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dh.aks.ac.kr/Edu/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user=Hufs%EC%98%A4%EB%AF%B8%EB%9E%98&feedformat=atomDH 교육용 위키 - 사용자 기여 [ko]2024-03-29T11:23:23Z사용자 기여MediaWiki 1.23.13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91%EC%9D%B8%EC%96%91%EC%9A%94병인양요2019-06-25T14:52:07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이다.<br />
<br />
=='''내용'''==<br />
<br />
==='''역사적 배경'''===<br />
병인사옥이라고도 한다.<br />
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금압령으로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이 학살된 [[병인박해]]가 발생했다. 이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이 3명 중,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되었다.<br />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은 프랑스 군대가 방심하는 사이 기습하여 프랑스군 3명을 죽였고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br />
<br />
==='''경과'''===<br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center;"<br />
|+ 표1-2. 병인양요의 경과<br />
! 날짜 || 내용<br />
|-<br />
|1866.10.16 || 강화부 점령<br />
|-<br />
|1866.10.26 || 문수산성 전투<br />
|-<br />
|1866.11.09 || 정족산성 전투<br />
|-<br />
|1866.11.10 || 프랑스군 함대 철수<br />
|}<br />
<br />
==='''결과'''===<br />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그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고 방화로 인해 [[외규장각]] 전각이 소실되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3%91%EC%9D%B8%EC%96%91%EC%9A%94&ridx=0&tot=463 병인양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9%B8%EA%B7%9C%EC%9E%A5%EA%B0%81%20%EC%9D%98%EA%B6%A4&ridx=0&tot=1283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반면,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또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B3%91%EC%9D%B8%EC%96%91%EC%9A%94 병인양요, 위키백과]</ref><br />
<br />
==강화 고려산 백련사와 병인양요 이야기==<br />
'''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3)'''(103쪽)에 의하면 ...<br />
<br />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법해 온 [[병인양요]] 때, [[장녕전]]에 봉안되어 있던 [[숙종]]관 [[영조]]의 [[어진]]을 [[백련사]]에 잠시 보관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강화유수]] [[이인기]]가 장계를 올려 장녕전에 모셨던 주 어진을 서문 밨에 있는 백련사로 옮겨 놓았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다시 어진은 왕명으로 서울의 궁궐로 옮기게 되었다. [[고재형]]이 지음 [[심도기행]]에는 1866년 9월 프랑스 군이 쳐들어 와 [[강화성]]이 함락되었을 때, [[별검 최씨]]가 두 어진을 받들고 서울로 들어와 궁 안의 진전에 종안하였다고 하였다."<br />
<br />
=='''멀티미디어'''==<br />
==='''연표'''===<br />
<html><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Yb9DyEBqTCeF9gFZRNQzm-XN3IH4Q4LeM3Fmhrj3np0&font=Default&lang=en&initial_zoom=2&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 등<br />
<br />
=='''참고문헌'''==<br />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6&totalCount=6&kristalProtocol=&itemId=tcmd&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B%B3%91%EC%9D%B8%EC%96%91%EC%9A%94&brokerPagingInfo=&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B3%91%EC%9D%B8%EC%96%91%EC%9A%94&searchKeywordConjunction=AND 병인양요, 근대사연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br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177 병인양요로써 더 강력해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사건]]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91%EC%9D%B8%EC%96%91%EC%9A%94병인양요2019-06-25T14:48:25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이다.<br />
<br />
=='''내용'''==<br />
<br />
==='''역사적 배경'''===<br />
병인사옥이라고도 한다.<br />
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금압령으로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이 학살된 [[병인박해]]가 발생했다. 이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이 3명 중,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되었다.<br />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은 프랑스 군대가 방심하는 사이 기습하여 프랑스군 3명을 죽였고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br />
<br />
==='''경과'''===<br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center;"<br />
|+ 표1-2. 병인양요의 경과<br />
! 날짜 || 내용<br />
|-<br />
|1866.10.16 || 강화부 점령<br />
|-<br />
|1866.10.26 || 문수산성 전투<br />
|-<br />
|1866.11.09 || 정족산성 전투<br />
|-<br />
|1866.11.10 || 프랑스군 함대 철수<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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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br />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그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고 방화로 인해 [[외규장각]] 전각이 소실되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3%91%EC%9D%B8%EC%96%91%EC%9A%94&ridx=0&tot=463 병인양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9%B8%EA%B7%9C%EC%9E%A5%EA%B0%81%20%EC%9D%98%EA%B6%A4&ridx=0&tot=1283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반면,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또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B3%91%EC%9D%B8%EC%96%91%EC%9A%94 병인양요, 위키백과]</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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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려산 백련사와 병인양요 이야기==<br />
'''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3)'''(103쪽)에 의하면 ...<br />
<br />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법해 온 [[병인양요]] 때, [[장녕전]]에 봉안되어 있던 [[숙종]]관 [[영조]]의 [[어진]]을 [[백련사]]에 잠시 보관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강화유수]] [[이인기]]가 장계를 올려 장녕전에 모셨던 주 어진을 서문 밨에 있는 백련사로 옮겨 놓았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다시 어진은 왕명으로 서울의 궁궐로 옮기게 되었다. [[고재형]]이 지음 [[심도기행]]에는 1866년 9월 프랑스 군이 쳐들어 와 [[강화성]]이 함락되었을 때, [[별검 최씨]]가 두 어진을 받들고 서울로 들어와 궁 안의 진전에 종안하였다고 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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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br />
==='''연표'''===<br />
<html><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Yb9DyEBqTCeF9gFZRNQzm-XN3IH4Q4LeM3Fmhrj3np0&font=Default&lang=en&initial_zoom=2&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 등<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사건]]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91%EC%9D%B8%EC%96%91%EC%9A%94병인양요2019-06-25T14:45:33Z<p>Hufs오미래: /* 역사적 배경 */</p>
<hr />
<div>=='''정의'''==<br />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이다.<br />
<br />
=='''내용'''==<br />
<br />
==='''역사적 배경'''===<br />
병인사옥이라고도 한다.<br />
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금압령으로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이 학살된 [[병인박해]]가 발생했다. 이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이 3명 중,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되었다.<br />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은 프랑스 군대가 방심하는 사이 기습하여 프랑스군 3명을 죽였고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br />
<br />
==='''경과'''===<br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center;"<br />
|+ 표1-2. 병인양요의 경과<br />
! 날짜 || 내용<br />
|-<br />
|1866.10.16 || 강화부 점령<br />
|-<br />
|1866.10.26 || 문수산성 전투<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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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11.09 || 정족산성 전투<br />
|-<br />
|1866.11.10 || 프랑스군 함대 철수<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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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br />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고 방화로 인해 [[외규장각]] 전각이 소실되었다.<br />
<br />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3%91%EC%9D%B8%EC%96%91%EC%9A%94&ridx=0&tot=463 병인양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9%B8%EA%B7%9C%EC%9E%A5%EA%B0%81%20%EC%9D%98%EA%B6%A4&ridx=0&tot=1283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강화 고려산 백련사와 병인양요 이야기==<br />
'''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3)'''(103쪽)에 의하면 ...<br />
<br />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법해 온 [[병인양요]] 때, [[장녕전]]에 봉안되어 있던 [[숙종]]관 [[영조]]의 [[어진]]을 [[백련사]]에 잠시 보관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강화유수]] [[이인기]]가 장계를 올려 장녕전에 모셨던 주 어진을 서문 밨에 있는 백련사로 옮겨 놓았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다시 어진은 왕명으로 서울의 궁궐로 옮기게 되었다. [[고재형]]이 지음 [[심도기행]]에는 1866년 9월 프랑스 군이 쳐들어 와 [[강화성]]이 함락되었을 때, [[별검 최씨]]가 두 어진을 받들고 서울로 들어와 궁 안의 진전에 종안하였다고 하였다."<br />
<br />
=='''멀티미디어'''==<br />
==='''연표'''===<br />
<html><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Yb9DyEBqTCeF9gFZRNQzm-XN3IH4Q4LeM3Fmhrj3np0&font=Default&lang=en&initial_zoom=2&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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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사건]]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풍정도감의궤2019-06-25T14:41:48Z<p>Hufs오미래: /* 이미지 */</p>
<hr />
<div>=='''정의'''==<br />
인목왕후 진풍정<ref>대궐 안에서 여는 잔치의 한 가지.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크고 의식이 더 정중하였음. 출처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12&cid=41826&categoryId=41826 네이버 지식백과]</ref>의 모든 내용들을 글과 그림으로 수록하여 남긴 [[의궤|조선왕실의궤]].<br />
<br />
=='''내용'''==<br />
==='''의의'''===<br />
풍정은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예례를 독특하고 독자적인 모습으로 자체 규범화한 우리나라의 전통 풍속으로, 풍정도감의궤는 1630년 3월 22일에 인조가 선조비 인목대비를 위하여 인경궁에 연 진풍정의 모든 축제 과정과 의복, 악기 등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책에 담은 의궤이다.<br />
<br />
2011년에 프랑스로부터 환수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또한 반환된 의궤 297권 중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외규장각]]에만 존재했던 유일본 30권 중 하나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풍정 의식을 기록한 [[의궤]]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이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dataType=20&searchWord=%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match=false&callFunc=goSearch%28%2720%27%2C+%271%27%2C+%27n%27%2C+%27%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27%29%3B 풍정도감의궤, 조선왕조실록사전]</ref>외규장각 환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인 만큼 아직 소유주와 권리대상은 프랑스이며, 1,757종 2,751책으로 이루어진 보물 제1901호 [[의궤|조선왕실의궤]] 목록에는 빠져 있다.<br />
<br />
==='''내용'''===<br />
장악원의 악공과 무동, 시각장애인들로 이루어진 관현맹인들이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였으며, 150여명의 중궁예연 여기, 10여명의 연화대, 70여명의 여의 등도 참가하였다. 풍정도감의궤가 기록한 1630년 축제에는 헌선도, 수연장, 몽금척, 봉래의, 연화대, 포구락, 향발무, 무고, 처용무의 9종의 무용이 공연되었다. 1600년대 초중반 당시 인목 왕후의 앞에 올려졌던 우리 나라의 고전 궁중 음식들의 상차림 모습, 조리 방법, 조리 재료 등 각종 레시피와 취식 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ref>[https://namu.wiki/w/%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 풍정도감의궤,나무위키]</ref><br />
<br />
==='''공개'''===<br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18일까지 개최된 '145년 만의 귀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풍정도감의궤1.jpg|200px|center]]<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풍정도감의궤의 표지<br />
<br />
[[파일:풍정도감의궤2.jpg|300px|center]]<ref>[http://www.hani.co.kr/arti/PRINT/485825.html 2011-07-04, 정갈한 옛 글씨·섬세한 행렬도…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5점 첫 공개]</ref><br />
<br />
풍정도감에 나타난 행렬도<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br />
*[https://blog.naver.com/danceins/70086555593 제5회 외규장각 도서-풍정도감의궤재현조선왕조 궁중연회의 내용을 담은 danceins님의 블로그]<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풍정도감의궤2019-06-25T14:41:32Z<p>Hufs오미래: /* 이미지 */</p>
<hr />
<div>=='''정의'''==<br />
인목왕후 진풍정<ref>대궐 안에서 여는 잔치의 한 가지.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크고 의식이 더 정중하였음. 출처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12&cid=41826&categoryId=41826 네이버 지식백과]</ref>의 모든 내용들을 글과 그림으로 수록하여 남긴 [[의궤|조선왕실의궤]].<br />
<br />
=='''내용'''==<br />
==='''의의'''===<br />
풍정은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예례를 독특하고 독자적인 모습으로 자체 규범화한 우리나라의 전통 풍속으로, 풍정도감의궤는 1630년 3월 22일에 인조가 선조비 인목대비를 위하여 인경궁에 연 진풍정의 모든 축제 과정과 의복, 악기 등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책에 담은 의궤이다.<br />
<br />
2011년에 프랑스로부터 환수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또한 반환된 의궤 297권 중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외규장각]]에만 존재했던 유일본 30권 중 하나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풍정 의식을 기록한 [[의궤]]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이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dataType=20&searchWord=%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match=false&callFunc=goSearch%28%2720%27%2C+%271%27%2C+%27n%27%2C+%27%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27%29%3B 풍정도감의궤, 조선왕조실록사전]</ref>외규장각 환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인 만큼 아직 소유주와 권리대상은 프랑스이며, 1,757종 2,751책으로 이루어진 보물 제1901호 [[의궤|조선왕실의궤]] 목록에는 빠져 있다.<br />
<br />
==='''내용'''===<br />
장악원의 악공과 무동, 시각장애인들로 이루어진 관현맹인들이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였으며, 150여명의 중궁예연 여기, 10여명의 연화대, 70여명의 여의 등도 참가하였다. 풍정도감의궤가 기록한 1630년 축제에는 헌선도, 수연장, 몽금척, 봉래의, 연화대, 포구락, 향발무, 무고, 처용무의 9종의 무용이 공연되었다. 1600년대 초중반 당시 인목 왕후의 앞에 올려졌던 우리 나라의 고전 궁중 음식들의 상차림 모습, 조리 방법, 조리 재료 등 각종 레시피와 취식 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ref>[https://namu.wiki/w/%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 풍정도감의궤,나무위키]</ref><br />
<br />
==='''공개'''===<br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18일까지 개최된 '145년 만의 귀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풍정도감의궤1.jpg|200px|center]]<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풍정도감의궤의 표지<br />
<br />
[[파일:풍정도감의궤2.jpg|200px|center]]<ref>[http://www.hani.co.kr/arti/PRINT/485825.html 2011-07-04, 정갈한 옛 글씨·섬세한 행렬도…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5점 첫 공개]</ref><br />
<br />
풍정도감에 나타난 행렬도<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br />
*[https://blog.naver.com/danceins/70086555593 제5회 외규장각 도서-풍정도감의궤재현조선왕조 궁중연회의 내용을 담은 danceins님의 블로그]<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풍정도감의궤2019-06-25T14:40:48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인목왕후 진풍정<ref>대궐 안에서 여는 잔치의 한 가지.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크고 의식이 더 정중하였음. 출처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12&cid=41826&categoryId=41826 네이버 지식백과]</ref>의 모든 내용들을 글과 그림으로 수록하여 남긴 [[의궤|조선왕실의궤]].<br />
<br />
=='''내용'''==<br />
==='''의의'''===<br />
풍정은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예례를 독특하고 독자적인 모습으로 자체 규범화한 우리나라의 전통 풍속으로, 풍정도감의궤는 1630년 3월 22일에 인조가 선조비 인목대비를 위하여 인경궁에 연 진풍정의 모든 축제 과정과 의복, 악기 등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책에 담은 의궤이다.<br />
<br />
2011년에 프랑스로부터 환수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또한 반환된 의궤 297권 중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외규장각]]에만 존재했던 유일본 30권 중 하나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풍정 의식을 기록한 [[의궤]]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이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dataType=20&searchWord=%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match=false&callFunc=goSearch%28%2720%27%2C+%271%27%2C+%27n%27%2C+%27%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27%29%3B 풍정도감의궤, 조선왕조실록사전]</ref>외규장각 환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인 만큼 아직 소유주와 권리대상은 프랑스이며, 1,757종 2,751책으로 이루어진 보물 제1901호 [[의궤|조선왕실의궤]] 목록에는 빠져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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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br />
장악원의 악공과 무동, 시각장애인들로 이루어진 관현맹인들이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였으며, 150여명의 중궁예연 여기, 10여명의 연화대, 70여명의 여의 등도 참가하였다. 풍정도감의궤가 기록한 1630년 축제에는 헌선도, 수연장, 몽금척, 봉래의, 연화대, 포구락, 향발무, 무고, 처용무의 9종의 무용이 공연되었다. 1600년대 초중반 당시 인목 왕후의 앞에 올려졌던 우리 나라의 고전 궁중 음식들의 상차림 모습, 조리 방법, 조리 재료 등 각종 레시피와 취식 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ref>[https://namu.wiki/w/%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 풍정도감의궤,나무위키]</ref><br />
<br />
==='''공개'''===<br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18일까지 개최된 '145년 만의 귀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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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풍정도감의궤1.jpg|200px|center]]<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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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정도감의궤의 표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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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풍정도감의궤2.jpg|200px|center]]<ref>[http://www.hani.co.kr/arti/PRINT/485825.html 2011-07-04, 정갈한 옛 글씨·섬세한 행렬도…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5점 첫 공개]</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br />
*[https://blog.naver.com/danceins/70086555593 제5회 외규장각 도서-풍정도감의궤재현조선왕조 궁중연회의 내용을 담은 danceins님의 블로그]<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2.jpg파일:풍정도감의궤2.jpg2019-06-25T14:38:56Z<p>Hufs오미래: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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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풍정도감의궤2019-06-25T14:35:38Z<p>Hufs오미래: /* 멀티미디어 */</p>
<hr />
<div>=='''정의'''==<br />
인목왕후 진풍정<ref>대궐 안에서 여는 잔치의 한 가지.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크고 의식이 더 정중하였음. 출처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12&cid=41826&categoryId=41826 네이버 지식백과]</ref>의 모든 내용들을 글과 그림으로 수록하여 남긴 [[의궤|조선왕실의궤]].<br />
<br />
=='''내용'''==<br />
==='''의의'''===<br />
풍정은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예례를 독특하고 독자적인 모습으로 자체 규범화한 우리나라의 전통 풍속으로, 풍정도감의궤는 1630년 3월 22일에 인조가 선조비 인목대비를 위하여 인경궁에 연 진풍정의 모든 축제 과정과 의복, 악기 등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책에 담은 의궤이다.<br />
<br />
2011년에 프랑스로부터 환수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또한 반환된 의궤 297권 중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외규장각]]에만 존재했던 유일본 30권 중 하나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풍정 의식을 기록한 [[의궤]]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이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dataType=20&searchWord=%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match=false&callFunc=goSearch%28%2720%27%2C+%271%27%2C+%27n%27%2C+%27%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27%29%3B 풍정도감의궤, 조선왕조실록사전]</ref>외규장각 환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인 만큼 아직 소유주와 권리대상은 프랑스이며, 1,757종 2,751책으로 이루어진 보물 제1901호 [[의궤|조선왕실의궤]] 목록에는 빠져 있다.<br />
<br />
==='''내용'''===<br />
장악원의 악공과 무동, 시각장애인들로 이루어진 관현맹인들이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였으며, 150여명의 중궁예연 여기, 10여명의 연화대, 70여명의 여의 등도 참가하였다. 풍정도감의궤가 기록한 1630년 축제에는 헌선도, 수연장, 몽금척, 봉래의, 연화대, 포구락, 향발무, 무고, 처용무의 9종의 무용이 공연되었다. 1600년대 초중반 당시 인목 왕후의 앞에 올려졌던 우리 나라의 고전 궁중 음식들의 상차림 모습, 조리 방법, 조리 재료 등 각종 레시피와 취식 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ref>[https://namu.wiki/w/%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 풍정도감의궤,나무위키]</ref><br />
<br />
==='''공개'''===<br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18일까지 개최된 '145년 만의 귀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풍정도감의궤1.jpg|200px|center]]<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풍정도감의궤의 표지<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br />
*[https://blog.naver.com/danceins/70086555593 제5회 외규장각 도서-풍정도감의궤재현조선왕조 궁중연회의 내용을 담은 danceins님의 블로그]<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98%EA%B6%A4의궤2019-06-25T14:34:32Z<p>Hufs오미래: /* 참고문헌 */</p>
<hr />
<div>=='''정의'''==<br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한 책.<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내용'''==<br />
==='''정의'''===<br />
‘의식의 궤범’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다양한 의궤'''===<br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제작한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이다. 조선 후기에는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에서 의궤를 꾸준히 작성하였다. 영조 대에 가장 많은 의궤가 제작되었고, 숙종·순조·고종 대에도 많은 의궤가 작성되었다. 대한제국이 있었던 14년 동안(1897~1910년)에는 총 68종의 의궤가 제작되었다. 이는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 전례를 갖추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이왕직에서 의궤를 작성하였다.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는 1942년에 작성된 『종묘영녕전의궤』이지만 이는 장부책에 불과하고, 1928년에 작성된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가 형태를 제대로 갖추면서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이다. 조선 왕조의 의궤는 1395년부터 1928년까지 530년 동안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1601년부터 1928년까지 제작된 의궤가 남아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jpg|300px|center]] <center>명성황후의 장례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center><ref>[http://heritage.unesco.or.kr/%EC%A1%B0%EC%84%A0%EC%99%95%EC%A1%B0-%E3%80%8E%EC%9D%98%EA%B6%A4%E5%84%80%E8%BB%8C%E3%80%8F/ 조선왕조 『의궤(儀軌)』, 유네스코 유산]</ref><br />
<br />
[[파일:진찬의궤.jpg|300px|center]] <center>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베푼 잔치의 기록인 '''진찬의궤'''</center><ref>[http://www.museum.seoul.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8202&mcseqno2=00000&cdLanguage=KOR 진찬의궤, 서울역사박물관]</ref><br />
<br />
[[파일:의궤8일.jpg|300px|center]] <center> KBS에서 방영했던 3D 다큐멘터리.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다루었다.</center><ref>[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5184 의궤, 8일간의 축제, 다음 영화]</ref><br />
<br />
==='''동영상'''===<br />
EBS Culture에서 2014년 4월 8일에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조선, 그 찬란한 기록의 역사 - 기록문화의 꽃, 의궤'''<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1JDQcjM9X_c"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D%98%EA%B6%A4(%E5%84%80%E8%BB%8C) 의궤, 위키실록사전]<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풍정도감의궤2019-06-25T14:30:38Z<p>Hufs오미래: /* 참고 */</p>
<hr />
<div>=='''정의'''==<br />
인목왕후 진풍정<ref>대궐 안에서 여는 잔치의 한 가지.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크고 의식이 더 정중하였음. 출처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12&cid=41826&categoryId=41826 네이버 지식백과]</ref>의 모든 내용들을 글과 그림으로 수록하여 남긴 [[의궤|조선왕실의궤]].<br />
<br />
=='''내용'''==<br />
==='''의의'''===<br />
풍정은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예례를 독특하고 독자적인 모습으로 자체 규범화한 우리나라의 전통 풍속으로, 풍정도감의궤는 1630년 3월 22일에 인조가 선조비 인목대비를 위하여 인경궁에 연 진풍정의 모든 축제 과정과 의복, 악기 등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책에 담은 의궤이다.<br />
<br />
2011년에 프랑스로부터 환수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또한 반환된 의궤 297권 중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외규장각]]에만 존재했던 유일본 30권 중 하나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풍정 의식을 기록한 [[의궤]]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이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dataType=20&searchWord=%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match=false&callFunc=goSearch%28%2720%27%2C+%271%27%2C+%27n%27%2C+%27%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27%29%3B 풍정도감의궤, 조선왕조실록사전]</ref>외규장각 환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인 만큼 아직 소유주와 권리대상은 프랑스이며, 1,757종 2,751책으로 이루어진 보물 제1901호 [[의궤|조선왕실의궤]] 목록에는 빠져 있다.<br />
<br />
==='''내용'''===<br />
장악원의 악공과 무동, 시각장애인들로 이루어진 관현맹인들이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였으며, 150여명의 중궁예연 여기, 10여명의 연화대, 70여명의 여의 등도 참가하였다. 풍정도감의궤가 기록한 1630년 축제에는 헌선도, 수연장, 몽금척, 봉래의, 연화대, 포구락, 향발무, 무고, 처용무의 9종의 무용이 공연되었다. 1600년대 초중반 당시 인목 왕후의 앞에 올려졌던 우리 나라의 고전 궁중 음식들의 상차림 모습, 조리 방법, 조리 재료 등 각종 레시피와 취식 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ref>[https://namu.wiki/w/%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 풍정도감의궤,나무위키]</ref><br />
<br />
==='''공개'''===<br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18일까지 개최된 '145년 만의 귀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풍정도감의궤1.jpg|200px|center]]<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풍정도감의궤의 표지<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br />
=='''참고'''==<br />
*[https://blog.naver.com/danceins/70086555593 제5회 외규장각 도서-풍정도감의궤재현조선왕조 궁중연회의 내용을 담은 danceins님의 블로그]<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풍정도감의궤2019-06-25T14:29:43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인목왕후 진풍정<ref>대궐 안에서 여는 잔치의 한 가지.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크고 의식이 더 정중하였음. 출처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12&cid=41826&categoryId=41826 네이버 지식백과]</ref>의 모든 내용들을 글과 그림으로 수록하여 남긴 [[의궤|조선왕실의궤]].<br />
<br />
=='''내용'''==<br />
==='''의의'''===<br />
풍정은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예례를 독특하고 독자적인 모습으로 자체 규범화한 우리나라의 전통 풍속으로, 풍정도감의궤는 1630년 3월 22일에 인조가 선조비 인목대비를 위하여 인경궁에 연 진풍정의 모든 축제 과정과 의복, 악기 등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책에 담은 의궤이다.<br />
<br />
2011년에 프랑스로부터 환수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또한 반환된 의궤 297권 중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외규장각]]에만 존재했던 유일본 30권 중 하나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풍정 의식을 기록한 [[의궤]]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이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dataType=20&searchWord=%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match=false&callFunc=goSearch%28%2720%27%2C+%271%27%2C+%27n%27%2C+%27%ED%9C%98%EA%B2%BD%EC%9B%90%EC%9B%90%EC%86%8C%EB%8F%84%EA%B0%90%27%29%3B 풍정도감의궤, 조선왕조실록사전]</ref>외규장각 환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인 만큼 아직 소유주와 권리대상은 프랑스이며, 1,757종 2,751책으로 이루어진 보물 제1901호 [[의궤|조선왕실의궤]] 목록에는 빠져 있다.<br />
<br />
==='''내용'''===<br />
장악원의 악공과 무동, 시각장애인들로 이루어진 관현맹인들이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였으며, 150여명의 중궁예연 여기, 10여명의 연화대, 70여명의 여의 등도 참가하였다. 풍정도감의궤가 기록한 1630년 축제에는 헌선도, 수연장, 몽금척, 봉래의, 연화대, 포구락, 향발무, 무고, 처용무의 9종의 무용이 공연되었다. 1600년대 초중반 당시 인목 왕후의 앞에 올려졌던 우리 나라의 고전 궁중 음식들의 상차림 모습, 조리 방법, 조리 재료 등 각종 레시피와 취식 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ref>[https://namu.wiki/w/%ED%92%8D%EC%A0%95%EB%8F%84%EA%B0%90%EC%9D%98%EA%B6%A4 풍정도감의궤,나무위키]</ref><br />
<br />
==='''공개'''===<br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18일까지 개최된 '145년 만의 귀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풍정도감의궤1.jpg|200px|center]]<ref>[https://www.segye.com/newsView/20110704004409 2011-07-04 佛서 돌아온 외규장각의궤 실물 5점 첫 공개, 세계일보]</ref><br />
<br />
풍정도감의궤의 표지<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br />
=='''참고'''==<br />
*[https://blog.naver.com/danceins/70086555593 제5회 외규장각 도서-풍정도감의궤재현조선왕조 궁중연회의 내용을 담은 danceins님의 블로그]<br />
<br />
<br />
*<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98%EA%B6%A4의궤2019-06-25T14:28:51Z<p>Hufs오미래: /* 이미지 */</p>
<hr />
<div>=='''정의'''==<br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한 책.<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내용'''==<br />
==='''정의'''===<br />
‘의식의 궤범’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다양한 의궤'''===<br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제작한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이다. 조선 후기에는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에서 의궤를 꾸준히 작성하였다. 영조 대에 가장 많은 의궤가 제작되었고, 숙종·순조·고종 대에도 많은 의궤가 작성되었다. 대한제국이 있었던 14년 동안(1897~1910년)에는 총 68종의 의궤가 제작되었다. 이는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 전례를 갖추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이왕직에서 의궤를 작성하였다.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는 1942년에 작성된 『종묘영녕전의궤』이지만 이는 장부책에 불과하고, 1928년에 작성된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가 형태를 제대로 갖추면서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이다. 조선 왕조의 의궤는 1395년부터 1928년까지 530년 동안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1601년부터 1928년까지 제작된 의궤가 남아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jpg|300px|center]] <center>명성황후의 장례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center><ref>[http://heritage.unesco.or.kr/%EC%A1%B0%EC%84%A0%EC%99%95%EC%A1%B0-%E3%80%8E%EC%9D%98%EA%B6%A4%E5%84%80%E8%BB%8C%E3%80%8F/ 조선왕조 『의궤(儀軌)』, 유네스코 유산]</ref><br />
<br />
[[파일:진찬의궤.jpg|300px|center]] <center>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베푼 잔치의 기록인 '''진찬의궤'''</center><ref>[http://www.museum.seoul.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8202&mcseqno2=00000&cdLanguage=KOR 진찬의궤, 서울역사박물관]</ref><br />
<br />
[[파일:의궤8일.jpg|300px|center]] <center> KBS에서 방영했던 3D 다큐멘터리.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다루었다.</center><ref>[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5184 의궤, 8일간의 축제, 다음 영화]</ref><br />
<br />
==='''동영상'''===<br />
EBS Culture에서 2014년 4월 8일에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조선, 그 찬란한 기록의 역사 - 기록문화의 꽃, 의궤'''<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1JDQcjM9X_c"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98%EA%B6%A4의궤2019-06-25T14:28:24Z<p>Hufs오미래: /* 기여 */</p>
<hr />
<div>=='''정의'''==<br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한 책.<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내용'''==<br />
==='''정의'''===<br />
‘의식의 궤범’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다양한 의궤'''===<br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제작한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이다. 조선 후기에는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에서 의궤를 꾸준히 작성하였다. 영조 대에 가장 많은 의궤가 제작되었고, 숙종·순조·고종 대에도 많은 의궤가 작성되었다. 대한제국이 있었던 14년 동안(1897~1910년)에는 총 68종의 의궤가 제작되었다. 이는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 전례를 갖추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이왕직에서 의궤를 작성하였다.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는 1942년에 작성된 『종묘영녕전의궤』이지만 이는 장부책에 불과하고, 1928년에 작성된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가 형태를 제대로 갖추면서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이다. 조선 왕조의 의궤는 1395년부터 1928년까지 530년 동안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1601년부터 1928년까지 제작된 의궤가 남아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jpg|300px|center]] <center>명성황후의 장례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center><ref>[http://heritage.unesco.or.kr/%EC%A1%B0%EC%84%A0%EC%99%95%EC%A1%B0-%E3%80%8E%EC%9D%98%EA%B6%A4%E5%84%80%E8%BB%8C%E3%80%8F/ 조선왕조 『의궤(儀軌)』, 유네스코 유산]</ref><br />
<br />
[[파일:진찬의궤.jpg|300px|center]] <center>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베푼 잔치의 기록인 '''진찬의궤'''</center><ref>[http://www.museum.seoul.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8202&mcseqno2=00000&cdLanguage=KOR 진찬의궤, 서울역사박물관]</center></ref><br />
<br />
[[파일:의궤8일.jpg|300px|center]] <center> KBS에서 방영했던 3D 다큐멘터리.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다루었다.</center><ref>[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5184 의궤, 8일간의 축제, 다음 영화]</ref><br />
<br />
==='''동영상'''===<br />
EBS Culture에서 2014년 4월 8일에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조선, 그 찬란한 기록의 역사 - 기록문화의 꽃, 의궤'''<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1JDQcjM9X_c"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4:26:46Z<p>Hufs오미래: /* 네트워크 그래프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 본래 조선왕실의궤 297권을 포함한 5천여 점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의궤 29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전부 불태워졌다. 배경 지식이 전무했던 프랑스의 수병들이 보기에 글만 있는 책은 별 가치가 없어 보여서 화려하게 채색된 [[의궤]]만 들고 갔다고 한다.<ref>[https://namu.wiki/w/%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나무위키]</ref><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994년 5월 8일,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키며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final/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br />
=='''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50032910600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9-15&officeId=00032&pageNo=6&printNo=14864&publishType=00010 1차 반환 당시의 신문기사]<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183613 외규장각 의궤의 영구대여식 반환을 비판하는 의견이 담긴 신문기사]<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 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9%B8%EA%B7%9C%EC%9E%A5%EA%B0%81외규장각2019-06-25T14:23:07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된 [[규장각]].<br />
<br />
=='''내용'''==<br />
==='''설치'''===<br />
1782년 2월, 정조에 의해 설치되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규장각|내규장각(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소실'''===<br />
1866년 발발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소실되었다. 단순히 외규장각만이 아닌 고려궁지가 통채로 불탔다. 또한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들은 프랑스의 수병들에 의해 약탈되었다.<br />
<br />
==='''복원'''===<br />
2002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가 대두되면서 국민 각계로부터 고려궁터에 있던 외규장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실된 이후에도 민가, 공공시설물들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지형변경이 많았던 탓으로 복원 계획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외규장각 복원지가 고려궁지 내에 있어 신중한 복원추진이 요구됨에 따라 1995년 이래 4차에 걸친 발굴조사, 관계전문가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통해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고증을 통해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지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통해서도 고려궁지내 고려시대 건물유구는 확인되지 않았고, 동 터에 조선시대 행궁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만이 밝혀졌다. 하지만 수차례의 발굴과 문헌고증, 관련전문가 자문,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통해 마침내 2003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ref>[http://english.cha.go.kr/multiBbz/selectMultiBbzView.do;jsessionid=W1yjgT441Aa4OHo1IfyY7kzXuS72PuT67BCXEZvwd34iyaKj0mf31F7Dt6EFYqxv?id=180&no=182&bbzId=newpublic&pageIndex=259&mn=NS_01_01&strWhere=&searchWrd=&sdate=&edate= 외규장각 복원과 고려궁터, 문화재청]</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1.jpg]]<br />
[[파일:외규장각현판.jpg]]<br />
<br />
<br />
==='''전자지도'''===<br />
<googlemap width="800" height="800" lat="37.751690" lon="126.485605" type="satilite"<br />
zoom="18"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br />
37.751874, 126.485332, [[외규장각]] </googlemap><br />
<br />
=='''참고문헌'''==<br />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2104855&language=ko_KR 외규장각의 교육적 의의를 설명하고 있는 논문]<br />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dataType=20&searchWord=%EC%99%B8%EA%B7%9C%EC%9E%A5%EA%B0%81&match=false&callFunc=goSearch%28%2720%27%2C+%271%27%2C+%27n%27%2C+%27%EC%99%B8%EA%B7%9C%EC%9E%A5%EA%B0%81%27%29%3B 외규장각이 속해있던 강화부행궁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사전의 내용]<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C%B8%ED%99%94%EC%97%B0%EB%8C%80_%EC%86%8C%EC%86%A1%EC%82%AC%EA%B1%B4문화연대 소송사건2019-06-25T14:18:50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외규장각 도서 및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해 문화연대가 프랑스정부와 소송전을 벌인 사건이다.<br />
=='''내용'''==<br />
==='''문화연대'''===<br />
{{글상자<br />
|color=#ffff00<br />
|text=이제 우리 자신이 나서서 문화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때다.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토대 위에서 최대한 자아 실현을할 수 있는 사회를 우리 스스로 만들자. 창조성을 드높이 구현하고 개성을 표현하면서도 공생이 가능한 사회, 문화사회를 만들자. 문화사회 건설을 위한 문화연대 만세!}}<br />
'억압이 아닌 자유', ‘차별이 아닌 평등’, ‘경쟁이 아닌 평화’가 존중되는 문화사회를 만들고자 창립된 비영리단체이다. 외규장각 및 약탈문화재 반환운동을 통해 소개하게 되었지만 스포츠, 연예, 인권, 보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f>[http://culturalaction.org/ 문화연대 홈페이지]</ref><br />
<br />
<br />
==='''소송'''===<br />
2008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에서 약탈당한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문화연대는 프랑스정부와 소송을 시작했다. 2009년 12월에 1심이 기각되었으나 항소심을 이어왔다. 2010년 4월 19일, 외규장각 되찾기 1만 시민서포터즈를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시민서포터즈는 외규장각 도서 및 약탈 문화재 반환소송(항소)과정에 함께하며 서포터즈의 이름으로 소송이 진행되었다. 또한 소송이 프랑스에서 진행이 되는 터라 준비 비용만 해도 1억 6천만원일 정도로 막대했는데 재정적 지원 역시 서포터즈와 일반인들의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충당하였다. <br />
<br />
<br />
그 외에도 문화연대는 외규장각 약탈문화재의 완전한 반환을 촉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br />
<br />
<br />
==='''1인 시위'''===<br />
2010년 10월 28일부터 11월 11일까지 전국시사만화협회와 문화연대가 함께 진행한 1인시위는 프랑스 문화원, 광화문 광장, 국회, 서울역 등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프랑스 문화원, 프랑스대사관 등 직접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br />
<br />
<ref>[https://culturalaction.tistory.com/entry/외규장각-약탈문화재-반환을-위한-1인시위를-진행했습니다 문화연대 티스토리]</ref><br />
==='''Live Aid 콘서트 개최'''===<br />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2010년 5월 27일과 28일에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콘서트‘Lost Heritage2’를 개최하였다. 소송비용의 충당과 외규장각 약탈문화재의 완전반환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ref>[https://culturalaction.tistory.com/search/%EC%99%B8%EA%B7%9C%EC%9E%A5%EA%B0%81 문화연대 티스토리]</ref><br />
==='''결과'''===<br />
이와 같이 문화연대는 외규장각 의궤를 비록한 약탈문화재의 완전반환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고 문화연대 내부에서도 이로 인한 실망감이 컸다. (하단에 이러한 심정이 잘 담긴 글을 붙이겠다.) 단순히 패소하였기 때문이 아닌 G20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정부가 먼저 대여반환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송과정에서 외규장각 및 약탈문화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문화연대 소송 사건은 충분히 의미있는 사건이었다.<ref>[http://culturalaction.org/archives/4426 문화연대 홈페이지]</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1인시위.jpg|frame|center|광화문 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ref>[https://culturalaction.tistory.com/entry/%EC%99%B8%EA%B7%9C%EC%9E%A5%EA%B0%81-%EC%95%BD%ED%83%88%EB%AC%B8%ED%99%94%EC%9E%AC-%EB%B0%98%ED%99%98%EC%9D%84-%EC%9C%84%ED%95%9C-1%EC%9D%B8%EC%8B%9C%EC%9C%84%EB%A5%BC-%EC%A7%84%ED%96%89%ED%96%88%EC%8A%B5%EB%8B%88%EB%8B%A4 문화연대 티스토리]</ref><br />
<br />
<br />
[[파일:문화연대콘서트.jpg|frame|center|Live Aid 콘서트의 현장이다.]] <ref>[https://culturalaction.tistory.com/entry/%EC%99%B8%EA%B7%9C%EC%9E%A5%EA%B0%81-%EC%95%BD%ED%83%88%EB%AC%B8%ED%99%94%EC%9E%AC-%EB%B0%98%ED%99%98%EC%9D%84-%EC%9C%84%ED%95%9C-1%EC%9D%B8%EC%8B%9C%EC%9C%84%EB%A5%BC-%EC%A7%84%ED%96%89%ED%96%88%EC%8A%B5%EB%8B%88%EB%8B%A4 문화연대 티스토리]</ref><br />
<br />
<br />
[[파일:문화연대.jpg|frame|center|주한 프랑스대사관 앞에서 외규장각 반환소송 항소선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0126129800005 2010-01-26, 문화연대 "약탈된 외규장각 도서 찾아오겠다",연합뉴스]</ref><br />
<br />
==='''동영상'''===<br />
*Lost Heritage 홍보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Yb8PCRwq-8"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br />
*[http://imnews.imbc.com/n_newssas/fullmovie/fullmovie02/2552330_16727.html?menuid=fullM 2010-01-27, 문화연대 "외규장각 도서 반환 항소", MBC NEWS]<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사건]]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AC%B8%ED%99%94%EC%97%B0%EB%8C%80_%EC%86%8C%EC%86%A1%EC%82%AC%EA%B1%B4문화연대 소송사건2019-06-25T14:17:54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외규장각 도서 및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해 문화연대가 프랑스정부와 소송전을 벌인 사건이다.<br />
=='''내용'''==<br />
==='''문화연대'''===<br />
{{글상자<br />
|color=#ffff00<br />
|text=이제 우리 자신이 나서서 문화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때다.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토대 위에서 최대한 자아 실현을할 수 있는 사회를 우리 스스로 만들자. 창조성을 드높이 구현하고 개성을 표현하면서도 공생이 가능한 사회, 문화사회를 만들자. 문화사회 건설을 위한 문화연대 만세!}}<br />
'억압이 아닌 자유', ‘차별이 아닌 평등’, ‘경쟁이 아닌 평화’가 존중되는 문화사회를 만들고자 창립된 비영리단체이다. 외규장각 및 약탈문화재 반환운동을 통해 소개하게 되었지만 스포츠, 연예, 인권, 보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f>[http://culturalaction.org/ 문화연대 홈페이지]</ref><br />
<br />
<br />
==='''소송'''===<br />
2008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에서 약탈당한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문화연대는 프랑스정부와 소송을 시작했다. 2009년 12월에 1심이 기각되었으나 항소심을 이어왔다. 2010년 4월 19일, 외규장각 되찾기 1만 시민서포터즈를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시민서포터즈는 외규장각 도서 및 약탈 문화재 반환소송(항소)과정에 함께하며 서포터즈의 이름으로 소송이 진행되었다. 또한 소송이 프랑스에서 진행이 되는 터라 준비 비용만 해도 1억 6천만원일 정도로 막대했는데 재정적 지원 역시 서포터즈와 일반인들의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충당하였다. <br />
<br />
<br />
그 외에도 문화연대는 외규장각 약탈문화재의 완전한 반환을 촉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br />
<br />
<br />
==='''1인 시위'''===<br />
2010년 10월 28일부터 11월 11일까지 전국시사만화협회와 문화연대가 함께 진행한 1인시위는 프랑스 문화원, 광화문 광장, 국회, 서울역 등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프랑스 문화원, 프랑스대사관 등 직접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br />
<br />
<ref>[https://culturalaction.tistory.com/entry/외규장각-약탈문화재-반환을-위한-1인시위를-진행했습니다 문화연대 티스토리]</ref><br />
==='''Live Aid 콘서트 개최'''===<br />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2010년 5월 27일과 28일에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콘서트‘Lost Heritage2’를 개최하였다. 소송비용의 충당과 외규장각 약탈문화재의 완전반환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ref>[https://culturalaction.tistory.com/search/%EC%99%B8%EA%B7%9C%EC%9E%A5%EA%B0%81 문화연대 티스토리]</ref><br />
==='''결과'''===<br />
이와 같이 문화연대는 외규장각 의궤를 비록한 약탈문화재의 완전반환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고 문화연대 내부에서도 이로 인한 실망감이 컸다. (하단에 이러한 심정이 잘 담긴 글을 붙이겠다.) 단순히 패소하였기 때문이 아닌 G20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정부가 먼저 대여반환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송과정에서 외규장각 및 약탈문화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문화연대 소송 사건은 충분히 의미있는 사건이었다.<ref>[http://culturalaction.org/archives/4426 문화연대 홈페이지]</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1인시위.jpg|frame|center|광화문 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ref>[https://culturalaction.tistory.com/entry/%EC%99%B8%EA%B7%9C%EC%9E%A5%EA%B0%81-%EC%95%BD%ED%83%88%EB%AC%B8%ED%99%94%EC%9E%AC-%EB%B0%98%ED%99%98%EC%9D%84-%EC%9C%84%ED%95%9C-1%EC%9D%B8%EC%8B%9C%EC%9C%84%EB%A5%BC-%EC%A7%84%ED%96%89%ED%96%88%EC%8A%B5%EB%8B%88%EB%8B%A4 문화연대 티스토리]</ref><br />
<br />
<br />
[[파일:문화연대콘서트.jpg|frame|center|Live Aid 콘서트의 현장이다.]] <ref>[https://culturalaction.tistory.com/entry/%EC%99%B8%EA%B7%9C%EC%9E%A5%EA%B0%81-%EC%95%BD%ED%83%88%EB%AC%B8%ED%99%94%EC%9E%AC-%EB%B0%98%ED%99%98%EC%9D%84-%EC%9C%84%ED%95%9C-1%EC%9D%B8%EC%8B%9C%EC%9C%84%EB%A5%BC-%EC%A7%84%ED%96%89%ED%96%88%EC%8A%B5%EB%8B%88%EB%8B%A4 문화연대 티스토리]</ref><br />
<br />
<br />
[[파일:문화연대.jpg|frame|center|주한 프랑스대사관 앞에서 외규장각 반환소송 항소선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0126129800005 2010-01-26, 문화연대 "약탈된 외규장각 도서 찾아오겠다",연합뉴스]</ref><br />
<br />
==='''동영상'''===<br />
*Lost Heritage 홍보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Yb8PCRwq-8"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br />
*[http://imnews.imbc.com/n_newssas/fullmovie/fullmovie02/2552330_16727.html?menuid=fullM 2010-01-27, 문화연대 "외규장각 도서 반환 항소", MBC NEWS]<br />
*<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사건]]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91%EC%9D%B8%EC%96%91%EC%9A%94병인양요2019-06-25T14:16:19Z<p>Hufs오미래: /* 경과 */</p>
<hr />
<div>=='''정의'''==<br />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이다.<br />
<br />
=='''내용'''==<br />
<br />
==='''역사적 배경'''===<br />
병인사옥이라고도 한다.<br />
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금압령으로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이 학살된 [[병인박해]]가 발생했다. 이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이 3명 중,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되었다.<br />
<br />
==='''경과'''===<br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center;"<br />
|+ 표1-2. 병인양요의 경과<br />
! 날짜 || 내용<br />
|-<br />
|1866.10.16 || 강화부 점령<br />
|-<br />
|1866.10.26 || 문수산성 전투<br />
|-<br />
|1866.11.09 || 정족산성 전투<br />
|-<br />
|1866.11.10 || 프랑스군 함대 철수<br />
|}<br />
<br />
==='''결과'''===<br />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고 방화로 인해 [[외규장각]] 전각이 소실되었다.<br />
<br />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3%91%EC%9D%B8%EC%96%91%EC%9A%94&ridx=0&tot=463 병인양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9%B8%EA%B7%9C%EC%9E%A5%EA%B0%81%20%EC%9D%98%EA%B6%A4&ridx=0&tot=1283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강화 고려산 백련사와 병인양요 이야기==<br />
'''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3)'''(103쪽)에 의하면 ...<br />
<br />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법해 온 [[병인양요]] 때, [[장녕전]]에 봉안되어 있던 [[숙종]]관 [[영조]]의 [[어진]]을 [[백련사]]에 잠시 보관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강화유수]] [[이인기]]가 장계를 올려 장녕전에 모셨던 주 어진을 서문 밨에 있는 백련사로 옮겨 놓았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다시 어진은 왕명으로 서울의 궁궐로 옮기게 되었다. [[고재형]]이 지음 [[심도기행]]에는 1866년 9월 프랑스 군이 쳐들어 와 [[강화성]]이 함락되었을 때, [[별검 최씨]]가 두 어진을 받들고 서울로 들어와 궁 안의 진전에 종안하였다고 하였다."<br />
<br />
=='''멀티미디어'''==<br />
==='''연표'''===<br />
<html><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Yb9DyEBqTCeF9gFZRNQzm-XN3IH4Q4LeM3Fmhrj3np0&font=Default&lang=en&initial_zoom=2&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 등<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사건]]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9%B8%EA%B7%9C%EC%9E%A5%EA%B0%81외규장각2019-06-25T14:11:29Z<p>Hufs오미래: /* 기여 */</p>
<hr />
<div>=='''정의'''==<br />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된 [[규장각]].<br />
<br />
=='''내용'''==<br />
==='''설치'''===<br />
1782년 2월, 정조에 의해 설치되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규장각|내규장각(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소실'''===<br />
1866년 발발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소실되었다. 단순히 외규장각만이 아닌 고려궁지가 통채로 불탔다. 또한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들은 프랑스의 수병들에 의해 약탈되었다.<br />
<br />
==='''복원'''===<br />
2002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가 대두되면서 국민 각계로부터 고려궁터에 있던 외규장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실된 이후에도 민가, 공공시설물들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지형변경이 많았던 탓으로 복원 계획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외규장각 복원지가 고려궁지 내에 있어 신중한 복원추진이 요구됨에 따라 1995년 이래 4차에 걸친 발굴조사, 관계전문가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통해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고증을 통해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지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통해서도 고려궁지내 고려시대 건물유구는 확인되지 않았고, 동 터에 조선시대 행궁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만이 밝혀졌다. 하지만 수차례의 발굴과 문헌고증, 관련전문가 자문,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통해 마침내 2003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ref>[http://english.cha.go.kr/multiBbz/selectMultiBbzView.do;jsessionid=W1yjgT441Aa4OHo1IfyY7kzXuS72PuT67BCXEZvwd34iyaKj0mf31F7Dt6EFYqxv?id=180&no=182&bbzId=newpublic&pageIndex=259&mn=NS_01_01&strWhere=&searchWrd=&sdate=&edate= 외규장각 복원과 고려궁터, 문화재청]</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1.jpg]]<br />
[[파일:외규장각현판.jpg]]<br />
<br />
<br />
==='''전자지도'''===<br />
<googlemap width="800" height="800" lat="37.751690" lon="126.485605" type="satilite"<br />
zoom="18"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br />
37.751874, 126.485332, [[외규장각]] </googlemap><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4:10:52Z<p>Hufs오미래: /* 사건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 본래 조선왕실의궤 297권을 포함한 5천여 점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의궤 29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전부 불태워졌다. 배경 지식이 전무했던 프랑스의 수병들이 보기에 글만 있는 책은 별 가치가 없어 보여서 화려하게 채색된 [[의궤]]만 들고 갔다고 한다.<ref>[https://namu.wiki/w/%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나무위키]</ref><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994년 5월 8일,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키며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콘텐츠4/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br />
=='''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50032910600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9-15&officeId=00032&pageNo=6&printNo=14864&publishType=00010 1차 반환 당시의 신문기사]<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183613 외규장각 의궤의 영구대여식 반환을 비판하는 의견이 담긴 신문기사]<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 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D%83%9C%EC%A7%84이태진2019-06-25T14:09:17Z<p>Hufs오미래: </p>
<hr />
<div>{{인물 정보<br />
|사진 = 이태진.jpg<br />
|이름 = 이태진<br />
|출생 = 1943.10.14<br />
|사망 = <br />
|성별 = 남성<br />
|국적 = 대한민국<br />
|직업 = 역사학자<br />
|경력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br />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br />
}}<br />
<br />
=='''정의'''==<br />
이태진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br />
=='''내용'''==<br />
==='''연구내용'''===<br />
특정 시대를 전공한다기보다는 한국사 전체에 포괄적으로 관심이 넓은 편으로, 학술대회에 참여하거나 논문을 내는 것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내는 편이다. 하지만 2000년에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편찬한 뒤부터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꾸준히 진행 중이다.<ref>[https://namu.wiki/w/%EC%9D%B4%ED%83%9C%EC%A7%84 이태진, 나무위키]</ref><br />
1980년대 붕당정치론을 제창하여 일제식민사학인 "당파성론"을 교과서에서 퇴출시켰으며, 1990년대에는 규장각을 독립시켜 조선후기를 르네상스로 평가하는 새로운 연구의 장을 열었으며, 정조를 절대계몽군주로 최초로 평가하여 정조의 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br />
2000년대에는 대한제국 연구에 집중하여 일제의 강제병합 불법성을 증명하였으며,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밝혀냈다. 일련의 연구과정으로 일제가 견고하게 구축한 식민사학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더욱이 외계충격설을 소개하여 식민 사학 타파를 넘어서 한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했다.<br />
그의 논저는 수백편에 이르며 주요 저서는 일본, 미국 등에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장기간 일본 <<세카이>>誌에서 일본 학자들과 논쟁을 벌여서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주장하였으며, <<교수신문>>에서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논쟁을 벌여서,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근대 국가 지향을 역설하였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화과정을 강의하였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는 한국인 교수 최초로 한국어로 역사를 강의하였다.<br />
2009년 정년 후 뉴라이트 계열과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히 뉴라이트 계열에 대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사의 주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말살하는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양자의 극단적인 역사인식을 함께 비판하고 구시대의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갈 것을 주문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83%9C%EC%A7%84 이태진, 위키백과]</ref><br />
올해에는 조선 유교 정치의 순기능 및 18세기 ‘민국’ 정치 연구, 고종 시대 근대화 정책 재조명 등을 통해 한국의 자립적 근대화 노력을 규명했으며,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한일 합병의 불법성을 증명하는 등 일제가 왜곡한 부정적 한국사 인식 개선 및 한국사학 발전에 기여한 공헌으로 제 28회 수당상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ref>[http://www.thinkfood.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935 2019-04-10, 올해 ‘수당상’에 이형목 교수·권익찬 책임연구원·이태진 명예교수 선정, 식품음료신문]</ref><br />
<br />
==='''외규장각 의궤 연구'''===<br />
1994년 5월 8일, 프랑스가 약탈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에 대한민국 내에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일으켰고 [[의궤]] 환수에 공헌하여서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이태진훈장.jpg|center]]<br />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공을 세운 인사 3명에 대한 포상식. '''가장 왼쪽'''이 이태진교수이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6308725 2011-09-30, 외규장각 의궤 환수 유공자 포상, 중앙일보]</ref><br />
<br />
[[파일:외규장각오찬.jpg|center]]<br />
외규장각 도서 환수 관계자 초청 오찬의 모습. '''왼쪽에서 네번째'''가 이태진교수이다.<ref>[http://www.korea.kr/news/blueHouseView.do?newsId=148710645&pageIndex=50&srchType=&srchStartDate=2010-01-01&srchEndDate=2018-11-02 외규장각 도서 환수 관계자 오찬 관련 브리핑, 대한민국 정책브리핑]</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K_UIcPZNs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4:06:19Z<p>Hufs오미래: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 본래 조선왕실의궤 297권을 포함한 5천여 점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의궤 29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전부 불태워졌다. 배경 지식이 전무했던 프랑스의 수병들이 보기에 글만 있는 책은 별 가치가 없어 보여서 화려하게 채색된 [[의궤]]만 들고 갔다고 한다.<ref>[https://namu.wiki/w/%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나무위키]</ref><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994년 5월 8일,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키며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콘텐츠4/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br />
=='''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50032910600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9-15&officeId=00032&pageNo=6&printNo=14864&publishType=00010 1차 반환 당시의 신문기사]<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183613 외규장각 의궤의 영구대여식 반환을 비판하는 의견이 담긴 신문기사]<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 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4:03:45Z<p>Hufs오미래: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 본래 조선왕실의궤 297권을 포함한 5천여 점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의궤 29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전부 불태워졌다. 배경 지식이 전무했던 프랑스의 수병들이 보기에 글만 있는 책은 별 가치가 없어 보여서 화려하게 채색된 [[의궤]]만 들고 갔다고 한다.<ref>[https://namu.wiki/w/%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나무위키]</ref><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994년 5월 8일,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키며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콘텐츠4/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br />
=='''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50032910600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9-15&officeId=00032&pageNo=6&printNo=14864&publishType=00010 1차 반환 당시의 신문기사]<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 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9%B8%EA%B7%9C%EC%9E%A5%EA%B0%81외규장각2019-06-25T14:00:22Z<p>Hufs오미래: /* 소실 */</p>
<hr />
<div>=='''정의'''==<br />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된 [[규장각]].<br />
<br />
=='''내용'''==<br />
==='''설치'''===<br />
1782년 2월, 정조에 의해 설치되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규장각|내규장각(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소실'''===<br />
1866년 발발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소실되었다. 단순히 외규장각만이 아닌 고려궁지가 통채로 불탔다. 또한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들은 프랑스의 수병들에 의해 약탈되었다.<br />
<br />
==='''복원'''===<br />
2002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가 대두되면서 국민 각계로부터 고려궁터에 있던 외규장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실된 이후에도 민가, 공공시설물들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지형변경이 많았던 탓으로 복원 계획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외규장각 복원지가 고려궁지 내에 있어 신중한 복원추진이 요구됨에 따라 1995년 이래 4차에 걸친 발굴조사, 관계전문가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통해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고증을 통해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지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통해서도 고려궁지내 고려시대 건물유구는 확인되지 않았고, 동 터에 조선시대 행궁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만이 밝혀졌다. 하지만 수차례의 발굴과 문헌고증, 관련전문가 자문,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통해 마침내 2003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ref>[http://english.cha.go.kr/multiBbz/selectMultiBbzView.do;jsessionid=W1yjgT441Aa4OHo1IfyY7kzXuS72PuT67BCXEZvwd34iyaKj0mf31F7Dt6EFYqxv?id=180&no=182&bbzId=newpublic&pageIndex=259&mn=NS_01_01&strWhere=&searchWrd=&sdate=&edate= 외규장각 복원과 고려궁터, 문화재청]</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1.jpg]]<br />
[[파일:외규장각현판.jpg]]<br />
<br />
<br />
==='''전자지도'''===<br />
<googlemap width="800" height="800" lat="37.751690" lon="126.485605" type="satilite"<br />
zoom="18"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br />
37.751874, 126.485332, [[외규장각]] </googlemap><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9%B8%EA%B7%9C%EC%9E%A5%EA%B0%81외규장각2019-06-25T13:58:36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된 [[규장각]].<br />
<br />
=='''내용'''==<br />
==='''설치'''===<br />
1782년 2월, 정조에 의해 설치되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규장각|내규장각(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소실'''===<br />
1866년 발발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소실되었다. 단순히 외규장각만이 아닌 고려궁지가 통채로 불탔다.<br />
==='''복원'''===<br />
2002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가 대두되면서 국민 각계로부터 고려궁터에 있던 외규장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실된 이후에도 민가, 공공시설물들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지형변경이 많았던 탓으로 복원 계획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외규장각 복원지가 고려궁지 내에 있어 신중한 복원추진이 요구됨에 따라 1995년 이래 4차에 걸친 발굴조사, 관계전문가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통해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고증을 통해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지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통해서도 고려궁지내 고려시대 건물유구는 확인되지 않았고, 동 터에 조선시대 행궁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만이 밝혀졌다. 하지만 수차례의 발굴과 문헌고증, 관련전문가 자문,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통해 마침내 2003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ref>[http://english.cha.go.kr/multiBbz/selectMultiBbzView.do;jsessionid=W1yjgT441Aa4OHo1IfyY7kzXuS72PuT67BCXEZvwd34iyaKj0mf31F7Dt6EFYqxv?id=180&no=182&bbzId=newpublic&pageIndex=259&mn=NS_01_01&strWhere=&searchWrd=&sdate=&edate= 외규장각 복원과 고려궁터, 문화재청]</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1.jpg]]<br />
[[파일:외규장각현판.jpg]]<br />
<br />
<br />
==='''전자지도'''===<br />
<googlemap width="800" height="800" lat="37.751690" lon="126.485605" type="satilite"<br />
zoom="18"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br />
37.751874, 126.485332, [[외규장각]] </googlemap><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9%B8%EA%B7%9C%EC%9E%A5%EA%B0%81외규장각2019-06-25T13:46:39Z<p>Hufs오미래: /* 개설 */</p>
<hr />
<div>=='''정의'''==<br />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된 [[규장각]].<br />
<br />
=='''내용'''==<br />
==='''개설'''===<br />
1782년 2월, 정조에 의해 설치되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규장각|내규장각(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1.jpg]]<br />
[[파일:외규장각현판.jpg]]<br />
<br />
<br />
==='''전자지도'''===<br />
<googlemap width="800" height="800" lat="37.751690" lon="126.485605" type="satilite"<br />
zoom="18"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br />
37.751874, 126.485332, [[외규장각]] </googlemap><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3:44:36Z<p>Hufs오미래: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 본래 조선왕실의궤 297권을 포함한 5천여 점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의궤 29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전부 불태워졌다. 배경 지식이 전무했던 프랑스의 수병들이 보기에 글만 있는 책은 별 가치가 없어 보여서 화려하게 채색된 [[의궤]]만 들고 갔다고 한다.<ref>[https://namu.wiki/w/%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나무위키]</ref><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994년 5월 8일,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키며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콘텐츠4/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br />
=='''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 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9%B8%EA%B7%9C%EC%9E%A5%EA%B0%81외규장각2019-06-25T13:40:24Z<p>Hufs오미래: /* 멀티미디어 */</p>
<hr />
<div>=='''정의'''==<br />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된 [[규장각]].<br />
<br />
=='''내용'''==<br />
==='''개설'''===<br />
1782년 2월, 정조에 의해 설치되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1.jpg]]<br />
[[파일:외규장각현판.jpg]]<br />
<br />
<br />
==='''전자지도'''===<br />
<googlemap width="800" height="800" lat="37.751690" lon="126.485605" type="satilite"<br />
zoom="18"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br />
37.751874, 126.485332, [[외규장각]] </googlemap><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9%B8%EA%B7%9C%EC%9E%A5%EA%B0%81외규장각2019-06-25T13:40:01Z<p>Hufs오미래: /* 이미지 */</p>
<hr />
<div>=='''정의'''==<br />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된 [[규장각]].<br />
<br />
=='''내용'''==<br />
==='''개설'''===<br />
1782년 2월, 정조에 의해 설치되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1.jpg]]<br />
[[파일:외규장각현판.jpg]]<br />
<br />
==='''동영상'''===<br />
<br />
==='''전자지도'''===<br />
<googlemap width="800" height="800" lat="37.751690" lon="126.485605" type="satilite"<br />
zoom="18"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br />
37.751874, 126.485332, [[외규장각]] </googlemap><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 등<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99%B8%EA%B7%9C%EC%9E%A5%EA%B0%81%ED%98%84%ED%8C%90.jpg파일:외규장각현판.jpg2019-06-25T13:39:04Z<p>Hufs오미래: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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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99%B8%EA%B7%9C%EC%9E%A5%EA%B0%811.jpg파일:외규장각1.jpg2019-06-25T13:38:43Z<p>Hufs오미래: </p>
<hr />
<div></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98%EA%B6%A4의궤2019-06-25T13:18:31Z<p>Hufs오미래: /* 내용 */</p>
<hr />
<div>=='''정의'''==<br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한 책.<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내용'''==<br />
==='''정의'''===<br />
‘의식의 궤범’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다양한 의궤'''===<br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제작한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이다. 조선 후기에는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에서 의궤를 꾸준히 작성하였다. 영조 대에 가장 많은 의궤가 제작되었고, 숙종·순조·고종 대에도 많은 의궤가 작성되었다. 대한제국이 있었던 14년 동안(1897~1910년)에는 총 68종의 의궤가 제작되었다. 이는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 전례를 갖추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이왕직에서 의궤를 작성하였다.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는 1942년에 작성된 『종묘영녕전의궤』이지만 이는 장부책에 불과하고, 1928년에 작성된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가 형태를 제대로 갖추면서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이다. 조선 왕조의 의궤는 1395년부터 1928년까지 530년 동안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1601년부터 1928년까지 제작된 의궤가 남아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jpg|300px|center]] <center>명성황후의 장례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center><ref>[http://heritage.unesco.or.kr/%EC%A1%B0%EC%84%A0%EC%99%95%EC%A1%B0-%E3%80%8E%EC%9D%98%EA%B6%A4%E5%84%80%E8%BB%8C%E3%80%8F/ 조선왕조 『의궤(儀軌)』, 유네스코 유산]</ref><br />
<br />
[[파일:진찬의궤.jpg|300px|center]] <center>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베푼 잔치의 기록인 '''진찬의궤'''</center><ref>[http://www.museum.seoul.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8202&mcseqno2=00000&cdLanguage=KOR 진찬의궤, 서울역사박물관]</center></ref><br />
<br />
[[파일:의궤8일.jpg|300px|center]] <center> KBS에서 방영했던 3D 다큐멘터리.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다루었다.</center><ref>[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5184 의궤, 8일간의 축제, 다음 영화]</ref><br />
<br />
==='''동영상'''===<br />
EBS Culture에서 2014년 4월 8일에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조선, 그 찬란한 기록의 역사 - 기록문화의 꽃, 의궤'''<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1JDQcjM9X_c"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98%EA%B6%A4의궤2019-06-25T13:15:02Z<p>Hufs오미래: /* 동영상 */</p>
<hr />
<div>=='''정의'''==<br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한 책.<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내용'''==<br />
==='''개설'''===<br />
‘의식의 궤범’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jpg|300px|center]] <center>명성황후의 장례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center><ref>[http://heritage.unesco.or.kr/%EC%A1%B0%EC%84%A0%EC%99%95%EC%A1%B0-%E3%80%8E%EC%9D%98%EA%B6%A4%E5%84%80%E8%BB%8C%E3%80%8F/ 조선왕조 『의궤(儀軌)』, 유네스코 유산]</ref><br />
<br />
[[파일:진찬의궤.jpg|300px|center]] <center>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베푼 잔치의 기록인 '''진찬의궤'''</center><ref>[http://www.museum.seoul.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8202&mcseqno2=00000&cdLanguage=KOR 진찬의궤, 서울역사박물관]</center></ref><br />
<br />
[[파일:의궤8일.jpg|300px|center]] <center> KBS에서 방영했던 3D 다큐멘터리.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다루었다.</center><ref>[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5184 의궤, 8일간의 축제, 다음 영화]</ref><br />
<br />
==='''동영상'''===<br />
EBS Culture에서 2014년 4월 8일에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조선, 그 찬란한 기록의 역사 - 기록문화의 꽃, 의궤'''<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1JDQcjM9X_c"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98%EA%B6%A4의궤2019-06-25T13:12:00Z<p>Hufs오미래: /* 멀티미디어 */</p>
<hr />
<div>=='''정의'''==<br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한 책.<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내용'''==<br />
==='''개설'''===<br />
‘의식의 궤범’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jpg|300px|center]] <center>명성황후의 장례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center><ref>[http://heritage.unesco.or.kr/%EC%A1%B0%EC%84%A0%EC%99%95%EC%A1%B0-%E3%80%8E%EC%9D%98%EA%B6%A4%E5%84%80%E8%BB%8C%E3%80%8F/ 조선왕조 『의궤(儀軌)』, 유네스코 유산]</ref><br />
<br />
[[파일:진찬의궤.jpg|300px|center]] <center>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베푼 잔치의 기록인 '''진찬의궤'''</center><ref>[http://www.museum.seoul.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8202&mcseqno2=00000&cdLanguage=KOR 진찬의궤, 서울역사박물관]</center></ref><br />
<br />
[[파일:의궤8일.jpg|300px|center]] <center> KBS에서 방영했던 3D 다큐멘터리.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다루었다.</center><ref>[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5184 의궤, 8일간의 축제, 다음 영화]</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1JDQcjM9X_c"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98%EA%B6%A4의궤2019-06-25T13:09:17Z<p>Hufs오미래: /* 이미지 */</p>
<hr />
<div>=='''정의'''==<br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한 책.<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내용'''==<br />
==='''개설'''===<br />
‘의식의 궤범’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jpg|300px|center]] <center>명성황후의 장례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center><ref>[http://heritage.unesco.or.kr/%EC%A1%B0%EC%84%A0%EC%99%95%EC%A1%B0-%E3%80%8E%EC%9D%98%EA%B6%A4%E5%84%80%E8%BB%8C%E3%80%8F/ 조선왕조 『의궤(儀軌)』, 유네스코 유산]</ref><br />
<br />
[[파일:진찬의궤.jpg|300px|center]] <center>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베푼 잔치의 기록인 '''진찬의궤'''</center><ref>[http://www.museum.seoul.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8202&mcseqno2=00000&cdLanguage=KOR 진찬의궤, 서울역사박물관]</center></ref><br />
<br />
[[파일:의궤8일.jpg|300px|center]] <center> KBS에서 방영했던 3D 다큐멘터리.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다루었다.</center><ref>[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5184 의궤, 8일간의 축제, 다음 영화]</ref><br />
<br />
==='''동영상'''===<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 등<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98%EA%B6%A4의궤2019-06-25T13:08:01Z<p>Hufs오미래: </p>
<hr />
<div>=='''정의'''==<br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한 책.<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98%EA%B6%A4&ridx=0&tot=62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내용'''==<br />
==='''개설'''===<br />
‘의식의 궤범’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jpg|300px|center]] <center>명성황후의 장례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center><ref>[http://heritage.unesco.or.kr/%EC%A1%B0%EC%84%A0%EC%99%95%EC%A1%B0-%E3%80%8E%EC%9D%98%EA%B6%A4%E5%84%80%E8%BB%8C%E3%80%8F/ 조선왕조 『의궤(儀軌)』, 유네스코 유산]</ref><br />
<br />
[[파일:진찬의궤.jpg|300px|center]] <center>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베푼 잔치의 기록인 '''진찬의궤'''<ref>[http://www.museum.seoul.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8202&mcseqno2=00000&cdLanguage=KOR 진찬의궤, 서울역사박물관]</center></ref><br />
<br />
[[파일:의궤8일.jpg|300px|center]] <center>KBS에서 방영했던 3D 다큐멘터리.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다루었다.</center><ref>[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5184 의궤, 8일간의 축제, 다음 영화]</ref><br />
<br />
<br />
==='''동영상'''===<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 등<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물품]]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B1%EC%B6%A9%ED%98%84백충현2019-06-25T12:14:09Z<p>Hufs오미래: /* 네트워크 그래프 */</p>
<hr />
<div><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70412/8429241/1 2009-09-27, 부고 국제법학자 백충현 교수, 동아일보]</ref><br />
{{인물 정보<br />
|사진 = 백충현.jpg <br />
|이름 = 백충현<br />
|출생 = 1939.03.22<br />
|사망 = 2007.04.11<br />
|성별 = 남성<br />
|국적 = 대한민국<br />
|직업 = 국제법학자<br />
|경력 = 대한법학회 부회장<br />
<br />
서울국제법연구원 이사장<br />
<br />
대한국제법학회 회장<br />
<br />
국제중재재판소 재판관<br />
}}<br />
<br />
=='''정의'''==<br />
백충현은 대한민국의 국제법학자이다.<br />
=='''내용'''==<br />
==='''생애'''===<br />
1961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동 대학원에서 국제법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br />
<br />
1982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로 활동하였고, 1987년에 대한법학회 부회장이 되었다. 1990년에 서울국제법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94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1999년에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이자 국제중재재판소 재판관으로 활동하였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대학교 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2004년에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 또한, 유엔 아프가니스탄 인권문제 특별보고관 등을 역임하였다.<br />
<br />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반환과 독도 영유권의 수호를 위해 국가에 이바지한 공헌이 인정되어 사망 이후인 2010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39_1_0031178 백충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br />
<br />
==='''독도를 지키고자 노력'''===<br />
백충현 교수의 가장 큰 업적은 <관판실측일본지도>를 통해 독도에 대한 일본과 우리나라의 영토분쟁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일본을 이끌던 자민당 1996년 10월 20일에 치러지는 일본 중의원 선거공약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내걸었다. 이에 백충현 교수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기 위해 서점을 샅샅이 뒤질 각오로 도쿄 간다 지역 고지도 서점을 방문했다. 일본 최고의 곤찬 지도라고 불리는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 서점에서도 연락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한국인에게는 팔지 않겠다는 고서점 주인들의 묵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백 교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4개월 후에야 일본 도쿄에 있는 고지도 전문점 충경당의 주인 이마이 데츠오씨로부터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백 교수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하지 않은 이 지도가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결정적 단서’이고, 이로써 영유권 분쟁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데츠오씨는 이 지도의 가치를 1,000만 엔, 당시의 환율로는 무려 1억이라고 책정하였다. 분명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백 교수는 끝끝내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손에 넣었고 이를 통해 일본 측에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역임을 명백히 밝혀냈다. <ref>[http://www.gimmyoung.com/Contents/StoryView?seq=822 [최초 공개] '독도 고유 영토론'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확실한 증거 <관판실측일본지도>, 김영사 홈페이지]</ref><br />
<br />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요구'''===<br />
1991년 가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규장각 도서 관리실장을 맡고 있던 [[이태진]] 교수가 백충현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에 대한 국제법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태진]]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백충현 교수는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반출 경로가 약탈이기 때문에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8B%9C%EA%B5%AD%EC%A0%9C%EB%B2%95 전시국제법]에 의해 프랑스에 반환을 요청하기로 결심한다. 이후에 프랑스 측에 협조 공문을 보내고, 한불 포럼을 개최하는 등 국제법적인 근거를 대며 외규장각 의궤의 '조건 없는 반환'을 위해 노력하였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21476681 2017-04-15, 20년 전 1억 주고 ‘일본 지도’ 사온 학자, 중앙일보]</ref> 아래는 백충현 교수가 1997년 4월에 열린 제2차 한불 포럼에서 발표한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의 국제법적 성격>의 일부이다.<br />
{{글상자<br />
|color=#cecece<br />
|text="1866년 병인양요라는 조선과 프랑스 간 무력 투쟁 과정에서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들의 반환을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역사적 정당성과 국제법적 이론을 기초로 한 지혜로운 외교 협상으로만 실현될 수 있는 문제다. 회수 방안의 출발점은 병인양요 당시 불법적으로 약탈된 외규 장각 도서에 대하여 현재 프랑스 측이 점유를 계속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나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원상회복, 즉 완전한 반환만이 국제 법규에 타당한 정의로운 해결책이다."<ref>[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7158794&memberNo=2367855 국제법 논리로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요구한 백충현 교수,김영사 포스트]</ref><br />
<br />
}}<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백충현책.jpg|500px|center|[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34977728&orderClick=LAG&Kc= 책 구입하러 가기]]]<br />
<br />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이충렬, 김영사)''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비롯한 백충현의 업적들을 사료와 함께 적어낸 도서이다. <ref>[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34977728&orderClick=LAG&Kc= 도서소개,교보문고]</ref><br />
<br />
<br />
[[파일:관판실측일본지도.png|500px|center|[http://www.gimmyoung.com/Contents/StoryView?seq=822 자세한 내용]]] <br />
<br />
'''관판실측일본지도'''를 들고 고서점의 데츠오 사장(좌)과 기념사진을 찍는 백충현 교수(우) <ref>[http://www.gimmyoung.com/Contents/StoryView?seq=822 독도와 외규장각 의궤를 지켜낸 법학자의 삶.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ref><br />
<br />
<br />
[[파일:외규장각기사.png|frame|center|'외규장각 협상' 반대 확산, 2001-11-04, 조선일보]] <br />
<br />
공동성명 발표 현장을 담은 2001년 11월 4일자 <조선일보> 기사이다. <ref>[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7158794&memberNo=2367855 국제법 논리로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요구한 백충현 교수,김영사 포스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sxlkl7s7Va4"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br />
=='''참고문헌'''==<br />
*[https://m.post.naver.com/my/series/detail.nhn?seriesNo=290715&memberNo=2367855&prevVolumeNo=7179911 출판사 '김영사'의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포스팅]<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045873 2001-01-31, "합병조약 국제법상 무효" 본격거론, 동아일보]<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 작성<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3%91%EC%9D%B8%EB%B0%95%ED%95%B4병인박해2019-06-25T12:12:55Z<p>Hufs오미래: </p>
<hr />
<div>[[파일:병인박해.jpg|400px|center|황일광 시몬 심문]] <center> 시몬(황일광)을 심문하는 장면이다. </center> <ref>병인박해, 위키백과</ref><br />
<br />
=='''정의'''==<br />
<br />
<center>'''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했던 박해'''</center><br />
<br />
<br />
병인박해(丙寅迫害)는 [[흥선대원군]] 정권에 의하여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이루어진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이다. ''병인사옥''이라고도 하며, 이로 인하여 조선의 평신도들과 프랑스의 선교사와 신부 등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br />
<br />
=='''내용'''==<br />
원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관대한 인물이었으나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의 소식은 반 [[흥선대원군|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하였고,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대원군에 의하여 네 차례에 걸쳐 계속적으로 추진되었으며 1차 병인사옥(1866년 봄), 2차 병인사옥(1866년 여름~가을), 무진사옥(1868년), 신미사옥(1871년)으로 이어졌다.<br />
<br />
==='''1차 병인사옥'''===<br />
1866년 2월, 조선에 체류하고 있던 주교 베르뇌를 선두로 수천명의 교인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이 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br />
이렇게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신부 리델은 7월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br />
<br />
==='''2차 병인사옥'''===<br />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되었다.<br />
<br />
<br />
==='''무진사옥'''===<br />
이러한 박해는 1868년 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의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묘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오페르트는 수차에 걸친 통상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펴나갔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br />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부근의 지방까지 피해를 입었다.<br />
<br />
==='''신미사옥'''===<br />
1871년의 신미양요로 다시 박해가 가중되었다. 신미양요는 1866년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의 사건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 조선에 포함외교를 펴고자 하면서 시작되었다.<br />
미국함대의 강화도 공격을 시발로 하여 6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미국은 물러가게 되었고, 격퇴에 성공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국민에게 철저한 쇄국양이의 국시를 선명히 하는 한편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그 뒤에도 탄압이 계속되다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다.<br />
우리나라 최대의 박해이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박멸이라는 국내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나 1839년의 기해박해와는 다르다.<br />
<br />
==='''병인박해 그 후'''===<br />
병인박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천주교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병인박해 기간중에 순교한 24명이 복자(福者)로, 1984년에는 성인(聖人)으로 오르게 되었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은 1890년 주교 뮈텔이 자료를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가 대표적이다.<br />
<br />
<br />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3%91%EC%9D%B8%EB%B0%95%ED%95%B4&ridx=0&tot=6 병인박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ref>[http://yoksa.aks.ac.kr/jsp/cc/View.jsp?cc10id=C0001678 병인박해,한국사 기초사전,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ref><br />
<br />
=='''멀티미디어 자료'''==<br />
==='''지도'''===<br />
<googlemap width="700" height="500" lat="37.381741" lon="126.862649" type="normal" zoom="10"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br />
37.206364, 126.816867, 남양 성모동산 <br />
37.544661, 126.911636, 천주교 절두산 순교 성지 성당 </googlemap><br />
<br />
=='''주석'''==<br />
<references/></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D%83%9C%EC%A7%84이태진2019-06-25T12:11:59Z<p>Hufs오미래: </p>
<hr />
<div>{{인물 정보<br />
|사진 = 이태진.jpg<br />
|이름 = 이태진<br />
|출생 = 1943.10.14<br />
|사망 = <br />
|성별 = 남성<br />
|국적 = 대한민국<br />
|직업 = 역사학자<br />
|경력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br />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br />
}}<br />
<br />
=='''정의'''==<br />
이태진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br />
=='''내용'''==<br />
==='''연구내용'''===<br />
특정 시대를 전공한다기보다는 한국사 전체에 포괄적으로 관심이 넓은 편으로, 학술대회에 참여하거나 논문을 내는 것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내는 편이다. 하지만 2000년에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편찬한 뒤부터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꾸준히 진행 중이다.<ref>[https://namu.wiki/w/%EC%9D%B4%ED%83%9C%EC%A7%84 이태진, 나무위키]</ref><br />
1980년대 붕당정치론을 제창하여 일제식민사학인 "당파성론"을 교과서에서 퇴출시켰으며, 1990년대에는 규장각을 독립시켜 조선후기를 르네상스로 평가하는 새로운 연구의 장을 열었으며, 정조를 절대계몽군주로 최초로 평가하여 정조의 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br />
2000년대에는 대한제국 연구에 집중하여 일제의 강제병합 불법성을 증명하였으며,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밝혀냈다. 일련의 연구과정으로 일제가 견고하게 구축한 식민사학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더욱이 외계충격설을 소개하여 식민 사학 타파를 넘어서 한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했다.<br />
그의 논저는 수백편에 이르며 주요 저서는 일본, 미국 등에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장기간 일본 <<세카이>>誌에서 일본 학자들과 논쟁을 벌여서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주장하였으며, <<교수신문>>에서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논쟁을 벌여서,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근대 국가 지향을 역설하였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화과정을 강의하였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는 한국인 교수 최초로 한국어로 역사를 강의하였다.<br />
2009년 정년 후 뉴라이트 계열과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히 뉴라이트 계열에 대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사의 주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말살하는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양자의 극단적인 역사인식을 함께 비판하고 구시대의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갈 것을 주문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83%9C%EC%A7%84 이태진, 위키백과]</ref><br />
올해에는 조선 유교 정치의 순기능 및 18세기 ‘민국’ 정치 연구, 고종 시대 근대화 정책 재조명 등을 통해 한국의 자립적 근대화 노력을 규명했으며,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한일 합병의 불법성을 증명하는 등 일제가 왜곡한 부정적 한국사 인식 개선 및 한국사학 발전에 기여한 공헌으로 제 28회 수당상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ref>[http://www.thinkfood.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935 2019-04-10, 올해 ‘수당상’에 이형목 교수·권익찬 책임연구원·이태진 명예교수 선정, 식품음료신문]</ref><br />
<br />
==='''외규장각 의궤 연구'''===<br />
1994년 5월 8일, 프랑스가 약탈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에 대한민국 내에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일으켰고 [[의궤]] 환수에 공헌하여서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이태진훈장.jpg|center]]<br />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공을 세운 인사 3명에 대한 포상식. '''가장 왼쪽'''이 이태진교수이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6308725 2011-09-30, 외규장각 의궤 환수 유공자 포상, 중앙일보]</ref><br />
<br />
[[파일:외규장각오찬.jpg|center]]<br />
외규장각 도서 환수 관계자 초청 오찬의 모습. '''왼쪽에서 네번째'''가 이태진교수이다.<ref>[http://www.korea.kr/news/blueHouseView.do?newsId=148710645&pageIndex=50&srchType=&srchStartDate=2010-01-01&srchEndDate=2018-11-02 외규장각 도서 환수 관계자 오찬 관련 브리핑, 대한민국 정책브리핑]</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K_UIcPZNs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99%B8%EA%B7%9C%EC%9E%A5%EA%B0%81%EC%98%A4%EC%B0%AC.jpg파일:외규장각오찬.jpg2019-06-25T12:02:58Z<p>Hufs오미래: </p>
<hr />
<div></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D%8C%8C%EC%9D%BC:%EC%9D%B4%ED%83%9C%EC%A7%84%ED%9B%88%EC%9E%A5.jpg파일:이태진훈장.jpg2019-06-25T11:59:30Z<p>Hufs오미래: </p>
<hr />
<div></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D%83%9C%EC%A7%84이태진2019-06-25T11:58:16Z<p>Hufs오미래: </p>
<hr />
<div>{{인물 정보<br />
|사진 = 이태진.jpg<br />
|이름 = 이태진<br />
|출생 = 1943.10.14<br />
|사망 = <br />
|성별 = 남성<br />
|국적 = 대한민국<br />
|직업 = 역사학자<br />
|경력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br />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br />
}}<br />
<br />
=='''정의'''==<br />
이태진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br />
=='''내용'''==<br />
==='''연구내용'''===<br />
특정 시대를 전공한다기보다는 한국사 전체에 포괄적으로 관심이 넓은 편으로, 학술대회에 참여하거나 논문을 내는 것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내는 편이다. 하지만 2000년에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편찬한 뒤부터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꾸준히 진행 중이다.<ref>[https://namu.wiki/w/%EC%9D%B4%ED%83%9C%EC%A7%84 이태진, 나무위키]</ref><br />
1980년대 붕당정치론을 제창하여 일제식민사학인 "당파성론"을 교과서에서 퇴출시켰으며, 1990년대에는 규장각을 독립시켜 조선후기를 르네상스로 평가하는 새로운 연구의 장을 열었으며, 정조를 절대계몽군주로 최초로 평가하여 정조의 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br />
2000년대에는 대한제국 연구에 집중하여 일제의 강제병합 불법성을 증명하였으며,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밝혀냈다. 일련의 연구과정으로 일제가 견고하게 구축한 식민사학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더욱이 외계충격설을 소개하여 식민 사학 타파를 넘어서 한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했다.<br />
그의 논저는 수백편에 이르며 주요 저서는 일본, 미국 등에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장기간 일본 <<세카이>>誌에서 일본 학자들과 논쟁을 벌여서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주장하였으며, <<교수신문>>에서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논쟁을 벌여서,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근대 국가 지향을 역설하였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화과정을 강의하였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는 한국인 교수 최초로 한국어로 역사를 강의하였다.<br />
2009년 정년 후 뉴라이트 계열과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히 뉴라이트 계열에 대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사의 주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말살하는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양자의 극단적인 역사인식을 함께 비판하고 구시대의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갈 것을 주문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83%9C%EC%A7%84 이태진, 위키백과]</ref><br />
올해에는 조선 유교 정치의 순기능 및 18세기 ‘민국’ 정치 연구, 고종 시대 근대화 정책 재조명 등을 통해 한국의 자립적 근대화 노력을 규명했으며,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한일 합병의 불법성을 증명하는 등 일제가 왜곡한 부정적 한국사 인식 개선 및 한국사학 발전에 기여한 공헌으로 제 28회 수당상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ref>[http://www.thinkfood.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935 2019-04-10, 올해 ‘수당상’에 이형목 교수·권익찬 책임연구원·이태진 명예교수 선정, 식품음료신문]</ref><br />
<br />
==='''외규장각 의궤 연구'''===<br />
1994년 5월 8일, 프랑스가 약탈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에 대한민국 내에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일으켰고 [[의궤]] 환수에 공헌하여서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K_UIcPZNs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D%83%9C%EC%A7%84이태진2019-06-25T11:54:20Z<p>Hufs오미래: </p>
<hr />
<div>{{인물 정보<br />
|사진 = 이태진.jpg<br />
|이름 = 이태진<br />
|출생 = 1943.10.14<br />
|사망 = <br />
|성별 = 남성<br />
|국적 = 대한민국<br />
|직업 = 역사학자<br />
|경력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br />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br />
}}<br />
<br />
=='''정의'''==<br />
이태진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br />
=='''내용'''==<br />
==='''연구내용'''===<br />
특정 시대를 전공한다기보다는 한국사 전체에 포괄적으로 관심이 넓은 편으로, 학술대회에 참여하거나 논문을 내는 것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내는 편이다. 하지만 2000년에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편찬한 뒤부터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꾸준히 진행 중이다.<ref>[https://namu.wiki/w/%EC%9D%B4%ED%83%9C%EC%A7%84 이태진, 나무위키]</ref><br />
1980년대 붕당정치론을 제창하여 일제식민사학인 "당파성론"을 교과서에서 퇴출시켰으며, 1990년대에는 규장각을 독립시켜 조선후기를 르네상스로 평가하는 새로운 연구의 장을 열었으며, 정조를 절대계몽군주로 최초로 평가하여 정조의 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br />
2000년대에는 대한제국 연구에 집중하여 일제의 강제병합 불법성을 증명하였으며,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밝혀냈다. 일련의 연구과정으로 일제가 견고하게 구축한 식민사학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더욱이 외계충격설을 소개하여 식민 사학 타파를 넘어서 한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했다.<br />
그의 논저는 수백편에 이르며 주요 저서는 일본, 미국 등에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장기간 일본 <<세카이>>誌에서 일본 학자들과 논쟁을 벌여서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주장하였으며, <<교수신문>>에서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논쟁을 벌여서,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근대 국가 지향을 역설하였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화과정을 강의하였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는 한국인 교수 최초로 한국어로 역사를 강의하였다.<br />
2009년 정년 후 뉴라이트 계열과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히 뉴라이트 계열에 대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사의 주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말살하는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양자의 극단적인 역사인식을 함께 비판하고 구시대의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갈 것을 주문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83%9C%EC%A7%84 이태진, 위키백과]</ref><br />
올해에는 조선 유교 정치의 순기능 및 18세기 ‘민국’ 정치 연구, 고종 시대 근대화 정책 재조명 등을 통해 한국의 자립적 근대화 노력을 규명했으며,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한일 합병의 불법성을 증명하는 등 일제가 왜곡한 부정적 한국사 인식 개선 및 한국사학 발전에 기여한 공헌으로 제 28회 수당상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ref>[http://www.thinkfood.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935 2019-04-10, 올해 ‘수당상’에 이형목 교수·권익찬 책임연구원·이태진 명예교수 선정, 식품음료신문]</ref><br />
<br />
==='''외규장각 의궤 연구'''===<br />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켜서 [[의궤]] 환수에 공헌하여서 훈장을 수여받았다.<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K_UIcPZNs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 등<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D%B4%ED%83%9C%EC%A7%84이태진2019-06-25T11:38:33Z<p>Hufs오미래: /* 내용 */</p>
<hr />
<div>{{인물 정보<br />
|사진 = 이태진.jpg<br />
|이름 = 이태진<br />
|출생 = 1943.10.14<br />
|사망 = <br />
|성별 = 남성<br />
|국적 = 대한민국<br />
|직업 = 역사학자<br />
|경력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br />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br />
}}<br />
<br />
=='''정의'''==<br />
이태진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br />
=='''내용'''==<br />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켜서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 프랑스 의궤 반환 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2011년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하였다.<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K_UIcPZNs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 등<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br />
=='''기여'''==<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1:26:10Z<p>Hufs오미래: /* 기여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994년 5월 8일,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키며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콘텐츠4/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br />
=='''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 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1:25:44Z<p>Hufs오미래: /* 멀티미디어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994년 5월 8일,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키며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콘텐츠4/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br />
=='''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br />
=='''기여'''==<br />
최초 작성:오미래<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1:25:20Z<p>Hufs오미래: /* 발견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994년 5월 8일, [[이태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1권을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후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키며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br />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콘텐츠4/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br />
=='''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br />
=='''기여'''==<br />
최초 작성:오미래<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C%94%81%EC%93%B8%ED%95%9C_%EA%B7%80%ED%99%98,_%EC%99%B8%EA%B7%9C%EC%9E%A5%EA%B0%81_%EC%9D%98%EA%B6%A4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2019-06-25T11:24:40Z<p>Hufs오미래: /* 반환 */</p>
<hr />
<div><br />
=='''정의'''==<br />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br />
<br />
=='''주요 노드'''==<br />
<br />
==='''인물'''===<br />
*구스타브 제독<br />
*정조<br />
*흥선대원군<br />
*프랑스<br />
*미테랑 대통령<br />
*대한민국<br />
*[[박병선|박병선 박사]]<br />
*문화연대<br />
*[[이태진|이태진교수]]<br />
*[[백충현|백충현교수]]<br />
<br />
==='''장소 및 국가'''===<br />
*[[외규장각]]<br />
*규장각<br />
*서울<br />
*강화도<br />
*국립중앙박물관<br />
*임시정부 파리위원부<br />
*프랑스<br />
*대한민국<br />
<br />
==='''사건'''===<br />
*병인박해<br />
*[[병인양요]]<br />
*KTX 기술력 수주<br />
*[[문화연대 소송사건]]<br />
*[[서울 G20 정상회담]]<br />
<br />
==='''물품'''===<br />
*[[의궤]]<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br />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br />
*조선조의 의궤<br />
*왕실의궤<br />
*[[풍정도감의궤]]<br />
*직지심체요절<br />
*천주교<br />
<br />
=='''내용'''==<br />
==='''약탈'''===<br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외규장각]]의 전각과 함께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br />
<br />
==='''발견'''===<br />
그렇게 약탈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1979년이 되어서야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br />
<br />
==='''1차 반환'''===<br />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 의궤]]』 상 1권을 반환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하 2책을 갖고 왔지만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담당사서는 "강화도에서 온 조선 책은 이미 파리국립도서관에 등록돼 프랑스의 국가 재산이 됐기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 책을 가져 온 것은 한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지 선물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수행단이 간신히 사서를 달래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한 책만 받아서 급히 청와대에 전달하는 외교적 결례가 벌어졌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1112193200005 2010-11-12, 이태진 위원장 "외규장각도서 반환 환영",연합뉴스]</ref>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br />
<br />
==='''2차 반환'''===<br />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 의궤들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br />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고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554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외규장각, 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br />
==='''이미지'''===<br />
[[파일:외규장각의궤반환일지.jpg]]<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11122209055 2010-11-12,“약탈 문화재” “국유 재산” 19년간 줄다리기,경향신문]</ref><br />
<br />
==='''동영상'''===<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qg381sDzj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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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지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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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그래프'''===<br />
<html><br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br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br />
<iframe width="100%" height=800px src="http://digerati.aks.ac.kr/Dhlab/hufs/2019-1a/omr/콘텐츠4/외규장각.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br />
</html><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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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01&aid=0005247646 2011-09-03, 외규장각 반환 기여 재불인사 3명에 훈장 수여, 네이버 뉴스]<br />
*[http://www.museum.go.kr/uigwe/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br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56 의궤 5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EBS 클립뱅크]<br />
<br />
=='''기여'''==<br />
최초 작성:오미래<br />
<br />
=='''주석'''==<br />
<references/><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95%EB%B3%91%EC%84%A0박병선2019-06-25T11:22:39Z<p>Hufs오미래: /* 멀티미디어 */</p>
<hr />
<div>{{인물 정보<br />
|사진 =박병선박사.jpg<br />
<br />
|이름 = 박병선<br />
|출생 = 1923.03.25<br />
|사망 = 2011.11.22<br />
|성별 = 여성<br />
|국적 = 대한민국<br />
|직업 = 역사학자<br />
|경력 = 프랑스 국립도서관 특별보조원<br />
콜레주 드 프랑스 연구원<br />
}}<br />
<ref>[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866 ‘직지의 대모’ 고 박병선 박사의 일생, 여성신문] </ref><br />
=='''정의'''==<br />
박병선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인물이다.<br />
<br />
=='''내용'''==<br />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 후, 1955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약탈해 간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를 꼭 찾아보라는 대학교 시절 스승 이병도의 당부로 인해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br />
<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박병선은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고서점 등을 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1975년이 되어서야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돼 있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 내었다.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를 찾기 위해 20년 동안을 찾아 헤매었지만 돌아온 것은 1967년부터 근무하던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의 권고 사직이었다.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한국에 알렸다는 것이 이유였다.심지어는‘한국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우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병선은 적극적으로 노력했다.<br />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f>[http://www.aks.ac.kr/home/index.do 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ref>의 도움을 받아 『조선조의 의궤』를 펴내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도서]]들의 서지사항을 제시하고 국내 기관에 수장된 의궤도서들과 비교하였다. 그리고 1989년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의궤]]도서들에 대한 해제 작업을 더 발전시켜 『왕실의궤』 해제서를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아울러 프랑스어로 원고를 작성하여 이를 출판하고자 하였다. [[의궤]]도서의 중요성을 프랑스 학계에 알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1980년부터 시작된 해제 작업은 10년이 걸려 1990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러나 상업성이 없어 프랑스에서 출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1992년이 되어서야 불어판 해제서가 세상에 나왔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박병선]]이 일하고 있던 프랑스의 학술원에 해당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 두 기관이 공동 출판으로 하여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도서]]의 중요성을 프랑스 석학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도록 배려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열정은 대한민국 내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에 불을 지폈다. 결국 2011년 5월 27일, 297책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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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s://ko.m.wikipedia.org/wiki/박병선_(역사학자) 박병선(역사학자),위키백과]</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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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br />
==='''이미지'''===<br />
[[파일:박병선.jp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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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할 당시의 박병선 박사. 사진은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사실이 보도된 신문기사이다. <ref>[http://snueaa.or.kr/index.php?mid=news&document_srl=55924&listStyle=viewer&page=4 서울대학교 동문소식-故 박병선 박사-프랑스는 해고, 한국 냉대에도...평생 독신으로 약탈 문화재 찾아 2011-11-25(조선일보 1972년 5월 28일자 신문)]</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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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병선장학금.jp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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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50주년 기념 폐막미사에서 박병선 박사의 뜻에 따라 도서와 장학금이 인천가톨릭대학교 측에 전달되는 모습이다.<br />
<ref>[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68 2011.11.28 고 박병선 박사 도서 및 장학금 인천가대 기증, 카톨릭뉴스]</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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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NK41RW4qI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참고문헌'''==<br />
[https://news.joins.com/article/6737746 이상언. 외규장각 145년 만의 귀환 일등공신 박병선 박사. 중앙일보. 2011년 11월 24일.]<br />
<br/><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008619 “<인터뷰> 외규장각 도서 첫 발견 박병선박사”. 연합뉴스. 2011년 4월 13일. 2011년 4월 16일에 확인함.]<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B0%95%EB%B3%91%EC%84%A0박병선2019-06-25T11:21:57Z<p>Hufs오미래: </p>
<hr />
<div>{{인물 정보<br />
|사진 =박병선박사.jpg<br />
<br />
|이름 = 박병선<br />
|출생 = 1923.03.25<br />
|사망 = 2011.11.22<br />
|성별 = 여성<br />
|국적 = 대한민국<br />
|직업 = 역사학자<br />
|경력 = 프랑스 국립도서관 특별보조원<br />
콜레주 드 프랑스 연구원<br />
}}<br />
<ref>[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866 ‘직지의 대모’ 고 박병선 박사의 일생, 여성신문] </ref><br />
=='''정의'''==<br />
박병선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서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인물이다.<br />
<br />
=='''내용'''==<br />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 후, 1955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약탈해 간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를 꼭 찾아보라는 대학교 시절 스승 이병도의 당부로 인해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br />
<br />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박병선은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고서점 등을 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1975년이 되어서야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돼 있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 내었다.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를 찾기 위해 20년 동안을 찾아 헤매었지만 돌아온 것은 1967년부터 근무하던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의 권고 사직이었다.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한국에 알렸다는 것이 이유였다.심지어는‘한국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우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병선은 적극적으로 노력했다.<br />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f>[http://www.aks.ac.kr/home/index.do 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ref>의 도움을 받아 『조선조의 의궤』를 펴내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도서]]들의 서지사항을 제시하고 국내 기관에 수장된 의궤도서들과 비교하였다. 그리고 1989년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의궤]]도서들에 대한 해제 작업을 더 발전시켜 『왕실의궤』 해제서를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아울러 프랑스어로 원고를 작성하여 이를 출판하고자 하였다. [[의궤]]도서의 중요성을 프랑스 학계에 알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1980년부터 시작된 해제 작업은 10년이 걸려 1990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러나 상업성이 없어 프랑스에서 출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1992년이 되어서야 불어판 해제서가 세상에 나왔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박병선]]이 일하고 있던 프랑스의 학술원에 해당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 두 기관이 공동 출판으로 하여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의궤도서]]의 중요성을 프랑스 석학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도록 배려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열정은 대한민국 내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에 불을 지폈다. 결국 2011년 5월 27일, 297책의 [[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왔다.'''<br />
<br />
<ref>[https://ko.m.wikipedia.org/wiki/박병선_(역사학자) 박병선(역사학자),위키백과]</ref><br />
<br />
=='''멀티미디어'''== <br />
==='''이미지'''===<br />
[[파일:박병선.jpg]]<br />
<br />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할 당시의 박병선 박사. 사진은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사실이 보도된 신문기사이다. <ref>[http://snueaa.or.kr/index.php?mid=news&document_srl=55924&listStyle=viewer&page=4 서울대학교 동문소식-故 박병선 박사-프랑스는 해고, 한국 냉대에도...평생 독신으로 약탈 문화재 찾아 2011-11-25(조선일보 1972년 5월 28일자 신문)]</ref><br />
<br />
[[파일:박병선장학금.jpg]]<br />
<br />
인천교구 50주년 기념 폐막미사에서 박병선 박사의 뜻에 따라 도서와 장학금이 인천가톨릭대학교 측에 전달되는 모습이다.<br />
<ref>[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68 2011.11.28 고 박병선 박사 도서 및 장학금 인천가대 기증, 카톨릭뉴스]</ref><br />
<br />
==='''동영상'''=== <br />
<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LNK41RW4qI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br />
<br />
==='''전자지도'''=== <br />
==='''네트워크 그래프'''===<br />
<br />
=='''참고문헌'''==<br />
[https://news.joins.com/article/6737746 이상언. 외규장각 145년 만의 귀환 일등공신 박병선 박사. 중앙일보. 2011년 11월 24일.]<br />
<br/><br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008619 “<인터뷰> 외규장각 도서 첫 발견 박병선박사”. 연합뉴스. 2011년 4월 13일. 2011년 4월 16일에 확인함.]<br />
<br />
=='''기여'''==<br />
오미래:최초작성<br />
<br />
=='''주석'''==<br />
<references/> <br />
<br />
<br />
[[분류:2019-1 디지털인문학입문(서울)]] [[분류:씁쓸한 귀환, 외규장각 의궤]] [[분류:인물]] [[분류:오미래]]</div>Hufs오미래