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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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강렬한 상흔을 남긴 베트남전은 당대의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다양한 영화와 소설이 발표되었다. 종전 이후 15년이 지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전쟁의 후일담을 다룬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미스 사이공]이다. 베트남 전 막바지를 배경으로 미군 병사와 베트남 처녀의 비극적인 사랑과 이별 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서구인의 관점에서 기대하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판타지로 가득 차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미스 사이공]이 발표된 지 20여년이 지난 2011년 한국에서는 뮤지컬 [천국의 눈물]이 만들어졌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가 중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했던 한국의 역사를 생각할 때 당연히 나올 법한 작품이지만 이 뮤지컬의 출발점은 독특하게도 한 편의 뮤직비디오였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에 출발한 뮤지컬


90년대 후반 국내 가요계에서는 큰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형 뮤직 비디오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영화 한편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스타 캐스팅에 더해 해외 로케를 진행해서 이국적인 볼거리를 더한 드라마틱한 뮤직비디오는 시청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아 음반 판매량으로 직결되었다. 프로듀서 김광수 대표는 무명의 신인 조성모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To Heaven’의 대성공 이후 한층 규모를 키운 ‘아시나요’로 굳히기를 시도했는데, 베트남전이 한창인 전장에서 핀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뮤직비디오가 뮤지컬 [천국의 눈물]의 출발점이다.

코어콘텐츠미디어의 김광수 대표는 ‘아시나요’의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이를 모티브로 삼아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수 있는 대형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고,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와 의기투합해 3년여의 제작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작곡에 프랭크 와일드혼, 작사에 로빈 러너, 무대 디자인에 데이비드 갈로, 안무에 이란영 등 국내외 정상급 스태프의 참여가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시나요’의 뮤직비디오는 전쟁이 한창인 마을을 중심으로 베트남 소녀와 한국인 병사가 사랑에 빠지지만 포화 속에 희생당하고 마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 타이즈의 뮤직비디오이기는 했지만 그 내용대로 충실하게 뮤지컬을 만드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사건과 갈등이 부족하고 주 무대가 되는 배경이 지나치게 한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는데다가 내전 중인 베트남의 시골 마을과 밀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 뮤지컬적인 볼거리를 만들어 낼만한 기회가 적었다. 이를 보완해 나가면서 [천국의 눈물]은 점차 출발점인 ‘아시나요’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멀어져 갔다. 이만희 작가가 극으로 풀어낼 수 있는 내용을 초기대본으로 정리하고,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피비 황이 최종 대본을 완성했다.

수정된 대본은 작품의 주요 배경을 사이공의 물랑루즈 클럽 ‘펄’과 아직 화염에 휩싸이기 전인 도시의 오랜 명승지와 삶의 터전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인 최전방 전선을 함께 다룬다. 2막에서는 린과 쿠엔이 그레이슨 대령을 따라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작품의 주 무대가 70년대의 샌프란시스코가 된다.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갔다가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넘어오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화려한 공연이 막을 올리는 서울의 대극장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에 확신을 갖지 못한 현재 티아나의 시점에서 중년의 준을 통해 돌아간 과거는 오래된 앨범을 열었을 때 떠오르는 기억처럼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그려진다. 이 작업은 토니상을 수상한 바 있는 무대디자이너 데이비드 갈로가 맡았다.


[지킬 앤 하이드]의 작곡가 와일드혼의 참여


순수한 한국군 청년이라는 남자주인공의 캐릭터는 뮤직비디오와 같지만 작가 지망생이라거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영웅적인 면이 추가되었다. 여주인공은 베트남 시골 마을의 소녀에서 화려한 클럽의 스타로 완전히 달라졌지만 가장 큰 변화는 삼각관계를 이루는 미군 장교의 등장이다. 그레이슨 대령이라는 이 인물은 아시아인의 시선으로 본 베트남 전쟁이라는 이 작품의 컨셉과 브로드웨이 진출이라는 제작목표를 고려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로 보인다.

[천국의 눈물]의 제작과정이 처음 언론에 알려졌을 때 가장 큰 관심을 끈 요소는 [지킬 앤 하이드]로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뮤지컬 작곡가 중 한 사람이 된 프랭크 와일드혼의 참여였다. ‘지금 이 순간’, ‘원스 어폰 어 드림’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뮤지컬 팬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진 그는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드라마틱하면서도 스케일이 큰 발라드 곡을 쓰는 데 능숙한 작곡가다. 전장에서 피어난 사랑을 음악으로 그려내기 위해 와일드혼은 아시아적인 멜로디가 가미된 아름다운 발라드부터 포탄 냄새을 잊으려는 군인들로 붐비는 클럽의 관능적이고 화려한 카바레 음악, 사랑에 배신당한 그레이슨 대령의 심경을 대변하는 우울한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대중적인 곡들을 썼다. 가장 공을 들인 곡은 역시 작품의 중심에 있는 불운한 연인들이 함께 부르는 듀엣 ‘들리나요’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이 노래는 이별 후 서로를 그리워하며 애달픈 마음으로 부르는 솔로 곡으로 다시 반복 된다.

치열한 전투와 시가전은 사실적으로 그려지기 보다는 듣는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정서가 전해지는 와일도혼의 음악과 스케일이 큰 안무에 능숙한 이란영 안무가의 내공에 기대고 있다. ‘세상의 끝’, ‘비처럼 내리는 불길’, ‘배워야만 했어’는 베트남 전에 얽힌 세 집단의 심리를 대변하는 데, ‘세상의 끝’이 자신의 신념과 이념을 위해서 전쟁터에 뛰어든 베트콩 게릴라들과 전쟁터가 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춤추는 클럽댄서들의 상반된 모습을, ‘비처럼 내리는 불길’에서는 일상의 공간이 완전히 파괴된 베트남 사람들의 공포를, ‘배워야만 했어’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끌려온 전쟁에서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낯모르는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고통 받는 젊은 병사의 고뇌를 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살기 위해 배신을 하고, 원치 않는 생이별을 하고, 또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채로 그리워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엇갈린 운명은 세계적인 디바가 된 티아나가 부르는 클로징 넘버 ‘호랑이와 비둘기’를 통해 오랜 상흔을 어루만지는 화해의 대단원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