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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년 [[주시경]]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C%84%9D%EC%98%81 지석영]의 주도로 설립된 국문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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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가며 민족어 3대 규범집(『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하였다. 3대 규범집은 다가올 민족국가 즉 독립국가에서 곧바로 국어 규범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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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어학회는 민족어 규범으로 된 『조선어대사전』을 기어코 출판하고자 하였다. 사전 편찬은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 오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앙양하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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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은 우리 말글이 침략자들에 의해 말살되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걸고 항쟁하였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사업은 일제의 조선 통치에 반하는 행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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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극로]]는 조선어사전의 완성을 통해 우리말과 조선의 혼을 영구히 유지하고자 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완수해 놓으면, 때가 돌아오는 날 즉 조국이 광복되는 날에 민족어를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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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 독립의 준비 차원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이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이극로의 발언은 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모든 전임위원의 인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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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징, 이극로를 포함하여 사전편찬에 관여한 사람들의 노고로 드디어 『조선어사전』의 원고가 나왔다. 우리말사전의 제목은 『조선어사전』으로 되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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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어학회는 1940년 3월 7일에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조선어대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하였다. 조선어대사전의 용어로 16만 어휘, 삽화 3천여 매를 완성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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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어사전』 원고는 많은 부분 일제로부터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1940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출판 허가를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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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침략자들이 일본어로 해설하여 간행한 『조선어사전』(1920)보다 약 3배가 많은 조선어 어휘를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 위원들이 수집·주해하였다는 사실에서 조선 문화의 우월성을 민족어사전 편찬을 통해 입증하였다고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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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20002&cid=62048&categoryId=62048 네이버 지식백과-한국근현대사사전]</ref>=== | ||
+ | *조선어학회 사건 | ||
+ | 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0여 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되었다. 해방 후 49년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글학회는 29년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 6권의 <큰사전>을 완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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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조선어학회3.jpg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8678&cid=59011&categoryId=59011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현충사 참배사진(1936.7.3)] | ||
+ | 파일:조선어학회6.jpg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8678&cid=59011&categoryId=59011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조선어학회, 19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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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했던 노력들에 대한 영화인 말모이와 모티브가 된 조선어학회의 인물들과 단체 간의 관계를 나타낸 네트워크 그래프 입니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9년 6월 25일 (화) 01:28 기준 최신판
목차
정의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현재 한글학회의 전신 [1]
내용
시대적 배경[2]
- 1930~40 년대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최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일본은 1929년에 경제 대공황을 겪은 이후, 1910년대에 사용한 무단통치 방식을 1930년대부터 다시 사용하며 민족 말살정치를 시작했다.
- 일본은 황국 신민화라는 명목으로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를 강조, 조선의 민족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하고,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어와 조선의 역사를 교육하는 것을 금지했으며,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 일본은 나라의 말과 글에는 혼과 정신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말과 글을 없애는 일에 가장 공을 들였다.
- 그리하여 용기있는 학자들이 뜻을 모아 조선어학회를 설립하게 된다.
설립[3]
- 조선어 연구회(1921)에서 가갸날 제정(1926)
- 마지막으로 이 두 단체를 계승한 조선어학회설립(1931)
활동[4]
-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가며 민족어 3대 규범집(『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하였다. 3대 규범집은 다가올 민족국가 즉 독립국가에서 곧바로 국어 규범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 조선어학회는 민족어 규범으로 된 『조선어대사전』을 기어코 출판하고자 하였다. 사전 편찬은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 오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앙양하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은 우리 말글이 침략자들에 의해 말살되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걸고 항쟁하였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사업은 일제의 조선 통치에 반하는 행위였다.
- 이극로는 조선어사전의 완성을 통해 우리말과 조선의 혼을 영구히 유지하고자 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완수해 놓으면, 때가 돌아오는 날 즉 조국이 광복되는 날에 민족어를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 민족 독립의 준비 차원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이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이극로의 발언은 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모든 전임위원의 인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 한징, 이극로를 포함하여 사전편찬에 관여한 사람들의 노고로 드디어 『조선어사전』의 원고가 나왔다. 우리말사전의 제목은 『조선어사전』으로 되어 있었다.
- 조선어학회는 1940년 3월 7일에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조선어대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하였다. 조선어대사전의 용어로 16만 어휘, 삽화 3천여 매를 완성하였다.
- 『조선어사전』 원고는 많은 부분 일제로부터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1940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출판 허가를 받았다.
- 일제 침략자들이 일본어로 해설하여 간행한 『조선어사전』(1920)보다 약 3배가 많은 조선어 어휘를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 위원들이 수집·주해하였다는 사실에서 조선 문화의 우월성을 민족어사전 편찬을 통해 입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건[5]
- 조선어학회 사건
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0여 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되었다. 해방 후 49년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글학회는 29년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 6권의 <큰사전>을 완간했다.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했던 노력들에 대한 영화인 말모이와 모티브가 된 조선어학회의 인물들과 단체 간의 관계를 나타낸 네트워크 그래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