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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등을 발표했다.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짦다란 사연 하나)",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으며 1971년에는 동아방송 라디오 심야 프로인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기도 하였다. 다시 1973년엔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C를 맡았으며 1976년과 1978년엔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와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그는 MBC-FM에서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의 MC를 맡았으며 기독교 방송의 환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인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에서 '윤형주와 함께'의 MC를 지냈다.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등을 발표했다.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짦다란 사연 하나)",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으며 1971년에는 동아방송 라디오 심야 프로인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기도 하였다. 다시 1973년엔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C를 맡았으며 1976년과 1978년엔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와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그는 MBC-FM에서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의 MC를 맡았으며 기독교 방송의 환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인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에서 '윤형주와 함께'의 MC를 지냈다.
 
<ref>[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D%98%95%EC%A3%BC 윤형주 위키백과]</ref>
 
<ref>[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D%98%95%EC%A3%BC 윤형주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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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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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5일 (토) 23:42 판

정의

대한민국의 포크, CCM 가수

내용

인물정보

  • 세시봉의 초기멤버, 1967년 송창식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 시인 윤동주와 6촌지간이다. 윤동주의 시를 노랫말로 하여 노래를 붙이려고 하였으나, 윤형주의 아버지가 "시도 이미 그 자체로 노래"라며 말렸다고한다.[1]
  • 경기고등학교 출신으로 김민기와 선후배관계이다.
  •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대중적인 음악을 작곡하는 능력이 있다. [2] 대표적으로 "조개 껍질묶어"[3]라는 곡이 있는데, 이는 경포대에서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꼬시기(?) 위해 몇분만에 즉석으로 만든 곡이라고.
  • 대한민국의 국민 CM송은 다 윤형주를 거쳤대도 과언이 아니다.
  • 윤형주의 CM송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클릭
  • 공부도 곧잘 했고 글재주도 좋았고[4], 음악은 물론 사업수완도 좋아 세시봉 활동을 끝내고 사업을 계속해서 했다.

음반

  • M.net 윤형주 음반 검색 결과 중 '정규'앨범 기준

생애 및 활동

서울에서 시인 아버지와 성악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이자 유학생. 유복한 고학력자 가정이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했다. 공부에도 소질이 있었고, 시와 운율에도 조예가 깊어,학창 시절부터 다수의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을 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뜻을 이어 집안에서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길 바랐으나, 본인은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의 설득 끝에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지원,196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968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학하였으나 1971년 중퇴하였다.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등을 발표했다.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짦다란 사연 하나)",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으며 1971년에는 동아방송 라디오 심야 프로인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기도 하였다. 다시 1973년엔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C를 맡았으며 1976년과 1978년엔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와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그는 MBC-FM에서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의 MC를 맡았으며 기독교 방송의 환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인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에서 '윤형주와 함께'의 MC를 지냈다. [5]

에피소드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이미지 출처

인물정보사진
1집 윤형주
네가 하라면 뭐든지 다 할거야/고백
I'll be home for christmas
The best of 윤형주/둘 다섯
윤형주 스테레오 앨범 제 2집

기여

주석

  1. 토크쇼 놀러와에서 언급한 내용
  2. 이러한 음악적인 견해가 송창식과는 달라 종종 부딪히기도
  3. 내 6살, 4살 먹은 조카도 이 노래를 알고 정말 좋아한다. 킬링파트는 "라라라라라라~"
  4. 조선일보에 세시봉이야기를 칼럼으로 연재하기도 했다.
  5. 윤형주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