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색설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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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색(色)을 모르는 사람이 셋이 있다=== | |
− | + | ○ 음식과 남녀는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 색(色)을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제안(齊安)은 무한히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되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마침내 부인과 마주앉지 않았고, 생원(生員) 한경기(韓景琦)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일찍이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으며, 만약 종년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固)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분변하지 못하였고, 또한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므로 자고는 그 후사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하고 운우(雲雨 남녀의 교정(交情))을 가르치려 하니, 그 아들은 놀라 상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뒤에는 붉게 단장하고 족두리한 여자만 보면 울면서 달아났다. | |
+ | ===여승과 정을 통한 홍(洪)재상=== | ||
+ | ○ 홍 재상(洪宰相)이 아직 현달하지 못한 때였다.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조그만 굴 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굴 속에는 집이 있고 17, 8세의 태도가 어여쁜 여승이 엄연히 홀로 앉아 있었다. 공이. “어째서 홀로 앉아 있느냐.” 물으니, 여승은, “세 여승과 같이 있사온데 두 여승은 양식을 빌리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침내 그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약속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그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여승은 이 말만 믿고 매양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날이 지나가도 나타나지 않자 마음에 병이 되어 죽었다. 공이 나중에 남방절도사가 되어 진영(鎭營)에 있을 때, 하루는 도마뱀[蜥蝪]과 같은 조그만 물건이 공의 이불을 지나가거늘 공은 아전에게 명하여 밖으로 내던지게 하자 아전은 죽여버렸는데, 다음날에도 조그만 뱀이 들어오거늘 아전은 또 죽여버렸다. 또 다음날에도 뱀이 다시 방에 들어오므로 비로소 전에 약속했던 여승의 빌미[神禍]인가 의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위세를 믿고 아주 없애버리려고 또 명하여 죽여버리게 하였더니 이 뒤로는 매일 오지 않은 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올 때마다 몸뚱이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다. 공은 영중(營中)에 있는 모든 군졸을 모아 모두 칼을 들고 사방을 둘러싸게 하였으나 구렁이는 여전히 포위를 뚫고 들어오므로 군졸도 들어오는 대로 다투어 찍어버리거나 장작불을 사면에 질러놓고 보기만 하면 다투어 불 속엘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은 밤이면 구렁이를 함 속에 넣어 방 안에 두고 낮에는 함 속에 넣어 변방을 순행할 때도 사람을 시켜 함을 짊어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그러나 공의 정신이 점점 쇠약해지고 얼굴빛도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 ||
+ | ===과부와 밀회 하려다 봉변당한 중=== | ||
+ | ○ 또, 어떤 상좌가 사승을 속이기를, “우리 집 이웃에 젊고 예쁜 과부가 있는데 항상 내게 말하기를, ‘절의 정원에 있는 감은 너의 스승이 혼자 먹느냐.’ 하기에, 나는, ‘스승이 어찌 혼자만 먹겠습니까. 매양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였더니, 그 과부는, ‘네가 내 말을 하고 좀 얻어 오너라. 나도 감이 먹고 싶다.’ 했습니다.” 하니, 중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네가 따서 갖다 주어라.” 하였다. 상좌가 모두 따다가 제 부모에게 갖다 주고는 중에게 가서, “여자가 매우 기뻐하며 맛있게 먹고는 다시 말하기를, ‘옥당(玉堂)에 차려놓은 흰 떡은 너의 스승이 혼자 먹느냐.’ 하기에, 내가, ‘스승이 어찌 혼자 먹겠습니까. 매양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였더니, 과부는, ‘네가 내 말을 하고 좀 얻어 오너라. 나도 먹고 싶다.’ 했습니다.” 하니, 중은, “만약 그렇다면 네가 거두어서 갖다 주어라.” 하므로, 상좌가 모두 거두어 제 부모에게 주고는 중에게 가서, “과부가 매우 기뻐하며 맛나게 먹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으로써 네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겠느냐.’ 하기에 내가, ‘우리 스승이 서로 만나보고 싶어합니다.’ 하니, 과부는 흔연히 허락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에는 친척과 종들이 많으니 스승이 오시는 것은 불가하고 내가 몸을 빼어 나가서 절에 가서 한 번 뵈옵겠다.’ 하므로, 내가 아무 날로 기약했습니다.” 하니, 중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 날짜가 되자 상좌를 보내어 가서 맞아 오게 하였더니, 상좌가 과부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폐(肺)를 앓는데 의사의 말이 부인의 신을 따뜻하게 하여 배를 다림질하면 낫는다 하니 한 짝만 얻어 갑시다.” 하니, 과부가 드디어 주었다. 상좌가 돌아와서 문 뒤에 숨어서 엿보니 중이 깨끗이 선실(禪室)을 쓸고 자리를 펴놓고 중얼거려 웃으며 하는 말이, “내가 여기에 앉고 여자는 여기 앉게 하고, 내가 밥을 권하고 여자가 먹으면 여자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서 서로 함께 즐기지.” 하였다. 상좌가 들어가서 신을 중 앞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모든 일이 끝장났습니다. 내가 과부를 청하여 문까지 이르렀다가 스승의 하는 소행을 보고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속였구나. 네 스승은 미친 사람이구나.’ 하고, 달아나므로 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하고, 다만 벗어 버리고 간 신 한 짝만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중이 머리를 숙이고 후회하며 하는 말이, “네가 내 입을 쳐라.” 하니, 상좌가 목침(木枕)으로 힘껏 쳐서 이빨이 다 부러졌다. | ||
+ | ===이장군과 과부, 파계승과 과부=== | ||
+ | ○ 이장군(李將軍)이 있었는데, 젊고 훤칠하여 풍채가 옥과 같았다. 그가 하루는 말을 타고 큰길을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22, 3세쯤 되어 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계집종 두어 명을 거느리고 장님에게 점을 치고 있었다. 장군이 눈짓을 하니 그녀 또한 장군의 풍모를 사모하는 듯이 서로 눈을 떼지 않았다. 장군이 졸병에게 그녀의 가는 곳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녀는 점치기를 마치더니 말을 타고 계집종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들어가 사제동(沙堤洞)으로 향하였다. 그 집은 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큰 집이었다. 이튿날 장군이 사제동에 들어가서 여염집에 출입하다가, 마침 그 동네에 사는 활공장이[弓匠]를 만났다. 장군은 무인(武人)이라 이내 서로 사귀어 나날이 이야기하고 놀면서 동네의 모든 집에 관하여 물으니 활공장이는 일일이 말하여 주었다. 장군은 또 묻기를, “저 산 기슭에 있는 큰 집은 무슨 성씨(姓氏)요.” 하니, 활공장이는, “재상 모공(某公)의 딸인데, 요사이 과부가 된 집이 올시다.” 하였다. 그 뒤부터는 장군이 오가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과부가 사는 집을 물었다. 하루는 한 소녀가 와서 불을 얻어 갔는데, 활공장이가, “지금 온 소녀가 과부댁 사람이니 장군은 그리 아십시오.” 하였다. 이튿날 장군은 다시 활공장이를 찾아와서 사정을 말하고,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여 잊을 수 없으니, 만약 그대로 인하여 성사하게 되면 사생(死生)을 그대의 명령대로 하겠소이다.” 하였다. 활공장이가 그 소녀를 불러 장군의 말을 전하고 돈과 옷감을 주었더니 소녀가 드디어 승낙하였다. 장군이 소녀에게 말하기를, “너를 매우 사랑하지만 일단 정회(情懷)가 있으니, 네가 내 청원을 들어주면 후하게 사례할 뿐만 아니라 너의 살림을 맡아 주겠다.” 하니, 소녀가, “말씀해 보십시오.” 하였다. 장군이, “요전에 내가 네 주인을 길에서 본 뒤로는 마음이 황홀하여 입맛을 잃었다.” 하니, 소녀가, “그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였다. 장군이, “어떻게 하느냐.” 하니, 소녀는 “내일 저물녘에 우리집 문 밖으로 오시면 제가 나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였다. 장군이 약속한 대로 가니 소녀는 반가이 나와 맞이하여 제 방에 들이고 경계하기를, “서두르지 마시고 참고 기다리십시오.” 하며,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장군이 두려워서 그 소녀에게 속지나 않았나 의심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안채에서 등불이 켜지고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주인 여자가 변소에 가는 모양이었다. 이때 그 소녀가 내려와서 장군을 끼고 들어가 안방에 있게 하고 다시 경계하기를, “참고 참으십시오. 참지 않으면 계획이 깨어질 것입니다.” 하므로, 장군은 캄캄한 방에 들어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등불이 켜지고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들어왔는데, 계집종이 물러가자 주인 여자는 적삼을 벗고 낯을 씻고 분(粉)을 바르니 얼굴이 옥(玉)처럼 깨끗하였다. 장군은 생각하기를, “나를 맞으려나보다.” 하였더니,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 동(銅)화로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우며 술을 은주전자에 덥히기에 장군은, “내게 먹이려나보다.” 생각하고, 나가려 하다가 문득 그 소녀의 참으라고 한 말을 생각하여 적이 앉아 기다렸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창문에 모래를 끼얹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한 거만한 사나이를 맞아들였다. 그 사나이는 들어서자마자 선뜻 주인 여자를 껴안고 희롱하므로, 장군은 섬찟하여 나가려고 하였으나 도리가 없어 그냥 있으니, 조금 후에 그 사나이는 주인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다가 모자를 벗었는데, 늠름한 까까중이었다. 장군은 그를 제지하리라 생각하고 방 속을 더듬어 긴 노끈 한 움큼을 쥐고 있다가, 중이 주인 여자와 함께 누울 때 장군이 돌출하여 노끈으로 중을 기둥에 묶어놓고 몽둥이로 마구 치니 중은 한없이 슬프게 부르짖었다. 그런 뒤 장군은 주인 여자와 한 번 즐기고 중에게 말하기를, “군중(軍中)의 신례(新禮)를 행하려 하니 네가 장만할 수 있겠느냐.” 하니, 중이,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고, 신례(新禮)의 잔치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 뒤로 장군은 과부집에 자주 왕래하고 과부 역시 장군을 사랑하여 여러 해가 되어도 변하지 않았었다. | ||
+ | ===보광사 중이 죽은 뒤 뱀이 되어 아내와 동거함=== | ||
+ | ○ 나의 장인 안공(安公)이 임천(林川 부여(扶餘)) 군수가 되었을 때, 보광사(普光寺)에 대선사(大禪師) 아무개란 중이 있어 자주 와 뵈었다. 그 사람됨이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므로 서로 친숙하였다. 그 중은 시골 여자를 데려다 아내로 삼고 몰래 왕래하였다. 어느 날 그 중이 죽어서 뱀으로 변해 아내의 방에 들어와서, 낮에는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밤이면 아내의 품에 들어가 그녀의 허리를 감고 머리는 가슴에 기대었는데, 꼬리 사이에 음경과 같은 혹이 있어서 그 곡진하고 정다움이 마치 전날과 같았다. 나의 장인이 이 얘기를 듣고 그 여인에게 뱀이 든 항아리를 가져 오게 하여 중의 이름을 부르니 뱀이 머리를 내밀었다. 장인이 꾸짖기를, “아내를 그리워하여 뱀이 되었으니 중의 도(道)가 과연 이와 같으냐.” 하니, 뱀이 머리를 움츠리고 들어갔다. 나의 장인은 몰래 사람을 시켜 조그만 함을 만들게 하고 그 아내에게 뱀을 꾀어 말하게 하기를, “군수님이 그대에게 새 함을 주어 몸을 편안하게 하여 줄 것이니 빨리 나와요.” 하며, 치마를 함 속에 펴주니 뱀이 항아리에서 나와 함 속에 옮겨 누우므로, 건강한 아전 두어 명이 뚜껑을 덮고 못을 박으니, 뱀이 날뛰고 뒹굴며 나오려 했으나 나오지 못하였다. 또 명정(名旌)에 중의 이름을 써서 앞을 인도하고, 중의 무리 수십 명이 북과 바리때를 울리고 불경을 외며 따라가서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그 후 그 아내는 아무 탈이 없었다. | ||
+ | ===안생의 여인 탐색=== | ||
+ | ○ 안생(安生)이란 사람은 경화거족(京華巨族)이었다. 이름은 학궁(學宮 성균관)에 걸어 두었으나,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복장으로 장안을 돌아다녔다. 일찍 상처하고 혼자 살았는데, 당시 정승의 계집종으로 돈이 많은 미인이 동성(東城)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재물로써 빙폐(聘幣)를 들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안생이 병이 났으므로 중매하는 사람이 상사병이라 하여 그 여자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혼인하였다. 여자는 17, 8세쯤 되었는데 얼굴과 태도가 매우 아름다워 서로 간곡한 정다움이 날로 깊어갔다. 한편 안생의 나이가 젊고 풍채가 아름다운 것을 이웃이 사모하고, 그 여인의 집에서도 또 좋은 사위를 얻었음을 기뻐하여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성찬(盛饌)을 차리고 집안 재산도 태반이 안씨에게로 돌아갔다. 여러 사위들이 샘을 내어 정승에게 가서 호소하기를, “우리 장인이 새 사위를 얻은 이래로 집안이 기울어지고 파산하여 점점 어려워집니다.” 하니 정승은 노하여 말하기를, “내 뜻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양가(良家)의 사위를 얻었으니, 내가 크게 징계하여 이로써 후인(後人)을 경계하리라.” 하고, 곧 미치광이 종놈 몇 명을 시켜서, 가서 안생의 장인과 아내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때 안생은 아내와 함께 밥상을 대하였다가 황겁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두 손을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한 번 붙들려 간 후로는 깊은 궁(宮)에 갇히어 겹문과 높은 담으로 인하여 안팎이 서로 떨어지니, 안생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오직 처가의 사람들과 더불어 돈과 베를 내어 궁중(宮中)의 종들과 문지기 졸병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고, 밤을 틈타서 담을 넘어 상종(相從)하고 조그마한 점방[小店]을 궁 옆에 사서 왕래하는 곳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자 집에서 붉은 신 한켤레를 보내오니 아내가 늘 갖고 놀기에, 안생이 희롱하기를, “이런 좋은 신을 신고 장차 다른 사람과 즐기려 하오.” 하니, 여자는 얼굴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서로 약속한 말이 똑똑히 눈앞에 있는데, 임자는 어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곧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신 한짝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또 어느 날 흰 적삼을 바느질하기에, 안생이 역시 전날처럼 희롱하니 여자는 낯을 가리고 울며 말하기를, “내가 임자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임자가 나를 배반하였습니다.” 하고, 적삼을 더러운 개천에 던지니, 안생은 그 절조에 심복(心服)하여 사랑함이 더욱 깊었다. 이로부터 저녁에 가서 새벽에 돌아오곤 하여 이런 생활이 여러 달 계속되었는데, 정승이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여 여자를 아내가 없는 하인에게 시집가라 하니, 여자는 곧 흔연히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어찌 수절(守節)하겠는가.” 하고, 시집갈 도구를 친히 준비하며 궁인(宮人)을 모두 불러서 성찬을 만들어 먹이니, 사람마다 모두 그가 개가(改嫁)한다고 생각하고, 혹은 그의 이랬다 저랬다 하여 믿음성이 없음을 미워하였는데, 그 여자는 이날 저녁에 가만히 딴 방에 들어가 목매어 죽었으나 안생은 몰랐었다. 이튿날 안생은 본가에 있었는데 예쁜 젊은 여자가 들어와 “낭자가 왔소이다.” 하기에 안생은, 신을 거꾸로 신고 문 밖에 나가니 예쁜 여자가 급히 말하기를, “낭자가 어젯밤에 죽었소이다.” 하였다. 안생은 웃으며 믿지 않았다. 그 까닭도 묻지 않고 점방에 이르니, 당중(堂中)에 평상을 놓고 옷과 이불로 시체를 덮었거늘, 안생은 목놓아 통곡하며 주저앉아 가슴을 치니 온 이웃에서 이 소리를 듣고 흐느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큰 비가 오고 물이 넘쳐서 사람이 동성집에 통행하지 못하여, 안생이 몸소 상구(喪具)를 갖추어 빈소를 차려 두고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배설하며 눈을 붙이지 아니하다가 밤이 깊어서 옷을 입은 채 잠깐 자는데, 여자가 평소의 모습으로 밖에서 들어왔다. 안생이 나아가 더불어 이야기하려 하다가 갑자기 깨어 방 안을 둘러보니, 창문은 적적하고 바람은 문풍지를 걷어올렸는데, 외로운 등불만 명멸(明滅)할 뿐이었다. 생은 울부짖고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였더니, 사흘이 지난 뒤에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개므로 안생은 달빛을 받으며 본가로 향하여 홀로 발 가는 대로 걸어 수강궁(壽康宮) 동문에 이르니, 밤은 이미 이경(二更)인데 화장하고 머리를 크게 쪽지어 올린 여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생을 따라오므로 그가 따라가 보니, 기침하고 탄식하는 것이 모두 전날에 듣던 소리와 같았다. 그는 크게 부르며 달려가서 한 도랑에 이르니 여자가 또 그 옆에 앉았다. 안생은 돌아보지 않고 그의 집에 이르렀더니 여자는 또 문 밖에 섰기에 그가 큰 소리로 종을 부르니, 여자는 모탕(나무를 쪼개거나 쇠를 단련할 때 밑에 받히는 받침)에 몸을 감추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생은 심신이 흐리멍텅하여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치광이 같기도 하더니, 달포가 지난 뒤에 정중한 예(禮)로 아내의 장사를 지낸 다음 얼마 안 가서 그도 역시 죽었다. | ||
+ | ===장님 남편을 속인 처=== | ||
+ | ○ 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이웃 사람에게 부탁하여 미녀에게 장가들려 하였다. 하루는 이웃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 이웃에 체격이 알맞은 진짜 절세 미녀가 있는데, 그대의 말을 그 여자에게 들려주면 흔연히 응할 것 같으나, 다만 재물을 매우 많이 달라고 할 것 같소.” 하니, 장님은, “만약 그렇다면 재산을 기울여 파산(破産)에 이를지언정 어찌 인색하게 하리요.” 하고 그의 아내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주머니와 상자를 찾아 재물을 모두 꺼내주고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만날 날이 되어 장님은 옷을 잘 차려 입고 나가고, 아내 역시 화장을 고치고 그의 뒤를 따라가서 먼저 방에 들어가 있으니, 장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배(再拜) 성례(成禮)하였다. 이날 밤에 자기 아내와 함께 동침하는데, 그 아기자기한 인정과 태도가 평상시와 달랐다. 장님은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오늘밤이 무슨 밤이기에 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는고. 만약에 음식에 비유하면, 그대는 웅번(熊膰 곰의 발바닥. 팔진미(八珍味)의 하나)이나 표태(豹胎 표범의 태(胎))와 같고, 우리 집사람은 명아주국이나 현미 밥과 같구나.” 하고 재물을 많이 주었다. 새벽이 되어 아내가 먼저 그의 집에 가서 이불을 안고 앉아 졸다가 장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묻기를, “어젯밤에는 어디서 주무셨소.” 하니 장님은, “아무 정승집에서 경(經)을 외다가 밤추위로 인하여 배탈이 났으니, 술을 걸러 약으로 쓰게 하오.” 하였다. 아내가 매우 꾸짖기를, “웅번ㆍ표태를 많이 먹고 명아국과 현미 밥으로 오장육부를 요란하게 하였으니 어찌 앓지 않을 수 있겠소.” 하니 장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제야 아내에게 속은 줄을 알았다. | ||
+ | ===장님의 처와 정을 통한 장님 친구=== | ||
+ | ○ 서울에 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젊은이와 벗하여 사이 좋게 지냈다. 젊은이가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길에서 나이 어린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그와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주인께서 잠시 별실(別室)을 빌려줄 수 없겠습니까.” 하니, 장님은 허락하여 주었다. 젊은이는 장님의 아내와 별실에 들어가 곡진하고 애틋한 정을 서로 나누는데, 장님이 창 밖을 돌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 빨리 가거라. 집사람이 와서 보면 이야말로 큰일이니 반드시 욕을 먹을 것이다.” 하였다. 조금 뒤 아내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그 새 어떤 손님 왔었소.” 하며 일부러 성낸 듯이 하니, 장님은,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정오쯤에 동쪽 마을의 신생(辛生)이 나를 찾아왔을 뿐이었소.” 하였다. | ||
+ | ===청파에 사는 두 사족과 기생=== | ||
+ | ○ 청파(靑坡 지금의 서울 청파동)에 부호한 사족(士族)인 심생(沈生)과 유생(柳生) 두 사람이 살았는데, 날마다 기생들 속에서 술에 빠져 살았다. 하루는 친한 벗 두어 명이 심생의 집에 모여 술을 마셨다. 심생에게는 노래와 춤을 잘하는 접연화(蝶戀花)라는 첩과 가야금 솜씨가 당시에 일인자였던 김복산(金卜山)이란 장님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불러 고아한 거문고와 청아한 노래로 무릎을 맞대어 서로 부르고 받고 하여 정회가 사무치고 흡족하였다. 밤중이 되어 좌중에서 누가 말하기를 “지난 일을 얘기하며 한바탕 웃어보자.” 하니, 모두, “그것 참 좋다.” 하고 손님들이 서로 우스운 얘기를 기탄 없이 하였다. 이때, 복산이, “나도 한마디 하리다. 요즈음 내가 어떤 집에 갔더니, 부잣집 자제라 또한 이름난 기생 두어 명이 있었는데, 자리가 파하자 모두 기생을 이끌고 방으로 갔는데, 그 중에 심방(心方)이란 계집이 노래를 잘하고 또 모(某)와 함께 잤소이다.” 하였다. 심생은, “그것 참 재미있는 일이다. 다시 얘기해 보아라.” 하였다. 그 자리 손님들이 모두, “가야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고 밤을 새울 것이지 하필 얘기만 할 것이냐.” 하였으나 기생도 또한 노래를 그쳐 모두 흥이 깨어져서 파하고 말았다. 문을 나와서 유생이 복산에게, “주인의 기생 이름이 심방인데 자네는 어찌 그런 미친 말을 했느냐.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눈먼 사람은 참으로 불쌍하다.” 하니, 복산은 실색하며, “다만 관명(官名)만 알고 아명(兒名)을 몰랐던 탓입니다. 무슨 낯으로 주인을 다시 보겠습니까.” 하였다. 이것이 이웃에 전파되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 ||
+ | ===어우동의 음사=== | ||
+ | ○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宗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의 아내가 된 뒤에도 태강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이쁜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 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모(某)는 나이가 젊고 모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또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방산수는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詩)를 지을 줄 알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었다. 하루는 방산수가 그녀의 집에 가니 그녀는 마침 봄놀이를 나가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만 소매 붉은 적삼만이 벽 위에 걸렸기에, 그는 시를 지어 쓰기를, | ||
+ | 물시계는 또옥또옥 야기가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 | ||
+ | 흰 구름 높은 달빛이 분명하도다 / 白雲高捲月分明 | ||
+ | 한가로운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아 있어 / 間房寂謐餘香在 | ||
+ | 이런 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 | ||
+ | 하였다. 그 외에 조관(朝官)ㆍ유생(儒生)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 의금부에서 그녀의 죄를 아뢰어 재추(宰樞)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법으로서 죽일 수는 없고 먼 곳으로 귀양보냄이 합당하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풍속을 바로잡자 하여 형(刑)에 처하게 하였는데, 옥에서 나오자 계집종이 수레에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하는 말이, “주인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번 일이 없었더라도 어찌 다시 이 일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가(良家)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 ||
+ | ===김사문과 기생 대중래의 연담=== | ||
+ | ○ 김 사문(金斯文 사문(斯文)은 유학자의 존칭)이 영남에 사신(使臣)으로 내려가 경주(慶州)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생 하나를 바치기에, 김이 데리고 불국사로 갔었는데, 기생은 나이가 어려서 남자와의 관계함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극력(極力) 김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밤중에 도망쳐 나왔는데, 그녀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러 하인(下人)들이 그녀가 짐승에게 잡혀 간것이나 아닌가 하여 이튿날 찾아보니 그녀는 맨발로 고을에 돌아가 있었다. 김은 뜻을 이루지 못함을 실망하고 밀양(密陽)에 도착하자 평사(評事) 김계온(金季昷)을 보고 그 사정을 말하니, 평사는, “내 기생의 동생으로 대중래(待重來)라는 애가 예쁜 모습에 성품이 그윽하고 조용하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중매해 주겠소.” 하였다. 하루는 부사(府使)가 영남루(嶺南樓) 위에서 잔치를 베풀어 기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좀 예쁘기에 김 사문이 물으니, 그녀가 바로 평사가 중매한다던 기생이었다. 김은 겉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나 마음은 늘 이 기생에게 있어서 상에 가득 찬 맛있는 안주도 먹기는 하여도 달지 않았다. 주인과 시객(侍客)이 모두 술잔을 바치기에 김이 일어나 잔을 권하자 평사가 그 기생을 시켜 잔을 받들어 바치게 하니, 김은 흔연히 웃으면서 의기양양한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이날 밤 그녀와 함께 망호대(望湖臺)에서 자고부터는 서로 정이 깊이 들어서 잠시도 떠나지 못하여, 대낮에도 문을 닫고 휘장을 치고서 이불을 쓰고 일어나지 않으니, 주인이 밥상을 가지고 와서 뵙고자 해도 서로 만나지 못한 지 여러 날이었다. 평사가 창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두 사람은 안고 누워 손발을 서로 꼬고 있을 뿐, 다른 말은 않고 오직, “나는 너를 원망한다.”고만 하였으며, 온몸에 써 있는 글자를 모두 서로 사랑을 맹세한 말이었다. 그 후 그는 여러 읍을 순력(巡歷)하였으나 마음은 항상 대중래에게 있었다. 하루는 사문(斯文) 윤담수(尹淡叟)와 김해(金海)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이야기하다가 장생(長栍)을 보면 반드시 하인으로 하여금 이수(里數)의 원근(遠近)을 자세히 보게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도 오히려 더디감을 의심하더니, 갑자기 펀펀한 들판이 아득한데, 어렴풋이 공간에 누각의 모습이 보였다 없어졌다 하니, 하인에게 묻기를, “이곳이 어딘가.” 하니, 하인은, “영남루입니다.” 하여 김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웃으니, 사문이 연구(聯句)를 짓기를, | ||
+ | 들녘은 넓은데 푸른 봉우리 가로질렀고 / 野闊橫靑峯 | ||
+ | 누각은 높아 흰 구름이 기대었네 / 樓高倚白雲 | ||
+ | 길가에 장승이 있으니 / 路傍長表在 | ||
+ | 응당 관문에 가까움을 기뻐하리로다 / 應喜近關門 | ||
+ | 하였다. 밀양에 도착하여 수십 일을 머무르니, 주인이 오래 있을 것을 염려하여 송별연을 누상(樓上)에서 베풀어 위로하니, 김은 부득이 행차하기로 하여 기생과 더불어 교외(郊外)에서 이별하였는데, 그는 기생의 손을 꼭 붙들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어느 역(驛)에 이르러 밤은 깊은데, 잠을 이루지 못하여 그는 뜰을 거닐다가 눈물을 흘리며 역졸(驛卒)에게, “내가 차라리 여기서 죽을지언정 이대로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네가 다시 한 번 대중래를 만나게 해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니 역졸이 불쌍히 여겨 그의 말을 따랐다. 밤중에 수십 리를 달려 날이 샐 무렵에 밀양에 도착했으나 부끄러워 부(府)에 들어가지 못하고, 은띠를 역졸에게 주고 흰옷 차림으로 울타리 길을 걸어가니, 우물에서 물긷는 노파가 있기에 김이, “동비(桐非 대중래의 아명)의 집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노파는 “저 다섯 번째 집이 그 집입니다.” 하였다. 김은 다시, “네가 나를 알겠느냐.” 하니 노파는 한참 쳐다보다가, “알겠소이다, 지난 가을에 방납(防納)의 일로 오셨던 어른이 아니십니까.” 하였다. 김이 돈주머니를 풀어 노파에게 주면서, “나는 방납수(防納叟)가 아니라 경차관(敬差官)이니, 나를 위하여 동비에게 가서 내가 온 것을 말하여라.” 하니 노파는, “동비는 지금쯤 본남편 박생(朴生)과 더불어 같이 자고 있을 것이니 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이, “내가 만나볼 수는 없더라도 소식만 들을 수 있다면 족하니, 네가 가서 내 뜻만 말해 주면 후히 보답하리라.” 하니 노파가 그 집에 이르러 분부대로 말하였다. 기생은 머리를 긁으며 말하기를, “딱한 일이다. 어찌 이렇게까지 할까.” 하니 박생이, “내가 그를 욕보일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는 선생이요 나는 한갓 유생이니, 후진으로서 선배를 욕보이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잠깐 피하리다.” 하고 숨어 버렸다. 김이 기생집에 들어가니 관사(官司)에서 이 일을 알고 몰래 찬과 쌀을 보내었다. 수일을 유숙하자 기생의 부모가 미워하여 내쫓으니, 두 사람은 대밭 속에 들어가서 서로 붙들고 울부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사람들이 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주었다. 기생을 데리고 가려 하는데 다만 말이 세 필뿐이므로 한 마리는 그가 타고 또 한 마리에는 이부자리와 농을 싣고, 나머지 한 마리에는 수종(隨從)하는 사람이 탔었는데, 결국 수종인의 말을 빼앗아 기생에게 화살을 메고 말을 타게 하고 수종인은 뒤로 따라 걷게 하니, 신이 무거워서 걸을 수가 없어 끈으로 신을 묶어서 말 목에다 걸었다. 역에 돌아와서는, 역졸이 모자와 띠를 섬돌에다 내동댕이치면서,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으나 이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그의 아내가 죽으니, 김은 관을 실어 중모(中牟)에 장사지내고 장차 밀양으로 향하려고 유천역(楡川驛 경북 청도역원(淸道驛院)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 ||
+ | 향기로운 바람이 산 위 매화에 부니 / 香風吹入嶺頭梅 | ||
+ | 꽃다운 소식은 이러하되 돌아오지 않음을 괴로워하도다 / 芳信如今苦未回 | ||
+ | 달빛이 희어 시냇물 20리에 어리었는데 / 月白凝川二十里 | ||
+ | 옥인은 어디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가 / 玉人何處待重來 | ||
+ | 하였다. 당시에 감사 김 상국(金相國)이 마침 그 기생을 사랑하다가 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주니 김이 서울로 데리고 갔다. 뒤에 김은 승지가 되어 벼슬이 높아지고 녹봉이 후해졌으며, 기생은 두 아들을 낳고 마침내 정실부인이 되었다. | ||
+ | ===남편감을 고른 처녀=== | ||
+ | ○ 옛날에 한 처녀가 있었는데 중매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이는 문장에 능하다 하고, 어떤 이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한다 하고, 어떤 이는 못가에 좋은 밭 수십 이랑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양기가 왕성하여 돌이 든 주머니를 거기에 매달고 휘두르면 머리를 넘긴다 하였다. 처녀가 시를 지어 그 뜻을 보이며 말하기를, | ||
+ | 문장이 활발하면 노고가 많고 / 文章闊發多勞苦 | ||
+ |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재능은 싸우다가 죽을 것이요 / 射御材能戰死亡 | ||
+ | 못가에 밭이 있으면 물로 손해를 볼 것이니 / 池下有田逢水損 | ||
+ | 돌이 든 주머니를 휘둘러 머리 위로 넘기는 것이 내 마음에 들도다 / 石囊踰首我心當 | ||
+ | 하였다. | ||
+ | ===경사 처의 외도=== | ||
+ | ○ 어떤 경사(經師)의 아내가 그의 남편이 외출한 사이에 이웃집 남자를 방에 맞아들여, 이제 막 서로 흥을 즐기는 찰나에 그 남편 때마침 돌아왔다. 아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으로 치마를 쥐고 남편의 눈을 가리려 뛰면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경사는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니, 남편은 아내가 자기에게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고 자기도 뛰면서 나아가 말하기를, “북택재신(北宅宰臣)의 장사를 치르고 오는 길이다.” 하였다. 아내가 치마로 남편의 머리를 싸안고 눕자 이웃 사람은 마침내 도망갔다. | ||
+ | ===중 신수와 노인이 한 여인과 동거함=== | ||
+ | ○ 신수(信修)라고 하는 중은 나의 향리 파주(坡州)에서 생장하여 낙수(洛水)의 남쪽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성품이 방탕하고 익살맞아서 말만 하면 포복절도(抱腹絶倒)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재물을 쓰는 데 인색하고 물건을 아끼는 법이 없어서 가산(家産)과 전지(田地)를 모두 여러 조카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보습과 호미로 밭갈지 아니하고도 여름에 항상 쌀밥을 먹었다. 중이 늙어서 얼굴이 탈바가지[假面] 같았는데, 머리를 흔들고 눈을 굴리며 16나한(羅漢 부처의 제자들)의 형상을 하되,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고, 또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 문득 그 모양을 시늉하며, 비록 평소 알지 못하던 높은 벼슬아치도 한번 보면 구면인 것같이 이름을 부르며 서로 너, 나 하였다. 절 앞에 사는 늙은이에게 젊은 아내가 있어 중이 그 여자와 더불어 서로 정을 통하였다. 늙은이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의 덕을 입고자 하여 아내를 데리고 절 속에 와서 붙여 살았는데, 중도 또한 늙은이를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많이 주었다. 세 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자되 서로 시기하지 아니하여 사내아이 하나와 계집애 하나를 낳았는데 중은, “노인의 자식이다.”하고 “노인은 또한 화상(和尙)의 자식이다.” 하였다. 중이 절에 있으면 노인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밭에서 채소를 가꾸었으며, 중이 만약 길을 떠나면 노인이 짐을 지고 그의 종이 되곤 하였다. 절에서 산 지 몇 해 만에 아내가 죽었는데, 여전히 중을 따라 살았으니 그 의(義)가 형제와 같았다. 노인이 죽자 중이 업고 가서 장사를 지내주었다. 중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엄청난 양의 술을 고래가 물마시듯 하였다. 사람들이 혹 속여서 심지어 쇠 오줌이나 흙탕물 같은 다른 것을 갖다주어도 한번에 쾌히 마시고 나선, “이 술은 아주 쓰다.” 하였다. 또 밥을 잘 먹어 마른 밥이나 단단한 떡이라도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잠깐 동안에 먹어 치웠다.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도 공공연히 어육(魚肉)을 먹었으므로 사람들이 보고 비웃으면, “이것은 토(土 오자(誤字)인 듯하다)이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닌데 먹는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였다. 경인(庚寅) 연간에 내가 상(喪)을 당해 파주에 있을 때 중이 항상 왕래하였는데, 나이가 70을 넘었는데도 기운은 여전히 정정하였다. 혹 어떤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느냐.”라고 물으면 중은 말하기를, “이 세상 사람은 망령되이 사념을 일으켜서 이욕(利慾)으로 서로 싸우며, 혹은 마음속에 포악함을 감추고 혹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저 이름난 출가자(出家者)들도 또한 모두 이와 같아, 향기로운 고기 냄새를 맡고서도 억지로 침을 삼키며,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흔들리는 마음을 힘써 바로잡는다. 나는 이와 달라 맛있는 것이 있으면 먹고 여색(女色)을 보면 취하기를 물이 쏟아지듯이 하며, 흙이 구덩이를 메우듯이 하여 물건에 마음이 없고 작은 사심도 모두 없앴으니, 내가 내세(來世)에 여래(如來)가 되지 못하면 반드시 나한(羅漢)이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제 재물을 아껴서 축적하는 데 힘쓰는데, 이 몸이 한번 죽으면 곧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니, 생전에 맛있는 음식 먹고 즐김만 같지 못하다. 대개 남의 자식이 되어 그 아비를 섬김에 있어서 모름지기 큰 떡을 만들고, 맑은 꿀 한 되와 빚은 술과, 썬 고기로 아침 저녁으로 올릴지니, 죽은 뒤에 마른 것과 마른 과일, 남은 술잔과 식은 불고기를 관 앞에 놓고 울며 제사지낸들 죽은 사람이 이를 먹겠느냐. 자네는 미처 이렇게 어버이를 섬기지 못했을지라도, 자네 자식에게는 이와 같이 하여 자네를 섬기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때로 밥을 앞에다 놓고 방울을 흔들어 경(經)을 외면서 스스로 혼을 부르기를, “신수(信修) 신수여, 죽어서 정토(淨土)에 태어나거라. 살아서는 비록 도리를 어기고 날뛰었으나 죽어선 마땅히 진실하여라.”하고, 곧 소리내어 크게 울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량하였다. 그후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는 주인에게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바랑을 메고 사라져버렸다. | ||
+ | ===정씨가 후처를 삼으려다 실패함=== | ||
+ | ○ 선비 정 모(鄭某)가 상처(喪妻)를 한 뒤, 남원에 부잣집 과부가 산다는 말을 듣고 배우자로 삼으려고 날을 가려 정혼하고, 정(鄭)이 먼저 군청에 이르러 예물을 갖추었는데, 과부가 계집종을 보내어 그 행동거지를 보게 하였다. 계집종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수염이 많은데다가 털모자까지 썼으니 늙은 병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과부가 말하기를, “내가 나이 젊은 장부(丈夫)를 얻어서 늘그막을 즐기고자 하였는데, 이런 늙은이를 어디다 쓰리오.” 하였다. 군청 관리들은 휘황하게 촛불을 켜들고 둘러싸서 과부 집으로 갔으나, 과부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정은 들어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되돌아갔다. 또 악관(樂官) 정 모가 만년에 또한 배우자를 잃은 뒤, 부잣집 여자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어느날 부잣집에 가보니, 그림 병풍을 치고 만당(滿堂)에 붉은 털요를 깔고 당중에다 비단요를 펴놓았다. 정이 자리에 나아가 스스로 계략을 잘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여자가 들여다보고 말하기를, “70살이 아니면 60살은 넘었으리라.”하고, 탄식하면서 좋지 않은 기색이 있었다. 밤을 틈타 여자의 방에 뛰어들어가니 여자가 정을 꾸짖기를, “어느 곳에 사는 늙은이가 내 방에 들어오는가. 용모가 복이 없을 뿐 아니라 말소리까지도 복이 없구나.”하고 밤중에 창을 열고 나가버리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뒤 어떤 유생이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 ||
+ | 어지럽게 욕탁(정교하는 것)하여 얼마나 기쁘게 날뛰었던고 / 粉粉浴啄幾騰讙 | ||
+ | 두 정의 풍류가 일반이로다 / 二鄭風流是一般 | ||
+ | 호연을 맺으려다가 도리어 악연을 맺었으니 / 欲作好緣還作惡 | ||
+ | 이렇게 되느니 홀아비 신세가 더 나은 것을 / 早知如此不如鰥 | ||
+ | 하였다. |
2020년 5월 22일 (금) 21:37 기준 최신판
목차
색(色)을 모르는 사람이 셋이 있다
○ 음식과 남녀는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 색(色)을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제안(齊安)은 무한히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되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마침내 부인과 마주앉지 않았고, 생원(生員) 한경기(韓景琦)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일찍이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으며, 만약 종년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固)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분변하지 못하였고, 또한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므로 자고는 그 후사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하고 운우(雲雨 남녀의 교정(交情))을 가르치려 하니, 그 아들은 놀라 상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뒤에는 붉게 단장하고 족두리한 여자만 보면 울면서 달아났다.
여승과 정을 통한 홍(洪)재상
○ 홍 재상(洪宰相)이 아직 현달하지 못한 때였다.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조그만 굴 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굴 속에는 집이 있고 17, 8세의 태도가 어여쁜 여승이 엄연히 홀로 앉아 있었다. 공이. “어째서 홀로 앉아 있느냐.” 물으니, 여승은, “세 여승과 같이 있사온데 두 여승은 양식을 빌리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침내 그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약속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그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여승은 이 말만 믿고 매양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날이 지나가도 나타나지 않자 마음에 병이 되어 죽었다. 공이 나중에 남방절도사가 되어 진영(鎭營)에 있을 때, 하루는 도마뱀[蜥蝪]과 같은 조그만 물건이 공의 이불을 지나가거늘 공은 아전에게 명하여 밖으로 내던지게 하자 아전은 죽여버렸는데, 다음날에도 조그만 뱀이 들어오거늘 아전은 또 죽여버렸다. 또 다음날에도 뱀이 다시 방에 들어오므로 비로소 전에 약속했던 여승의 빌미[神禍]인가 의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위세를 믿고 아주 없애버리려고 또 명하여 죽여버리게 하였더니 이 뒤로는 매일 오지 않은 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올 때마다 몸뚱이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다. 공은 영중(營中)에 있는 모든 군졸을 모아 모두 칼을 들고 사방을 둘러싸게 하였으나 구렁이는 여전히 포위를 뚫고 들어오므로 군졸도 들어오는 대로 다투어 찍어버리거나 장작불을 사면에 질러놓고 보기만 하면 다투어 불 속엘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은 밤이면 구렁이를 함 속에 넣어 방 안에 두고 낮에는 함 속에 넣어 변방을 순행할 때도 사람을 시켜 함을 짊어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그러나 공의 정신이 점점 쇠약해지고 얼굴빛도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과부와 밀회 하려다 봉변당한 중
○ 또, 어떤 상좌가 사승을 속이기를, “우리 집 이웃에 젊고 예쁜 과부가 있는데 항상 내게 말하기를, ‘절의 정원에 있는 감은 너의 스승이 혼자 먹느냐.’ 하기에, 나는, ‘스승이 어찌 혼자만 먹겠습니까. 매양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였더니, 그 과부는, ‘네가 내 말을 하고 좀 얻어 오너라. 나도 감이 먹고 싶다.’ 했습니다.” 하니, 중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네가 따서 갖다 주어라.” 하였다. 상좌가 모두 따다가 제 부모에게 갖다 주고는 중에게 가서, “여자가 매우 기뻐하며 맛있게 먹고는 다시 말하기를, ‘옥당(玉堂)에 차려놓은 흰 떡은 너의 스승이 혼자 먹느냐.’ 하기에, 내가, ‘스승이 어찌 혼자 먹겠습니까. 매양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였더니, 과부는, ‘네가 내 말을 하고 좀 얻어 오너라. 나도 먹고 싶다.’ 했습니다.” 하니, 중은, “만약 그렇다면 네가 거두어서 갖다 주어라.” 하므로, 상좌가 모두 거두어 제 부모에게 주고는 중에게 가서, “과부가 매우 기뻐하며 맛나게 먹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으로써 네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겠느냐.’ 하기에 내가, ‘우리 스승이 서로 만나보고 싶어합니다.’ 하니, 과부는 흔연히 허락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에는 친척과 종들이 많으니 스승이 오시는 것은 불가하고 내가 몸을 빼어 나가서 절에 가서 한 번 뵈옵겠다.’ 하므로, 내가 아무 날로 기약했습니다.” 하니, 중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 날짜가 되자 상좌를 보내어 가서 맞아 오게 하였더니, 상좌가 과부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폐(肺)를 앓는데 의사의 말이 부인의 신을 따뜻하게 하여 배를 다림질하면 낫는다 하니 한 짝만 얻어 갑시다.” 하니, 과부가 드디어 주었다. 상좌가 돌아와서 문 뒤에 숨어서 엿보니 중이 깨끗이 선실(禪室)을 쓸고 자리를 펴놓고 중얼거려 웃으며 하는 말이, “내가 여기에 앉고 여자는 여기 앉게 하고, 내가 밥을 권하고 여자가 먹으면 여자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서 서로 함께 즐기지.” 하였다. 상좌가 들어가서 신을 중 앞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모든 일이 끝장났습니다. 내가 과부를 청하여 문까지 이르렀다가 스승의 하는 소행을 보고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속였구나. 네 스승은 미친 사람이구나.’ 하고, 달아나므로 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하고, 다만 벗어 버리고 간 신 한 짝만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중이 머리를 숙이고 후회하며 하는 말이, “네가 내 입을 쳐라.” 하니, 상좌가 목침(木枕)으로 힘껏 쳐서 이빨이 다 부러졌다.
이장군과 과부, 파계승과 과부
○ 이장군(李將軍)이 있었는데, 젊고 훤칠하여 풍채가 옥과 같았다. 그가 하루는 말을 타고 큰길을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22, 3세쯤 되어 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계집종 두어 명을 거느리고 장님에게 점을 치고 있었다. 장군이 눈짓을 하니 그녀 또한 장군의 풍모를 사모하는 듯이 서로 눈을 떼지 않았다. 장군이 졸병에게 그녀의 가는 곳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녀는 점치기를 마치더니 말을 타고 계집종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들어가 사제동(沙堤洞)으로 향하였다. 그 집은 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큰 집이었다. 이튿날 장군이 사제동에 들어가서 여염집에 출입하다가, 마침 그 동네에 사는 활공장이[弓匠]를 만났다. 장군은 무인(武人)이라 이내 서로 사귀어 나날이 이야기하고 놀면서 동네의 모든 집에 관하여 물으니 활공장이는 일일이 말하여 주었다. 장군은 또 묻기를, “저 산 기슭에 있는 큰 집은 무슨 성씨(姓氏)요.” 하니, 활공장이는, “재상 모공(某公)의 딸인데, 요사이 과부가 된 집이 올시다.” 하였다. 그 뒤부터는 장군이 오가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과부가 사는 집을 물었다. 하루는 한 소녀가 와서 불을 얻어 갔는데, 활공장이가, “지금 온 소녀가 과부댁 사람이니 장군은 그리 아십시오.” 하였다. 이튿날 장군은 다시 활공장이를 찾아와서 사정을 말하고,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여 잊을 수 없으니, 만약 그대로 인하여 성사하게 되면 사생(死生)을 그대의 명령대로 하겠소이다.” 하였다. 활공장이가 그 소녀를 불러 장군의 말을 전하고 돈과 옷감을 주었더니 소녀가 드디어 승낙하였다. 장군이 소녀에게 말하기를, “너를 매우 사랑하지만 일단 정회(情懷)가 있으니, 네가 내 청원을 들어주면 후하게 사례할 뿐만 아니라 너의 살림을 맡아 주겠다.” 하니, 소녀가, “말씀해 보십시오.” 하였다. 장군이, “요전에 내가 네 주인을 길에서 본 뒤로는 마음이 황홀하여 입맛을 잃었다.” 하니, 소녀가, “그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였다. 장군이, “어떻게 하느냐.” 하니, 소녀는 “내일 저물녘에 우리집 문 밖으로 오시면 제가 나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였다. 장군이 약속한 대로 가니 소녀는 반가이 나와 맞이하여 제 방에 들이고 경계하기를, “서두르지 마시고 참고 기다리십시오.” 하며,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장군이 두려워서 그 소녀에게 속지나 않았나 의심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안채에서 등불이 켜지고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주인 여자가 변소에 가는 모양이었다. 이때 그 소녀가 내려와서 장군을 끼고 들어가 안방에 있게 하고 다시 경계하기를, “참고 참으십시오. 참지 않으면 계획이 깨어질 것입니다.” 하므로, 장군은 캄캄한 방에 들어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등불이 켜지고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들어왔는데, 계집종이 물러가자 주인 여자는 적삼을 벗고 낯을 씻고 분(粉)을 바르니 얼굴이 옥(玉)처럼 깨끗하였다. 장군은 생각하기를, “나를 맞으려나보다.” 하였더니,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 동(銅)화로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우며 술을 은주전자에 덥히기에 장군은, “내게 먹이려나보다.” 생각하고, 나가려 하다가 문득 그 소녀의 참으라고 한 말을 생각하여 적이 앉아 기다렸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창문에 모래를 끼얹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한 거만한 사나이를 맞아들였다. 그 사나이는 들어서자마자 선뜻 주인 여자를 껴안고 희롱하므로, 장군은 섬찟하여 나가려고 하였으나 도리가 없어 그냥 있으니, 조금 후에 그 사나이는 주인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다가 모자를 벗었는데, 늠름한 까까중이었다. 장군은 그를 제지하리라 생각하고 방 속을 더듬어 긴 노끈 한 움큼을 쥐고 있다가, 중이 주인 여자와 함께 누울 때 장군이 돌출하여 노끈으로 중을 기둥에 묶어놓고 몽둥이로 마구 치니 중은 한없이 슬프게 부르짖었다. 그런 뒤 장군은 주인 여자와 한 번 즐기고 중에게 말하기를, “군중(軍中)의 신례(新禮)를 행하려 하니 네가 장만할 수 있겠느냐.” 하니, 중이,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고, 신례(新禮)의 잔치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 뒤로 장군은 과부집에 자주 왕래하고 과부 역시 장군을 사랑하여 여러 해가 되어도 변하지 않았었다.
보광사 중이 죽은 뒤 뱀이 되어 아내와 동거함
○ 나의 장인 안공(安公)이 임천(林川 부여(扶餘)) 군수가 되었을 때, 보광사(普光寺)에 대선사(大禪師) 아무개란 중이 있어 자주 와 뵈었다. 그 사람됨이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므로 서로 친숙하였다. 그 중은 시골 여자를 데려다 아내로 삼고 몰래 왕래하였다. 어느 날 그 중이 죽어서 뱀으로 변해 아내의 방에 들어와서, 낮에는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밤이면 아내의 품에 들어가 그녀의 허리를 감고 머리는 가슴에 기대었는데, 꼬리 사이에 음경과 같은 혹이 있어서 그 곡진하고 정다움이 마치 전날과 같았다. 나의 장인이 이 얘기를 듣고 그 여인에게 뱀이 든 항아리를 가져 오게 하여 중의 이름을 부르니 뱀이 머리를 내밀었다. 장인이 꾸짖기를, “아내를 그리워하여 뱀이 되었으니 중의 도(道)가 과연 이와 같으냐.” 하니, 뱀이 머리를 움츠리고 들어갔다. 나의 장인은 몰래 사람을 시켜 조그만 함을 만들게 하고 그 아내에게 뱀을 꾀어 말하게 하기를, “군수님이 그대에게 새 함을 주어 몸을 편안하게 하여 줄 것이니 빨리 나와요.” 하며, 치마를 함 속에 펴주니 뱀이 항아리에서 나와 함 속에 옮겨 누우므로, 건강한 아전 두어 명이 뚜껑을 덮고 못을 박으니, 뱀이 날뛰고 뒹굴며 나오려 했으나 나오지 못하였다. 또 명정(名旌)에 중의 이름을 써서 앞을 인도하고, 중의 무리 수십 명이 북과 바리때를 울리고 불경을 외며 따라가서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그 후 그 아내는 아무 탈이 없었다.
안생의 여인 탐색
○ 안생(安生)이란 사람은 경화거족(京華巨族)이었다. 이름은 학궁(學宮 성균관)에 걸어 두었으나,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복장으로 장안을 돌아다녔다. 일찍 상처하고 혼자 살았는데, 당시 정승의 계집종으로 돈이 많은 미인이 동성(東城)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재물로써 빙폐(聘幣)를 들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안생이 병이 났으므로 중매하는 사람이 상사병이라 하여 그 여자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혼인하였다. 여자는 17, 8세쯤 되었는데 얼굴과 태도가 매우 아름다워 서로 간곡한 정다움이 날로 깊어갔다. 한편 안생의 나이가 젊고 풍채가 아름다운 것을 이웃이 사모하고, 그 여인의 집에서도 또 좋은 사위를 얻었음을 기뻐하여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성찬(盛饌)을 차리고 집안 재산도 태반이 안씨에게로 돌아갔다. 여러 사위들이 샘을 내어 정승에게 가서 호소하기를, “우리 장인이 새 사위를 얻은 이래로 집안이 기울어지고 파산하여 점점 어려워집니다.” 하니 정승은 노하여 말하기를, “내 뜻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양가(良家)의 사위를 얻었으니, 내가 크게 징계하여 이로써 후인(後人)을 경계하리라.” 하고, 곧 미치광이 종놈 몇 명을 시켜서, 가서 안생의 장인과 아내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때 안생은 아내와 함께 밥상을 대하였다가 황겁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두 손을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한 번 붙들려 간 후로는 깊은 궁(宮)에 갇히어 겹문과 높은 담으로 인하여 안팎이 서로 떨어지니, 안생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오직 처가의 사람들과 더불어 돈과 베를 내어 궁중(宮中)의 종들과 문지기 졸병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고, 밤을 틈타서 담을 넘어 상종(相從)하고 조그마한 점방[小店]을 궁 옆에 사서 왕래하는 곳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자 집에서 붉은 신 한켤레를 보내오니 아내가 늘 갖고 놀기에, 안생이 희롱하기를, “이런 좋은 신을 신고 장차 다른 사람과 즐기려 하오.” 하니, 여자는 얼굴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서로 약속한 말이 똑똑히 눈앞에 있는데, 임자는 어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곧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신 한짝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또 어느 날 흰 적삼을 바느질하기에, 안생이 역시 전날처럼 희롱하니 여자는 낯을 가리고 울며 말하기를, “내가 임자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임자가 나를 배반하였습니다.” 하고, 적삼을 더러운 개천에 던지니, 안생은 그 절조에 심복(心服)하여 사랑함이 더욱 깊었다. 이로부터 저녁에 가서 새벽에 돌아오곤 하여 이런 생활이 여러 달 계속되었는데, 정승이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여 여자를 아내가 없는 하인에게 시집가라 하니, 여자는 곧 흔연히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어찌 수절(守節)하겠는가.” 하고, 시집갈 도구를 친히 준비하며 궁인(宮人)을 모두 불러서 성찬을 만들어 먹이니, 사람마다 모두 그가 개가(改嫁)한다고 생각하고, 혹은 그의 이랬다 저랬다 하여 믿음성이 없음을 미워하였는데, 그 여자는 이날 저녁에 가만히 딴 방에 들어가 목매어 죽었으나 안생은 몰랐었다. 이튿날 안생은 본가에 있었는데 예쁜 젊은 여자가 들어와 “낭자가 왔소이다.” 하기에 안생은, 신을 거꾸로 신고 문 밖에 나가니 예쁜 여자가 급히 말하기를, “낭자가 어젯밤에 죽었소이다.” 하였다. 안생은 웃으며 믿지 않았다. 그 까닭도 묻지 않고 점방에 이르니, 당중(堂中)에 평상을 놓고 옷과 이불로 시체를 덮었거늘, 안생은 목놓아 통곡하며 주저앉아 가슴을 치니 온 이웃에서 이 소리를 듣고 흐느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큰 비가 오고 물이 넘쳐서 사람이 동성집에 통행하지 못하여, 안생이 몸소 상구(喪具)를 갖추어 빈소를 차려 두고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배설하며 눈을 붙이지 아니하다가 밤이 깊어서 옷을 입은 채 잠깐 자는데, 여자가 평소의 모습으로 밖에서 들어왔다. 안생이 나아가 더불어 이야기하려 하다가 갑자기 깨어 방 안을 둘러보니, 창문은 적적하고 바람은 문풍지를 걷어올렸는데, 외로운 등불만 명멸(明滅)할 뿐이었다. 생은 울부짖고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였더니, 사흘이 지난 뒤에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개므로 안생은 달빛을 받으며 본가로 향하여 홀로 발 가는 대로 걸어 수강궁(壽康宮) 동문에 이르니, 밤은 이미 이경(二更)인데 화장하고 머리를 크게 쪽지어 올린 여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생을 따라오므로 그가 따라가 보니, 기침하고 탄식하는 것이 모두 전날에 듣던 소리와 같았다. 그는 크게 부르며 달려가서 한 도랑에 이르니 여자가 또 그 옆에 앉았다. 안생은 돌아보지 않고 그의 집에 이르렀더니 여자는 또 문 밖에 섰기에 그가 큰 소리로 종을 부르니, 여자는 모탕(나무를 쪼개거나 쇠를 단련할 때 밑에 받히는 받침)에 몸을 감추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생은 심신이 흐리멍텅하여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치광이 같기도 하더니, 달포가 지난 뒤에 정중한 예(禮)로 아내의 장사를 지낸 다음 얼마 안 가서 그도 역시 죽었다.
장님 남편을 속인 처
○ 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이웃 사람에게 부탁하여 미녀에게 장가들려 하였다. 하루는 이웃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 이웃에 체격이 알맞은 진짜 절세 미녀가 있는데, 그대의 말을 그 여자에게 들려주면 흔연히 응할 것 같으나, 다만 재물을 매우 많이 달라고 할 것 같소.” 하니, 장님은, “만약 그렇다면 재산을 기울여 파산(破産)에 이를지언정 어찌 인색하게 하리요.” 하고 그의 아내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주머니와 상자를 찾아 재물을 모두 꺼내주고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만날 날이 되어 장님은 옷을 잘 차려 입고 나가고, 아내 역시 화장을 고치고 그의 뒤를 따라가서 먼저 방에 들어가 있으니, 장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배(再拜) 성례(成禮)하였다. 이날 밤에 자기 아내와 함께 동침하는데, 그 아기자기한 인정과 태도가 평상시와 달랐다. 장님은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오늘밤이 무슨 밤이기에 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는고. 만약에 음식에 비유하면, 그대는 웅번(熊膰 곰의 발바닥. 팔진미(八珍味)의 하나)이나 표태(豹胎 표범의 태(胎))와 같고, 우리 집사람은 명아주국이나 현미 밥과 같구나.” 하고 재물을 많이 주었다. 새벽이 되어 아내가 먼저 그의 집에 가서 이불을 안고 앉아 졸다가 장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묻기를, “어젯밤에는 어디서 주무셨소.” 하니 장님은, “아무 정승집에서 경(經)을 외다가 밤추위로 인하여 배탈이 났으니, 술을 걸러 약으로 쓰게 하오.” 하였다. 아내가 매우 꾸짖기를, “웅번ㆍ표태를 많이 먹고 명아국과 현미 밥으로 오장육부를 요란하게 하였으니 어찌 앓지 않을 수 있겠소.” 하니 장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제야 아내에게 속은 줄을 알았다.
장님의 처와 정을 통한 장님 친구
○ 서울에 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젊은이와 벗하여 사이 좋게 지냈다. 젊은이가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길에서 나이 어린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그와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주인께서 잠시 별실(別室)을 빌려줄 수 없겠습니까.” 하니, 장님은 허락하여 주었다. 젊은이는 장님의 아내와 별실에 들어가 곡진하고 애틋한 정을 서로 나누는데, 장님이 창 밖을 돌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 빨리 가거라. 집사람이 와서 보면 이야말로 큰일이니 반드시 욕을 먹을 것이다.” 하였다. 조금 뒤 아내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그 새 어떤 손님 왔었소.” 하며 일부러 성낸 듯이 하니, 장님은,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정오쯤에 동쪽 마을의 신생(辛生)이 나를 찾아왔을 뿐이었소.” 하였다.
청파에 사는 두 사족과 기생
○ 청파(靑坡 지금의 서울 청파동)에 부호한 사족(士族)인 심생(沈生)과 유생(柳生) 두 사람이 살았는데, 날마다 기생들 속에서 술에 빠져 살았다. 하루는 친한 벗 두어 명이 심생의 집에 모여 술을 마셨다. 심생에게는 노래와 춤을 잘하는 접연화(蝶戀花)라는 첩과 가야금 솜씨가 당시에 일인자였던 김복산(金卜山)이란 장님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불러 고아한 거문고와 청아한 노래로 무릎을 맞대어 서로 부르고 받고 하여 정회가 사무치고 흡족하였다. 밤중이 되어 좌중에서 누가 말하기를 “지난 일을 얘기하며 한바탕 웃어보자.” 하니, 모두, “그것 참 좋다.” 하고 손님들이 서로 우스운 얘기를 기탄 없이 하였다. 이때, 복산이, “나도 한마디 하리다. 요즈음 내가 어떤 집에 갔더니, 부잣집 자제라 또한 이름난 기생 두어 명이 있었는데, 자리가 파하자 모두 기생을 이끌고 방으로 갔는데, 그 중에 심방(心方)이란 계집이 노래를 잘하고 또 모(某)와 함께 잤소이다.” 하였다. 심생은, “그것 참 재미있는 일이다. 다시 얘기해 보아라.” 하였다. 그 자리 손님들이 모두, “가야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고 밤을 새울 것이지 하필 얘기만 할 것이냐.” 하였으나 기생도 또한 노래를 그쳐 모두 흥이 깨어져서 파하고 말았다. 문을 나와서 유생이 복산에게, “주인의 기생 이름이 심방인데 자네는 어찌 그런 미친 말을 했느냐.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눈먼 사람은 참으로 불쌍하다.” 하니, 복산은 실색하며, “다만 관명(官名)만 알고 아명(兒名)을 몰랐던 탓입니다. 무슨 낯으로 주인을 다시 보겠습니까.” 하였다. 이것이 이웃에 전파되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우동의 음사
○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宗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의 아내가 된 뒤에도 태강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이쁜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 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모(某)는 나이가 젊고 모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또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방산수는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詩)를 지을 줄 알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었다. 하루는 방산수가 그녀의 집에 가니 그녀는 마침 봄놀이를 나가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만 소매 붉은 적삼만이 벽 위에 걸렸기에, 그는 시를 지어 쓰기를, 물시계는 또옥또옥 야기가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높은 달빛이 분명하도다 / 白雲高捲月分明 한가로운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아 있어 / 間房寂謐餘香在 이런 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 하였다. 그 외에 조관(朝官)ㆍ유생(儒生)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 의금부에서 그녀의 죄를 아뢰어 재추(宰樞)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법으로서 죽일 수는 없고 먼 곳으로 귀양보냄이 합당하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풍속을 바로잡자 하여 형(刑)에 처하게 하였는데, 옥에서 나오자 계집종이 수레에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하는 말이, “주인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번 일이 없었더라도 어찌 다시 이 일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가(良家)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김사문과 기생 대중래의 연담
○ 김 사문(金斯文 사문(斯文)은 유학자의 존칭)이 영남에 사신(使臣)으로 내려가 경주(慶州)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생 하나를 바치기에, 김이 데리고 불국사로 갔었는데, 기생은 나이가 어려서 남자와의 관계함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극력(極力) 김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밤중에 도망쳐 나왔는데, 그녀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러 하인(下人)들이 그녀가 짐승에게 잡혀 간것이나 아닌가 하여 이튿날 찾아보니 그녀는 맨발로 고을에 돌아가 있었다. 김은 뜻을 이루지 못함을 실망하고 밀양(密陽)에 도착하자 평사(評事) 김계온(金季昷)을 보고 그 사정을 말하니, 평사는, “내 기생의 동생으로 대중래(待重來)라는 애가 예쁜 모습에 성품이 그윽하고 조용하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중매해 주겠소.” 하였다. 하루는 부사(府使)가 영남루(嶺南樓) 위에서 잔치를 베풀어 기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좀 예쁘기에 김 사문이 물으니, 그녀가 바로 평사가 중매한다던 기생이었다. 김은 겉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나 마음은 늘 이 기생에게 있어서 상에 가득 찬 맛있는 안주도 먹기는 하여도 달지 않았다. 주인과 시객(侍客)이 모두 술잔을 바치기에 김이 일어나 잔을 권하자 평사가 그 기생을 시켜 잔을 받들어 바치게 하니, 김은 흔연히 웃으면서 의기양양한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이날 밤 그녀와 함께 망호대(望湖臺)에서 자고부터는 서로 정이 깊이 들어서 잠시도 떠나지 못하여, 대낮에도 문을 닫고 휘장을 치고서 이불을 쓰고 일어나지 않으니, 주인이 밥상을 가지고 와서 뵙고자 해도 서로 만나지 못한 지 여러 날이었다. 평사가 창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두 사람은 안고 누워 손발을 서로 꼬고 있을 뿐, 다른 말은 않고 오직, “나는 너를 원망한다.”고만 하였으며, 온몸에 써 있는 글자를 모두 서로 사랑을 맹세한 말이었다. 그 후 그는 여러 읍을 순력(巡歷)하였으나 마음은 항상 대중래에게 있었다. 하루는 사문(斯文) 윤담수(尹淡叟)와 김해(金海)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이야기하다가 장생(長栍)을 보면 반드시 하인으로 하여금 이수(里數)의 원근(遠近)을 자세히 보게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도 오히려 더디감을 의심하더니, 갑자기 펀펀한 들판이 아득한데, 어렴풋이 공간에 누각의 모습이 보였다 없어졌다 하니, 하인에게 묻기를, “이곳이 어딘가.” 하니, 하인은, “영남루입니다.” 하여 김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웃으니, 사문이 연구(聯句)를 짓기를, 들녘은 넓은데 푸른 봉우리 가로질렀고 / 野闊橫靑峯 누각은 높아 흰 구름이 기대었네 / 樓高倚白雲 길가에 장승이 있으니 / 路傍長表在 응당 관문에 가까움을 기뻐하리로다 / 應喜近關門 하였다. 밀양에 도착하여 수십 일을 머무르니, 주인이 오래 있을 것을 염려하여 송별연을 누상(樓上)에서 베풀어 위로하니, 김은 부득이 행차하기로 하여 기생과 더불어 교외(郊外)에서 이별하였는데, 그는 기생의 손을 꼭 붙들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어느 역(驛)에 이르러 밤은 깊은데, 잠을 이루지 못하여 그는 뜰을 거닐다가 눈물을 흘리며 역졸(驛卒)에게, “내가 차라리 여기서 죽을지언정 이대로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네가 다시 한 번 대중래를 만나게 해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니 역졸이 불쌍히 여겨 그의 말을 따랐다. 밤중에 수십 리를 달려 날이 샐 무렵에 밀양에 도착했으나 부끄러워 부(府)에 들어가지 못하고, 은띠를 역졸에게 주고 흰옷 차림으로 울타리 길을 걸어가니, 우물에서 물긷는 노파가 있기에 김이, “동비(桐非 대중래의 아명)의 집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노파는 “저 다섯 번째 집이 그 집입니다.” 하였다. 김은 다시, “네가 나를 알겠느냐.” 하니 노파는 한참 쳐다보다가, “알겠소이다, 지난 가을에 방납(防納)의 일로 오셨던 어른이 아니십니까.” 하였다. 김이 돈주머니를 풀어 노파에게 주면서, “나는 방납수(防納叟)가 아니라 경차관(敬差官)이니, 나를 위하여 동비에게 가서 내가 온 것을 말하여라.” 하니 노파는, “동비는 지금쯤 본남편 박생(朴生)과 더불어 같이 자고 있을 것이니 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이, “내가 만나볼 수는 없더라도 소식만 들을 수 있다면 족하니, 네가 가서 내 뜻만 말해 주면 후히 보답하리라.” 하니 노파가 그 집에 이르러 분부대로 말하였다. 기생은 머리를 긁으며 말하기를, “딱한 일이다. 어찌 이렇게까지 할까.” 하니 박생이, “내가 그를 욕보일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는 선생이요 나는 한갓 유생이니, 후진으로서 선배를 욕보이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잠깐 피하리다.” 하고 숨어 버렸다. 김이 기생집에 들어가니 관사(官司)에서 이 일을 알고 몰래 찬과 쌀을 보내었다. 수일을 유숙하자 기생의 부모가 미워하여 내쫓으니, 두 사람은 대밭 속에 들어가서 서로 붙들고 울부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사람들이 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주었다. 기생을 데리고 가려 하는데 다만 말이 세 필뿐이므로 한 마리는 그가 타고 또 한 마리에는 이부자리와 농을 싣고, 나머지 한 마리에는 수종(隨從)하는 사람이 탔었는데, 결국 수종인의 말을 빼앗아 기생에게 화살을 메고 말을 타게 하고 수종인은 뒤로 따라 걷게 하니, 신이 무거워서 걸을 수가 없어 끈으로 신을 묶어서 말 목에다 걸었다. 역에 돌아와서는, 역졸이 모자와 띠를 섬돌에다 내동댕이치면서,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으나 이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그의 아내가 죽으니, 김은 관을 실어 중모(中牟)에 장사지내고 장차 밀양으로 향하려고 유천역(楡川驛 경북 청도역원(淸道驛院)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향기로운 바람이 산 위 매화에 부니 / 香風吹入嶺頭梅 꽃다운 소식은 이러하되 돌아오지 않음을 괴로워하도다 / 芳信如今苦未回 달빛이 희어 시냇물 20리에 어리었는데 / 月白凝川二十里 옥인은 어디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가 / 玉人何處待重來 하였다. 당시에 감사 김 상국(金相國)이 마침 그 기생을 사랑하다가 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주니 김이 서울로 데리고 갔다. 뒤에 김은 승지가 되어 벼슬이 높아지고 녹봉이 후해졌으며, 기생은 두 아들을 낳고 마침내 정실부인이 되었다.
남편감을 고른 처녀
○ 옛날에 한 처녀가 있었는데 중매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이는 문장에 능하다 하고, 어떤 이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한다 하고, 어떤 이는 못가에 좋은 밭 수십 이랑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양기가 왕성하여 돌이 든 주머니를 거기에 매달고 휘두르면 머리를 넘긴다 하였다. 처녀가 시를 지어 그 뜻을 보이며 말하기를, 문장이 활발하면 노고가 많고 / 文章闊發多勞苦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재능은 싸우다가 죽을 것이요 / 射御材能戰死亡 못가에 밭이 있으면 물로 손해를 볼 것이니 / 池下有田逢水損 돌이 든 주머니를 휘둘러 머리 위로 넘기는 것이 내 마음에 들도다 / 石囊踰首我心當 하였다.
경사 처의 외도
○ 어떤 경사(經師)의 아내가 그의 남편이 외출한 사이에 이웃집 남자를 방에 맞아들여, 이제 막 서로 흥을 즐기는 찰나에 그 남편 때마침 돌아왔다. 아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으로 치마를 쥐고 남편의 눈을 가리려 뛰면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경사는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니, 남편은 아내가 자기에게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고 자기도 뛰면서 나아가 말하기를, “북택재신(北宅宰臣)의 장사를 치르고 오는 길이다.” 하였다. 아내가 치마로 남편의 머리를 싸안고 눕자 이웃 사람은 마침내 도망갔다.
중 신수와 노인이 한 여인과 동거함
○ 신수(信修)라고 하는 중은 나의 향리 파주(坡州)에서 생장하여 낙수(洛水)의 남쪽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성품이 방탕하고 익살맞아서 말만 하면 포복절도(抱腹絶倒)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재물을 쓰는 데 인색하고 물건을 아끼는 법이 없어서 가산(家産)과 전지(田地)를 모두 여러 조카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보습과 호미로 밭갈지 아니하고도 여름에 항상 쌀밥을 먹었다. 중이 늙어서 얼굴이 탈바가지[假面] 같았는데, 머리를 흔들고 눈을 굴리며 16나한(羅漢 부처의 제자들)의 형상을 하되,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고, 또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 문득 그 모양을 시늉하며, 비록 평소 알지 못하던 높은 벼슬아치도 한번 보면 구면인 것같이 이름을 부르며 서로 너, 나 하였다. 절 앞에 사는 늙은이에게 젊은 아내가 있어 중이 그 여자와 더불어 서로 정을 통하였다. 늙은이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의 덕을 입고자 하여 아내를 데리고 절 속에 와서 붙여 살았는데, 중도 또한 늙은이를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많이 주었다. 세 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자되 서로 시기하지 아니하여 사내아이 하나와 계집애 하나를 낳았는데 중은, “노인의 자식이다.”하고 “노인은 또한 화상(和尙)의 자식이다.” 하였다. 중이 절에 있으면 노인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밭에서 채소를 가꾸었으며, 중이 만약 길을 떠나면 노인이 짐을 지고 그의 종이 되곤 하였다. 절에서 산 지 몇 해 만에 아내가 죽었는데, 여전히 중을 따라 살았으니 그 의(義)가 형제와 같았다. 노인이 죽자 중이 업고 가서 장사를 지내주었다. 중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엄청난 양의 술을 고래가 물마시듯 하였다. 사람들이 혹 속여서 심지어 쇠 오줌이나 흙탕물 같은 다른 것을 갖다주어도 한번에 쾌히 마시고 나선, “이 술은 아주 쓰다.” 하였다. 또 밥을 잘 먹어 마른 밥이나 단단한 떡이라도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잠깐 동안에 먹어 치웠다.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도 공공연히 어육(魚肉)을 먹었으므로 사람들이 보고 비웃으면, “이것은 토(土 오자(誤字)인 듯하다)이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닌데 먹는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였다. 경인(庚寅) 연간에 내가 상(喪)을 당해 파주에 있을 때 중이 항상 왕래하였는데, 나이가 70을 넘었는데도 기운은 여전히 정정하였다. 혹 어떤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느냐.”라고 물으면 중은 말하기를, “이 세상 사람은 망령되이 사념을 일으켜서 이욕(利慾)으로 서로 싸우며, 혹은 마음속에 포악함을 감추고 혹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저 이름난 출가자(出家者)들도 또한 모두 이와 같아, 향기로운 고기 냄새를 맡고서도 억지로 침을 삼키며,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흔들리는 마음을 힘써 바로잡는다. 나는 이와 달라 맛있는 것이 있으면 먹고 여색(女色)을 보면 취하기를 물이 쏟아지듯이 하며, 흙이 구덩이를 메우듯이 하여 물건에 마음이 없고 작은 사심도 모두 없앴으니, 내가 내세(來世)에 여래(如來)가 되지 못하면 반드시 나한(羅漢)이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제 재물을 아껴서 축적하는 데 힘쓰는데, 이 몸이 한번 죽으면 곧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니, 생전에 맛있는 음식 먹고 즐김만 같지 못하다. 대개 남의 자식이 되어 그 아비를 섬김에 있어서 모름지기 큰 떡을 만들고, 맑은 꿀 한 되와 빚은 술과, 썬 고기로 아침 저녁으로 올릴지니, 죽은 뒤에 마른 것과 마른 과일, 남은 술잔과 식은 불고기를 관 앞에 놓고 울며 제사지낸들 죽은 사람이 이를 먹겠느냐. 자네는 미처 이렇게 어버이를 섬기지 못했을지라도, 자네 자식에게는 이와 같이 하여 자네를 섬기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때로 밥을 앞에다 놓고 방울을 흔들어 경(經)을 외면서 스스로 혼을 부르기를, “신수(信修) 신수여, 죽어서 정토(淨土)에 태어나거라. 살아서는 비록 도리를 어기고 날뛰었으나 죽어선 마땅히 진실하여라.”하고, 곧 소리내어 크게 울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량하였다. 그후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는 주인에게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바랑을 메고 사라져버렸다.
정씨가 후처를 삼으려다 실패함
○ 선비 정 모(鄭某)가 상처(喪妻)를 한 뒤, 남원에 부잣집 과부가 산다는 말을 듣고 배우자로 삼으려고 날을 가려 정혼하고, 정(鄭)이 먼저 군청에 이르러 예물을 갖추었는데, 과부가 계집종을 보내어 그 행동거지를 보게 하였다. 계집종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수염이 많은데다가 털모자까지 썼으니 늙은 병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과부가 말하기를, “내가 나이 젊은 장부(丈夫)를 얻어서 늘그막을 즐기고자 하였는데, 이런 늙은이를 어디다 쓰리오.” 하였다. 군청 관리들은 휘황하게 촛불을 켜들고 둘러싸서 과부 집으로 갔으나, 과부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정은 들어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되돌아갔다. 또 악관(樂官) 정 모가 만년에 또한 배우자를 잃은 뒤, 부잣집 여자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어느날 부잣집에 가보니, 그림 병풍을 치고 만당(滿堂)에 붉은 털요를 깔고 당중에다 비단요를 펴놓았다. 정이 자리에 나아가 스스로 계략을 잘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여자가 들여다보고 말하기를, “70살이 아니면 60살은 넘었으리라.”하고, 탄식하면서 좋지 않은 기색이 있었다. 밤을 틈타 여자의 방에 뛰어들어가니 여자가 정을 꾸짖기를, “어느 곳에 사는 늙은이가 내 방에 들어오는가. 용모가 복이 없을 뿐 아니라 말소리까지도 복이 없구나.”하고 밤중에 창을 열고 나가버리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뒤 어떤 유생이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어지럽게 욕탁(정교하는 것)하여 얼마나 기쁘게 날뛰었던고 / 粉粉浴啄幾騰讙 두 정의 풍류가 일반이로다 / 二鄭風流是一般 호연을 맺으려다가 도리어 악연을 맺었으니 / 欲作好緣還作惡 이렇게 되느니 홀아비 신세가 더 나은 것을 / 早知如此不如鰥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