조선왕조의 복식 제도 개혁
Synopsis
조선은 몇 차례의 해외 탐방을 거치면서 서구식 예복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였고, 그 전에 전통복식에 대한 간소화를 실시하였다. 1884년 윤 5월 24일 '관복()은 흑단령()으로 통일하되 착수()로 만들도록 하라'는 고종의 명이 있었고, 윤 5월 25일 '사복() 중에서 도포, 직령, 창의, 중의와 같이 겹겹으로 입고 소매가 넓은 옷은 일하는데 불편하므로 약간 변통시켜서 오직 착수의()와 전복()을 입고 사대()를 대어 간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세우라'는 고종의 명에 따라 예조에서 6월 3일에 사복변통절목()을 정하여 올린다. 그러나 이 갑신년의 의제개혁은 많은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고, 고종은 일관된 입장으로 반대의견을 고수해 가면서 수개월간 의견대립이 지속된다. 그러다가 10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가 실패하면서 선비 및 서민들은 다시 옛날 의복을 입는 것으로 돌아간다. 이후 10년 동안 복식제도의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제개혁은 1894년에 다시 논의된다. 이 때의 의제개혁은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갑오경장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일본에 의해 집권하게 된 정권에 의해 진행되었다. 초정부적인 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안건을 올리면 고종이 윤허하는 형식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갑오의제개혁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좀 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138쪽.<> 그 내용은 갑신의제개혁에서 정하였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흑단령 복장을 '대례복'이라 하고, 공무복을 '통상예복'이라 한 것에서 차이가 있다. 통상예복으로는 주의(), 답호, 사모, 화()를 착용하게 하였다.
계속해서 다음해인 1895년에도 의제개혁 내용은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먼저 3월 29일 '공사예복()'에서 답호를 제외하고 궁에 들어갈 때만 사모, 화, 사대()를 사용하도록 하고, 주의()는 모두 검은색으로 할 것을 명했다. 그 다음, 8월 10일 '조신 이하 복장식'이라는 규정을 발표하였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복(), 제복(), 상복() 제도는 모두 그대로 유지하고, 갑오년 의제개혁에서 대례복만 정했던 복식제도의 형식을 대례복, 소례복, 통상복색으로 하여 근대적 개념에 대응시켰다.<>28~29쪽.<> 구체적으로는 대례복은 소매가 넓은 흑단령, 사모, 품대, 화를 착용하고, 소례복은 소매가 좁은 흑단령, 사모, 속대, 화를 착용한다. 통상복은 주의, 답호, 사대 차림으로 한다.
갑오의제개혁과 을미의제개혁이 일본의 간섭하에 진행된 개혁이라 하더라도 고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갑신의재게혁의 내용을 이어받고 있으며, 전통식 복식제도의 바탕 위에 서양식 형식을 가미하는 것으로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29쪽.<>
이러한 의제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였고, 갑신정변 때 부터 문제로 떠오르던 단발문제가 대두되면서 복식제도 개혁은 다시 한 번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의 기록 중 '경성의 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신문기사 내용을 보면, 1월 1일 단발령을 내려 국왕, 대원군, 관리, 병사가 단발하고 인민은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내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계획하던 것보다 이른 12월 30일, 유길준, 조희연 등과 일본인의 협박으로 고종부터 강제로 단발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백성들도 체두관에 의해 마구 머리를 깎였다. 갑자기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에 거리에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거의 끊겼고, 결국 나라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백성들이 전국각지에서 을미의병으로 일어나게 된다.
단발령 직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여 단발령 철회 조치를 내린다. 당시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상복 차림 사진에서 백립에 흰색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이미 단발을 한 상태지만 백립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망건을 사용하여 머리를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고종이 단발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옷차림이라고 볼 수 있다.<>149쪽.<>
단발령은 고종의 철회 조치로 인해 일시적으로 복구되지만, 점차 단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조선인들에게는 단발이 개화의 상징 보다는 친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져서<>148쪽.<> 의제개혁과 단발이 모두 시행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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