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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3일 (일) 04:57 기준 최신판
강화도방위체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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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50px]] | |
설립시기 | 숙종 5년(1679) |
GPS | 37.733089N, 126.516555E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18 |
역할 | 강화도 방어 돈대 |
둘레 | |
인원수 | 160 |
상위소속 | 제물진 |
하위소속 |
내용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이다. 윤이제가 강화유수일때 축성되었다. 육지와 강화도를 오가는 나루터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방어시설로 맞은편 육지에 있는 김포 문수산성(文殊山城)과 마주보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要塞)이다. 강화의 삼국시대 이름이 갑비고차(甲比古次)인 것에서 유래하여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이나,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이곳으로 건너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텐데……”라 한탄하여 말했다는 유래도 있다.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면서 강화로 천도하고 강화도 해안을 지키기 위해 외성을 쌓았을 때부터 육지로 가기 위한 요충이었고, 조선 인조 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피난할 때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왕자와 비빈(妃嬪)들이 피난할 때도 이곳을 통하였다. 효종 7년(1656)에 이르러 국방을 강화하고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국방시설을 확충하고 만약의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강화도를 요새화하면서 요충지마다 진(鎭)을 설치하였는데, 그때에 이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갑곶돈대는 통진(通津:지금의 김포시 통진읍)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축조되었는데, 주위가 113보에 지첩이 40이었다. 돈대는 진보다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인데, 이곳에는 대포 8문이 배치되었다. 그 후 숙종 5년(1679)에 이르러 작은 성채모양의 돈대와 포를 장치한 포대가 축조되고, 이곳의 경영이 본격화되어 관리책임자인 병마만호(兵馬萬戶) 아래에 군관(軍官) 36명, 군병(軍兵) 100명, 돈군(墩軍) 24명 즉 총 160명이 소속되고 군량미 157석과 배 8척이 있었다. 이 갑곶나루에는 1875년에 축조된 갑곶포대가 있는데 갑곶돈대는 망해(望海)·제승(制勝)·염주(念珠) 등 세포대와 더불어 제물진(濟物鎭)에 소속되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함대가 6백인의 병력을 이곳으로 상륙시켜 강화성을 점령하였으나, 정족산성(鼎足山城)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 부대에 패한 뒤 물러났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강화동종’을 가져가려 하였으나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등을 약탈하였다.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대신(全權大臣) 구로다[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서 이곳으로 상륙한 다음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역사적인 유적이다. 이곳에는 성 문루인 진해루(鎭海樓)가 있었고, 고려시대 몽고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이섭정(李涉亭)의 터가 있었는데, 그 후 성벽 포대가 폐허화되었다. 1977년에 이르러 옛터에 새로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복원하였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대포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바다를 향해 침입하는 외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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