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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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ext='''''북쪽 두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지(下肢)를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속 | + | |text='''''북쪽 두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지(下肢)를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속 목격자 증언<ref>[https://www.ajunews.com/view/20180627143134361 아주경제-한밤중 한강대교를 끊은 사람은 누구일까]</ref> |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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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민들은 이 말을 믿었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뒤였다.<br/> | 서울 시민들은 이 말을 믿었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뒤였다.<br/> | ||
*1950년 6월 28일 새벽 | *1950년 6월 28일 새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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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결과 | *사건 결과 | ||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최소 500,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폭사 및 익사하였다. 무엇보다 강 북쪽의 시민들이 제 때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최소 500,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폭사 및 익사하였다. 무엇보다 강 북쪽의 시민들이 제 때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
2019년 6월 25일 (화) 21:54 기준 최신판
정의
북쪽 두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지(下肢)를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속 목격자 증언[1] |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사건 과정과 결과
- 1950년 6월 27일 밤 10시
전쟁 2일차이던 6월 27일 밤 10시 서울의 이승만대통령의 음성이 담긴 라디오가 나왔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서울 시민들은 이 말을 믿었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뒤였다.
- 1950년 6월 28일 새벽
서울 시민들은 6월 28일 새벽녘 미아리 전투소리를 듣고 북한군이 서울 가까이 진격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피난민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한강 대교로 모였다. 그러던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철교에 하늘을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이 때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과, 군인, 경찰을 포함해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 사건 결과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종로서 경찰 77명을 포함 최소 500,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폭사 및 익사하였다. 무엇보다 강 북쪽의 시민들이 제 때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평가
- 폭파의 전략적 가치
일단 한강대교 폭파 자체는 전략적으로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는 행위였으며, 소련 고문단의 사후 평가에서도 105전차여단의 한강교 조기확보 실패를 개전 직후의 주요 실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한강철교의 폭파가 불완전했고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공세 재개까지 3일여의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이 효과가 반감된 것은 사실이나, 공자의 변덕 혹은 정치적 결정으로 인한 공세중단을 바라고 방어에 나설수는 없는 노릇이고, 한강 대안측에 방어선을 구축함에 있어서도 적의 기동로가 한강철교 한 곳으로 제한되는 것은 승수효과를 통해 방자측에서 일시적/국지적 비교우위를 달성하기 용이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2]
-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논란
한강 인도교 폭파가 가치있는 전략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비판적인 시각이 주를 이룬다. 특히 국군의 열세를 숨기고, 홀로 도망쳐놓고는 자신이 서울에 머무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국민을 기만했다는 점이 가장 비판을 받는 점이다. 또한 이 전략은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고 다리를 건너 피난을 가는 무고한 민간인을 아군이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여러 실정과 독재행위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서 이승만 개인의 대표적인 과로 상징화되고 있다.
멀티미디어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정리 영상
매체 속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 웰컴 투 동막골
웰컴 투 동막골 속 국군 장교 표현철은 극 중 상관의 명령에 의해 한강 대교를 폭파한 장본인으로 나오며 이를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