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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 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의 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 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의 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
− | 쌍릉의 두 봉분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하는 문자를 새겨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 + | 쌍릉의 두 봉분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하는 문자를 새겨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3146&cid=40942&categoryId=33539 명릉]</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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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로 보는 인원왕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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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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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4일 (월) 20:22 판
정의
1687(숙종 13)∼1757(영조 33).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
내용
생애
1687년 11월 3일(음력 9월 29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이조판서 김남중의 3대손이며,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1702년(숙종 28) 10월 3일에 16세의 나이로 숙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홍역, 치통, 종기, 천연두등을 앓았으나 소생했고, 2년 뒤에 혜순(惠順)이라는 호를 받았다.
후궁인 숙빈 최씨, 영빈 김씨와 가깝게 지냈으며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을 지지해 왕세제 책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연잉군이 역모의 주범으로 용의선상에 오르자 몸소 보호하였다.
숙종이 죽은 뒤 경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영조 즉위 이후에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소생은 없었으며 경종 원년(1721년)에는 영조를 왕세제로 등극시키고, 양자로 입적했다.
매사에 엄격하고 강한 결단력으로 조선 후기 궁중의 법도를 바로잡았으며, 그 예로 곡좌 (모로 좌우로 꺾어 앉는 예법) 의 예법을 몸소 실천하였다는 것으로 전해진다.
며느리인 정성왕후가 65세로 승하하고 약 한달 후인 1757년 5월 13일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승하했다.
1722년(경종 2) 자경(慈敬), 1726년(영조 2) 헌열(獻烈), 1740년 광선현익(光宣顯翼), 1747년 강성(康聖), 1751년 정덕(貞德), 1752년 수창(壽昌), 1753년 영복(永福), 1756년 융화(隆化) 등의 존호(尊號)가 올려졌다.
사후에 휘호(徽號) 정의장목(定懿章穆)이 올려졌다.
시호는 혜순자경헌렬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정의장목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定懿章穆仁元王后)이다.
능묘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으며,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 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의 치수도 실물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쌍릉의 두 봉분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하는 문자를 새겨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1]
명릉(단릉)의 모습
재미로 보는 인원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