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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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六日, 漂大洋中, 是日陰, 風波少歇, 始督仇迴等尊片席以為帆, 建施竿以為橋, 劈舊橋之本以為, 隨風西向而去, 顧見洪濤間有物, 不知其大也, 其見於水上者, 如長屋廊, 噴沫射天, 波籬浪駭, 稍工戒舟人, 搖手合勿語, 舟過甚遠, 然後稍工呼曰:“彼乃鯨也,大則吞航,小能覆舟,今幸不相值,我其更生更生矣.”入夜,風濤還勁,舟行甚疾,安義曰:“嘗聞海有龍神甚食,請投行李有物,以讓謝之,臣不之應,舟人皆曰:“人有此身,然後有此物,此物皆身外物,”爭檢有染衣服、軍器、鐵器、口粮等物,投諸海,臣亦莫之能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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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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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날은 흐렸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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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랑이 조금 수그러들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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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로소 구질회 등을 독려하여 조각이 난 돗자리를 기워서 돛을 만들고, 상앗대를 세워서 돛대를 만들고, 그 돛대의 밑둥을 잘라서 닻을 만들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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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을 따라 서쪽을 향하여 가는데, 살펴보니 큰 파도 사이에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물 위에 드러난 것만 해도 기다란 행랑채와 같고, 거품을 뿜어 내어 하늘에 솟구치는데 물결이 뒤집어지는 것이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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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공이 배 안의 사람들에게 경계하며 손을 흔들어 말을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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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가 멀리 지나간 후에야 사공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저것이 바로 고래[1][2][3][4][5]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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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것은 배를 삼키고 작은 것도 배를 뒤엎을 수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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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다행히 서로 마주치지 않아서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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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이 되자 풍랑이 다시 강해지므로 배가 가는 속도가 매우________________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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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th Day. Adrift in the Open Ocean. This day was cloudy. The wind and waves were a little calmer. First I directed Kujilhoe and others to repair the ripped mats for a sail, erect the mizzen for a mast, and split off the base of the former mast for an anchor. We went west with the wind. Looking out over the broad waves, I saw something, the size of which I did not know. The part I saw above the water was like a long shed. It spurted spume into the sky and stirred up waves. Shaking his hand, the helmsman cautioned the men in the boat not to speak. Only after the boat had passed far beyond did he call out, “That was a whale. Big ones swallow boats, and little ones overturn them. It was luck that we did not meet. We live again!”As night fell, the wind and waves grew strong again. The boat went very fa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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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 Ui said, “I have heard that the sea has a Dragon God who is very greedy. Let us throw away the baggage and things we have as a sacrifice to him.” I would not permit it. All the men in the boat said,“Men have their bodies first and things later. These are all things apart from the body.” They vied with each other searching out clothing, weapons, iron implements, and rations, and threw them into the sea. There was no way for me to stop the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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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 | ===1월 7일=== | ||
===2월 27일=== | ===2월 27일=== | ||
===3월 1일=== | ===3월 1일=== |
2020년 4월 2일 (목) 16:41 판
목차
개요
학력
- 수비고등학교 졸업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경력
- 딱히 없음
좋아하는 것들
- 데이식스(가수)
- 초콜릿
- 매운 음식
- 만화책
- 그림 그리기
최부의 표해록
윤 정월 1일
間正月初一日, 雨. 收使最夕來, 乃以水精寺僧智慈之船, 固族行, 官船所不及, 命兵房鎮撫高益堅、吳純等, 回泊于則刀浦, 以為臣渡海之備,判官驗證遣軍官邊石山以出.
비가 내렸습니다.
목사(牧使)가 아침저녁으로 와서 조문(弔問)하였습니다. 수정사(水精寺) 승려 지자(智慈)의 배가 튼튼하고 빨라 관선(官船)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며, 병방(兵房)진무(鎭撫) 고익견(高益堅)과 오순(吳純) 등에게 별도포 (別刀浦)로 돌려 대도록 명하여, 신이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여 주었습니다. 판관(判官) 정전(鄭益)은 군관(軍官) 변석산(邊石山)을 보내어 조문하였습니다.
Ist Day, Intercalary First Month. Rain. The Prefect came twice, morning and evening, to express his sympathy. A boat of Chija, a priest of Sujong Temple, being strong, fast and unmatched by the official boats, [the Prefect] ordered military policemen Ko Ik-kyón, O Sun and others to take it round to Pyolto-p'o, moor it, and make it available for my crossing. Judge Chòng Chon sent Pyön Sok-san, an officer, to offer condolences.
1월 2일
初二日,陰,侵晨, 臣别刀浦候風韻,擁義縣訓導崔角、鄉校生徒金鼎 蹲等二十餘罪、內需詞典會重醉及崔根等,皆徒步以隨,至十五里許. 少選, 乾使咖至問關. 是日, 臣之帶去吏程保、金重等所造採 御乘監收 場辦公·私装,刷流移人,括溫占伴們,冒認良民等文籍,及資去全州府上 濟州三邑帳籍十七冊又一冊,濟州三色官上各年帳 戶籍 軍籍等文書, 輸付于牧使,藏之營廳,受書目回送而來.
흐렸습니다.
해뜰 무렵에 신은 별도포의 후풍관(候風館)으로 나아갔습니다. 정의현(佐義縣)훈도(訓導) 최각(崔角), 향교(鄕校)생도(生徒) 김정린(金鼎隣) 등 20여 명과 내수사(內需司)전회(典會)34 박중알(朴重幹) 및 최근 등은 모두 걸어 서 15리 남짓 따라왔습니다.
조금 후에는 목사가 말을 달려와 위문하였습니다. 이 날 신이 데리고 간 아전 정보와 김중 등이 어승(御乘) 점마별감(點馬別監)35 목장(牧場)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변별하고, 유이인(流移人)을 추쇄(推刷)하고, 멋대로 반당(伴尙)으로 삼거나 양민(良民)으로 잘못 인준한 자 등을 적발한 것 등의 문적(文籍) 및 가져갔던 전주부(全州府)에서 올린 제주(濟州) 3읍 장적(帳籍) 17책과 또 다른 1책, 제주 3읍의 담당관이 올린 매년의 장적·호적(戶籍)·군적(軍籍) 등의 문서(文書)를 봉하여 목사에게 넘겨주어 영청(營廳)에 보관하도록 하고, 그 문서목록을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2nd Day. Cloudy.
Early in the morning I went to the Hup’ung-gwan in Pyolto-p’o. Ch’oe Kak, the Superintendent of Education of Sõnŭi District; over twenty students, including Kim Chong-nin, of the regional school;6 Pak Chung-han, a Secretary of the Office of Supplies; and Ch’oe Kun and others walked with me. When we had gone about fifteen li Hỏ, the new Prefect, came hurrying up and offered his condolences. This day the officials who had accompanied me, Chòng Po, Kim Chung, and others sealed records that they had kept of private venality, of exiles, containment of outbreaks, suppression of secret societies, and people falsely pretending loyalty; seventeen volumes plus one volume of dossiers we had brought from Chònju Prefecture to the three towns of Cheju; and various ledgers, house registers, and military registers presented by the officials of the three towns of Cheju; and turned them over to the office in charge of the Prefect's treasury. They received a list of the documents and brought it back.
1월 3일
初三日,漂流海中,是日,午陰乍雨,東風微頁,海色深青,大靜具系監鄭圖瑞、訓導虛警, 聞臣遇喪, 來吊間,與崔角、朴重幹、倭學訓導金體郁、軍官崔仲眾、鎮撫金仲理等十余人、學長金存麗、金“得體、校生二十餘非,俱送別于浦口,存麗、得體等止臣行, 曰: “老僕生長海國,請經水路,漢拏山陰雨不調, 必有風變, 不可乘船. 且 家禮》 ‘始聞親__密行’註云:“日行百里, 不夜行, 雖哀戚猶避害也.’ 夜行尚不可, 況過此大海, 其可不慎乎?” 座中或動或止, 日高不決. 鎮撫安義來告日: “東風正好,可以去矣!” 重醇、仲__等亦勸行. 臣遂告別登船, 掉過五里, 軍人權山、許荷理等皆
日:“今日,風勢若作若,雪寵若卷若舒,當如此風候不順之日,行如此波譯險惡之海,恐有後悔,請還于别刀浦,待風復行,未為晚也,女義曰:“天之氣候,非人預料,頃刻之間,安知有披雲觀天之理乎!抑過此海者,私覆 沒,接踵相繼,唯奉王命朝臣前擁義縣監李暹外,鮮有漂流敗沒者,則都 是上德至重,无所知也,況謀之聚口,事未有濟,豈可登程而復路,以 致稽緩乎?”合張帆而行,經過大火脱島,府中人皆以謂向(巨}[E]要 梁,截海而上,順風泊概子島,甚駛也,桂山不聽其言,執其能從風所指,過 愁德島而西,海氣晦冥,風雨作,將近桃子品藏船處,沙勢甚急,天又昏 黑,督合格軍體之,軍人皆曰:“若此日發工,誰之過敗?”皆懷逆心,不聽從 以力船,退流至草菌岛,依西岸下可而泊,夜三更,尚理曰:“此島雖碍東風, 三面通,不合泊船,今又有北風之漸,進退無據,將乃何?且此船不在初 泊處, 漸却入海中,所泊之,伯或已破,今計莫若學们稍前,製之于岸,待 天明掉入狱子可也,遂舉,果破矣,梓之未及近岸,為北風所逆,驅出無 依之處,雨猶不止,風浪交惡,隨濤上下,莫知所適,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다 비 오다 하며 동풍이 조금 불고, 바다 물빛은 짙은 청색이었습니다.
대정현(大靜縣)감(監) 정사서(鄭嗣瑞)와 훈도(訓導) 노경(盧警)은 신이 친상 당한 것을 듣고 달려와 조문하고, 최각(崔角)·박중알, 왜학훈도(倭學訓導) 김계욱(金繼郁), 군관(軍官) 최중중(崔仲衆), 진무(鎭撫) 김중리(金仲理) 등 10여 인과 학장(學長) 김존려(金存麗)·김득례(金得禮) 및 향교생도 20여 명과 함께 포구에서 송별해 주었습니다.
존려와 득례 등은 신이 떠나는 것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저희 늙은이들은 섬에서 자라 바닷길을 잘 압니다.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반드시 바람의 변화가 생기니 배를 타서는 안 됩니다.
또 《가례(家禮)》 [1]의, 친상(親喪)을 듣자마자 길을 떠나라4는 조목의 주(註)에도, '하루에 100리를 가되 밤길은 가지 말아야 하니 비록 슬프더라도 몸을 해치는 일은 피해야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밤길을 가는 것도 안 되는데, 하물며 바다 건너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좌중에 권하는 이도 있고 말리는 이도 있어, 해가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와서 알리기를,“동풍이 마침 알맞으니 떠날 만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중알과 최중중 등도 또한 떠나기를 권하였습니다.
신은 마침내 작별을 고하고 배에 올라 노를 저어 5리쯤 가니, 군인(軍人) 권산(權山)과 허상리(許尙理) 등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불다가 잦아들기도 하고, 먹구름이 꼈다가 개기도 하니 이처럼 바람이 고르지 못한 날에 이처럼 파도가 사나운 바다를 건넌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 듯합니다. 청컨대 별도포로 돌아가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하늘의 날씨는 사람이 미리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볼 수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바다를 건넌 사람으로서 민간의 배가 뒤집혀 침몰되는 일은 잇달아 일어났지만, 왕명을 받든 조신(朝臣)으로서는 오직 전 정의현감(産義縣監) 이섬(李__)45 외에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된 적이 드물었던 것은, 모두 임금의 덕이 지극히 높음을 실제로 하늘이 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다 보면 일이 끝이 없는 법입니다. 어찌 길을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시일을 천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돛을 펼치고 가도록 소리쳐 명했습니다.
겨우 대화탈도(大火脫島)를 지났는데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배가 거요량(巨要梁)을 향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올라가서 바람을 따라 추자도(秋子島)[2]에 정박하면 매우 빠르게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으나, 권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키를 잡고 바람 부는 대로 수덕도(秘德島)를 지나서 서쪽으로 갔습니다.
바다가 어두컴컴해지면서 바람은 약해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자도의 배 정박할 곳에 가까이 갈 즈음에 물살이 아주 급해지고 하늘도 캄캄하여졌으므로, 곁군[格軍]을 독려하여 노를 젓도록 하였습니다.
군인들이 모두, “이 같은 날씨에 배를 출발시킨 것은 누구 잘못입니까?”라고 말하고는, 모두가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힘껏 노를 저으라는 말을 따르지 않아, 뒤로 흘러 내려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쪽 해안에 의지해서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습니다.
밤 3경(更)이 되자 허상리가 말하기를,
“이 섬은 비록 동풍을 막고 있지만 3면이 트여 있어 배를 정박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지금 또 북풍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데 기댈 곳이 없게 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한 이 배는 처음 정박한 곳에 있지 않고 도리어 점점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으니 내린 닻줄이 이미 끊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닻을 올려 조금 앞으로 나아가 해안에 매어 두었다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노를 저어 추자도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닻을 올려보니 과연 끊어져 있었습니다. 노를 저었으나 미처 해안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북풍을 맞아 기댈 데가 없는 곳으로 몰려나오게 되었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를 않고 풍랑이 사나워 파도를 따라 오르내리니, 향하는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3rd Day. At sea. This day was cloudy and sometimes rainy. The wind was from the east and slightly favorable. The sea was deep green. Chong Sa-so, Junior Director of Taejšng District, and No Kyong, Superintendent of Education, had heard that there had been a death in my family and came in haste to express their sympathy. More than ten men – Ch’oe Kak, Pak Chung-han, Kim Kye-uk (the Superintendent of Japanese Studies),8 Ch’oe Chung-jung (an officer), Kim Chung-ni (a Security Officer), and others – and in addition School Masters Kim Chol-lyð and Kim Tủng-nye and over twenty students saw us off at the river mouth. Chol-lyo and Tùng-nye tried to stop me from going, saying, “We old men were born and grew up by the sea, and we know much about the sea lanes. When it is changeable on Mt. Halla, now cloudy, now rainy, the wind is sure to shift, and it will be impossible to sail boats. Not only that, the commentary under ‘Travel on First Hearing of a Relative's Death' in the Chia li says, 'One travels one hundred li by day, but not at all by night. Though grief is great one still avoids injury.210 If night travel is improper, how much more could crossing this great sea be disrespectful!".
Some of those in the room urged me on, some held me back. The sun was high, and I had not decided. Security Officer An Ui came and told me, “The east wind is just right. You can go.” Then Chung-han, Chung-jung and others also urged me to go. Finally I took my leave and got into the boat. When we had rowed five li, Kwon San, Hð Sang-ni and other soldiers said to me, “Today first the wind waxes, and then it wanes; the clouds and fog roll in, and then they scatter. We fear that if on a day of such unsteady winds you travel in a heavy sea like this one, you will regret it later. Let us turn back to Pyõlto-p'o and wait for [a more favorable] wind before starting again. We shall not lose too much time that way.” An Ui said, “Heaven's weather is not something people can forecast. How do you know that the clouds will not scatter and that we shall not see fair skies again soon? Moreover, private boats that cross this sea capsize and sink one after another, but the ministers of the Court who have received the King's command (except Yi Sõm, the former Junior Director of Sõnŭi District11) seldom go adrift or sink. All that is because His Majesty's virtue is extremely great and is known to Heaven. Anyway, with suggestions from everyone, the matter will never be settled. How can we set out only to return and delay?” He shouted a command to set sail. Shortly after we passed Taehwat’al Island, all the men in the boat thought that if the boat headed for Sinyoryang and cut across the sea upwind, we should land at Ch’uja Island very quickly. Kwon San would not listen to them. He grasped the tiller and went with the wind. We passed Ch’udok Island and went west. The sea was dark, the wind weak. It began to rain. As we were approaching the harbor of Ch’uja Island, the evening tide was very swift, and the sky was dark. When the overseer gave orders to the troops, all the soldiers at the oars said, “Whose fault is it that we sailed on a day like this?” They nursed rebellion and would not obey and man the oars. We drifted off to Ch'oran Island, dropped anchor off the west bank, and moored.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Sang-ni said, “This island blocks the east wind, but we are open to the waves on three sides; it is not suitable. Now, too, the wind is shifting to the north. We can neither go on nor retreat; it is a bad position to be in. The boat, moreover, is not where we first moored it. It is gradually drawing off into the sea. I am afraid the anchor with which we moored may already have broken. Under the circumstances it is best to raise the anchor, go forward a bit, and make fast to the shore. It will then be possible to wait for the sky to clear and row into Ch’uja.” Then we raised the anchor, and it was, indeed, broken. Rowing, we could not draw near the shore and were driven off by the north wind to an unprotected part. It rained on, never stopping, the wind beating upon the water. We rose and fell with the waves and did not know where we were going.
1월 4일
初四日, 澳入大洋中, 是日, 雨大風, 驚濤浪, 狱天鼓海, 帆席盡破, 舟以二槽高大,尤易傾撓,勢將覆壓,命肖厅寶操斧去之,高以福鏈草芭附之舟尾以黎講,當午雨稍寧,東風又大作, 載傾载浮, 聽其所之, 臀眼間已入西海. 稍工指東北, 望有島若一點彈丸於漂渺間, 曰: “彼疑乃黑山島也. 過此以往, 四無島嶼, 水天相接, 汗漫無涯之海.”人皆知攸措, 僵卧舟中.
臣令安義督軍人以取露治船等事. 有軍人高迴者作聲曰: “濟州海路甚險, 凡往來者, 皆待風累朔. 至如前敬差官, 在朝天館, 在水精寺, 通計凡三朔以候, 然後乃行. 今此行當風雨不定之時, 不占一日之候, 以至此極, 皆自取也.”
餘軍皆曰: “執已如此, 取露治船, 雖竭心力, 終亦必亡. 吾寧用力而死, 莫如安队以待死.” 皆掩耳不從命, 或歐之亦不起. 宋真殘劣之甚者, 被國而怒, 曰:“長壽哉! 此船也. 等至於破, 何不速破!”
程保曰: “濟州人心, 外凝毒, 預慢(民)[原]悍, 以死為輕, 故其言類如此.” 臣意亦以謂溺死已決矣, 尚蒙天助, 幸不至於溺, 必漂流無定, 以至死日, 無如之何, 又憤軍人怠惰,遂點檢同舟人,則從者程保、金重、李禎、孫孝子、崔(巨) 巨] 伊山、莫金、萬山及濟州牧使所定送鎮撫安義、記官李孝枝、總牌 許尚理、領船權山、稍工金高面、格軍金怪山·肯斤寶·金仇迴·玄山·金石貴·高以福·金朝迴·文迴·李孝台·姜有·夫命同·高內乙 同·高福·宋真·金都終·韓每山·鄭實、護送軍金粟·金真音山·高迴·金松·高保終·梁達海·朴終回·金得時·任山海、官奴權松·姜內·李山·吳山等,合自身凡四十三人,臣招安義問曰:“我一人,非官員例,從者至煩,甚為未便,濟州人乘紅者至三十五人,何也?”
安義曰:“我牧使所以盡心者,對以敬差官之禮,且運紅,必用聚力,然後可行,况海路复遠,如於蔚島等處,水賊盛行,護送不可不嚴也.”
臣曰:“過海時,當精擇運紅人及水路語習者,則數雖少可矣,今此同舟人,皆懈怠暴藍者,虛張名數,而無其實,使船漂流,致之死地,徒增痛哭耳.”
叫謂軍人等曰:“我奔初喪,情不可少留,人或有勸之行,為人子者,其可頃刻需“滯乎?汝等之同我見漂,實由於我,然勢亦使之然也.况好生惡死,人情所同,汝等豈無欲生之心哉?舟或破碎或沈覆則已矣,觀舟今堅緻,未易至破,若不遇石嶼,能修補刮水,幸或風定波恬,則雖流至他國,可以得生,今汝等亦有父母,有妻兒, 有昆季親戚,皆望汝生,畏其不壽,汝等則不念其情,不愛其身,徒以给我之心,率相解體,自歸死地,惑之甚者,
尚理等十餘人曰:“軍人皆頑鈍無識之徒,故其用心不通若此,然人各有心,我等當"竭力從事,艷而後已,”夜風雨不止,巨濤尤甚,激入舶髓,隨人隨取,量可二更,驚濤鼓蕩,襄駕篷屋. 丹半沈,衣服行李,盡見沾滿,凍寒砭骨,命在瞬息,臣握李植手,枕程保膝,金重、孝子傍臣左右,狼藉以待死,傍有一人結項將絕,李楨解其結, 則乃吳山也,巨伊山、莫金等,竭力汲水,水猶不减,臣以謂舟尚完固,則
p. 354 自上激射, 自隙漏入之水, 不汲則坐待沈沒, 汲之則底有生理, 勉强而起, 叫權松贊爆得火,卷首席以烘之,又叫斤寶、高福、高面等,親檢綽漏處,以補塞之,又解衣分給權山、高面、巨伊山、怪山、尚理等,以勸勉所事. 程保、金重、孝子等散衣服,分諸軍人,軍人若仇迴、文迴、都終、每山、玄山等爭感奮出死力,刮水殆盡,舟僅獲全,不移時,舟又入石嶼錯亂中,權山運船不知所向,尚理、仇迴等,執篙無所施,幸賴天風驅出,得免碎破.
큰 바다 가운데로 표류해 들어갔습니다.
이 날은 우박이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놀란 파도와 무서운 물결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해면을 내리치니 돛이 모두 부서져 버렸습니다.
배는 높고 큰 돛대 2개 때문에 쉽게 기울어져 뒤집어질 기세였으므로 소근보(肖斤寶)에게 도끼로 돛대를 제거하게 하고, 고이복(高以福)에게 거적을 엮어 선미(船尾)에 붙여 파도를 막게 하였습니다.
정오가 되어 비는 조금 그쳤으나 동풍이 또 크게 일어나 배는 기울어졌다 떠올랐다 하였으며, 그 가는대로 맡겨두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서해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뱃사공이 동북쪽을 가리키기에 바라보니, 마치 한 점 탄환과 같은 섬이 아득한 곳에 있었습니다.
뱃사공이, “저것이 아마 흑산도(黑山島)[1][2][3][4]일 것입니다.
이곳을 지나서 앞으로 간다면 사방에 섬이라고는 없고 물과 하늘이 서로 닿아 있는 끝없이 넓은 바다뿐입니다”라고 말하니,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배 안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신이 안의를 시켜 군인들에게 취로(取露)[5]하는 일, 배를 수리하는 일 등을 독려하도록 하였습니다.
군인 고회(高廻)란 자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제주는 바닷길이 매우 험난해서 왕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여러 달씩 순풍을 기다려! 전 경차관(敬差官) 같은 분으로 말하면 조천관(朝天節)에 있다가 수정사(水精寺)에 있다가 하며 모두 합쳐 석 달이나 기다린 뒤에야 길을 떠났거든, 지금 이 행차는 비바람이 고르지 않은 때 하루의 날씨도 살펴보지 않고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자초한 일이야!”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 군인들은 모두,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취로를 하고 배를 수리하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야. 애를 쓰다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편안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편이 나아”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 귀를 막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며, 혹은 때려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송진(宋眞)은 모자라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라, 맞으면서 성내 말하기를,
“명도 길구나, 이 배는! 파선되기만을 기다리는데, 왜 빨리 파선되지 않는 거야! 어차피 부서지게 될 것이라면 왜 빨리 부서져 버리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말하기를, “제주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독하며 고집스럽고 사나워, 죽음을 가벼이 여기므로 그들의 말투가 이와 같습니다 56 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또한 물에 빠져 죽을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 하늘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 물에 빠져 죽지 않더라도,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군인들의 게으른 행동에 분개하다가 마침내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종자(從者)인 정보(程保)·김중(金重)·이정(李)·손효자(孫孝子)·최거이산(崔巨伊山)·막금莫金)·만산(__山)과 제주목사가 보낸 진무(鎭撫) 안의(安義), 기관(記官) 이효지(李孝枝), 총패(總牌)[6]58 허상리(許尙理), 영선(領船)[7]59 권산(權山), 사공 김고면(金高面), 곁군 김괴산(金怪山)·소근보(肖近寶)·김구질회(金仇此廻)·현산(玄山)·김석귀(金石貴)·고이복(高以福)· 김조회(金朝廻)·문회(文廻)·이효태(李孝台)·강유(姜有)·부명동(夫命同)·고내을동(高內乙同)·고복(高福)·송진(宋眞)·김도종(金都終)·한매산(韓每山)·정실(鄭實), 호송군(護送軍)[8] 김속(金栗)·김진음산(金眞音山)·고회(高廻)·김송(金松)·고보종(高保終).양달해(梁達海)·박종회(朴終回)·김득시(金得時)·임산해(任山海), 관노(官奴) 권송(權松)·강내(內)·이산(李山)·오산(吳山) 등과 저까지 합해서 모두 43명이었습니다.
신이 안의를 불러 묻기를, “나는 한 상제(喪制)로서 관원의 격식에 따를 처지가 아닌데 종자(從者)가 너무 많아 마음이 몹시 편치 않다. 제주 사람으로서 배를 탄 사람이 35명이나 되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니 안의가 말하기를, “우리 목사(牧使)께서 마음을 다한 것은 경차관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또 큰 배를 부리는 데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힘을 써야만 항해가 가능합니다. 하물며 바닷길이 아득하게 멀 뿐더러 울도(蔚島)[9] 등지와 같은 곳은 해적이 많으니 호송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바다를 건널 때는 배를 부리는 자와 바닷길을 잘 아는 자만 가려 뽑으면 비록 수가 적어도 괜찮다. 지금 이 배를 같이 탄 사람은 모두 게으르고 사나운 자들로서 인원수만 늘려놓았지 그 실속이 없다. 배가 표류되어 사지(死地)에 이르게 되면 통곡 소리만 더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를 질러 군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초상(初喪)을 당하여 달려가는 몸이라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인 데다 사람들 중에 떠나기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자식 된 자로서 잠깐 동안이라도 지체할 수 있었겠는가? 너희들이 나와 함께 표류를 당한 것은 실로 나 때문이지만, 형세가 또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물며 살고 싶고 죽기 싫은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데 너희들도 어찌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배가 혹시 부서졌거나 뒤집어졌다면 끝장이지만 살펴보건대 지금 배는 단단하여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겠다. 만약 돌섬에만 부딪히지 않는다면 수리해 가며 물을 퍼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잠잠해진다면 비록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이르더라도 살아날 수가 있다. 지금 너희들도 또한 부모와 처자가 있고 형제와 친척도 있어서, 모두가 너희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일찍 죽을까 걱정할 것이다. 너희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 몸도 아끼지 않으며, 오직 나를 탓하는 마음으로 서로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스스로 죽을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제 정신을 잃음이 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상리 등 10여 인이 말하기를, “군인들은 모두 고루하고 우둔하며 무식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씀이 이와 같이 막혔으나, 사람마다 마음가짐이 다르니 저희는 마땅히 죽을 때까지 힘껏 일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밤에도 바람과 비는 그치지 않고 큰 파도는 더욱 심하여 배 안으로 부딪쳐 들어왔으나 물이 들어오는 대로 퍼내었습니다. 밤 2경이 쯤 되니 성난 파도가 출렁대면서 봉옥(蓬屋)(거적으로 만든 집)) 위로 넘나들었습니다. 배는 반쯤 가라앉아 의복과 행장은 모두 물에 젖었습니다. 추위는 뼈를 깎아내는 듯하였고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은 이정의 손을 잡고 정보의 무릎을 베고 누웠습니다. 김중과 효자는 신의 양쪽에서 어지러이 쓰러져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한 사람이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려 할 때 이정이 그 목맨 것을 풀고 보니 바로 오산이었습니다.
거이산과 막금 등이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었으나 물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신은 배가 아직 튼튼하므로, 위로 세차게 쏟아져 들어오는 물과 틈에서 새어드는 물을 퍼내지 않는다면 앉아서 배가 침몰되기를 기다리는 셈이겠지만, 물을 퍼낸다면 살아날 길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지로 일어나서 큰 소리로 권송을 불러 부싯돌을 쳐서 불을 지피고 짚자리를 말아 때게 하였습니다. 또 근보, 고복, 고면 등을 큰 소리로 불러 물이 새는 곳을 직접 찾아낸 다음 이를 막도록 하였습니다. 또 옷가지를 풀어 권산, 고면, 거이산, 괴산, 상리 등에게 나누어주며 맡은 일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정보, 김중, 손효자 등도 또한 여러 군인들에게 의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인들 중에 구질회, 문회, 도종, 매산, 현산과 같은 사람은 감격하여 죽을 힘을 다해 다투어 물을 거의 다 퍼내니 배가 겨우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배가 또 돌섬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권산은 배를 움직이며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알지 못했고, 상리와 구질회 등은 상앗대를 잡고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바람에 힘입어 내몰려 나와, 부서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4th Day. Drifting into the Open Ocean. This day there were rain and hail. High winds roiled the sea. Terrible waves swelled into the sky and churned the ocean. The sails were completely ripped. The masts, being tall, were in danger of breaking and crushing the [superstructure] of the boat. I ordered San Kŭn-bo to take his axe and cut them down. Ko I-hok bound straw mats to the stern of the boat to ward off the waves. At noon, the rain abated somewhat, and a strong east wind rose again. We went heeling and pitching along, and I realized immediately that we had already entered the Western Sea. The helmsman pointed to the northeast. I saw there an island like a pellet of shot on the horizon. He said, “That may be Hủksan Island.” After we went past it, there was no island in any direction. Water and sky met in endless space. All the men, not knowing what to do, lay down prone in the boat. I commanded An ti to direct the soldiers to do such things as bail out the water and repair the boat. One soldier, Ko Hoe, shouted, “The Cheju sea lanes are very dangerous. Everyone who travels in them waits months for the wind. In the case of the former commissioners, they waited as long as three months at Choch’on-gwan and Sujong Temple before they went. This present voyage comes just at the time of unsettled wind and rain. We did not forecast the weather for a single day, and we have come to this extremity. We have brought it all upon ourselves.” | All the other soldiers said, “That is so. Even if we exhaust our will and strength bailing water and repairing the ship like this, in the end we still shall die. Rather than use up our strength and die, let us lie easy and wait for death.” They all closed their ears and would not obey orders. They would not even get up when whipped. Song Chin, a great shirker, being beaten grew angry. He said, “A long-lived one, this ship! Since she is going to break up sooner or later, why doesn't she do it quickly?” Chòng Po said, “Cheju men appear to be stupid, but inside they are wicked. They are obstinate, rude, rebellious, and cruel, and they take death lightly. That is why they talk like that.” I, too, thought that we were sure to drown. If we received help from Heaven and were fortunate enough not to drown, then surely we should drift indefinitely until the day we died. What else could be? I was also exasperated at the insolence of the troops. Then I counted over the men in the boat. There were my staff – Chòng Po, Kim Chung, Yi Chong, Son Hyo-ja, Ch'oe Kõisan, Makkům, and Mansan- ;, and those assigned by the Prefect of Cheju to escort us - Security Officer An Ui, Recorder Yi Hyo-ji, Keeper of the Seals Hỏ Sang-ni, Ship Captain Kwon San, Helmsman Kim Ko-myon, Privates Kim Koe-san, San Kūn-bo, Kim Kujilhoe*, Hyon San*, Kim Sok-kwi, Ko I-hok, Kim Cho-hoe, Munhoe*, Yi Hyo-t'ae, Kang Yu, Pu Myong-dong, Ko Naeŭltong*, Ko Pok, Song Chin, Kim To-jong, Han Mae-san, Chồng Sil; Escort Troops Kim Sok, Kim Chinằmsan*, Ko Hoe, Kim Song, Ko Po-jong, Yang Tal-hae, Pak Chong-hoe, Kim Tủk-si, Im San-hae; and public slaves Kwon Song, Kang Nae, Yi San, and O San*. Altogether there were forty-three men, including me. I called An Ui and questioned him: “I am a man in mourning. I am not in official standing. It is extremely awkward to have so many men aboard. How is it that the Cheju men on board come to thirty-five?” An Ủi said, “What our Prefect was at great pains to do was to meet the protocol for a commissioner. Sailing a large boat, furthermore, takes the work of many, and when the sea route is long and, as at Wi Island and other places, pirates are active, the escort must all the more be strong.” I said, “It is possible to cross the sea successfully with only a few sailors and navigators, if they are carefully chosen. These men, now, are all lazy and insolent. In numbers they swell the roster, but in fact they are nothing. If the boat should drift and we all die, their presence would only increase the number of wailing [widows and orphans].” I called out to the troops, “I am hurrying into my first mourning. My feelings permit not even a slight delay. Since someone did urge me to go, as a son can I delay for a moment? It is true that you have been cast adrift on the sea because of me, but circumstances are also responsible. "Since it is common nature to all men to love life and hate death, how can you not want to live? "If the boat breaks up or sinks, that will be all. My view is that the boat is now sound and tight. Probably it will not break up easily, and if we do not strike a rocky island, we can repair it and bail out the water. If by luck the wind settles and the waves calm down, we may drift to another country, but we shall save our lives. You, too, have fathers, mothers, wives, children, brothers, and relatives, who hope that you will live and fear that you might die; yet, without considering their feelings or the danger to your own lives; you have refused to work because you think I am to blame. It is the height of stupidity to bring death upon yourselves thus.” Over ten men, including Sang-ni, said, “The troops are a gang of stubborn ignoramuses. That is why they reason in such an absurd fashion. But everyone has his own way of thinking. We shall work with all our strength until we die.” During the night, the wind and rain did not stop. The waves were enormous. They washed into the bow and stern, and as they came in, we bailed them out. In, perhaps, the second watch, terrifying waves swelled up and straddled the mat shelter. The boat half sank. The clothing and baggage were soaked through, and freezing cold pierced us to the bone. Our fate lay in the moment. I took Yi Chong's hand and pillowed my head in Chòng Po's lap. Kim Chung and Hyo-ja were at my left and right sides. Thus sprawled about, we waited to die. A man nearby was trying to hang himself and was about to die when Yi Chong untied him. [The man] proved to be O San.
Kõisan, Makkům, and others worked as hard as they could bailing out water. The water seemed not to diminish. I assumed that if the boat was still sound and we did not bail out the water washing in above and leaking in through cracks, we should sit and wait and sink. If we did bail, it might be possible to survive. I forced myself to get up. I called to Kwon Song to kindle a fire by friction, roll up the mats and dry them. I also called to Kủn-bo, Ko Pok, Ko-myon, and others personally to search out the leaking places and plug them. Then I took off my clothes and divided them among Kwon San, Ko-myon, Kõisan, Koe-san, and Sangni as encouragement. Chòng Po, Kim Chung, and Hyo-ja also took off their clothes and divided them among the troops. Soldiers such as Kujilhoe, Munhoe, To-jong, Mae-san, and Hyon San, full of gratitude, exerted their utmost strength to bail all the water out of the boat. They had got it almost all out, and the boat seemed for the most part safe, when almost immediately it again headed into a rocky island. In the confusion, Kwon San, sailing the boat, had not realized where he was going. Sang-ni and Kujilhoe seized poles, but they were useless. Fortunately, we were driven off by a heaven-sent wind and avoided crashing.
1월 5일
初五日, 澳大洋中, 是日, 昏霧四塞, 咫尺不辨, 向晚, 雨脚如麻, 至夜, 雨少止, 怒濤如山, 高若出青天, 下若入深淵, 奪衝擊躍, 敗, 決在呼吸之間. 莫金、權松等技淚謂臣曰:“勢已迫矣,無復望已,請替換衣服,以待大命之至,“臣如其言,懷印與馬牌,具喪冠與服,慌慌然按手祝天曰:“臣在世,唯忠孝友愛為心,心無欺,身無縫冤,手無殺害,天雖高 高,實所鑑臨,今又奉君命而往,奔父喪而歸,臣不知有何罪咎?倘臣有罪,罰及臣身可也,同舟四十餘人,無罪見溺,天其敢不矜乎?天若哀此窮人,返風息濤,使臣得再生於世,葬臣新死之父,養臣垂老之母,幸又得鞠躬
於丹墀之下,然後雖萬死無生,臣實甘心,”言未記,莫金遠抱臣身, 曰:“一家人百年苦樂,皆仰此身,有如十盲仰一枚,今至於此,無復再見一家之人.”遂瓣踊而哭,陪吏以下亦哭泣鑽手以天祐,
이 날은 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서 빗발이 삼대 같았습니다.
밤이 되자 비가 조금 그쳤으나 성난 파도가 산더미와 같아서, 높게 일 때는 푸른 하늘로 솟는 듯했고 내려갈 때는 깊은 못에 빠져 들어가는 듯하여,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찢는 듯하며, 모두 물에 빠져 썩어 문드러질 것이 순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막금과 권송 등은 눈물을 씻으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급박하여 다시 희망이 없으니 청컨대 의복을 갈아입고 죽음을 맞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그 말과 같이 인장(印章)[1]과 마패(馬牌)를 품에 넣고 상관(喪冠)과 상복(喪服)을 갖추고는 벌벌 떨며 손을 비비면서 하늘에 빌기를,
“신은 살아오면서 오직 충효와 우애를 마음에 새기고, 마음으로는 속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몸으로는 원수진 일이 없었으며 손으로는 누구를 죽이거나 해친 적이 없었음은 하늘이 비록 높고 높지마는 실로 굽어 살피시는 바입니다. 이번에도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신에게 무슨 죄와 허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신에게 죄가 있으면 신의 몸에만 벌이 미치면 될 것이지, 같이 배를 탄 40여 인은 죄도 없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하늘은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늘께서 만약 이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바람을 거두고 파도를 그치게 하여 신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다시 삶을 얻어, 갓 죽은 신의 아비를 장사지내고 늙으신 신의 어미를 봉양하며 다행히 다시 궁궐의 뜰 아래에 국궁(鞠__)[2]할 수 있게 하신다면, 이후에는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미처 마치지 않았는데 막금이 갑자기 신의 몸을 안으면서,“한 집안 사람들이 평생의 고락을 모두 이 분에게 기대기를, 마치 '열 소경에 한 막대처럼 여겼는데,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집안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피 통곡하였습니다. 배리(陪吏) 이하도 소리를 내어 슬피 울면서 손을 모아 하늘의 도움을 빌었습니다.
5th Day. Adrift in the Open Ocean. This day a dense fog obscured everything.
Things a foot away could not be made out. Towards evening, rain streamed down heavily, abating somewhat with night. The frightening waves were like mountains. They would lift the ship up into the blue sky and then drop it as if down an abyss. They billowed and crashed, the noise splitting heaven from earth. We might all be drowned and left to rot at any moment. Wiping away tears, Makkům and Kwon Song said to me, “Conditions are critical; there is no hope. Please change your clothes and wait for your fate to come.” I did as they said. I pocketed my seal and horse permit against my chest and put on my mourning hat and gown. Anxiously I joined my hands and prayed to Heaven. “In the world I have tried only to be loyal, filial, friendly, and loving. My heart has had no deceit. I have done no wrong, I have killed no one. Far away above us though you are, Heaven, you must be aware of this. Now, again having gone out on my Sovereign's orders, I have been hurrying home to mourn for my father. I do not know for what sin I am to blame. If I have sinned, let punishment come to me alone. Will you, Heaven, presume to be so unmerciful as to let over forty innocent men drown with me? Heaven, if you pity this poor person, reverse the wind and still the waves. Let me return alive to the world, bury my newly dead father, and take care of my aging mother. If, by good fortune, I am also able to bow before the Court, then I shall truly be content to die ten thousand deaths after that.”
Before I had finished speaking, Makkům suddenly embraced me. He said, “A whole family for their entire life, in pain and pleasure, have relied on me. They have been like ten blind men leaning on one staff. Now it has come to this. I shall not see my family again.” Then he beat his breast, stamped his feet, and wept.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ose below them also wept. They folded their hands and prayed for Heaven's protection.
1월 6일
初六日, 漂大洋中, 是日陰, 風波少歇, 始督仇迴等尊片席以為帆, 建施竿以為橋, 劈舊橋之本以為, 隨風西向而去, 顧見洪濤間有物, 不知其大也, 其見於水上者, 如長屋廊, 噴沫射天, 波籬浪駭, 稍工戒舟人, 搖手合勿語, 舟過甚遠, 然後稍工呼曰:“彼乃鯨也,大則吞航,小能覆舟,今幸不相值,我其更生更生矣.”入夜,風濤還勁,舟行甚疾,安義曰:“嘗聞海有龍神甚食,請投行李有物,以讓謝之,臣不之應,舟人皆曰:“人有此身,然後有此物,此物皆身外物,”爭檢有染衣服、軍器、鐵器、口粮等物,投諸海,臣亦莫之能禁.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풍랑이 조금 수그러들었습니다.
비로소 구질회 등을 독려하여 조각이 난 돗자리를 기워서 돛을 만들고, 상앗대를 세워서 돛대를 만들고, 그 돛대의 밑둥을 잘라서 닻을 만들었습니다.
바람을 따라 서쪽을 향하여 가는데, 살펴보니 큰 파도 사이에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물 위에 드러난 것만 해도 기다란 행랑채와 같고, 거품을 뿜어 내어 하늘에 솟구치는데 물결이 뒤집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공이 배 안의 사람들에게 경계하며 손을 흔들어 말을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배가 멀리 지나간 후에야 사공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저것이 바로 고래[1][2][3][4][5]입니다.
큰 것은 배를 삼키고 작은 것도 배를 뒤엎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 서로 마주치지 않아서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풍랑이 다시 강해지므로 배가 가는 속도가 매우_________________
6th Day. Adrift in the Open Ocean. This day was cloudy. The wind and waves were a little calmer. First I directed Kujilhoe and others to repair the ripped mats for a sail, erect the mizzen for a mast, and split off the base of the former mast for an anchor. We went west with the wind. Looking out over the broad waves, I saw something, the size of which I did not know. The part I saw above the water was like a long shed. It spurted spume into the sky and stirred up waves. Shaking his hand, the helmsman cautioned the men in the boat not to speak. Only after the boat had passed far beyond did he call out, “That was a whale. Big ones swallow boats, and little ones overturn them. It was luck that we did not meet. We live again!”As night fell, the wind and waves grew strong again. The boat went very fast.
An Ui said, “I have heard that the sea has a Dragon God who is very greedy. Let us throw away the baggage and things we have as a sacrifice to him.” I would not permit it. All the men in the boat said,“Men have their bodies first and things later. These are all things apart from the body.” They vied with each other searching out clothing, weapons, iron implements, and rations, and threw them into the sea. There was no way for me to stop t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