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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 ||
− | 숙종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3&mn=RT_01_10_01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 + | 숙종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3&mn=RT_01_10_01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ref>[http://www.linkroyaltombs.or.kr/cms/content/view/272 조선왕릉 형식]</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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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결국 숙종과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은 누구였을까?'''</font>=== | ==='''<font color=green>결국 숙종과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은 누구였을까?'''</fo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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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새로 산릉공사를 해야 하는 것(당시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공사하고 있던 상황)을 염려하여 | [[영조]]는 새로 산릉공사를 해야 하는 것(당시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공사하고 있던 상황)을 염려하여 | ||
− | 명릉 서쪽 언덕에 자리를 선정하고 필요한 인력과 국고를 줄여 산릉공사의 부담을 덜었다. | + | 명릉 서쪽 언덕에 자리를 선정하고 필요한 인력과 국고를 줄여 산릉공사의 부담을 덜었다.<ref>[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3&mn=RT_01_10_01 명릉 이야기]</ref> |
살아생전 늘 [[숙종]]과 함께하고 싶었으나 숙종에게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인현왕후]]는 | 살아생전 늘 [[숙종]]과 함께하고 싶었으나 숙종에게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인현왕후]]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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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잡했던 숙종의 여인들 중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인현왕후]]였다. | 그 복잡했던 숙종의 여인들 중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인현왕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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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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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inkroyaltombs.or.kr/cms/content/view/272 조선왕릉 형식] | *[http://www.linkroyaltombs.or.kr/cms/content/view/272 조선왕릉 형식] | ||
− | * | + | *[https://blog.naver.com/saarinen00/175511417 명릉]사진 참조 |
=='''기여'''== | =='''기여'''== | ||
=='''주석'''== |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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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 | +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서오릉 속 숙종과 숙종의 사람들]] [[분류:형식]] [[분류:김다연]] |
2019년 6월 25일 (화) 22:25 기준 최신판
정의
동원이강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 광릉이며, 예종 창릉, 성종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숙종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1]
내용
결국 숙종과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은 누구였을까?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그렇게 여인들을 이용해 환국을 일삼았던 숙종의 마지막 선택은 인현왕후였다.
생전에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던게 걸렸던 것인지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을 공사할 때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제도로 공사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에 제일 처음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1720년(숙종 45)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의 능 옆으로 능을 조성하여 쌍릉의 형식을 이루었다.
명릉을 조성한지 37년이 지난 후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생전에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곳에 미리 묻힐 자리를 정하였으나,
영조는 새로 산릉공사를 해야 하는 것(당시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공사하고 있던 상황)을 염려하여
명릉 서쪽 언덕에 자리를 선정하고 필요한 인력과 국고를 줄여 산릉공사의 부담을 덜었다.[2]
살아생전 늘 숙종과 함께하고 싶었으나 숙종에게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인현왕후는
죽어서야 숙종과 계속 함께할 수 있었다.
그 복잡했던 숙종의 여인들 중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인현왕후였다.
멀티미디어
동원이강릉 형식의 명릉 사진
참고문헌
- 명릉사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