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무(武舞)
제례의식에서 무(武)를 상징하는 무무는 문(文)을 상징하는 문무(文舞)와 함께 필수적인 일무로 연행되면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왕조를 거쳐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고 있다. 세종(1418~1450) 때 무무는 58명의 악생(樂生)으로 구성됐다. 무원(舞員)은 48명이었고, 나머지 10명은 정(旌)·순(錞)·탁(鐸)·요(鐃)·탁(鐲)·응(應)·아(雅)·상(相)·둑(纛) 같은 의물을 들었다.
이때 무원과 정을 든 악생은 모두 피변관을 쓰고 표문대구고(豹文大口袴)와 비란삼(緋鸞衫)에 황화갑(黃畵甲)을 입고, 기량대(起梁帶)를 띠고, 백포말(白布襪)에 오피리(烏皮履)를 신었다. 그 외의 인원은 홍말액(紅抹額)을 단 무변(武弁)을 쓰고, 백주고(白紬袴)와 백주중단(白紬中單) 위에 비란삼을 입었다.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포말에 오피리를 신었다.
성종(1469~1494) 때 무무의 인원은 48명과 정(旌) 2명이었다. 이들은 피변을 쓰고, 흡주의(皀紬衣)·백주중단·백주군(白紬裙)에 금동혁대를 띠고, 백포말에 오피리를 신었다. 조선초기 종묘제향(宗廟祭享) 때 연행된 무무는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라고 불리었다. 세종조(1418~1450) 회례연(會禮宴)에서 제5작을 올릴 때, 헌가(軒架)는 "무열지곡"(武烈之曲)을 연주하고, 무무가 들어와 춤을 춘다. 천신인 풍운뢰우(風雲雷雨)·산천(山川)·성황(城隍)의 제사 때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을, 문무(文舞)가 물러가고 무무가 나올 때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송신(送神)에는 송협종궁(送夾鍾宮)의 "원안지악"(元安之樂)을 연주한다.
현재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과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 공연 때 헌가에서 연행되는 무무의 인원과 의물 그리고 복식이 문묘와 종묘의 경우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다. 문묘제향(文廟祭享) 때 연행되는 무무는 64명으로 구성된 팔일무(八佾舞)이다. 무원은 오른손에 척(戚) 곧 도끼를 들고 왼손에는 간(干) 즉 방패를 들며, 피변관(皮弁冠)을 쓰고 홍주의(紅紬衣)에 남사대(藍絲帶)를 띠고 목화(木靴)를 신는다. "성안지악"(成安之樂)에 맞추어 추는 무무는 아헌과 종헌절차에서만 연행된다.
한편 종묘제례의 경우 무무는 36명(현재는 64명)의 육일무(六佾舞)이다. 앞 세 줄의 무원은 검(劍)을 들고 뒤 세 줄은 창(槍)을 양손에 들고 춤을 추며, 무원은 화화복두(畵花幞頭)를 쓰고 홍주의 위에 남사대를 띠고 목화를 신는다. 종묘의 무무도 문묘의 경우처럼 아헌(亞獻)과 종헌(終獻) 절차에서만 "정대업"(定大業)의 반주음악에 맞추어 연행된다. 현행 무무의 복식과 인원은 조선초기의 것과 다르다.
Meta Data
- 타입: 무용
- 항목명: 무무(武舞)
- Writer: 조대웅
웹 자원
한겨레음악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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